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8. 비앙카 델 카스타나 - 12
“...잘 자, 비앙카.”
나는 내 품 안에서 끝내 정신을 잃고 만 비앙카를 땅에 살포시 눕혔다. 그녀의 신체를 살짝 어루만져보니, 전신의 마력이 끝끝내 고갈 나고 말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생각해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리아와 그렇게 피터지게 싸우고 나서 얼마 되지도 않아, 뒤이어 나와 싸우기까지 했으니, 이렇게정신을 잃어버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하, 아...”
깊이 호흡을 하여, 숨을 크게 내쉰다. 극한 상태에 놓여있던 몸의 긴장을 내려놓는 것과 동시에, 전신에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끔찍한 격통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아, 으.”
온 몸은, 상처투성이였다. 비앙카의 ‘백염의 탄식’을 정면으로 받아낸 왼팔은 몸에 간신히 붙어 있어 이제는 어떠한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 상태였으며, 마지막 순간 삭월(朔月)을 펼쳐낸 오른팔은 그 반동을 이겨내지 못한 끝에 뼈가 완전히 뒤틀리고 박살이 나버리고 말았다.
전신의 피부는 열상(裂傷), 화상, 동상 등 인간이 입을 수 있는 온갖 부상을 입은 끝에 누더기처럼 흉하게 너덜거리고 있었으며,생명력을 오러로 변환해 사용한다는 미친 짓을 저지른탓인지 온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마치, 전신에서 생기(生氣)라는 개념이 송두리째 사라진 듯한 기분이었다. 어디까지나 나의 예상이긴 하지만, 방금 전 비앙카와의 싸움의 여파로 인하여 아무리 적어도 몇 개월 어치의 수명은 깎여나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남는 장사가 따로 없군.”
익히 각오한 바였다. 내가 맞서고자 한 상대는 인류 최강의 일각인 동시에 현존하는 최강의 마법사 중 하나였다. 본래대로라면 나와 같은 허접이 감히 검을 들이밀 수 있는 레벨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겨우 이 정도 부상을 입고 그녀에게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 자체가 기적 같은 일이었다.
...거기다가, 아리아와 비앙카 둘 중에 한 명이 죽어나가는 꼴을 보느니, 내 수명이 몇 개월 깎여나가는 편이 백배는 낫지 않겠는가. 딱 한 가지, 내 온 몸이 말 그대로 다 부서져버린 끝에 전신이 빌어먹을 정도로 아프다는 것 하나만 뺀다면.
“...쿨럭-!”
결국 입에서 새까맣게 죽은 피를 토해내고 말았다. 아무래도 요즘 들어 피를 토하는빈도가 너무 많이 늘어난 것 같았다. 이러다가 제 명에 죽지 못할 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상상이 머릿속을 엄습하고 말았다. 피를 토해낸 반동인지, 눈앞의 시야가 점차 가물가물해져 가는 것만 같았다.
터벅, 터벅.
그 때였다. 나의 귀에, 이쪽으로 누군가가 다가오는 듯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 것이.
“수고하셨어요, 카인님.”
“...아리아.”
폐품이 되기 일보직전인 나의 눈에, 누군가의 모습이 들어온다. 순간, 눈앞이 흐릿해진 바람에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할 뻔했지만, 목소리를 통해 눈앞의 사람의 정체가 아리아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무리하셨네요. 그것도 엄청.”
그리 말을 하면서 아리아는 자신의 옷자락으로 내 얼굴에서 흘러내리고 있는 땀과 피를 닦아내 주었다. 그녀의 깨끗하고 단정한 옷이, 나의 피로 인해 금세 더러워지고 말았다. 하지만, 아리아는 그 따위 사실은 하나도 신경 쓰지 않는 것 마냥 나의 몸에 묻어 있는 땀과 피를 꼼꼼하게 닦아내주고 나서야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며 나에게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네 옷을 더럽혀가면서까지 이렇게 해줄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어떻게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실 수가 있나요? 전 카인님의 전속 시녀인데 말이에요. 그리고,제가 이 순간 카인님께 해드릴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이런 것 밖에 없는 걸요.”
그리 대답을 하며 아리아는 평상시와는 확연히 다른 성숙한 미소를 지어보일 뿐이었다.
“카인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한 가지만 여쭈어 봐도 괜찮을까요?”
“...뭔데? 그리고 가능하면 빠르게 물어봐주면 좋겠는데.”
아까부터 네가 두 명으로 보이고 있는 꼴을 보아하니 조만간 정신을 잃어버릴 것 같으니까.
“음, 별 다른 건 아니에요. 그냥 단순한 확인 작업에 불과하니까요. 카인님. 비앙카 델 카스타나의 손에 납치되고 난 직후, 그녀의 손에 기억을 잃어버리셨죠?”
“...그래, 그랬었지.”
아리아에게도 귀가 달려 있는 이상 나와 비앙카의 대화를 실컷 들을 수 있었을 테니 이제 와서 숨기고 자시고 할 내용은 아니었다. 나는 아리아의 말을 순순히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말이죠, 카인님의 기억, 사실 온전하지는 않으시죠?”
우뚝.
아리아의 말을 들은 그 순간, 몸이 그대로 굳어져버리고 말았다. 가물가물하게 꺼져가던 의식이 단숨에 명확한 무언가로 전환된다.
“그거 아세요? 카인님, 그간 못 뵌 사이에 성격이 굉장히 많이 바뀌셨다는 걸요. 근본까지 바뀐 것은 아니지만, 조금 더 진중해지고, 차분해진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요?”
뭐, 과거의 성격이나 지금의 성격이나, 저는 둘 다 허용범위이니 상관없지만 말이에요, 라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아리아.
...사실, 아리아의 말이 전부 맞았다. 나 자신조차 알 수 없는 어떠한 연결에 의해 기억을 되찾을 수 있었지만, 내가 되찾은 기억은 온전한 기억이 아니었다. 아직도 나의 기억 중간 중간에 커다란 구멍이 존재한다는 것을, 손쉽게 인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뭐, 일상에 지장을 주거나 혹은 다른 사람을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치명적인 결락은 아니었기에 대충 수긍하고 넘기긴 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내가 ‘이전의 나’와 동일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결코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현재의 나는 타인이 보기에 무언가가 확실히 달라져버린 게 틀림없는 것이겠지.
“...어떻게 알았지? 그렇게 티가 많이 났나?”
아리아를 추궁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볼 때 내가 그렇게 티가 나게 굴었나 하는,자조적인 의미에서 던진 질문이었을 뿐이다.
“인격이란 기억과 상보적 관계에 놓여 있기 마련이잖아요? 기억을 통한 경험이 쌓여가며 개인의 인격 또한 점차 변화를 거듭하게 되는 법. 그런데 카인님의 성격은 그걸 감안해도 좀 많이 변한 것 같아요. 고작 40일간의 변화라고 하기에는, 조금 극적인 면이 있다고 판단을 했을 뿐이랍니다.”
“.....”
“사실,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몇 군데 있기는 해요. 단순히 성격뿐만이 아니라 검술을 비롯한 전반적인 신체 능력 또한 향상된 것 같은데, 그런 부분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이해가 잘 가지 않거든요.”
설마 대수림에 쳐 박혀서 잘 나오지 않는 그 음흉한 엘프의 농간일까요, 라며 아리아는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을 중얼거린다.
대체 어째서일까. 나는 나의 눈앞에 서 있는 아리아가, 내가 익히 알고 있던 그 아리아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확실히 달랐다. 나를 향해 교태를 부리듯 살포시 미소를 짓고 있는 저 표정도, 평소보다 훨씬 이지적인 저 말투도, 어딘가 모르게 고풍스러운 자태가 묻어나오는 저 분위기도, 전부 난생 처음 보는 아리아의 모습이었다.
...아니, 아니었다. 나는 아리아의 저러한 모습을, 처음 보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분명, 언젠가 아리아의 저러한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그건, 분명-
“...아리아, 너, 설마...”
비틀.
아리아를 향해 뭐라 말을 하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이제는 한계였나 보다. 필사적으로 의식을 지탱해보려 노력하였지만, 안 그래도 가물가물했던 내 시야가 빠르게 암전되어 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바닥을 향해 천천히 쓰러져가는 내 몸을, 부드러운 팔로 감싸 안아주는 누군가가 있었다.
“...고마워. 내게 이름을 주어서. 고마워. 끝까지, 내 편이 되어 주어서. 고마워. 나를 행복하게 해줘서.”
“그리고, 고마워. 나를, 끝까지 믿어줘서.”
나를 끌어안아주고 있는 그 기분 좋은 감촉에, 왠지 모르게 안심을 하며, 밀려오는 수마(睡魔)에 몸을 맡긴다. 그렇게 내 의식이 파직하며 꺼지기 직전, 누군가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내 귓가에 이러한 말을 속삭인다.
“약속할게. 나 또한, 마지막 순간까지 당신만의 편이 되어줄 것이라는 것을.”
그렇게, 오늘 당신이 한 선택이 올바른 선택이었다는 것을, 꼭 증명해보이도록 할게.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편히 쉬기를.
****
그리하여, 하나의 싸움이 끝을 맺었다. 천지가 부서질 듯한 굉음을 떨쳐 울리며, 서로가 자신만의 신념을 관철하고자 했던 그 싸움은, 결국 한 남자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그리고 저 만치에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그들이 자아내던 싸움을 그저 지켜보기만 하던 어느 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아이리스 엘 데브하르트. 카인 폰 에스텔이라는 남자의 스승이며, 연인인 동시에, 그와 모든 것을 함께 하기로 약조한, 그런 관계에 놓여 있는 여인이 바로 그녀의 정체였다.
“...카인.”
전부, 보았다. 전부 눈에 담아내었다. 너의 분투를, 너의 의지를, 그리고 너의 결의를.
...사실, 네가 저 여자의 손에 의해 다치고, 아파할 때마다, 너를 향해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꾹 참았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그 자리에 서 있는 너의 노력을, 무위로 돌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너는 승리하였다. 너는 오직 너 자신만의 힘으로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해내었다. 그 모습은,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찬란할 뿐이었다.
참으로 멋졌다. 그와 함께, 너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 또한 더욱 커지고 말았다.
지금 당장 네 옆으로 달려가,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너를 제도로 데려가고 싶다. 오직 나만을 바라보고, 나만을 향해 웃어주고, 나만을 사랑하게 만들고 싶었다. 이번에야말로, 세상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너와 함께 행복 하고 싶다.
너와 함께 한다는 상상을 하니,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내 옆에 영겁토록 있어주는 너를 상상하니, 너무도 행복한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내 가슴을 가득 채우는 이 풍만한 기분이, 바로 사랑이 아닌가 하는 흡족함이 느껴진다.
“카인.”
아이리스의 두 눈이 탐욕으로 빛을 내기 시작한다. 그의 주위에 있는 떨거지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신경이 쓰이지도 않는다.
이제 나 또한, 본격적으로 너라는 남자를 가져볼까 한다.
****
“...최고였어, 정말로.”
대수림의 가장 중심부, 세계수의 수호자라고 불리는 키리에 엘 데나리스는 얼굴이 잔뜩 상기된 채로 스스로의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방금 전, 키리에가 남몰래 관음 하였던 광경은 그녀의 기나긴 인생 속에서도 몇 번 보지 못했던 대단한 광경이었다. 정말로, 최고였다. 짜릿하였다. 시간이 다소 흘렀음에도 전신에서 흥분이 가시지 않았다. 여인의 은밀한 부분이 그대로 젖어버리는 것 같은 극도의 쾌락이었다.
“...아아, 정말 멋졌어. 이 정도면, 아이리스 엘 데브하르트 때와 맞먹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키리에가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그 당시의 카인이 가장 멋있었지만, 오늘 또한 상당히 만만치 않았다. 역시, 아무리 보고 또 봐도 질리지가 않았다. 그녀가 사랑하는 인간이 스스로의 신념에 의거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우는 광경은, 그녀에게 있어 지독하리만치 황홀한 광경이었던 것이다.
키리에는 자신도 모르게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할짝였다. 갈증이 인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아득할 정도로 기나긴 삶 속에서 쌓이고 또 쌓인 권태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이것 하나로는 부족했다. 더욱 더 큰 유희거리가 필요하였다.
“아, 그러고 보니.”
문득 머릿속에 떠오르고 말았다. 아직 그녀가 움직이지 않은 말이 하나 남아 있었다는 것을.
아리엘 티에르. 키리에가 알고 있는 한, 가장 질척질척하고, 음습하며, 비앙카 이상으로 정신이 나가 있는 여자.
물론, 상당히 머리가 잘 돌아가며, 세계의 진실에 대해 일부나마 깨닫고 있다는 점이꽤나 걸리기는 하지만, 키리에는 그 뱀 같은 여자를 움직이게 하는 열쇠가 무엇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자아, 아리엘 티에르. 너는 대체 내게 어떠한 장면을 연출해 줄 것이니?”
모든 것이 한 데 모이고, 모든 진실이 드러나는 그 순간, 그는 과연 어떠한 선택을 내리게 될 것인가. 아무래도 당분간은, 그러한 미래를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심심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