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화 〉8. 비앙카 델 카스타나 - 06
내 말이 끝나는 순간, 이 자그마한 오두막 내부에는 적막만이 가득차고 말았다.
황녀는, 의외로 나의 대답에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두 눈을 살포시 감더니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제자리에 조용히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
그렇게 찰나에 불과한 순간이었는지, 아니면 영겁과도 같은 순간이었는지 알 수가 없는 시간이 흐르고서야, 황녀는 자신의 두 눈을 떴다.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두 눈에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는 듯한 기색이 깃들어있기만 하였다.
“...카인, 방금 전의 그 말. 정말 제정신에서 한 말 이었던 것인가?”
황녀의 목소리 속에는, 왠지 모르게 나를 향한 은은한 아픔과 슬픔이 배어져 있었다.
“유감스럽지만, 제 정신은 지극히 멀쩡하기만 할 따름입니다. 방금 전의 그 말 또한, 온전한 정신에서 내뱉은 말이 분명하고 말입니다.”
내가 흔들림 없는 태도로 그리 대답을 하자, 황녀는 아무 말 없이 나를 향해 한 발짝 다가왔다. 그녀의 전신에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위압감에, 나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 발짝 물러서고 말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현재의 황녀는 왠지 모르게 나에게 화를 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째서인가?”
황녀는, 분한 듯 입술을 깨물며 나를 바라보았다.
“대체 어째서인가, 카인? 나는 모르겠네. 자네의 저의를, 정말로 모르겠다네. 아리아도 그렇고, 비앙카 델 카스타나도 그렇고, 그 여자들이 대체 자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스스로의 모든 걸 내던지면서까지 그녀들을 위하려고 드는 것인가?”
“.....”
“비앙카 델 카스타나는, 자네를 납치한 것으로도 모자라 이곳에 감금하기까지 한 장본인일세. 자네가 이곳에서 그녀와 어떠한 생활을 영위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네. 하지만, 그 속에 자네의 자유 의지 따위는 없었다는 것만은 쉬이 추측할 수 있다네. 그녀의 의도가 어떠했는지 또한 잘 모르겠다만, 그녀의 행위를 선(善)이라 칭할 수 없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네.”
황녀의 말은, 옳다. 진실이었다. 나 또한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현재 내가 이 단란한 오두막에 머무르고 있는 것은 나의 의지에서 비롯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어디 그 뿐이랴. 그녀는 나를 납치한 것으로도 모자라 내 기억을 통째로 날려버린 끝에 내곁에서 연인행세를 하기까지 하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비앙카가 내게 저지른 일은 여러모로 정상인의 상식을 가뿐히 뛰어넘은 듯한 행위임이 아닐 수 없었다.
“자네의 전속시녀, 아리아는 또 어떠한가? 그녀는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비앙카 델 카스타나보다 더욱 커다란 문제점을 내포한 소녀가 아니던가?”
황녀의 목소리는, 아까 전 나와 대화를 나누던 때와는 확연하게 달랐다. 그녀의 목소리 속에서는, 확실한 증오만이 배여 있었다.
“카인, 내 눈은 옹이구멍이 아니라네. 비록 현재 모든 힘을 잃어버린 채 그대의 곁에서 얌전히 시녀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미래에 저지른 일이 없었던 일이 되는 것은아닐세. 대륙 전체에 끝나지 않은 겨울을 불러온 장본인이자, 자네를 끝끝내 죽음으로 몰고 간 원인이라 할 수 있는 ‘겨울의 마녀’야 말로 그녀의 진정한 정체라는 것을, 내가 모를 것이라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라네.”
“.....”
아리아가 나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말은 뭔가 조금 이상한 말이긴하였지만, 저 말 역시 마냥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리아가 ‘겨울의 마녀’로서 행하였던 모든 일들은 시계태엽이 거꾸로 뒤 감기며 전부 사라진 일이 되긴 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행한 일이 없었던 일이 된 것은 아니었다. 10년 뒤, ‘겨울의 마녀’를 토벌하고 나서 과거로 회귀한 황녀나 나 같은 사람이 남아 있는 이상, 아리아가 저지른 원죄는 언제고 그녀를 심판하려 들겠지.
“대답해주게나. 내가 납득이 가도록 설명을 해주게. 자네는 어찌하여 그 여자들을 아끼고 귀애하는 것인가? 어찌하여 그들을‘자신의 것’이라 칭하는 것인가? 그들은, 자네의 인생 속에서 커다란 해악을 끼친 존재가 분명할 지언데, 그런데, 어째서...”
어찌하여 그들을 그 정도로 아끼고, 또 사랑해주고 있는 것이냐, 라고. 심지어 자신의 목숨이 위험할 지도 모르는 장소에 뛰어들어가면서까지, 그들을 구원해주려는 이유가 대체 무엇이냐고.
그녀는 그 이상은 차마 자신의 입으로 말을 할 수 없다는 듯, 언어가 되지 못한 신음성을 흩뿌리기만 할 뿐이었다.
“.....”
...확실히, 황녀의 말은 옳은 말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올바른 말은 아니었다. 나는 단언할 수 있었다. 내가 아리아와 비앙카를 향해 품고 있는 이 감정은,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 이분법적인 요소로서 딱 잘라 정의를 내릴 수 있을 만큼 명확한 것이 아니었단 말이다.
그러니 토로한다. 지금 이 순간, 그들과 함께하며 많은 감정을 느끼고만, 과거의 자신을 낱낱히 고백한다.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약속?”
떠올린다. 10년 전으로 회귀한 날, 나의 옆자리에 곤히 잠들어 있던 어느 하얀 머리 소녀의 모습을.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 채, 그 어떠한 지식도 떠올리지 못한 채, 불안감에 휩싸인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가녀린 여인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떠올려본다.
그 때의 아리아는, 10년 뒤 대륙을 파멸로 이끌어 갈 ‘겨울의 마녀’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저, 어디에나 있는 평범하고 무력한 한 소녀에 불과하였다.
그렇기에, 나는 아리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 약속하였다. 네가 장차 나의 힘이 되어준다면, 나는 네가 머물러도 되는 장소를 마련해주고, 이 세상으로부터 너를 보호해주겠노라고. 네가 살아가도 되는 의미를, 내가 만들어주겠다고.
약속은, 아직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녀와의 신뢰는 끊겨 있지 않았다. 아리아가 세상을 재앙을 불러오게 될 ‘겨울의 마녀’가 아니라, 카인 폰 에스텔의 전속시녀인 이상, 나는 그녀를 보호해줄 의무가 있었다. 세상의 그 어떠한 위협 속에서도 그녀의 편이 되어주어야만 하였다. 그러니, 아리아는 나의것이나 마찬가지이리라.
비앙카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녀 또한, 나에게 많은 잘못을 저질러왔다. 원정대에서 함께 할 무렵, 나를 갖은 명목으로 괴롭힌 것으로도 모자라 이번에는 나를 강제로 납치하고, 그 과정에서 내 기억을 지웠으며, 결과적으로 나를 기만하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나 또한 비앙카에게 있어 죄인이나 다름없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그녀가 나를 향해 아주 오래전부터 마음을 품어왔었다는 사실을 끝까지 눈치 채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 필사적으로 부정해 왔었다, 라는 말이 옳은 표현일 것이다. 나에게 있어, 비앙카가 실은 그리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그렇게 실로 기나긴 세월에 걸쳐, 그녀를 돌아봐주지 못하였다. 그녀의 마음을 애써 외면하기만 하였다. 그녀의 슬픔을 방치해두기만 하였다. 그녀의 아픔을, 그저 머나먼 곳에서 쳐다보고 있기만 하였다. 나 역시, 그녀에게 있어 그리 떳떳하기만 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니, 나 역시 그녀를 향해 수많은 잘못을 범해온 것이 아닌가 싶다. 도덕적 우위를 내세울 정도로 올바른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비유하자면 우리 둘은 일종의 쌍방과실과 비슷한 관계가 아닐까 생각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저지른 잘못이 상쇄가 되는, 그러한 관계.
“...그것은, 그저 궤변에 불과하다네.”
“맞습니다. 전부 궤변이며, 억지에 불과한 논리일 따름입니다.”
나는 황녀의 말을 순순히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라고 해서 내 말이 억지로 가득찬 궤변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한 말을 철회하고픈 생각은 없었다. 내 말이 궤변이면 어떠하고 억지면 또 어떠한가? 현재 나의 마음이 그러할 따름인데.
결정적으로, 나는 비앙카와 사랑을 나누었다. 비앙카가 나의 품에 안긴 순간, 그녀는 내 여자가 되었으며, 나의 것이 되었다. 그러한 이유면 내가 이러한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한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나는 내 손에 들어온 것을 놓칠 정도로, 얼간이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고작 그러한 이유 때문에, 자네는 그런 무모한 일을 자행하려 드는 것인가?”
“고작이 아닙니다.”
나는 쓴웃음을 머금으며 이리 말을 덧붙였다.
“황녀님, 저는 무척이나 탐욕스러운 인간입니다. 한 번 손아귀에 쥔 것이라면, 악착같이 꽉 쥔 채로 절대 빼앗기지 않으려 드는 그런 욕심쟁이란 말입니다. 그러한 제가, 이미 제 것이 된 여인들을 순순히 놓아줄 리가 있겠습니까?”
“.....”
나의 말에 황녀는 뇌성벽력과 화염으로 넘실거리는 지평선 너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자살행위일세. 설령 자네가 저곳에 간다 할지라도, 과연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저들을 꺾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해낼 수 있다 생각하는가?”
황녀의 말에, 나는 이리 대답할 뿐이었다.
“저하. 아리아, 아니, ‘겨울의 마녀’에 대적하였을 당시의 저희들은, 승산을 재어가며 그녀를 향해 덤벼들었던 것입니까?”
나의 말에, 황녀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뻣뻣하게 굳는다. 그리고, 무언가 한탄하기라도 하듯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렇지 않았지. 그래, 자네 말이 옳다네. 승산 따위 희박하기 그지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우리는 ‘겨울의 마녀’에 정면으로 대적하였지. 그리고 그 끝에-”
“저희는 승리하였었죠. 그냥, 그것뿐인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자네가 내놓은 대답이란 말인가?"
왠지 모르게 나를 씁쓸한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황녀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때로는, 이성이 아니라 마음이 가는 대로 행하고 싶을 때도 있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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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너는 나를 떠나간다. 다른 누군가가 시켜서가 아니라, 오직 스스로의 의지로, 사지(死地)를 향해 걸어 들어간다.
“...카인.”
네 등이, 나에게서 점점 멀어져간다. 지금 당장이라도 네게 달려가, 너를 말리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계속해서 네 등을 바라보기만 한다. 멀어져가는 네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는 언젠가의 너를 떠올리고 말았다.
- 아이리스 엘 데브하르트, 나의 위대한 스승이시여. 언제까지 그렇게 주저앉아있기만 할 것입니까? 그렇게 가만히 앉아만 있다가는, 저희는 끝끝내 아무 것도 뒤바꾸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일어서십시오. 제가 아는 당신은, 그렇게 나약한 여자가 아니지 않습니까.
- ...그거 아십니까? 사실 전, 황녀님을 많이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끝까지 지켜봐주십시오. 이것이야말로, 제가 당신에게 보여드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사실, 나는 실망하고 있었다. 내가 익히 알던 너와, 현재의 너는, 아주 많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내가 알던 너는, 눈이 부시도록 빛나는 사람이었다. 나 따위가어떠한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찬란하기 그지없는 사람이었다. 너는, 지상에 놓인 유일한 별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너는 지극히 평범하기만 할 뿐이었다. 분명 내가 알던 너와 지금의 너는 동일 인물이었지만, 동시에 결국 다른 사람이 아닌가 하며 남몰래 한숨을 내쉬곤 하였다.
그런데 아니었다. 내가 틀렸다. 시간을 넘어, 공간을 넘어서도, 너는 언제나 너였다. 너라는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우며, 찬란한 별빛을 뿜어낸다. 네가 뿜어내는 광택(光澤)에, 나는 마치 부나방이 된 것 마냥 매혹될 뿐이다. 과거에 그래왔었고, 지금 다시 한 번, 네게 반해버리고 말았다.
“...카인.”
네가 멀어져 간다. 언제나 내 앞을 지켜주었으면 하던, 너의 굳세고 씩씩한 등이 내게서 점점 멀어져만 간다. 사실, 지금이라도 너를 붙잡고 싶다. 내 앞에서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다른 여자들을 구하러 간다고 말하는, 너를 붙잡고 싶다. 네게 매달려서, 오직 나만을 바라봐달라고 매달리고 싶다. 나만을 사랑해달라고 애걸하고 싶다.
하지만, 나는 널 붙잡을 수가 없다. 만약 지금 이 순간, 내가 너를 붙잡는다면, 그것은 너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행위가 될 터이니.
그러니, 나는 너를 지켜보기만 하겠다. 너의 의지를 존중하도록 하겠다. 네가 네 의지를 어디까지 관철할 수 있나, 나의 눈에 똑똑히 담아내도록 하겠다.
마지막 순간, 찬란하게 빛나던 너를 다시 볼 수 있다면, 지금의 내가 느끼는 고통 따위는 실로 아무 것도 아닐지어니.
그것이야말로, 너를 향한 나만의 사랑의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