〈 84화 〉10. 어느 날 밤에 생긴 일 - 02
데카라즈난 공작가, 저택의 한적한 곳에 위치한 연무장.
다른 귀족가에서는 그 막대한 금액 탓에 고작해야 성문밖에 적용하지 못하는 대물리술식과 대마력술식이 아무렇지도 않게 코팅되어 있는, 실로 돈으로 도배를 했다 표현하더라도 과언이 아닌 연무장 위에서, 한 명의 남성과 한 명의 여성이 서로 검을 든 채 대치하고 있는 중이었다.
남자의 이름은 카인 폰 에스텔.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에스텔 공작가의 소공작이라는 것 외에는 별다른 특색을 나타내지 않던 남자였지만 최근 들어 제국의 이름난 강자들을 연이어 격파함에 따라 명성을 떨치게 된, 맹자(猛者)라고 할 수 있는 남자가 바로 그였다.
그리고 그의 앞에서 심호흡을 크게 하며 약간이지만 긴장을 한 기색으로 그를 향해 검을 치켜세우고 있는 한 명의 여인이 있었다.
검을 휘두르는 것에 결코 방해가 되지 않도록 자신의 흑갈색 머리를 하나로 묶어 올렸으며, 부드러운 가죽으로 만들어진 갑옷을 착용하고 있음에도 늘씬한 팔다리와 풍만한 가슴으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육체의 곡선을 숨길 도리가 없는, 놀라울 정도로 매혹적인 외모를 지닌 여인이었다.
여인의 이름은 노엘 폰 데카라즈난. 천 년의 세월을 이어온 데카라즈난 공작가의 하나 뿐인 공녀(公女)이자, 오직 검의 재능만을 살펴본다면 그녀의 오라비인 페르젤 폰 데카라즈난을 넘어서 당대 제일의 검객을 노리는 것 또한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평가를 받는 이가 바로 그녀였다.
현재, 그녀가 이리 검을 들고 카인과 대치를 하고 있는 이유는 실로 간단하였다. 첫째는, 그녀의 아버지인 데카라즈난 공작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며, 두 번째는-
노엘, 그녀가 스스로 원하였기 때문이다. 대륙을 떨쳐 울리는 강자와의 대련은, 결코 쉽게 찾아오는 기회가 아니었으니까.
‘...역시, 소문대로의 실력자...!’
노엘은 무표정한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카인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넘어 삼키고 말았다. 자세는 제대로 잡혀 있지만 군데군데 허점이 적나라하게 노출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얼핏 보면, 한참 동안 검을 손에서 놓은 채 한량과도 같은 삶을 살아왔다고 하더라도 고개를 절로 끄덕일 만큼의 빈틈투성이인 모습이었다.
왼쪽 상완, 우측 하박, 거기다가 보폭이 가지런하지 않아 몸의 균형이 좌측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기까지 했으니, 평소 같으면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달려들어 빈틈을 찔러갔겠지.
...하지만, 이번만큼은 섣부르게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 또한 귀라는 것이 있었다. 눈앞의 저 인물이, 감히 그녀로서는 측정할 수도 없는 대단한 강자인지에 대해서 수도 없이 들었었단 말이다.
소문에 의하면, 카인 폰 에스텔은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기 전, 손에 검을 들지 않은 상태임에도 오직 체술만으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투르니젠 소공작을 철저히 농락한 끝에 가볍게 승리를 거머쥐었다고 하던가.
그것뿐이 아니었다. 이것은 정말 믿겨지지 않는 소문이기는 했지만, 그는 손으로 타인의 오러를 만져도 아무렇지도 않아하며, 심지어는 적의 흉계에 빠져 무방비 상태로 일류의 검사와 마법사의 협공을 받았음에도 믿기지 않는 투혼을 발휘하여 끝끝내 승리를 거머쥐었다던가.
그리고 그의 소문을 인증이라도 하듯, 여인의 몸으로 제국제일검의 위치에 오른 황녀, 아이리스 엘 데브하르트가 그의 천재성에 반하여 검에 대해 논하기 위해 에스텔 공작가를 직접 찾아갔다는 소식은 대륙 전체를 발칵 뒤집어 놓을 정도로 놀라운 소식이었다.
더욱 대단한 것은, 그 황녀조차 자신이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고 에스텔 공작가를 쓸쓸히 나서야만 했던 것이었다. 이에, 세간의 사람들은 쑥덕거리고 말았다. 황녀조차, 그의 재능에 반해버렸지만 그의 재능은 한층 더 높은 곳에 있었던 것이노라고. 어쩌면, 이것으로서 황실의 부마(駙馬)가 결정이 된 것일지도 모르는 노릇이라고.
그것 외에도, 그의 강함을 반증하는 소문 따위, 정말 차고 넘쳤다. 물론 필경은 전부 뜬소문. 노엘은 자신이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도 않은 사실을 실제 사실인 것 마냥 맹신하는 얼간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소문들의 반의 반만 진실이라 하더라도, 그녀가 이 자리에서 카인 폰 에스텔을 이길 가능성 따위는 전무하다고 보더라도 무방하겠지.
“.....”
패배가 치욕스럽다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상대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검을 갈고 닦아 가는 구도자(求道者)였으며, 그것도 그녀보다 한참 앞선 길을 걸어가고 있는 선각자적인 인물이었다. 그런 초월적인 강자에게 패배를 하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그런 강자 앞에서 자신이 지닌바 실력을 전부 펼쳐보지도 못한 채 추태를 부릴까봐 염려가 되는 것 일뿐.
“...데카라즈난의, 노엘입니다. 이름 높은 에스텔 소공작을 뵙게 되어, 실로 영광입니다.”
천 년을 이어온 명문가의 후예다운 모습을 보이려 했지만 긴장으로 인해 목소리 끝이 살짝 갈리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인사를 받아주기라도 하듯, 카인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에스텔의 카인. 잘 부탁드립니다. 데카라즈난 영애.”
카인의 말은 격식이 있었지만, 동시에 모르는 사람이 듣는다면 긴장이라도 한 것 같다 착각을 할 만큼 싸늘하게까지 들렸다. 물론 이름난 강자인 그가 긴장을 할 리가 없으니, 어디까지나 강자 특유의 오만함이리라.
하지만 노엘은 그의 그러한 모습을 보며 불쾌함 따위 전혀 느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것이야말로, 그녀가 추구하던 이상적이고 냉철한 무인의 모습-
“...쳇.”
그런데 그 때였다. 노엘이 그를 반짝반짝 빛나는 눈길로 바라보고 있자니, 어디선가 그녀를 향해 혀를 차는 듯한 소리가 돌려왔다.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소리의 근원지를 살펴보니, 그곳에는 소녀와 여인의 경계선쯤에 위치한 것 같은 하얀 머리의 아름다운 여자가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겉옷을 손에 든 채로 얌전히 시립하고 있는 모습을 보아하니, 처음에는 그가 데리고 온 시녀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차려 입은 옷이 굉장히 고급진 것을 보아하니 과연 그 정체가 무엇인지 살짝 아리송하였다.
그녀의 얼굴은, 매우 이지적이며 단정하기까지 하였다. 어디를 보아도 오늘 난생 처음 보는 사람을 향해 혀를 찬다는, 무례한 행위를 할 것처럼 생각되지 않았다. 이내 노엘은, 자신이 긴장을 너무 많이 한 탓에 헛것을 들은 것이 틀림없는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그럼, 가겠습니다. 에스텔 소공작.”
에스텔 소공작이 사용하는 검술은 잘 알고 있다. 에스텔 공작가의 고유 검술, ‘명신(明神)’은 기본기를 다지는 것에 굉장히 충실한, 정통적인 검술이라고 대륙에 정평이 나있었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너무 올곧으며 변화가 없는, 기본에 충실한 검술이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노엘에게도 어느 정도 승산이 있을 것이다. 데카라즈난 공작가의 고유 검술인 ‘이지러진 태양’은 변칙성을 추구하며 상대의 허점을 노리는 검술이었으니까.
“하아-!”
노엘이 기습적으로 앞을 향해 치고 나간 것과 동시에,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검이 역수(逆手)로 기괴하게 꺾이며 카인의 요혈을 매섭게 덮친다. 다음 순간, 아무 것도 없던 공간에 십 수개의 참선이 생겨나며 그를 덮쳐들었다.
허나 카인의 표정은 어떠한 변화도 없었다. 그가 검을 앞으로 쭉 하고 내밀자 인지할 틈 사이도 없이 노엘의 검의 궤도가 살짝 흐트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 틈 사이를 놓치지 않고, 카인은 반발력을 이용해 그녀의 사각으로 파고든다.
하지만 노엘은 당황하지 않고 몸을 회전시키며 검을 반전시켰다. 그녀의 손 안에서 검이 유려하게 회전하며 파공성을 내뿜었다. ‘이지러진 태양’은 그 어떤 자세에서도 제 위력을 낼 수 있도록 설계된 검술. 고작해야 적의 위치가 바뀌었다고 해서 당황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순간, 노엘의 몸이 희끗하게 변화했다. 이번에는 그녀가 카인을 향해 덤벼들며 그의 상반신을 향해 검을 휘두른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빨랐는지 그녀가 휘두르는 검의 궤적이 한 줄기 섬광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타타다다당-!
“.....!”
하지만 그 찰나의 순간, 노엘이 휘둘렀던 검이 눈에 보이지 않을 속도로 도로 튕겨 나오고 말았다. 실로 가공할 만한 속도의 반사 신경이 아닐 수 없었다. 당황조차 하지 않고 그녀의 검을 튕겨낸 그의 모습은 실로 고수의 풍모였던지라, 그녀는 다시금감탄을 해버리고 말았다.
‘...응?’
그런데, 그녀의 눈에 이상한 광경이 들어왔다.방금 전 그녀의 초식을 막아 낸 카인의 팔이, 약간이지만 떨리고 있다는 것을. 설마 저 정도 강자가 고작 그거 하나 막았다고 지쳤을 리는 없을 테고, 아마 압도적인 하수인 자신에게 검을 휘둘러야 하는 것인가 망설이고 있는 것이겠지.
역시, 그는 됨됨이까지 훌륭한 이상적인 무인이었던 것이다-
노엘은 다시 한 번 내심 감탄을 하며 카인을 향해 재차 공격을 감행한다. 그녀는 진심을 다해 그를 향해 검을 휘둘렀지만, 카인은 실로 무심한 눈빛을 한 채로 그녀의 모든 공격을 회피하였다.
쉬익-!
노엘이 휘두르는 검은, 카인에게는 닿지 않았다. 어쩌다가 아슬아슬하게 그에게 검이 닿으려고 해도, 그 때마다 그녀가 휘두른 검은 거짓말처럼 궤도를 벗어났다. 마치, 카인이 자신의 검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조절하는 것만 같이 느껴졌다.
...물론, 정말로 그럴 리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그의 회피 기술이 너무 뛰어난 것일 터이겠지. 그 정도로, 그와 그녀의 실력 차가 난다는 것을, 노엘은 마음 속 깊이 인정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 때였다. 그는 대체 어떠한 심경의 변화가 온 것인지, 갑자기 들고 있던 검을 축하고 늘어뜨렸다.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너무도 급격한 움직임을 연이어 펼친 끝에, 체력이 방전된 것 같이 보이는 그러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저만한 강자가 벌써 체력이 떨어졌을 리가 없으니, 아마 자신을 유혹하고자 하는 함정임이 틀림없겠지.
‘...들어가야 하나?’
하지만 동시에 너무나 달콤한 함정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그녀에게 승산은 존재하지 않았다. 질 때 지더라도 그에게 한 방 쯤은 제대로 먹이고 싶다는, 오기가 그녀의 뇌리를 점령하고 말았다.
팟-!
결국, 노엘이 내린 선택은 공격이었다. 그녀는 남은 힘을 전부 그러모아, 카인의 심장을 향해 빠른 속도로 쇄도하였다. 이것이, 노엘이 행한 최후의 발버둥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녀의 결정적인 패착이었다.
콰앙-!
“.....!”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 인지조차 할 수 없었다. 그냥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하늘과 땅의 위치가 뒤바뀌어 있었다. 아마, 그가 카운터를 사용해 자신을 제압한 것 같다는 추측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완패-
그렇다. 졌다. 그녀는 명실상부한, 완벽한 패배를 겪고 말았다. 게다가, 이것은 단순한 패배가 아니었다. 에스텔 소공작은, 마지막까지 그녀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아마, 그가 자신에게 가르쳐주고자 했던 것은 최후의 순간까지 결코 방심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의 메시지였던 것이겠지. 그것을 그녀의 몸에 직접 새겨 넣기 위해, 그는 압도적 약자인 그녀를 상대로 약한 척을 했던 것이 분명하리라-
“졌습니다. 저의, 완패입니다.”
노엘의 입에서 시원스런 패배 선언이 흘러나오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의 두 눈에서는, 자신을 쓰러뜨린 카인을 향한 경애와 흠모의 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소문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에스텔 소공작은 인간으로서도, 그리고 무인으로서도 완벽에 가까운 사람임이 틀림없었던 것이다-
“...저, 소공작님. 혹시...”
혹시 시간이 남는다면, 자신과 차라도 한 잔하며 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는 것이 어떠하냐는 말을 꺼내려는 그 순간이었다.
“카인님, 수고하셨어요.”
하얀 머리 여성이 소공작을 향해 사뿐히 걸어오더니, 노엘의 말을 교묘하게 가로막으며 그를 향해 수건을 건네주었다. 그 무례함에 노엘이 뭐라고 한 소리를 하려고 했던 그 순간, 노엘을 대상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힘이 작용해 그녀를 뒤로 살짝 밀어내버리고 말았다. 이제 보니, 저 하얀 머리 여자는 예사 인물이 아닌 듯 하였다.
“...흥.”
하얀 머리 여자는 노엘을 한 번 힐끗 쳐다보더니 이내 피식하고 웃음을 지어보였다. 평소 같으면 그 태도에 대해 뭐라 한 소리를 하였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에스텔 소공작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지위를 앞세워 뭐라고 한다면 왠지 모르게 여자로서 패배를 할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찌릿-
그렇게 저 하얀 머리 여자와 한참이나 눈싸움을 하다 보니, 그제야 노엘은 에스텔 소공작과 관련된 여러 소문 중 하나를상기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에스텔 소공작은 대륙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미인인 사라 세르나드와 약혼한 상태였으면서도, 다른 여자와 눈이 맞아 그녀와 파혼을 감행하였다고 했었지.
‘...소공작의 애첩인 것일까.’
과연, 같은 여자가 보기에도 하얀 머리 여자의 자태는 실로 아름다웠다. 이 정도면, 사라 세르나드와의 파혼을 감행할 만하다, 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갈 정도였으니까.
‘...어째서.’
소공작을 탓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자신의 아버지인 데카라즈난 공작 또한 본부인과는 별개로 첩을 두 명이나 두고 계셨다. 원래 공작쯤 된다면 설사 삼처사첩을 거느린다 하더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그냥, 세상이 조금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어째서 잘난 남자의 곁에는, 일치감치 여자가 그 옆을 꿰차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조금 질투심이 서렸을 뿐.
그렇게 노엘 폰 데카라즈난의 마음 속 한 구석에서는, 그녀 자신조차 알지 못하는 감정이 서서히 싹트기 시작하였다. 아주, 아주 조그마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