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8. 비앙카 델 카스타나 - 09
그렇게, 그는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여인들에게 고하였다. 더 이상의 다툼은, 결코 허용하지 않겠노라고. 만일, 상대방에 대한 적의를 들어낼 것이라면, 그 전에 먼저 자기 자신부터 넘어서야 할 것이라고. 결코 꺾이지도, 타협하지도 않을 눈빛을 한 채로,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호소하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 그의 행위는 참으로 어리석게만 비추어질 뿐이었다. 카인을 포함한,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잘 알고 있었다. 현재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 가장 약한 이가 다름 아닌 그라는 것을.
이 얼마나 우스운 노릇인가. 힘이 뒷받침되지 않는 정의 따위, 공허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다. 약자가 내세우는 의견따위, 강자에게 있어 시끄러운 잡음에 지나지 않다. 이 자리에서 그가 아무리 스스로의 굳은 신념을 내세운다 할지라도, 두 여인이 그를 무시한 채 앞으로 한 발짝만 발걸음을 내딛는다면 그의 모든 행동은 허사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아리아와 비앙카는 그리 행동할 수가 없었다. 그의 어리석은 행위에 조소를 비출 수 없었다. 그가 내세운 신념을 무시하며 자신만의 뜻을 내세울 수가 없음을, 이내 깨닫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의 그러한 모습이야말로, 두 여인이 그를 사랑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으니까.
“.....”
그렇게, 이 자리에 묵직한 적막이 흐른다. 주변에서 불꽃이 타닥이는 소리와 스산하게 불어오는 바람소리만이, 시간의 경과를 알려주는 지표가 되어줄 따름이었다.
세 사람 중, 가장 먼저 입을 열어 침묵을 깨뜨린 사람은 다름 아닌 아리아였다.
“...알겠어요. 그것이 카인님의 의견이라면, 저는 그에 따르도록 할게요.”
눈동자 속에 여전히 비앙카에 대한 격렬한 증오를 불태우고 있으면서도, 아리아는 자신의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카인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아가 딱히, 비앙카를 용서해서가 아니었다. 그녀는 여전히, 카인을 기만한 비앙카 델 카스타나를 싫어하고, 그를 넘어 증오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리아에게 있어 카인의 명령은 그 이상으로 절대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아리아의 안에서 카인이 차지하는 위치는 절대적인 무언가임이 틀림없었으니까.
아리아라는 여자는, 카인이 원하지 않는 일은 절대로 행하지 않는다. 그것이야말로, 아리아가 스스로의 가슴 속에 새겨놓은 첫 번째 명제이자 철칙이었다.
“...그래, 내 억지를 들어주어서 고맙구나. 아리아.”
그리 말을 하며 카인은 아리아의 머리를 다시금 슥하고 쓰다듬어 준다. 방금 전의 격렬했던 전투의 여파로, 아리아의 머리가 많이 헝클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까지 오는 길에 네가 구사하는 마법을 전부 봤단다. 정말, 많이 강해졌더구나. 아리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어.”
마법을 익힌 지 몇 달 되지 않았는데 저 비앙카 델 카스타나와 호각을 다툴 정도의 실력을 쌓았을 것이라고는 정말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아리아와 비앙카와 보통의 여인들처럼 머리채를 잡아당기며 싸울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이것은 스케일이 커도 너무 크지 않은가.
덕분에 카인은 이곳까지 오는 길에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겨야만 하였다. 아니, 만일 그가 ‘흐르는 별’을 익히고 있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죽었을 지도 모른다. 아리아와 비앙카가 정면에서 격돌한 여파는, 카인과 같은 잔챙이 몇쯤은 가볍게 압살할 정도로 강렬했던 것이다.
“.....”
카인이 자신에게 칭찬을 해주었음에도 아리아는 그를 향해 빙그레 웃음을 지어보일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카인은 아리아의 그러한 모습에 왠지 모를 기시감을 느끼고 말았다.
분명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아리아가 분명한데, 어쩐지 아리아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아리아가 분명하긴 하지만,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훨씬 성숙하고, 키도 조금 자랐고, 말투도 왠지 더 어른스러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성장기라 그런 것인가?’
하지만 지금은 그 따위 사소한 것에 신경을 쓸 때가 아니었다. 그가 부린 억지에 대해, 아리아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할 따름이었다. 그들 사이에 싸움을 말리기 위해 기나긴 설득의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생각했었지만, 우선 두 개의 고비 중 하나는 순순히 넘기게 되었으니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러면 비앙카, 이번에는 네 대답을 들어보고 싶은데.”
카인은 고개를 돌려 아까부터 어떠한 말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비앙카를 향해 그리 질문을 던졌다.
“...카인.”
비앙카는 카인을 슬픈 눈으로 한 차례 쳐다보더니 이내 차마 어떠한 말도 하지 못하겠다는 듯 자신의 입술을 꽉하고 깨물고 말았다.
“...그래. 당신은 언제나 그런 사람이었지. 자기 자신의 행복보다 타인의 슬픔을 더욱 가슴에 담아두며, 스스로의 행복보다는 절망에 탄식하는 이들을 우선시하는, 그런 사람이었지. 과거나, 미래나, 현재나, 당신은 정말이지 한결 같이 아름다운 사람이구나.”
그리 중얼거리는 비앙카의 눈동자 속에는 그가 깃들어 있지 않았다. 그녀는 분명 카인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동시에 그녀는 그의 모습을 통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다른 무언가를 투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있잖아, 카인. 난 말이지, 네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당신의 소망이 곧 나의 소망이며, 당신의 기쁨이 곧 나의 기쁨이니까. 그만큼 나는, 당신을 아주 많이 사랑하고 있어.”
비앙카의 말은, 진실이었다. 그것이야말로 틀림없는, 비앙카 델 카스타나라는 한 명의 여인이 지닌 소망의 형태-
“하지만 말이지. 그 여자를 죽이지 말라는 네 부탁만은, 도저히 들어줄 수가 없어.”
그러한 말을 하는 비앙카의 두 눈에는, 어느새 결연한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카인, 너도 사실 잘 알고 있잖아. 그 여자는, 당신의 시녀는, 아리아는, 그리고 ‘겨울의 마녀’는, 언젠가 세상에 재앙을 불러올 여자라는 사실을.”
그것은, 아직은 일어나지 않을 일. 하지만, 동시에 우리들의 과거에 일어났었던, 끔찍한 참극.
“대륙에, 끝나지 않는 겨울이 도래하였어.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는, 많은 죽음을 보아야만 했지. 혹독한 추위로, 굶주림으로, 실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기만 했지. 그것과 비슷할 정도로, 참 많은 사람들이 슬퍼하고 있었어. 우리가 겪어야만 했던 혹독한 겨울은, 참으로 거대한 비극임이 틀림없었어.”
“...사실, 처음에는 말이지, 난 주위의 만연한 죽음 속에서도 별 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어. 왜냐하면, 이 세상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거든. 이런 세상 따위,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생각했었거든. 하지만 말이야, 네가 내게 가르쳐 주었었지.”
한 때의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지금도 두 눈을 감으면,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버림 받은 한 소녀에게 손을 뻗어준, 한 소년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본다.
“나는 너와 함께 하며 많은 것을 배웠어. 세상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고,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웠지. 그리고,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고, 그 끝에 누군가를 사랑하는 법 또한, 배울 수 있었어.”
그것은, 실로 기적이었다. 너와 마주하였기에 나는 한낱 도구에서 한 명의 사람이 되었으며, 한 명의 여인이 되었으며, 그 끝에 어느 누군가의 연인이 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저 여자는 우리가 자아내어 갈 미래의 모든 것을 부술지도 모르는 존재야.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상 그 자체를 망칠 지도 모르는 존재야. 거기에, 네 목숨을 앗아갈지도 모르는 존재야. 그러니 나는.”
그러한 존재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을 뿐이다.
“...아리아는, 그저 아리아일 따름이야. 그녀는 어떠한 잘못도 행하지 않았어. 비앙카, 너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죄과(罪科)를 묻고자 하는 것인가?”
카인의 대답에, 비앙카는 쓸쓸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녀에게 있어 악역이란, 익숙한 배역이었다.
“네 말이 옳아, 카인.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하여, 선악을 따지고 죄의 경중을 논하는 것보다 무의미한 일은 없는 법이지. 하지만, 세상에는 만에 하나라는 것이 있는 법이 있어. 앞으로 닥쳐올 미래는, 어느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니까. 그러니, 만약, 어쩌면.”
10년 뒤, 아리아가 ‘겨울의 마녀’가 되어 이 세상에 다시금 재액으로 군림할 가능성 또한, 제로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말이야, 카인. 나는 저 여자를 죽인다는 말을, 이미 입에 올리고 말았어.”
비앙카 델 카스타나라는 여인은 자신이 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와는 별개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생명 하나하나를 꽃과 같다 여기고 있었다. 생명의 가치에 대해 함부로 논해서는 안 되며, 의미 없는 살생 따위 행해서는 아니 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왜냐하면, 비앙카라는 여자는 이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 생명의 무게와 그 가벼움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이 세상에 태어난 직후, 가장 처음 먼저 본 광경은 자신의 ‘형제자매’라 할 수 있는 실험체가 아무렇지도 않게 죽고, 또 그를 보충하듯 아무렇지도 않게 태어나는 광경이었다. 그 광경 속에는 생명에 대한 존중도, 무게도, 아무 것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생명이란, 참으로 덧없는 무언가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갓 태어난 그녀가 무수히 죽어나가는 생명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녀를 향한 실험체들의 애원도, 절규도, 전부 무시한 채 그녀는 실험실을 빠져나왔고, 카스타나의 성을 받아 한 명의 ‘인간’이 되었다.
...비앙카는 기억해야한다만 한다 생각했다. 그 때의 그녀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자신의 삶을 위해, 자신의 생존을 위해, 주변을 돌아보지 못하고, 혼자서만 살아남고 말았다. 그러니, 자신이 그들의 죽음을 전부 기억하고, 그 무게를 짊어져야만 한다 생각했다. 그것만이, 그녀가 그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속죄였으니까.
그러니 비앙카는, 누군가를 죽인다는 말을 함부로 자신에 입에 올려서는 아니 된다 생각하였다. 만약, 누군가를 죽인다는 말을 입에 올린다면, 그것은.
누군가를 반드시 죽인다는, 필살의 각오에 임하였을 때뿐.
그것은, 비앙카 델 카스타나에게 있어 세상 어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마음 속 깊은 맹세였다.
“미안해, 카인. 나는 결코, 지금 이 순간의 내 의지를 꺾을 수 없어.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을 바꿀 수 없어. 그러니-”
결코 이 자리에서 물러날 수 없다고, 비앙카는 카인을 향해 굳건한 눈동자를 하고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 네 의지를 존중한다. 비앙카.”
그리고 비앙카의 그러한 말에, 카인은 자신의 고개를 선선히 끄덕였다.
이해한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비앙카가 어째서 저렇게 행동하는 것인지, 잘 알고 있다. 그녀의 행동을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저, 나와 지향하는 곳이 다른 것일 뿐.
...사실, 나 또한 내가 올바른 것인지, 아니면 아집에 휩싸여 엇나가고 있는 것인지, 잘 알지 못한다. 어쩌면, 내가 틀린 것이고 비앙카의 의견이 전적으로 올바른 것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런 나라도, 확신하고 있는 것이 있다. ‘겨울의 마녀’라면 몰라도, 지금의 아리아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다.
현재의 아리아는, 아직 어떠한 잘못도 범하지 않았다. 오직 죄를 범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누군가를 심판한다는 것은 온당치 못한 일임이 분명하다. 비앙카가 아리아의 죄악을 바라본다면, 나는아리아의 선함을 증명해보이도록 하겠다. 아리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그녀를 나의 시녀로 삼은 시점에서,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를 신뢰하기로 하였으니까.
그러니, 답은 심플하다. 네가 아리아를 죽이고자 한다면, 나는 너를 전력으로 막아설 뿐.
우두둑-
흐르는 별을 이용해, 이제는 움직이지 않은 왼팔의 흐름을 조절하며, 강제로 움직이게 한다. 오른팔에 비하면 목각인형마냥 뻣뻣한 움직임이지만, 그래도 아예 움직이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낫겠지.
“카인, 설마 나하고 싸우려고 하는 거야?”
비앙카가 슬픈 눈으로 카인을 바라본다.
“당신이 강하다는 것은 나도 알아. 얼마 전, 마스터의 경지의 무인을 상대로 하여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만 보아도 당신은 충분히 강자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지. 하지만-.”
비앙카는 루시안 폰 투르니젠 ‘따위’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그녀는 틀림없는 인류 최강의 일각이자 현 인류의 정점에 위치한 마법사.
비록 아리아와의 혈투 속에서 많은 내상을 입고, 남아 있는 마력이 얼마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카인과의 전력 차를 생각한다면 그 따위 마이너스는 핸디캡조차 되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카인은 현재 한 쪽 팔을 정상적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 단언할 수 있었다. 카인 폰 에스텔에게, 승산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음에도, 카인은 어떠한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지금부터 너와 싸우려 한다. 비앙카.”
자신이 결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녀를 향해 도전하는 그 어리석은 모습은, 언젠가 그녀가 사랑했던 그의 모습을 연상시키고 말았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굳센 의지에,비앙카 역시 각오를 다질 수밖에 없었다.
“...만약, 만약. 네가 다치거나, 죽는다면. 나 또한 따라서 죽을게. 그러니...”
최선을 다해, 자신을 꺾어달라며 호소하는 그녀를 향해, 카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괜찮아. 비앙카, 넌 네가 할 일을 해. 지금부터 나는, 그런 너를 필사적으로 말릴 테니까.”
싸움에 임하는 노릇은, 단순히 아리아를 위해서만이 아니다. 비앙카, 너를 납득시키고, 지금까지 너를 돌아보지 못한 나의 잘못에 대해 속죄하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너를 위한 싸움이기도 하였다.
비앙카, 이번에야말로 나를 향한 너의 마음을, 전부 받아주도록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