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6화 〉9. 복수불반(覆水不返) - 01 (76/201)



〈 76화 〉9. 복수불반(覆水不返) - 01

“깨셨나요?”

나를 무척이나 염려하는 듯한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정신을 되찾을 수 있었다. 눈을 뜨니, 나 자신이 익숙하기 그지없는 푹신한 감촉의 침대 위에 누워 있다는 깨달았다. 침대도 그렇고, 시야에 들어오는 천장의 장식도, 전부 익숙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익숙한 정도가 아니라 내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공간이었다. 이곳은, 다른 곳도 아닌 에스텔 공작가의  방이었던 것이다.

“...으음.”

왜인지는 몰라도, 내가 이렇게 침대 위에서 속편하게 잠들어 있었던 시간이 상당히 길었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내가 정신을 잃기 전에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새록새록 떠오르기 시작한다.

침을 꿀꺽 넘어 삼키며 시험 삼아 팔다리에 힘을 넣어보니 팔과 다리들이 나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느껴진다. 다행스럽게도 사지 중 어디 한 구석이 떨어져 나간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정말 다행이었다. 아무래도 이제부터 밥숟가락을 어느 손으로 들어야 하나 하는 쓸데 없는 고민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무리하지 마세요. 일단 완치가 되기는 했지만, 아직 안정이 필요한 단계이니 말이에요.  그렇게 무리를 하다가 다치고 온다면, 저 정말로 화 많이 낼 거 에요?”

나긋나긋하고, 상냥하며, 굉장히 익숙한 목소리가 또다시 옆에서 들려온다. 눈동자를 굴려 옆을 살며시 살펴보니, 상당히 오랜만에보는 얼굴이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성녀님?”

그렇다. 내가 누워 있던 침대의 바로 옆에는, 미래의 성녀이자  시점에서는 여신의 현신이라고 불릴 만큼 강대한 신성력을 품고 있는 여인, 아리엘 티에르가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저를 그런 호칭으로 지칭하시네요. 저번에 분명 서로 이름으로 부르기로 하지 않았었나요? 성녀 같은 이상한 호칭 말고, 아리엘이라고 불러주세요. 카인.”

“...알겠습니다, 아리엘.”

왠지 모르게 새침한 얼굴을 하며 나를 향해 그런 말을 하는 성녀, 아니 아리엘을 향해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내 추측이 올바르다면 성녀 또한 미래에 대한 기억이 있는 것이 분명할 터인데, 어째서 이토록 이름으로 불리기를 고집하는 것인지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설마 자신이 미래에서 회귀 했다는 사실을 들키기 싫은 것일까. 그러한 이유에서라면성녀라는 호칭을 한사코 거부하는 것이 납득이 가기는 한다.

그렇게 아리엘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던 것도 잠시, 나는 이내 이리 멍하니 앉아만 있을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야만 하는 사실이 있다는 것을 상기할  있었다.

“비앙카, 그러고 보니 비앙카는 어찌 되었습니까?”

내가 마지막으로 비앙카를 보았을 때, 그녀는 전신의 마력이 고갈된 끝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었다. 물론, 그 자리에 아리아도 있었으니 그녀가 잘 조치를 했을 것이라 믿고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비앙카를 향해 걱정이 드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이 입은 상처에 비하면 그 정신 나... 아니, 비앙카 델 카스타나의 상태는 양호한 것을 넘어선 끝에 아주, 그것도 아주 멀쩡하기 말이에요.”

그리 말을 하더니 아리엘은 갑자기 자신의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힐끗 째려보았다. 스스로의 볼을 뾰로통하게 부풀린 것을 보아하니, 무언가가 매우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눈초리였다.

“...카인, 당신은 어째서 그런 이야기를 입에 올리는 것인가요? 그 여자의 현재 상태와 같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이야기 따위보다, 저희 사이에서 우선적으로 오고가야만 하는 이야기가 있지 않을까요?”

이래 뵈어도 엄청나게 무리했답니다, 라며 의기양양한 어조로 말을 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그제야 아리엘에게 무엇을 잘못하였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군요. 아리엘, 당신이 어째서 이곳에 있는 것입니까? 제가 전해 듣기로 아리엘 당신은 중요한 일이 아니면 법황국에서 나오는 일이 드물다고 했습니다만...”

“.....”

아리엘에게서 풍기는 기세가 갑자기 험악하게 변하였다. 아무래도 정답이 아닌 것을 골라버린 것이 아닐까.

“...카인. 제가 에스텔 공작가에 머무르고 있는 이유가 그리도 궁금하셨나요? 다른 질문을 전부 제쳐두고 그것부터 여쭈어  정도로요? 좋아요, 말씀드리죠. 제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미안하지만, 거기서부터는 내가 설명하도록 하지.”

벌컥-

다음 순간, 노크고 뭐고 아무 것도 없이 문이 벌컥 열리며 어느 여자가  방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들어온다. 엄연한 손님의 신분인 주제에 마치 집주인인  마냥 당당하게도 행동하는 그녀의 이름은 아이리스  데브하르트. 정말 유감스럽지만 예의범절과 같은 사소한 매너를 명목으로 뭐라 한소리를 하기에는 너무도 대단한 신분을 가진 여인이기도 하였다.

“드디어 깨어났군, 카인. 무려 보름이 넘는 시간동안 의식을 잃고 있던 그대를 바라보고만 있자니, 참으로 가슴이 아픈 시간이었다네.”

황녀의 말에 나는 황망한 목소리로 대꾸를   밖에 없었다.

“...제가 정신을 잃은 지 무려 보름이 넘었습니까?”

“마지막 순간에 자네가 미친 짓만 하지 않았어도 그리 의식을 잃을 이유는 없었을 테지. 반성하도록 하게.”

황녀가 말하는 ‘미친 짓’이란, 생명 에너지를 오러로 변환시킨 행위를 뜻하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황녀가 나를 향해 저리 말을 할 정도이니, 새삼스레 내가 얼마나 정신 나간 짓을 저질렀던 것인지 실감이 들기 시작한다.

나를 향해 쓴소리를 한 마디 내뱉은 황녀는, 이번에는 아리엘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그녀를 힐끗하고 째려보기 시작하였다.

“본의 아니게  밖에서 그대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전부 들어버리고 말았다네. 내 가만히 듣고만 있자니 아리엘 티에르, 그대에게 한 소리를 안 할 수가 없더군. 환자를 치유하는 것이야말로 성직자의 본분이건만, 그러한 사실을 새까맣게 잊은 채 칭찬을 구걸하며 자신의 저열한 욕망을 채우려는 수작이 아주 가관이더군. 정말 부끄럽지도 않은가?”

그리 말을 하는 황녀의 입꼬리가 위쪽으로 살짝 올라가 있었다. 그것은, 아무리 좋게 보아도 상대를 향한 도발임이 틀림없었다.

“글쎄요. 문 밖에서 쥐새끼마냥 다른 사람들의 은밀한 대화를 훔쳐 듣고서는 그것을 본인 앞에서 당당하게 밝히는 어떤 여자도 부끄러움을 느끼는 기색이 없는 것 같은데, 제가 굳이 그런 감정을 느껴야하는이유가 있을까요?”

“허어, 정말 뻔뻔스럽군, 아리엘 티에르. 수치심이고 뭐고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스스로의 행동을 부끄러워하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을 줄이야. 대단하군. 그러다가 나중에는 카인의 사지중 하나를 직접 부러뜨리고 치유를 해준 뒤에 그에게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고 꼬리를 흔들지는 않을까 벌써부터 걱정되는군 그래.”

“하, 정말 말하는 것 하나하나가 황녀님의수준과  어울리는군요. 방금 전의 그 말,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황녀님은 해서는 아니 될 말이 아니었나요? 저는 아직도 황녀님께서 수련이라는명목 하에 카인의 전신을 두들기던 장면이 새록새록 기억나는 걸요. 카인의 사지를  십번이고 부러뜨린 장본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황녀님이야말로 정말 파렴치하기 그지없는 분이 틀림없는  같네요.”

“정말, 아무 것도 모르면 절반이라도 간다는 옛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로군. 아리엘 티에르, 카인과 내가 함께한 것은 엄연한 수련이었다네. 스스로의 무(武)를 갈고 닦고, 앞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는 말일세. 뭐, 어딘가 앉아 기도를 올리는 것만으로도 편하게 힘을 쌓아 올린 그대는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을 테지만 말일세.”

“호오, 그것  흥미로운 이론이로군요. 그렇다면 제가 지금 이 자리에서 황녀님의 옥체를 건드리거나 혹은 어디 한 군데를 부러뜨려도 그것 또한 무(武)를 추구하는 수련 과정이라 이해해주실 수 있는 것인가요?”

“흠, 그거 굉장히 매혹적인 제안이로군. 안 그래도 나 또한 교단에서 어떠한 항의도 들어오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그대에게 안성맞춤이라 할 수 있는 수련을 제안해주고 싶었다네. 어차피 그대는 설사 팔다리가 잘리더라도 가재처럼 다시 돋아나는 징그러운 여자가 아니었던가? 몸을 함부로 막 굴리더라도 그리 티가 나지 않을 테니 가르침을 주기에 최적의 조건이 아닐 수가 없군.”

“못 할 것도 없죠. 그러면, 제국에 이름 높은 황녀님의 검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시험해 볼까요?”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는 수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이라도 주먹이라도 휘두를 것 같은 그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결국  여인을 향해  마디를 할 수밖에 없었다.

“...두 분 모두 진정 좀 하시면 안 됩니까?”

여기서 아리엘과 황녀가 진심으로 맞붙기 시작한다면 1분도 되지 않아 에스텔 공작성은 먼지가 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 분명하다. 아리아와 비앙카가 서로를 금방이라도 죽일 것처럼 미친 듯이 싸웠던 그 때의 광경이 다시 한 번 연출될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여자 둘이 투닥 거리는 광경은 아리아와 비앙카의그것만으로도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대가 그리 말을 하니 어쩔 없군. 운 좋은 줄 알게. 아리엘 티에르.”

“...제가 좀 흥분한  같네요. 사과드리죠, 카인.”

이유는 모르겠지만 두 여자 모두 상대방이 아니라 나를 향해 사과를 하였다. 제도에서도 절실히 느낀 바였지만, 아리엘과 황녀 사이는 험악한 수준을 뛰어 넘어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째서 황녀는 아리엘과 저렇게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일까. 아리아와는 한동안 여행도 같이 다닐 만큼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주제에.

그렇게 과열되었던 분위기가 조금이나마 진정이 되자 그제야 제정신을 차린 듯 황녀가 헛기침을 한다. 아무래도 방금  자신이 조금 도가 지나쳤다는 것을 깨달은 것 같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흠, 아까 하려고 했던 이야기를 마저 하도록 하지.저 여자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바로 내가 불렀기 때문이라네. 그대와 비앙카 델 카스타나의 ‘밀월여행’ 사건 때문에 혹시나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편지를 보냈던 것이라네.”

“카인, 전 황녀님께서 불러서 온 것이 아니에요. 애초에, 저 또한 카인과 비앙카 델 카스타나의 약혼 소식을듣고 북상하던 와중이었으니 말이에요.”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나와 비앙카의 거짓 약혼이 나와 관련 있는 여자들을 모조리 끌어 모은 셈이 되었다는 의미인가?

“뭐,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여자이지만 걸어다니는 약통으로는 그럭저럭 쓸 만한 여자이니 말일세. 덕분에 그대가 입고 있던 심대한 부상 또한 치유하는 것이 가능하였지.”

“카인을 치유한 사람은 저인데 생색은 황녀님께서 내시는군요.”

과연, 내 사지 중 하나가 떨어져나가지 않고 전부 온전히 붙어 있을 수 있는 이유는 전부 아리엘 덕택이었던 것인가.

“아까도 말씀드린 사실이지만, 카인이 입은 부상은 너무 심각했어요. 비록 외상은 전부 치유했다고 하지만 한동안은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셨으면 좋겠군요.”

그리 말을 하더니 아리엘은 한숨을 내쉬며 나를 알 수 없는 눈초리로 쳐다보기 시작한다.

“그럼, 얼추 상황을 이해한 것 같으니 저 또한 카인에게 한 가지만 질문을 해도 괜찮을까요?”

“아, 예. 그리 하시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리엘은 왠지 모르게 뾰족함이 느껴지는 말투로 나에게 질문을 던져온다.

“그간 카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직접 듣기 위해 아무 것도 묻지 않았지만, 이제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을 것 같네요. 카인, 당신이 입은  심대한 부상, 비앙카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인가요?”

“...예?”

“어물쩍 넘어가실 생각하지 마세요. 카인의 왼팔에는 초고열에 닿은 끝에 세포 그 자체가 괴사된 흔적이 남아 있더군요. 제가 알기로 그런 흔적을 남길 수 있는 비앙카의 ‘백염의 탄식’ 밖에 없어요. 그러니 확실히 말해주세요. 카인, 당신은 지난 시간동안 비앙카와 단 둘이서 대체 무슨 짓을 했던 것인가요?”

“...저, 그게...”

왠지 모르게등 뒤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말았다. 이 자리에서 입을 잘못 놀렸다가는 두고두고 후회를 하게  것이라는 강렬한 예감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그리고 그 때였다.

벌컥-

또 다시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하고 열린다. 이쯤 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방이 공공재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을 품어도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게슴츠레 뜨고 매너 없는 난입자들의 얼굴을 살펴보니, 다름 아닌 아리아와 비앙카였다.

“카인!”

“카인님! 깨어나셨군요!”

내가 의식을 회복했다는 사실이 그리도 반가운지,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아리아와 비앙카. 하지만 아리엘은 비앙카의 그런 모습이 못마땅한 것인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빈정거리는 듯한 어조로 이리 말을 하였다.

“호오, 누군가 했더니, 카인이 의식을 회복하자마자 가장 먼저 행방을 물어본  주인공이었군요.”

“...뭐? 카인이 의식을 회복하자마자 나를 가장 먼저 찾았다고?”

아리엘이 자신을 향해 뭐라고 하건 간에, 그녀는 아무래도 자신이 듣고 싶은 말만을 들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내가 보고 싶었던 거야, 카인? 사실, 나도 당신이 무척이나 보고 싶었어. 그러면 이제, 그 날 당신이 나에게 약조하였던 것을 지킬 때가  것이로구나.”

“...그 날 약조했던 것? 그게 대체 뭔데?”

그 날 내뱉었던 말이 원체 많았던 지라 비앙카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쉽사리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야 당연한 거 아닐까? 나를 평생 사랑해준다는 약속 아니겠어?”

그리 말을 하며 비앙카는 내 팔을 덥석 하고 끌어안았다.

“.....”

“.....”

“.....”

다음 순간, 이 자리에 모여 있던 다른  여인으로부터 숨이 막힐 듯한 침묵이 새어나온다.

‘염병할.’

머리가 지끈하고 아파오는 것은 대체 어째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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