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 〉9. 복수불반(覆水不返) - 02
과거, 나는 길거리를 돌아다니다가 고양이 두 마리가 서로가 서로를 향해 투닥 거리는 장면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한낱 길고양이인 주제에 투기장의 노련한 전사인 것 마냥 긴장을 늦추는 기색 없이 상대방을 경계하거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서로간의 거리를 재거나, 앞발과 꼬리를 들어 올려 위압감을 형성하고자 하는 그 모습들은, 나에게서 상당한 흥미를 유발하였던 것이다.
뭐, 솔직히 고백하자면 아무 것도 목격하지 못한 것 마냥 그 자리를 그냥 지나치기에는 너무도 재미난 구경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외형만큼은 어디에 놓아도 빠지지 않을 법한 귀여운 고양이 둘이서 상대방을 짓밟기 위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서로의 급소를 향해 발톱을 휘두르는 그런 장면을 대체 어디에 가서 또 볼 수 있겠는가? 자고로 자기와 관련된 일이 아니라는 전제 하에서 가장 재미난 구경거리란 바로 불구경과 싸움구경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과거의 나 자신이 얼마나 오만한 생각에 빠져 있었던 것인지 절실히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인간이자 제삼자인 내 입장에서야 흥미로운 구경거리인 것이지, 그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고양이들 입장에서 보자면 자신들의싸움은 단순한 구경거리인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피와 살이 튀기는 치열한 혈투였을 것이 분명하다.
혹시 어쩌면, 나라는 사람에게는 고양이들이 투닥 거리는 장면을 구경거리로 삼을 자격이 없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왜냐하면, 나는 현재 길고양이들이 서로에게 내비추는 적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가공할 만한 살기를 뿜어내는 여인들의 한가운데 끼어 있는 신세였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과거의 내가 쌓아 올린 업보 그 자체인 것이 아닐까. 과거의 나는 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현재의 내가 이러한 고통을 받아야만 하는 것일까.
“...사랑.”
비앙카의 말을 들은 아리아의 얼굴은 심대한 충격이라도 입은 것 마냥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아리아의 두 눈이 조금이지만 죽어있는 광경은 내 등골을 절로 서늘하게 해주는 무시무시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도, 아리아가 짓고 있는 표정은 그나마 나은 축에 속하는 표정임이 틀림없었다. 왜냐하면, 현재 황녀와 아리엘이 짓고 있는 표정은 실로 가관이라는 말로도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기 때문이다.
“...호오, 비앙카 델 카스타나. 그대의 말이 정녕 사실이라면 그것은 정말 흥미로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네. 마음 같아서는 그날 밤, 카인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에 대해 자세한 속사정을 들어보고 싶은 충동이 이는군.”
그러한 말을 하며 비앙카가 아니라 나를 향해 두 눈을 날카롭게 번뜩이는 황녀의 모습에 내 심장은 한껏 쪼그라들어간다. 방금 전, 오랜만에 마주한 아리엘과 반가워서 어쩔 줄 몰라 하던 그 때의 그 표정을 짓고 있는 꼴을 보아하니 조만간 비앙카와의 2차전이 시작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만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사랑이요? 카인이, 당신을 평생토록 사랑해준다고 말을 했었다고요?”
아리엘의 경우에는, 황녀보다 조금 더 무서웠다. 나는 내 기억을 통틀어서 아리엘이 타인을 향해 저토록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언제나 느긋하고, 여유로우며, 상대방을 방실방실 웃는 낯으로 대하기만 하는 여자가 바로 아리엘이었단 말이다.
방금 전 황녀와 으르렁 거릴 때만 해도 어투가 날카로울지언정 표정만큼은 평소와 한 치의 변화도 없었는데 지금은 어째서 저러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비앙카의 발언 중 대체 어떠한 부분이 아리엘의 신경을 거스른 것일까.
“흐응. 이제 와서 카인과 나를 향해 뭐라 해봐야 그저 추하기만 할 뿐이야. 그와 내가 함께 ‘처음으로’ 사랑을 나누었던 과거는 결코 변하지 않는 사실이 되어 버린 지 오래라고. 아, 그래도 지난 1년간 함께 했던 정이 있으니까 조금쯤은 자비를 베풀어줄 의향도 있어. 그렇지, 측실 정도가 어때? 너도 괜찮지? 카인?”
내가 보아도 실로 재수가 없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하며 내게 허락을 구하는 것인지 통보를 하는 것인지 도무지 의중을 알 수가 없는 말을 당당히도 내뱉는 비앙카. 나는 비앙카의 그러한 모습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비앙카의 저 말은, 아무리 보아도 도폭선에 불을 당기는 미친 짓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카인, 이제 보니 자네 아주 대단한 난봉꾼이었군? 첫 키스는 사라 세르나드와 함께 하더니 첫 관계는 비앙카 델 카스타나와 함께 나누었는가? 하, 다음 목표는 대체 누구인가? 다음에는 대체 누구와 무엇을 함께 할 계획인지 설명해줄 수 있겠는가?”
“.....”
머리에 열 좀 차올랐는지 굉장히 흥분한 기색으로 나를 추궁하는 황녀. 다른 건 다 그렇다 치더라도 갑자기 뜬금없이 사라의 이름은 왜 꺼내드는 것일까.
“...하, 처음? 비앙카, 당신이 카인의 처음이라고요?”
비앙카의 말이 어지간히도 기가 찼던 것인지 피식하고 헛웃음을 흘리는 아리엘.
“참 건방진 말이 아닐 수 없네요. 언제나 패배만 반복한 끝에 꼬리 만 개처럼 구석에 쳐 박혀 있던 패배자가 입만 살아서 왈왈 짖어대는 꼴을 봐주는 것은 이토록 힘든 일이었군요. 스스로가 그의 처음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그 무지함까지는 귀엽게 봐줄 수 있지만, 측실이니 뭐니 하는 주제 넘는 말을 함부로 지껄인다면 카인이 조금 곤란하지 않을까요, 비앙카?”
“...아리엘 티에르, 너 지금 말 다 했어?”
성격 더러운 걸로 치자면 제국에서도 수위를 다툴만한 인재인 비앙카가 아리엘의 저러한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덕분에 절대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아리엘의 신신당부가 무색해질 정도로 내 방은 순식간에 전쟁터로 변모하게 되었다.
“.....”
그나마 아리아만큼은 저 전쟁터에 합류하지 않고 내 옆에 가지런히 앉아 있어주고 있었다. 그러한 사실이 현재의 나에게 한 줄기 안온감을 안겨다주고 있었다.
“...나가자, 아리아.”
“예, 카인님.”
다행히 저 여자 세 명은 현재 자신이 이곳에서 제일 잘났다며 목청을 드높이고 있는 와중이었기에 나와 아리아가 방을 빠져나가는 것에 대해서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주위의 여인들의 관계는 최악이라는 말로도 살짝 부족한 감이 있는 것 같았다. 저 여자들끼리 하하호호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며 웃고 떠드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만 이건 조금 심한 노릇이 아닌가?
‘카인 폰 에스텔, 이 개 같은 새끼.’
대체 과거의 나는 어떤 식으로 여자들을 후리고 다녔기에 저 여자들이 저렇게 날뛰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아니, 비앙카는 그렇다 쳐도 황녀와 아리엘은 대체 왜 저리 행동을 하는 것이란 말인가. 과거의 카인 폰 에스텔은 정녕 여자 하나로는 만족을 하지 못하고 아무 여자에게나 찝쩍거리던 인간 말종 같은 새끼였다는 의미인 것일까.
“...카인님, 괜찮으세요? 혹시 아직도 편찮은 부분이 있으신 건가요?”
그렇게 내가 심도 깊은 고민에 빠져 있자니, 아리아는 내가 아직도 어딘가가 아픈 것이라 생각을 하는 것인지 나를 걱정스런 눈초리로 쳐다봐 주고 있었다.
“...아니, 난 괜찮아.아리아.”
나는 그리 대답을 하며 내 뒤편에서 반듯하게 시립하고 있는 아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리아의 전체적인 모습은, 평상시와 크게 별다를 바는 없었다. 물론,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키가 한 뼘 정도 자란 듯 하며, 전체적으로 무언가가 성숙해진 것 같았지만, 그러한 점을 제외한다면 나머지는 전과 같다고 해도 무방하였다. 말투도, 분위기도, 풍기는 기척도, 전부 내가 익히 알고 있던 과거의 아리아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렇다면, 내가 정신을 잃기 전 마주했던 아리아는 대체 누구였을까. 평상시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를 풍기며, 나를 향해 ‘고맙다’라고 속삭여준, 그녀는 정말로-
“.....”
머리가 복잡해진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아리아는 에스텔 공작령의 귀여운 시녀이자 카를 영감의 제자인 전속 마법사, 아리아인 것일까. 아니면 내가 알고 있던 아리아인 ‘척’을 하고 있는 것일까.
더욱 골치가 아픈 점은, 둘 중의 어느 쪽이 진실이건 간에 나에게 아리아를 추궁할 능력 따위는 갖추어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아리아는 이제 기억을 전부 잃어버린 끝에 나를 보며 벌벌 떨던 그 때의 무능력한 아리아가 아니었다. 비록 비앙카에게 간발의 차로 패하기는 하였지만, 그녀와 정면에서 맞부딪힌 끝에 일대의 지형지물을 모조리 잿더미로 만들어버린 무시무시한 실력을 쌓은 마법사이기도 했단 말이다.
결국,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평상시와 크게 다르지 않은 태도로 그녀를 대하는 것 밖에 없었다. 참으로 한숨이 절로 나오는 대처법이 아닐 수가 없었다. 대체 어쩌다가 내 인생이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일까. 소공작 씩이나 되어가지고 사방에 있는 여자들의 눈치나 보고 다니는 고달픈 인생이라니.
그렇게 내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며 아리아와 함께 응접실로 나오니, 유감스럽게도 그곳에는 이미 선객 한 명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더욱 유감스러운 사실은, 그 선객이란 내게 있어 그리 달갑지 않은 얼굴이었다는 점일 것이다.
“왜 여기서 놀고 있는 것이지, 루시안? 아직 대낮인데 벌써부터 게으름을 피워도 되는 것인가?”
“...드디어 깨어난 것인가. 카인 폰 에스텔. 그리고, 난 에스텔 공작가의 식객으로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다. 에스텔 공작가의 봉신 같은 존재가 아니라고 네게 몇 번이고 설명을 했던 것 같다만.”
또 뭐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 눈살을 찌푸리며 나를 쳐다보는 녀석의 정체는 다름이 아니라 제도에서 나에게 한 차례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은 전과가 있는 투르니젠 공작가의 차기 후계자, 루시안 폰 투르니젠이었던 것이다.
“...내 기억으로는 네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았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만.”
“여전히 패배자 주제에 입만살았군.”
나는 녀석의 변명을 가볍게 씹으며 녀석의 맞은편에 털썩하고 주저앉았다. 그런데 루시안의 반응이 조금 이상하였다. 평상시 같으면 내 말에 조금 더 흥분하는 기색을 보일 녀석이 오늘따라 굉장히 조심스런 기색을 표하고 있으니 뭔가 어색하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뭐야, 왜 그래? 뭘 그리 혼자서 끙끙대고 있는 거야?”
나의 질문에 루시안은 인상을 찌푸리더니 극히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내게 속삭였다.
“황녀 저하께서 현재 이곳에 머무르고 계시는 중이다.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그 분 앞에서 경거망동을 하는 기색은 보이면 안 되는 법이 아니겠는가?”
“.....”
루시안이 그리도 신성시하는 황녀 저하께서 현재 내 방에서 한창 경거망동 중이시라는 것을 녀석이 안다면 어떤 표정을 지어보일지 살짝 궁금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흠, 루시안. 너 잠시 시간 좀 내줄 수 있냐. 긴히 이야기를 좀 나누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서 말이지.”
“...이야기라면 이곳에서 나누어도 되지 않는가? 대체 어디를 간다는 것이지?”
루시안의 의아함이 섞인 질문에 나는 대답을 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일 따름이었다.
“우리 아버지께 같이 좀 가자고.”
아무래도 나 혼자서는 결정할 수 없는 이야기가 몇 가지 있을 것 같으니 말이다.
****
“...흠, 드디어 깨어난 것이더냐. 정녕 아리엘, 그 아이의 말이 틀림없었구나. 아마 오늘 내일이면 의식을 되찾을 것 같다고 호언장담을 하더니 말이다.”
대략 두어달 만에 얼굴을 다시 마주한 아버지께서는, 하나 뿐인 아들이 의식을 되찾았다는 깜짝 놀랄만한 소식을 접하였음에도 시큰둥한 표정을 지어보이실 뿐이었다.
“어째서 그리도 담담한 반응을 보이시는 것입니까?”
두 팔을 벌려 환대하는 것까지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조금 섭섭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야, 나는 의식을 잃은 네 얼굴을 그간 질리도록 쳐다보았거든. 오늘 아침만 해도 내게 안부 인사를 올리러 오지 않는 아드님을 몸소 찾아가 뫼시었다는 사실을 너는 알고는 있느냐?”
나를 향해 혀를 끌끌 차던 아버지께서는 이내 진중한 얼굴을 하시며 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셨다.
“그나저나 비앙카, 그 아이에게서 이야기는 전부 들었다. 네가 그 아이에게 평생토록 곁에 있어주겠다는 닭살 돋는 고백을 했다는 것이 정녕 사실이더냐?”
“.....”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내가 했던 고백이 그대로 흘러나온다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쪽팔린 일이라는 것을 새삼스레 깨닫고 말았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도망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나는 굳세게 마음을 먹고 고개를 끄덕인다.
“...예, 사실입니다.”
전후사정이 어찌 되었건 간에, 나는 비앙카와 사랑을 나누었다. 그러니, 비앙카를 책임져야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내가 되어 가지고 어찌 한 번 품에 안은 여자를 내팽개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런데 내 사내다운 호탕한 답변에 아버지께서는 오묘한 표정을 보이신다.
“흠, 그런데 말이다. 비앙카 그 아이는 그렇다 치더라도, 황녀 저하나 아리엘이라고 하는 여자는 또 어찌된 노릇이더냐?”
“...황녀님이나 아리엘의 이름은 여기서 왜 나오는 것입니까?”
“그야 저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분과 네가 상당히 깊은 관계에 놓여 있는 사이라고 하셨으니 말이다. 폐하께서도 이미 반쯤은 공인을 하신, 그런 사이라고 하시던데 그게 정말 사실이더냐?”
“.....”
난생 처음 들어보는 황당무계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비앙카 그 아이에, 황녀 저하에, 아리아에, 성녀 후보로 명성이 자자한 아리엘까지. 허허, 내 아들의 능력이 이리도 출중할 줄은 내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아직 숨기고 있는 여자가 더 있다면 어디 한 번 읊어 보거라. 그래, 남몰래 엘프와 백년해로를 맺은 적이 있다 해도 이해를 해주도록 하마.”
“...엘프가 대체 여기서 왜 나오는 것입니까?”
애당초 드높은 자존심을 가진 엘프가 열등한 인간 따위를 좋아할 리가 없지 않겠는가?
“뭐, 말이 그렇다는 것이다. 어쨌건 숨겨둔 여자가 있다면 언제든지 고백 하거라. 남몰래 첩으로 삼을 생각은 일랑 품지 말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