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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2화 〉9. 복수불반(覆水不返) - 07 (82/201)



〈 82화 〉9. 복수불반(覆水不返) - 07

사라는 웃고 있었다. 자신의 처지가 진심으로 우스꽝스럽기만 한 듯, 한동안 소리 없이 키득거리며 웃기만 하였다.

“...사라.”

하지만, 나는 전혀 우습지 않았다. 아니, 금방이라도 머리가 돌아버릴 것 같았다. 지금 이 순간, 누군가 나를 조금이라도 건드린다면 그대로 펑하고 터져나갈 것만 같은 분노가 전신을 맴돌고 있었다.

나 또한,  알고 있었다. 대륙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미인인 사라와 나 같은 녀석이 약혼을 맺게 된 이면에는, 결코 아름답지 않을 사정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약혼식을 맺는 내내 나를 향해 단 한 점의 미소조차 짓고 있지 않던 사라를 보았을 때부터, 우리의 약혼에는 사라의 의지 따위는 단 한 점도 섞여있지 않았다는 것쯤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단 말이다.

그 때는, 별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귀족 사회에서는 정략결혼 따위, 너무도 흔하여 이야깃거리조차 되지 못하는 시시한 일에 불과하였다. 비록 사라와 나의 약혼이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 진행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내가 그녀를 향해 최선을 다한다면 그녀 또한 언젠가 나를 향해 마음을 열어주지 않을까 하는 순진한 감상만을 품고 있기만  뿐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뭔가 아니었다. 사라와 내가 파혼을 한 지, 고작해야  달 밖에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 여인에게 대놓고 다른 남자를 유혹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으로도 모자라, 내가 보고 있는 앞에서 숙부라고 하는 인간한테  따위 취급을 받는 신세라니. 이것은,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사라라고 하는 여인을 언제든 다른 가문에 팔아치울 수 있는 ‘상품’으로 취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하, 아...”

하지만 참았다. 현재의 나는, 사라와 어떠한 관계에도 놓여 있지 않았다. 한 때 그녀의 약혼자이긴 했지만, 지금  시점의 나는 그녀와 완벽한 무관계에 놓여 있었단 말이다. 나는 그녀의 가족이 아니었거니와, 관계자도 아니었고, 서로 사랑하는 사이에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러니, 함부로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 그녀의 아픔에 대해 함부로 ‘안다고’ 설쳐서는  된다. 지난 세월, 홀로 견뎌야만 했던 그녀의 아픔은, 온전히 그녀 자신만의 것이었으니까. 그녀 스스로가 자신의 아픔을 입에 올리지 않는 이상, 내가 행하는 모든 행위는 무책임한 행위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떨리는 손을 애써 진정시켜본다. 다행히, 나이는 허투투 먹었던 것은 아닌지 예상 외로 자기 자신을 금방 통제할 수 있었다. 내 감정이 요동치고 있다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주먹에 힘을 넣으며, 나는 최대한 무뚝뚝한 어조로 그녀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사라,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몇 가지 있는데.”

“뭔데?  상태의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답해줄게.”

그녀는 자신의 뒷목을 톡톡 두드리며 나를 향해 그리 대답을 하였다. 아마, 그녀를 옭아매고 있는 예의 그 ‘저주’ 때문이겠지.

“내가 알기로 데카라즈난 소공작에게는 약혼녀가 있다고 들었는데. 이제 와서 그를 유혹해 봐야 너무 늦은 것이 아닌가?”

“그렇지?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내 아버님을 비롯한 모두의 생각은 조금 다른가봐.”

“...다르다고?”

“응, 내가 첩으로 들어가도 상관없으니 어떻게 해서든 그를 유혹하는 것에 열중하기만 하라고 했어. 가라사대, 데카라즈난 소공작은 책임감이 많은 성격이니까, 어떻게 해서든 관계를 가지기만 한다면,  뒤로는 일사천리로 진행이 될 것이라던데?”

사라는 키득거리며 말을 하였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전혀 우스운 발언이 아니었다. 사람이 일정 이상으로 화가 난다면, 오히려 머리가 차갑게 식어버린다는 새로운 발견을 하며, 나는 그녀를 향해 다시 한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어째서 데카라즈난 공작가지?”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사라는 내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인지 자신의 눈살을 찌푸렸다.

“어째서 투르니젠 공작가가 아니라, 데카라즈난 공작가냐고.”

그렇다. 회귀 전, 그러니까 원래 역사대로라면 사라는 현재 에스텔 공작가에서 빌빌거리고 있는 루시안 그 녀석의 아내가 되어 투르니젠 공작가의 안주인이 될 운명일터. 그런데 어찌하여 데카라즈난 공작가에 와서 소공작의 첩 따위를 목표로 노리고 있는 것일까.

“그건  어떻게 안 거야? 신기하네. 마치, 내 마음 속에 한 번 들어갔다가 나온 것 같아.”

사라는 아주 약간이지만 놀랍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게 순순히 사정을 털어놓았다.

“사실, 네 말대로 투르니젠 공작가를 목표로 하려고 했는데, 루시안 폰 투르니젠이 현재 수개월  자리를 비운 상태더라고. 그래서 아버님께서는 목표를 데카라즈난 공작가로 바꾸셨지. 뭐, 어차피 4대 공작가에 영향력을 넓히는 것이 목표였으니까, 어디가 되어도 딱히 상관은 없던 것이 아닐까?”

“.....”

사라의 말에, 나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성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일이 도대체 어떻게  영문인지, 확실히 깨달을  있었기 때문이다.

‘...나 때문이었나.’

그렇다. 사라가 투르니젠 공작가로 향하지 않은 이유는 그곳에 루시안이 없었기 때문이며, 루시안이 투르니젠 공작가에 존재하지 않는 이유는 현재 에스텔 공작가에 체류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루시안이 현재 에스텔 공작가에 체류를 하고 있는 이유는 수개월 전, 제도에서 나와 결투를 감행하였다가 얻어터진 탓이며, 그 때 내가 제도에 있던 이유는 사라와 나의 파혼 사실에 대해 황제에게 알리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나와 사라가 파혼을 하게 된 이유는 내가 10년 전으로 회귀를 하며 내 침대 위에 아리아가 있는 광경을 그녀가 목격하였기 때문이었다. 즉,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현재 그녀가 이곳에서 이 따위 취급을 받고 있는 것은, 전부 나 때문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내가 과거로 회귀하고, 현재를 뒤바꾸고 있었기에, 이렇게 미래가 송두리째 변화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

물론, 그것을 나의 잘못이라고는   없었다. 나라고 해서 이러한 상황을 의도하고 만들어낸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기분이 매우 더러운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그 원인이 어찌 되었건 간에, 사라가 현재 이곳에서 이따위 엿 같은 대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결코 변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넌 어떻게  생각이지?”

“응?”

“그러니까, 데카라즈난 소공작을 유혹한다느니, 첩으로 들어간다느니, 그 따위 정신 나간 헛소리를 순순히 수용할 생각인 것인가? 저번에는 분명, 네 입으로 이렇게 말했었잖아. 너는-”

가문에 얽매여 인형처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것도 희생할 수 있노라고 내게 말했던 주제에, 이제와 다시    시절로 돌아갈 심산이냐고 묻는 나의 질문에, 사라는 그저 처연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래, 그 때 나는 분명, 네게 그렇게 말을 했었지. 나를 거두어 달라고.  세상으로부터 나를 감추어 줄 가림막이 되어 달라고.”

“하지만 말이지, 그 날은 오늘이 아니야. 아니, 오늘이 되어서는 안 돼. 카인, 너도 잘 알고 있잖아? 내가 그 때 했던 말은, 지금 당장 나를 구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먼 훗날을 기약하고 네게 했던 말이라는 것을.”

“.....”

“아직은 때가 아니야. 아직은 어떠한 준비도 되어 있지 않다고. 지금  자리에서 감정만을 앞세워봐야 어떠한 것도 해결되지 않다는 것을, 너 또한 잘 알고 있지 않아? 그러니, 지금 이 자리에서 네가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 카인.”

사라의 그러한  속에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체념과 익숙함만이 깃들어 있었다.

“...사라.”

나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향해 한 발짝 다가서고 말았다. 내가 자신을 향해 다가서자, 그녀의 몸이 움찔하고 떨리는 것이 느껴진다.

“...그러면 너는?”

“...어?”

“그래, 나 또한 사라 네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 예전부터 너는 똑똑했고,네 말이 틀리는 모습 따위는  한 번도 보지 못했으니까. 그러니, 이번에도  말이 맞겠지.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의 너는 대체 어떻게 되는 것이지?”

“.....”

“원하지도 않는 다른 남자를 유혹하고, 원하지도 않은 관계를 가지고, 원하지도 않는 남자의 곁에 서서 교태를 부리는 것이, 지금 이 순간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야? 이것이 정녕 네가 원하던 삶이었던 것이냐고!”

그 순간,  말에 지금까지 줄곧 무표정으로 대응하던 사라의 얼굴이 쩍하고 갈라지고 말았다. 가면이 깨어지고, 민낯이 드러나고  그녀의 얼굴에는, 체념과 아픔만이 묻어나오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면 뭐 어떻게 하라고?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대체 뭘  수 있는데? 가진 것이라고는 가문의 후광 뿐. 스스로는 어떠한 것도 가지지 못한 무기력한 계집이,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데!”

나를 향해 언성을 드높이는 사라를 향해, 나는 다시금 그녀를 향해 한 발짝 다가선다. 그  밤, 테라스에서 그랬던 것 마냥 우리  사이의 거리가 다시금 의미를 잃어버렸다. 느껴진다. 사라의 풋풋한 체향과, 달뜬 숨소리와, 감추려고 애를 쓰고는 있지만 두 눈에 맺혀 있는 자그마한 물기에 이르기까지, 그녀가 느끼고 있는 모든 감정이, 손에 잡힐 듯 느껴지고 말았다.

정말, 멍청한 여자였다. 평소에 똑똑한 척, 잘난 척은 혼자서  하던 주제에, 이런 간단한 문제의 답 하나를 도출해내지 못하다니.

...그러니, 내가 대신 말해주겠다. 지금 이 순간, 네가 나를 향해 해야만 하는 말을, 너를 대신해 내가 말해주도록 하겠다.

“때려치워.”

“...뭐?”

“때려치우라고. 유혹이고, 첩이고, 나발이고, 전부 다 때려치우라고. 그 따위 것은 신경 쓰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내가, 너를 도와줄 테니까.”

“...카인, 너 정말 미쳤구나. 아니면,  일이 아니라고 해서 함부로 지껄이는 거야?”

사라는 정말 기가 차다는 목소리를 하며 나를 싸늘한 눈초리로 바라볼 뿐이었다.

“넌 스스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긴 하는 거야? 넌 지금 아무런 계획도 없이 세르나드 백작가를 적으로 돌리겠다고 선언하고 있는 거야. 거기다가, 나를 감시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냥개들이  뒤에 따라 붙었는지는 알고 하는 소리야?  그들이 얼마나 치밀하고 잔인한지 몰라. 그것 말고도, 그들에게는-”

“그런데?”

순간, 사라의 말문이 턱하고 막히고 말았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말만을 앞세우는 내가 한심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라면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나오는 내가 무모하다고 걱정이라도 해주는 것일까. 나는 도무지, 그녀의 속내가 어떤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너, 내 말을 알아듣기는  거야? 지금의 내가 그들에게 대항을 하겠다며 발버둥 쳐봐야 아무런 소용도 없어. 그것은 그저 무모하고, 멍청한 일에 불과할 따름이라고. 비록, 지금 이 순간이 조금은 괴롭고 힘들지라도, 어떻게든 견뎌낸다면 언젠가는 기회가 올-.”

“멍청한 건 너야, 사라.”

나는 사라의 말을 중간에  잘라 끊으며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언젠가 찾아올 기회를 노리기 위해, 지금 이 순간을 포기하겠다고? 위험 따위는 결코 감수하지 않겠다고? 네가 바라는 자유란 것은, 아무런 리스크도 없이 손쉽게 얻을  있을 정도로 값싼 녀석이었나?”

“...너.”

“다른 건 모르겠고.  말이지, 네가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의 품에 안기는 꼴을 보는 것은 정말로 싫어. 나는, 네 그 따위 표정을 보기 위해 너와 순순히 파혼을 해준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니까, 고집 그만 피우고 이제 그만 일어나. 내가 아는 너는, 그렇게 우는 소리를 늘어놓을 만큼 약한 여자가 아니었잖아?”

“...카인.”

나의 말에, 멍하니 나를 올려다보기만 하던 사라의 얼굴에 서서히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한다. 그녀는 일순간 어딘가가 아련한 눈빛을 내비추더니, 이내  눈을 지그시 감으며 나를 향해 속삭였다.

“...어째서?”

“어째서 넌, 내게 이렇게까지 해주는 거야? 네 말대로 우리는, 이제 어떠한 관계도 아니게 되었는데...”

나를 향해 울먹이는 듯한 어조로 내게 질문을 던지는 사라를 향해, 나는 쓴웃음을 머금으며 답을 해준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는걸.”

“...혹시, 나한테 아직 마음이 남아서 그런 거야?”

“아니, 그건 아마 아닌 것 같은데.”

이제 와서 사라를 향한 어떠한 미련이 남아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비앙카와의 그  이후, 나는 여러 가지 기억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 사라와 이렇게 마주하고 있자니, 확실하게 알  있었다. 내가 잃어버린 기억 속에는, 그녀를 향한 여러 가지 감정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을.

치매 환자마냥 그녀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 수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다만, 과거에 내가 그녀를 향해 느꼈던 여러 가지 감정들이 생생하게 느껴지지 않을 뿐이었다. 마치, 내가 한 때나마 그녀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역사책에서 읽은 것과 같은 기분이 들 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나라도 알 수 있는 것이 있었다. 아니, 그녀에 대한 사사로운 감정에 휩싸이지 않은 채 지금  순간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에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있었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처음부터 아무 것도 몰랐다면 모를까, 사라가 나를 향해 ‘도와 달라’고 말을 한 이상, 나는 그녀의 요청을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앞에서 모든 것을 달관한 채 죽어 있는 눈빛을 하고 있는 모습이, 도저히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이다.

“...그래도, 이렇게 나를 대놓고 도와준다면, 에스텔 공작가와, 세르나드 백작가 사이에 어떠한 불협화음이...”

“그런 건, 제발 좀 신경 쓰지 마.”

그리 말을 하며, 나는 살며시 고개를 내저으며.

“그냥, 카인 폰 에스텔이라고 하는  남자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한 사라의 얼굴을, 똑바로 직시한다.

“사라 세르나드라고 하는 여자를 구해주려고 하는, 그런 시시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으니까.”

결국, 사라의  눈에서 참고 참았던 눈물이 흐르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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