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9. 복수불반(覆水不返) - 05
지금으로부터 천 년 전, 초대 황제가 혼란했던 대륙을 평정하고 이 땅 위에 하나의 제국을 세우는 일에 있어, 그의 휘하에서 가장 큰 공을 세웠던 네 명의 인물이 있었다.
에스텔, 투르니젠, 데카라즈난, 크러셀. 그들은 각각 제국을 대표하는 4대 공작가의 시원(始原)이 되었을 뿐더러, 에스텔은 북쪽, 투르니젠은 서쪽, 크러셀은 남쪽, 데카라즈난은 동쪽에 위치함에 따라 천 년이라는 시간에 걸쳐 각 지역의 패자(霸者)로서 군림을 해왔었다.
즉, 바꿔 말하자면 돈도 없고 농사도 잘 이루어지지 않으며 폐광만이 사방에 즐비한 탓에 천 년이라는 세월에 걸쳐 몰락과 쇠퇴를 수없이 거듭해 온 에스텔 공작가를 제외한다면 다른 공작가들은 각자 자신들이 떠맡은 지역에서 떵떵거리며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참으로 슬픈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다른 공작가들이 지니고 있는 재력이 얼마나 막대한 지에 대해서는 루시안 그 녀석만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었다. 루시안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스스로의 몸에 두르고 있는 모든 것들은 명품이 아닌 것이 없었으며, 녀석이 에스텔 공작가에 체류하기 위해 매달 나에게 건네주는 금액은 근검과 절약을 강제로 좌우명으로 삼고 살 수밖에 없었던 내게 있어 입이 떡하고 벌어질 만한 커다란 액수였단 말이다.
그리고 4대 공작가 중에서도 제국에서 부유하기로는 한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가장 잘나가는 가문이 바로 우리의 목적지인 데카라즈난 공작가였다. 그들의 영지에는 대륙에서 가장 기름진 넓은 곡창지대가 자리하고 있었으며, 영지의 해안가에는 암염광(巖鹽鑛)이 널려 있어 이를 통해 채취하는 소금으로 실로 막대한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한 마디로, 무늬만 공작가일 뿐 실제로는 그 위상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에스텔 공작가와는 다르게 데카라즈난 공작가는 제국에 단 넷밖에 존재하지 않는 공작가의 위엄을 누구보다 잘 보여주는 가문이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능히 대륙 제일을 칭할 수 있는 데카라즈난 공작가를 이끌어 나가고 있는 직계 혈족들 또한 예사 인물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디까지나 명목상이긴 하지만 같은 공작의 지위에 있는 만큼 공식석상에서 장차 데카라즈난 공작가를 이어나갈 후계자인 페르젤 폰 데카라즈난과 여러 번 얼굴을 마주한 적이 있었는데, 그 녀석은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정말 재수가 없는 녀석이었다.
우선, 녀석의 얼굴은 참으로 잘생겼었다. 아니, 단순히 잘생긴 정도가 아니었다. 페르젤 폰 데카라즈난의 얼굴은 내가 녀석을 처음 보았을 때 순간적으로 여자가 아닌가 착각을 해버릴 정도로 미형의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재수 없게 생긴 녀석이었다.
루시안 그 녀석도 상당히 기생오라비 같이 생겨 먹은 녀석이었던지라 에스텔 공작가의 있는 여자 사용인들이 녀석의 얼굴을 넋이 나가 쳐다볼 때마다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 들었건만, 루시안 보다 한층 더 잘생긴 낯짝을 한 채로 세상을 활보한다는 것은 대체 어떠한 느낌일지 궁금할 정도였다.
또한, 소문에 의하면 페르젤 폰 데카라즈난은 제왕학과 경영학을 비롯한 각종 학문에 통달을 하였으며, 무가(武家)의 후예답게 지닌바 검술 실력 또한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종합하자면, 녀석은 어미 뱃속에서부터 타인의 위에서 군림하기에 적합한 모든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완벽한 인간이나 다름이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글쎄요, 저는 그런 것은 그냥 과장된 소문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요. 시녀언니들이 루시안님이 그렇게 잘생겼다고 호들갑을 떨었는데, 솔직히 제 눈에는 카인님이 더 잘생겼거든요. 그러니까, 데카라즈난 소공작님도 사실은 카인님에 비하면 한참 모자란 사람일 수도 있는 것 아닐까요?”
“...그것 참, 입에 발린 칭찬 고맙구나. 아리아.”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리고 무엇보다, 입에 발린 말이 아니라 엄연한 사실인걸요?”
아리아가 나를 향해 그런 따뜻한 위로의 말을 던져주었지만 정말 유감스럽게도 아리아의 위로는 나에게 있어 와 닿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약간의 비참함만을 안겨다 줄 뿐이었다.
‘엄마가 자기 아들이 세상에서 제일 잘생겼다고 칭찬해주는 것 같잖아.’
이런 시덥잖은 이야기가 수도 없이 오고간, 길고도 지루한 마차 여행 끝에 나와 아리아는 드디어 데카라즈난 공작가에 들어 설 수 있었다.
‘...떨리는군.’
솔직히, 살짝 긴장감이 들기도 하였다. 명목상으로는 같은 공작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실제 위상은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커다란 격차를 보이고 있다. 과연 데카라즈난 공작가에서는, 북방의 촌구석에서 온 에스텔 소공작을 환대해줄 것인가? 자신들과 에스텔 공작가가, 동격의 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줄 것인가?
“천상을 달리는 용을 그 등에 짊어진 북방의 칼날, 에스텔 공작가의 소공작과 그 일행 분께서 참으로 머나먼 발걸음을 해주셨군요. 제 이름은 고든, 부족하나마 데카라즈난 공작가의 내사(內事)를 총괄하는 자리에 있는 이입니다. 이름 높은 에스텔 소공작을 실제로 뵙게 되어 크나큰 영광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의 걱정은 기우에 가까웠다. 내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보게 된 광경은, 나와 아리아가 데카라즈난 공작가에 당도하였음을 환영해주기 위함인지 거대한 대문의 너머로 기사단이 도열을 맞춰 시립하고 있는 광경이었다. 카스타나 후작가를 방문하였을 때도 이러한 환대를 받기는 했지만, 그 때는 비앙카의 약혼 예정자라는 신분에서 후작가를 방문했던 것이고, 이번에는 순수한 손님의 자격으로 데카라즈난 공작가를 방문한 것이건만, 어찌하여 이토록 환대를 해주는 것인지 살짝 이해가 가지 않기도 했다.
“그야, 에스텔 공작가는 그러한 자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격 말씀이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나와 아리아가 기사들 사이를 걸어가고 있자니, 옆에서 총관이 나를 향해 나지막한 목소리로 설명을 해주었다.
“저희 데카라즈난은, 천 년 전, 초대 황제 폐하 밑에서 함께 하였던 맹우인 에스텔을 잊지 않았습니다. 특히 공작 각하께서는, 에스텔 소공작님을 뫼시는 것에 있어서 단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도록 하라고 저희에게 신신당부를 하셨습니다.”
그리 말을 하며 나에게 다시 한 번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이는 총관의 모습에, 나는 절로 감탄을 금치 못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역시, 대륙 제일의 위상을 다투는 가문은 그 배포 또한 남다른 것이 틀림없었다. 제도에서 고작 여자 하나 때문에 아무 잘못 없는 순진무구한 나에게 시비를 걸다가 결투에서 패배하고 얻어터진 투르니젠 공작가의 추한 애송이와는 비교도 할 수가 없는 담대한 마음씀씀이였던 것이다.
한결 마음이 편안해진 나는 그제야 조금 안정이 된 눈길로 데카라즈난 공작가의 저택 내부를 차근차근 살펴볼 수 있었다. 내가 가장 먼저 느낀 감상이란, 저택의 부지가 굉장히 커다랗다는 점이었다. 에스텔 공작성보다 커다란 것은 물론이거니와, 카스타나 후작가의 본성보다도 더욱 웅장한 넓이를 자랑하고 있었다. 과연, 대륙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부를 자랑하는 가문의 저택다운 모습이라고 해야 할까.
대문에서 저택으로 이르는 길목에 조성되어 있는 아름다운 정원 또한 마찬가지였다. 고작해야 제철 꽃을 심어놓은 에스텔 공작가나, 타인에 대한 공감성이 현저히 부족한 정신병자들의 소굴답게 경관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고 침엽수만을 잔뜩 심어놓았던 카스타나 후작가와는 달리,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색깔의 꽃들이 조화롭게 피어 있는 데카라즈난 공작가의 화단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성을 절로 나오게 할 만큼 아름다운 모습을 자랑하고 있었다.
‘돈으로 아주 떡칠을 해놓았군.’
겉으로 보기에 최상의 아름다움을 유지시키기위해 꽃들에게 보호마법과 보존마법을 여러 겹 중첩해 놓았다는 것이 느껴졌는데, 고작해야 화단의 유지를 위해 그 비싼 마법사들을 고용하여 마법을 걸어놓았다는 점만 보더라도 데카라즈난 공작가의 재력이 대체 어느 정도인지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에스텔 소공작님. 그럼 공작 각하께 바로 들리시겠습니까? 각하께서는 현재 집무실 안에서 소공작님을 기다리고 계시는 중입니다.”
“그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총관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안내에 따라 저택 내부로 들어섰다. 그렇게 미로와도 같은 저택 내부를 걸어가던 와중, 총관은 내 쪽을 바라보며 나지막한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에스텔 소공작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소공작님께 한 가지만 여쭈어 봐도 괜찮겠습니까?”
“무엇이든 물어보셔도 됩니다.”
내 허락이 떨어지자 총관은 아무 말 없이 내 뒤를 졸졸 쫓아오던 아리아를 힐끔 바라보며 나를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 견문이 얕아서 그런 탓인지, 소공작님과 함께 데카라즈난 공작가를 방문해 주신 일행 분이 누구인지 도무지 파악을 할 수가 없군요. 혹시, 저 아가씨께서는 에스텔 소공작님과 어떠한 관계에 놓여있는 분이신지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으음.”
총관이 그러한 질문에 나는 순간적으로 대체 어떻게 답변을 해야 하나 고민을 해버리고 말았다. 솔직히, 총관의 질문에 대답을 해주는 것은 전혀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냥 사실대로, 아리아는 나의 전속 시녀로서 이곳에 따라온 것이라고 말을 해주면 끝나는 일에 불과했다.
...하지만, 왠지 싫었다. 아리아가 나의 전속 시녀라는 신분으로서 에스텔 공작가에 머무르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지만, 동시에 그녀가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 한낱 시녀로서 취급을 받지 않았으면 하는, 내가 생각해도 정말 모순적이기 짝이 없는 감정이 가슴 속에 맴돌고 있었던 것이다.
나도 잘 알고 있다. 아리아를 전속 시녀로서 가까이 둔 것은 바로 나이며, 그런 나에게 이 따위 감상을 품을 자격 따위는 없다는 것을. 하지만, 껄끄러운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정신을 잃기 직전, 나를 향해 ‘고맙다’라며 속삭이던 아리아를 마주했던 탓인지, 가슴 속 한쪽 구석에서 간질간질한 무언가가 올라오는 것만은 참을 수가 없었단 말이다.
헌데 그 때였다. 내가 총관의 질문에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하는 것이 의아하기라도 했던 것인지, 아리아는 자신의 머리를 갸웃거리며 총관의 질문에 순순히 대답을 해주었다.
“저 말씀이신가요? 그야, 저는 에스텔 소공작님의 시중을 들기 위해 이곳에 함께 온...”
“아리아.”
급히 손을 들어 아리아의 입을 막은 나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며 총관을 향해 나지막하게 말을 하였다.
“...그녀는 에스텔 공작가의 전속 마법사이자 귀빈으로 있는 몸입니다. 그러니, 그에 상응하는 대우를 해주셨으면 하는군요.”
...빌어먹을. 만약 에스텔 공작가로 다시 돌아간다면 아리아에게서 내 전속 시녀라는 직함부터 바로 떼어 놓게 할 것을 굳게 다짐하며, 나는 총관을 향해 거짓말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찌하겠는가. 데카라즈난 공작가에 머물 시간이 꽤나 길어질지도 모르는데, 그 시간 동안 아리아가 내 시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차별대우를 받으며 이곳에 머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저절로 불쾌감이 치솟는 것을.
헌데, 나의 그러한 대답을 듣자마자 총관은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 빙그레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렇군요. 이해했습니다, 소공작님. 굳이 더 이상의 설명은 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네?”
“모든 것은 소공작님께서 바라신대로 될 것이니 심려를 놓으시지요.”
총관은 그 의중을 알 수 없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이내 저택의 가장 심처에 있는 화려한 방으로 나를 안내하였다.
“이곳입니다. 안쪽에서, 각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총관의 말에 나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며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끼익-
내가 방에 들어서니, 데카라즈난 공작가의 가주이자 당대의 공작인 라인폴트 폰 데카라즈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를 환대해주었다.
“어서 오게나. 에스텔 소공작. 그대가 데카라즈난 공작가에 당도하였음을 진심으로 환영하는 바이네.”
“감사합니다. 공작님.”
내가 그의 환대에 대응하여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자, 그는 무언가 미안한 얼굴을 하며 나에게 사과를 하였다.
“...흠, 그런데 내 예상보다 자네가 훨씬 빠르게 도착했군. 그대가 이리도 빠르게 당도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채, 그만 젊은이들과 다과를 나누고 있던 와중이었지 뭔가. 나의 무례를 용서하게나. 에스텔 소공작.”
“아닙니다. 오히려 별 다른 기별도 없이 불쑥 이곳을 방문한 제 책임이 더 크니 공작님께서는 스스로를 낮추지 마시지요.”
“허어, 그리 생각을 해주니 정말 고맙군.”
그리 말을 하며 라인폴트는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에게 손짓을 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게끔 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 쪽으로 얼굴을 돌린 그 순간, 나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져버릴 수밖에 없었다. 가주의 집무실에 앉아 있던 남녀 한 쌍 모두, 내가 잘 알고 있는얼굴들이었다.
남자 측은 데카라즈난 소공작, 페르젤 폰 데카라즈난이었으며 그의 옆에 있던 눈부신 금발 머리를 지닌 미인의 정체는 바로-
“...사라?”
나의 첫사랑인 동시에, 나와 한 때 약혼을 맺었지만 이제는 어떠한 관계도 아니게 된 여인, 사라 세르나드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