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화 〉9. 복수불반(覆水不返) - 06
그 뒤로, 데카라즈난 공작과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정말 유감스럽게도 공작이 나를 향해 하는 말은 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이미 내 모든 신경은 방금 전에 보았던 사라에게 집중이 되어 있던 탓이었다. 대체 왜 사라가 이곳에 있는 것이란 말인가? 내가 기억하기로, 사라는 미래에 데카라즈난 공작가와 어떠한 연관성도 지녔던 적이 없었단 말이다.
‘미래가 바뀌기라도 한 것인가?’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미래는 이미 충분히 바뀌었다. 내가 알고 있던 원래의 과거는 흔적도 없이 산산조각 났을 정도로 많은 것이 바뀌었단 말이다. 원래 역사대로라면 현 시간대에는 아리아라는 여인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며, 비앙카는 카스타나 후작가에 쳐 박힌 채로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황녀나 아리엘 또한 나 하나만을 바라보고 에스텔 공작가로 달려오는 그런 불상사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테지.
하지만, 회귀 후 사라와 얽힌 적은 그리 많지 않다. 물론, 본의 아니게 침대 위에 아리아가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광경을 들키는 바람에 파혼이 앞당겨지긴 했지만 바꿔 말하자면 고작해야 그 정도의 일이었다. 내가 대범하고 호탕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라 사라와의 파혼을 ‘그 정도’라고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어차피 사라와의 파혼은 회귀 전에도 일어났던 일이기에 지금 파혼을 당하나 1년 뒤에 파혼을 당하나 그다지 큰 상관이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설마.’
문득, 황궁에서 사라와 나누었던 이야기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나를 향해 처연한 미소를 짓던 그녀, 자신을 에스텔 공작가에 거두어달라고 애걸을 하던 그녀.
- ...넌, 아무 것도 몰라. 내가 네게 이런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내 어떠한 것을 포기해야만 했는지.
‘...빌어먹을.’
데카라즈난 공작과의 대화를 마치고 그의 집무실을 빠져 나오며, 결국 나는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이제 와 사라를 향해 어떠한 감정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꾸만 그녀를 향해 시선이 쏠리는 것만은 어찌할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 때 테라스에서 사라와 맺었던 ‘약속’을 떠올린다면 더더욱 그러하였고.
그렇게 내가 응접실로 발걸음을 옮기니, 그곳에는 이미 선객이 있었다. 무언가 진정이 되지 않는 기색을 하며 주위를 왔다 갔다 하는 사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스스로의 얼굴을 진정시키려 하고 있었지만 이미 그녀의 전신에서는 초조함과 긴장이 역력하게 묻어나오고 있었다. 내 앞에서는 언제나 당당하기만 했던 사라의 저따위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짜증이 치솟는 것을 애써 참아내며 나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사라.”
내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자 그제야 사라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나와 시선이 교차한 그 순간, 나는 그녀의 초조했던 얼굴이 약간이나마 풀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카, 아니, 에스텔 소공작님.”
예전처럼 나를 이름으로 부르려다가 우리의 관계가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떠올린 것인지 나를 존칭으로 부르는 사라. 정말 새삼스럽지만, 이제 나와 그녀는 약혼 관계도 뭣도 아닌 남남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해버리고 말았다. 이제와 그녀에게 연애감정이 남아있다는 소리는 아니었지만, 한 때 그녀와 이름으로 부르던 사이였건만 어쩌다가 이런 지경까지 온 것인지 씁쓸하기만 할 뿐이었다.
“너만 괜찮다면, 잠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
“.....”
내가 자신을 향해 손을 내밀자 사라는 순간적으로 멈칫하였지만, 이내 무언가를 결심한 듯 내 쪽을 향해 순순히 자신의 손을 뻗어왔다.
“...저라도 괜찮다면, 그리 할게요. 소공작님.”
그런데 그 때였다. 그 때까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옆에 시립해 있던, 허리춤에 검을 매고 있는 중년 남성이 그녀의 팔을 꽉 하고 붙든다.
“사라, 지금 대체 어디를 가려고 하는 것이더냐? 너라는 계집은 시간이 지나도 참으로 철딱서니가 없구나. 우리는 이곳에 놀러온 것이 아니다.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주제에 감히 경거망동을 하려 들다니.”
“...숙부님, 전...”
“조용히 하거라. 이런 곳에서까지 네게 언성을 높이기 싫으니.”
사라는 자신의 팔을 꽉 하고 붙잡고 있는 그의 손길이 아프기만 한지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지만 중년인은 그 따위 것은 하나도 신경 쓰지 않는 것 마냥 그녀를 자신 쪽으로 거칠게 잡아당겼다. 마치, 사라를 한 명의 사람이 아니라 물건으로 취급하는 듯한 태도였다.
“...사라.”
그것은, 백작가의 금지옥엽이 받는 취급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 취급이었다. 순간적으로 머리에 열이 확하고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나는 중년인 앞으로 나섰다.
“지금 대체 무엇을 하시는 것입니까? 아무런 힘도 없는 여인에게, 이런 짓을 하다니.”
나의 말에 사라를 붙들고 있던 중년인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이내 사라의 팔을 순순히 놓아주었다.
“...윽.”
중년인이 붙들었던 팔 쪽에 통증이 남아 있는 것인지 입술을 깨물며 자신의 팔을 어루만지고 있는 사라. 하지만 중년인은 자신의 행동에 어떠한 가책도 느끼지 않는 것인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기색으로 뻔뻔스레 말을 늘어놓기만 할 뿐이었다.
“...가문내부의 행사입니다. 에스텔 소공작. 숙부 된 이로서, 버르장머리 없는 질녀(姪女)를 훈계할 수도 있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여인의 가녀린 팔뚝을 이 따위로 만들어 놓는 것이 정녕 훈계란 말입니까?”
나는 사라의 새하얀 팔뚝에 새빨간 피멍이 올라온 것을 그에게 보이며 언성을 높였다.
“에스텔 소공작님. 소공작께서는 제 질녀와 파혼을 하였으니 이제 아무런 관계도 아닌 관계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사라를 이리 신경 써주시는 것입니까?”
혹시 사라에게 마음이 남아 있어 그녀의 편을 드는 것이냐는 뜻이 함축되어 있는 중년인의 빈정거림을 무시한 채 나는 사라의 손을 덥석하고 붙잡았다. 마음 같아서는 위아래도 없는 저 개자식에게 뭐라고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지금 저딴 녀석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저런 자식은,나중에라도 얼마든지 밟아버릴 수 있었지만 사라는 그렇지 않았으니까.
“카, 카인...?”
“잠시 사라를 빌려가도록 하겠습니다. 팔만 치료하고 곧바로 돌려보내도록 할 것이니, 괜한 걱정을 하지 마시지요.”
중년인에게 그러한 말을 남긴 채, 나는 사라를 내 쪽으로 끌어당기며 응접실을 빠져나왔다. 자신의 조카를 저따위로 취급하는 빌어먹을 개자식과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고 있는 것은, 참으로 불쾌한 일이 아닐 수 없었기에.
“...카인.”
그리고 가장 짜증나는 것은, 내 앞에서는 항상 이지적인 척 굴었던 주제에 제 숙부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하던 이 헛똑똑이 계집애였다.
“...하.”
새삼스레 깨닫게 되었다. 한 때나마 사랑했던 여자가 다른 사람에게서 엿 같은 취급을 받고 있는 꼴을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는다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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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 네겐 언제나, 신세만 지게 되는구나. 카인.”
데카라즈난 공작가에서 배정받은 방으로 사라를 끌고 온 후, 드디어 단 둘이서만 있게 되자 사라의 입에서 가장 먼저 흘러나온 말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고, 나를 향해 그 따위 말을 늘어놓는 그녀의 표정은 수치심에 휩싸여 있지도, 내 앞에서 그 따위 취급을 받은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깃들어 있지도 않았다.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지독할 정도의 익숙함뿐이었다. 마치, 그 염병할 ‘숙부’라는 인간에게서, 그 따위 취급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지속적으로 받아온 끝에 마음이 전부 닳아버리기라도 한 것 마냥, 그녀는 무덤덤하게만 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나를 더욱 열 받게 하고 있었다. 물론, 어렴풋하게나마 예상은 하고 있었다. 연회가 있던 날 밤, 그녀는 분명히 내게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자신을 받아달라고. 나와 에스텔 공작가가,자신의 안식처가 되어 주기를 바란다고.
그렇기에 어렴풋하게나마 예상을 하고 있었다. 사라 세르나드라고 하는 여인이 지닌 뒷모습은, 겉으로 보이는 그녀의 모습마냥 그리 밝고 아름다운 모습은 아닐 것이라고. 그 이면에는, 분명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떠한 고충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이건 너무 심하였다. 아니, 상상을 하는 것과 눈으로 직접 보는 것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사라가 자신의 가족에게서 저 따위 취급을 받고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였다. 내가 버젓이 보고 있는 와중에도 저리 행동할 지경이니, 다른 사람의 눈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는 사라를 향한 취급이 어떠하였을 지는 정말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왜 진작 말 안했어?”
“뭐를?”
담담하기 이를 데 없는 그녀의 무심한 말에, 나는 그녀의 팔을 들어올린다. 그곳에는, 시간이 꽤나 지났음에도 가시지 않은 새빨간 피멍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도와달라고. 살려달라고. 내가 가문에서 이 따위 취급을 받고 있다고! 왜 진작 말 안했냐고!”
화가 치솟는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나라는 놈이 너무나도 병신 같이 느껴졌다. 과거, 사라의 얼굴을 보기 위해 그녀의 사랑을 시험해보기 위해 아픈 척이나 했던 것이나, 테라스에서 사라와 이야기를 나눌 때, 그녀를 시험해본답시고 그녀를 향해 굴욕적인 발언을 했었던 것이 이제 와서 너무도 후회가 되기 시작하였다. 그 때 당시, 사라가 내 앞에 어떠한 마음으로 섰던 것인지, 어떠한 사정이 있었던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오직 내 생각만을 했던 나 자신을 죽여 버리고 싶을 뿐이었다.
“...아파.”
사라가 나를 올려다보며 그러한 말을 내뱉자, 그제야 나는 자신이 너무도 흥분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래서야, 그녀에게 이 따위 피멍을 남긴 숙부라는 인간과 다를 바가 없지 않는가.
“...미안하다.”
그리 말을 하며 나는 품속에서 연고 하나를 꺼내 그녀의 팔뚝에 천천히 발라주었다. 이 연고는 비앙카가 연금술을 이용해 직접 만들어준 것으로, 어지간한 상처쯤은 순식간에 낫게 해주는 대단한 성능을 자랑하는 약품이었다. 절대로 다치는 일이 없도록 하라며 비앙카가 강제로 내 품 속에 넣어준 물건이었는데, 이 연고가 이런 일에 쓰이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렇게 내가 얌전히 그녀의 팔에 연고를 발라주자, 아픔이 조금이나마 누그러진 것인지 사라의 표정이 아까보다 한결 나아진다. 역시, 지금까지는 억지로 고통을 참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쪽팔렸어.”
“뭐?”
“쪽팔렸다고. 네 앞에서는 고고한 귀족가의 영애인 것 마냥 행세를 하던 주제에, 정작 가문에서는 그 따위 취급이나 받고 있던 나 자신이, 너무나도 쪽팔렸다고. 그래서 말 안했어. 아니, 못했어. 나도 여자야. 다른 남자 앞에서, 동정 어린 눈초리 따위는 추호도 받고 싶은 마음 따위 없었다고.”
그리 말을 하며 사라는 자신의 눈을 지그시 감았다. 더 이상 이러한 주제로 나와 말을 나누기 싫다는 단호한 신호였다. 그녀와 알고 지낸 시간이 오래되었던 만큼, 그녀의 입을 열게 하는 것이 지난하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이번에는 다른 질문을 해보기로 했다.
“...그럼, 데카라즈난 공작가에 머무르고 있는 이유는 대체 무엇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세르나드 백작가와 데카라즈난 공작가 사이의 이어지는 접점을 찾을 수가 없어서 말이지.”
그리고 나의 질문에 사라는 그것이 정답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기만 할 뿐이었다.
“그게 바로 이유야, 카인.”
“...그게 무슨 말이지?”
“현재 세르나드 백작가와 데카라즈난 공작가 사이의 접점은 존재하지 않지.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두 가문 사이의 교두보를 어떻게 해서든 만들어 보기 위해서야. 그래, 겉으로 보자면 그렇지.”
“...겉으로는?”
“그래. 실은 말이야, 세르나드 백작가에서는 나의 몸뚱아리를 미끼로 삼아 데카라즈난 소공작을 유혹하라는 지시를 내렸거든. 그래, 마치 길거리에서 돈 몇 푼에 남자들을 유혹하는 더러운 창부마냥 말이지.”
그리 말을 하는 사라의 입에는, 자조적인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제 알겠니, 카인? 나라는 여자가, 세르나드 백작가에서 어떠한 처지에 놓여 있던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