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화 〉9. 복수불반(覆水不返) - 03
“...제 화려한 여성 편력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면 좋겠군요.”
옆에서 나를 무표정하게 쳐다보는 아리아의 눈초리가 지금보다 더 매서워지기 전에 그만두는 편이 현명한 듯 싶다. 그리고,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만사를 제쳐두고 아버지부터 찾아뵌 이유는 고작해야 잔소리나 듣기 위함이 아니었다.
“흠, 좌우지간 네 결정이 바로 섰다니 나로서는 그리 할 말이 많지 않구나. 어쨌건 비앙카 그 아이라면 나도 찬성이다. 그렇다면, 두 사람 사이의 식은 어찌할 생각이더냐? 내가 전해 듣기로 카스타나 후작가에서 치루었던 약혼식은 중간에 흐지부지 되었다고 하던데 말이다. 네가 정녕 그 아이와 혼인에 뜻이 있다면 제대로 된 식을 올려야 할 것이 아니더냐?”
아버지의 지적에 나는 고개를 좌우로 살며시 내저었다.
“비앙카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당분간은 그 종류를 막론하고 그 어떠한 식도 올리지 않을 생각입니다.”
“...음, 그건 또 어째서냐? 어차피 반려로 맞이할 것이라면 일치감치 식을 올려두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 비앙카 그 아이라면 사라가 그랬던 것 같이 네게 파혼을 하자고 요청하는 일은 없을 텐데 말이다.”
아주 어릴 적부터 네 볼썽사나운 모습을 전부 목격하고도 네가 좋다고 덤벼드는 기특한 아이이니 말이다, 라며 쓸데없는 말을 덧붙이시는 아버지.
비앙카와 굳이 식을 올리지 않으려는 이유는 아주 간단하였다. 나와 관련이 있는 다른 여자들이 눈을 새파랗게 뜨고 있는 이상 비앙카와 식을 올린다는 행위 그 자체가 그 여자들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보라, 지금 에스텔 공작가에 황녀와 아리엘이 거하고 있는 이유를 찾아 거슬러 올라가 본다면 그 근원에는 나와 비앙카의 거짓 약혼 사건이 자리하고 있지 않던가?
비앙카와 황녀와 아리엘이 에스텔 공작가에 머물면서 단순히 식량을 축내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반가워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지경인데 만약 내가 비앙카와 정식으로 식을 올린다는 말을 꺼낸다면 그들이 어떠한 반응을 내비출 지 불 보듯 뻔한 노릇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10년 뒤 마냥 에스텔 공작령 전체가 잿더미가 되어 폭삭 주저앉아 버리는 불길한 미래 밖에 상상이 가지 않는단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속사정을 아버지께 전부 털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 나는 얼마 전, 거짓 약혼을 계속 유지하자며 나를 붙잡는 비앙카를 뿌리칠 때 써먹었던 변명을 한 번 더 써먹기로 결심하였다.
“그야, 저와 비앙카와 이어진다고 하면 기뻐해줄 사람들이 그리 많은 것 같지가 않으니 말입니다. 적어도, 북부의 여러 귀족들은 저희 둘의 관계에 대해 썩 달갑게 여기지는 않을 것 같군요.”
에스텔 공작가와 카스타나 후작가 사이의 험악한 관계는 그렇다 치더라도,북부에서 에스텔이 몰락하고 카스타나 측으로 기세가 완전히 넘어간 지 몇백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 비앙카와 나의 결합은 북부의 균형을 흔들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카스타나 후작가에는 공식적으로 비앙카를 제외한 다른 직계가 존재하지 않으니까.
“글쎄, 네가 대체 왜 그 따위 사실에 대해서 신경을 쓰고 다니는 것인지는 둘째치더라도, 넌 상당히 커다란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구나. 내가 파악하기로, 북부에 거하는 귀족 중에 너희 둘이 이어지는 사실에 대해 반대를 하는 녀석은 극히 드물다고 알고 있다만.”
“...예? 그건 또 어째서입니까?”
자기 이익을 챙기는 것밖에 모르는 탐욕스런 돼지 놈들이 비앙카와 나의 결혼에 찬성을 표할 이유가 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인 것인가?
“...실로 어처구니가 없구나. 너는 이미 자신의 안위밖에 알지 못하는 탐욕스런 놈들을 한데 모아 놓은 자리에서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해 보인 바가 있지 않더냐? 놈들에게도 푸른색의 피가 흐른다는 긍지가 있다면 너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겠지. 너라는 사람에게, 자신들의 위에 군림할 자격이 갖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
아버지께서 대체 무슨 말을 하시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현 상황에서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었기에 대충 흘려 넘기기로 했다. 내가 아버지를 뵙고자 한 이유는, 그런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나누고자 함이 아니라 현재 내가 처해있는 암울하기 짝이 없는 이 상황을 타파할만한 해결책을 의논하기 위함이었다.
“...뭐, 그런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야기는 이제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비앙카와 식을 치루기 위해서는, 그 전에 먼저 해결해야하는 문제가 몇 가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 에스텔 공작가의 내부를 아무렇지도 않게 어슬렁거리고 있는 위험인물인 황녀라던가, 아리엘과 같은 여인들과 얽혀 있는 여러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든 해결하지 않으면 나에게 행복한 미래는 결코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이번에는 비앙카 때 그랬던 것과 같이 사태가 막장으로 치닫는 것만은 최대한 지양하고 싶다.
납치라던가, 감금이라던가, 기억상실과 같은 진귀한 경험은 일생에 한 번이면 충분하고도 넘쳤다. 그런 일을 두 번이나 겪는 것은 결단코 사양이었다. 그 주체가 제 아무리 세상에 보기 드문 미인이라 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손에 멋대로 휘둘리는 것은 결코 내 취향이 아니란 말이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실로 간단하였다. 다른 여자들이 내게 어떠한 수작을 부려오건 간에, 그를 정면에서 타파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 만약 내가 그들을 정면에서 맞상대할 수 있는 힘이 갖춘다면, 적어도 비앙카 때 그랬던 것과 같이 맥없이 상황에 휩쓸려 다니는 일만은 발생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력이 어느 정도 회복된다면 데카라즈난 공작가를 방문해 보고 싶습니다.”
바로 이것이, 내가 심사숙고 끝에 내놓은 결론이었다.
“.....”
나의 다소 뜬금없는 말에, 아버지께서는 무언가를 재어보기라도 하시듯 심사숙고를 거치고 있는 기색이 역력하셨다. 그리고, 나의 말에 그간 아무 말 없이 옆에 시립해 있던 루시안은 다소 의외인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카인 폰 에스텔. 데카라즈난 공작가에 마지막 열쇠가 있다 생각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크러셀 공작가는 이미 논외라고 단정을 지은 것인가?”
루시안의 질문에, 나는 순순히 수긍을 하며 입을 열었다.
“크러셀은 대대로 문관을 배출하기로 유명한 곳이니까. 결정적으로, 데카라즈난 공작가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가전 검술이 있다 전해들었다. 굳이 가능성을 따진다면 데카라즈난 쪽이 훨씬 높다고보는데?”
“확실히, 그건 합리적인 판단이로군.”
내 말에 납득이라도 한 것인지 고개를 얌전히 끄덕이는 루시안.
“...언젠가는 매듭을 지어야 하는 일이긴 했지만, 네가 이리도 서두르는 기색을 보이는 것에는 무언가 이유가 있을 테지. 좋다, 어디 한 번 네 뜻대로 해 보거라. 에스텔 공작가의 가주로서 데카라즈난 공작가와 협상을 하는 일에 전권을 부여하도록 하마.”
아버지와는 이미 해놓은 이야기가 있으니 굳이 제반사정을 설명하지 않아도 일이 일사천리로 풀려나갔다.
“그렇다면 루시안, 너는 어찌할 셈이지? 설마 이 자리에서 어떠한 발언권도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네가 초라한 사람은 아니지 않나?”
나의 도발 섞인 질문에 루시안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며 순순히 입을 열었다.
“일이 여기까지 왔는데 투르니젠 공작가가 발을 뺄 수는 없는 노릇이지. 투르니젠 공작가의 소공작으로서, 네게 전권을 맡기도록 하마. 카인 폰 에스텔.”
루시안의 허락 아닌 허락이떨어지고 나서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이것으로서, 모든 조건이 갖추어졌다. 일이 과연 순조롭게 풀릴지는 알 수 없다면 현재의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어디까지나 만약의 영역이긴 하지만, 일이 순조롭게 잘 풀린다면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나는, 나의 스승인 황녀를 이길 가능성을 손에 넣게 될지도 모른다.
****
그 뒤로 이야기는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었다. 내가 미처 떠올리지 못했던 여러 가지 부분에 대한 의논을 마치고 아버지의 집무실에서 나와 응접실로 들어서니, 지금까지 살면서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의외의 한 쌍이 그곳에 사이좋게 앉아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우웅-
윤기가 흐르는 보랏빛 머리를 하고 있는 상냥한 얼굴의 여인이 흑발의 귀여운 소녀의 다리를 어루만져 주고 있었다. 여인의 손에는 얼핏 보기만 해도 신성하기 그지없는 은은한 광택이 맺혀 있었는데, 그 손이 흑발을 한 소녀의 다리를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선천적으로 연약했던 그녀의 다리에 점차 살이 차오르고 근육이 오밀조밀하게 맺혀 가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리엘의 치유를 몇 번이고 경험해본 내가 보기에도 그것은 기적이나 다름없는 광경이었다. 아리엘이 아주 어렸을 적, 눈이 먼노파의 시력을 되찾아 주고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는 기적을 일으켰다는 사실은 익히 들은 바가 있었지만, 설마 선천적으로 신체가 약한 사람을 건강한 체질로 바꿀 정도로 대단한 권능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는 미처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음, 이 정도면 그럭저럭 된 것 같네요. 엘레나, 그럼 어디 한 번 일어서 보시겠어요?”
아리엘의 말이 끝나자 엘레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엘레나의 얼굴이 아리엘을 향한 경외의 시선으로 변모하고 말았다.
“...몸을 움직이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어요. 숨이 차지도 않고, 어딘가에서 통증이 느껴지지도 않아요. 굉장해요. 아리엘님, 이건 정말, 기적과도 같아요.”
자신을 향해 감탄의 말을 내뱉기를 주저하지 않는 엘레나를 향해, 아리엘은 실로 자애로운 시선을 한 채로 그녀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엘레나. 당신의 말대로 이건 기적이 맞아요. 왜냐하면, 제가 부리는 이 힘은 여신께서 인간을 긍휼히 여긴다는 징표이기 때문이랍니다.”
“하지만, 다른 성직자 분들께도 치유를 받았음에도 아리엘님만큼 대단한 효과를 보인 적은 없었던 걸요?”
엘레나가 눈을 깜빡이며 아리엘에게 그리 말을 하자 아리엘은 손으로 입을 다소곳하게 가리며 살며시 웃음을 지었다.
“유감스럽지만, 제가 엘레나에게 한 일은 그분들이 했던 것과 별 차이가 없답니다. 다만, 제가 조금 더 강한 신성력을 보유하고 있기에 몸으로 그 차이가 느껴지는 것에 불과해요. 그리고, 제 치유 또한 일시적인 것에 불과해서 진정으로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제게 꾸준한 치유를 받아야 할 거에요.”
“...꾸준한 치유요?”
아리엘의 말에 엘레나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았다.
“하지만 아리엘님께서는 근시일 내에 에스텔 공작가를 떠난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그렇다면 저를 치유해주시는 것은 무리가아닐까요?”
엘레나의 축 늘어진 듯한 말에 아리엘은 그녀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이리 속삭였다. 내가 보기에 그 모습은, 교활한 뱀이 순진한 양에게 유혹의 말을 던지는 광경과 매우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아요. 한 가지 방법이 있답니다.”
“방법이요? 그게 뭔데요?”
“만약, 제가 엘레나와 한 가족이 된다면 에스텔 공작가를 떠나지 않아도 될 것이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엘레나와 함께할 시간 또한 넉넉해지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 말을 하며 아리엘은 그 광경을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던 나를 힐끗하며 돌아보았다. 참, 대단한 여자였다. 내가 이곳에 들어선 사실 따위는 옛날 옛적부터 눈치를 챘으면서도 저렇게 시치미를 뚝 떼는 것이 가능하다니.
“당신도 그리 생각하지 않나요, 카인?”
“.....”
이제는 자신의 욕망을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는 아리엘을 향해, 나는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것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아, 오셨어요. 오라버니?”
그제야 내가 들어선 것을 알아챈 엘레나가 나를 향해 고개를 숙이자, 아리엘은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서서히 출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겨갔다.
“남매끼리의 대화이니 이 자리에계속 머무는 것은 운치없는 일이겠지요. 저는 이만 눈치껏 빠지도록 할게요. 그럼, 나중에 또.”
그리 말을 하며 종종걸음으로 저만치 사라져가는 아리엘의 뒷모습을, 나는 다소 수상쩍은 눈초리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리엘이라는 여자가 먹잇감을 눈앞에 두고 저리 순순히 물러날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리엘이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나를 향해, 평상시보다 확연히 밝은 표정을 짓고 있는 엘레나가 다가왔다.
“오라버니. 아버님과의 대화는 잘 끝마치셨나요? 무슨 대화를 나누셨기에 이리 오래 대화를 나누신 것인가요?”
“아, 뭐. 여행에서 복귀하고 나서 꽤나 오랜만에 뵙는 것이니까이것저것 말을 늘어놓다보니 이야기가 조금 길어진 것이란다. 엘레나.”
아무리 그래도 집무실에서 있었던 일은 그대로 이야기할 수는 없었으니 대충 얼버무려서 대답을 해주니, 엘레나는 왠지 모르게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본다.
“치, 결국 말 안 해주신다는 것이네요. 너무해요, 오라버니. 그럼 대신에, 제 질문에 한 가지 답이라도 해주시면 안 될까요?”
“내가 답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내가 엘레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엘레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향해 질문을 던진다.
“다름이 아니라, 비앙카 씨가 장차 오라버니의 반려자가 될 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던데, 그것이 정말 사실인가요?”
“뭐, 그렇지.”
내가 어떠한 형태로든 비앙카를 책임지기로 하였으니까, 그것은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리고, 엘레나의 질문 또한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제가 전해 듣기로 비앙카 씨는 마법사로서는 훌륭할지는 몰라도 한 가문의 안주인으로서는 조금부족한 사람이래요. 마법사답게 성격이 괴팍하고 엄청난 사치를 즐기는데다가 아랫사람들을 함부로 대한다고 하던데요?”
“...누가?”
엘레나는 방금 전까지 아리엘이 앉아 자리를 힐끔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내흔들었다.
“그건 말 안할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