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8화 〉8. 비앙카 델 카스타나 - 05 (68/201)



〈 68화 〉8. 비앙카 델 카스타나 - 05

쿠르르르-

천지사방을 떨쳐 흔드는 듯한 커다란 파공성에, 나는 그만 잠에서 깨어나고 말았다. 눈을 감고 계속해서 잠을 청해보려고 했지만, 이내 그것이 무리임을 깨닫고 말았다. 과장 조금 보태서 벼락 수십 개가 동시에 떨어지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지고 있는데, 잠을 청할 수 있을 정도로 나는 강심장이 아니었으니까.

“...으음...”

나는 부스스한 눈을 비비며 내 옆자리를힐끗하고 쳐다보았지만, 내 옆에 있어야 할 비앙카는 이미 온데 간데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그녀를 대신하기라도 하듯 침대 시트 위에 선명하기 그지없는 핏자국이 남아있는 모습이 나의 눈에 들어오고 말았다.

“.....”

저 새빨간 핏자국을 보고 있자니, 어젯밤의 격렬했던 정사(情事)가 떠올라 갑자기 기분이 싱숭생숭해지는 것 같았다. 굉장히 어린 시절부터 보아왔던 비앙카와 이런 관계를 맺어도 되었던 것인가 하는 생각부터 시작하여, 과연 이런 식으로 그녀의 처음을 가져가도 되는 것인가 하는 등신 같은 생각에 이르기까지 온갖 이상한 생각이 나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게 내가머리를 긁적이며 온갖 궁상을 떨고 있자니, 그런 내가 한심하기라도  것인지 오두막의 출입문 쪽에서 혀를 끌끌하고 차는 소리와 함께 익숙하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나의 귓가에 들려왔다.

“이런, 이제야 깨어났는가. 부지런한 줄 알았는데 상당한 늦잠꾸러기였지 않는가. 흠, 다르게 생각하니 그렇게 볼 일이 아니로군. 왜냐하면 아직은 새벽이니까 말일세. 그리 생각하니 자네가 그렇게 신생아마냥 잠에 빠져 있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군.”

고개를 천천히 돌려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보니, 내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어느 여인이 출입구 쪽에 몸을 기대고  있는 모습이 비춰지고 있었다.

“...황녀님?”

그녀의 정체는 다름 아닌 제국의 황녀이자 나에게 ‘흐르는 별’을 알려준 검술스승, 아이리스 엘 데브하르트였다.

“루멘티움에서 본 이후 꽤나 오래간만이로군. 카인 경. 대체  달 만에 경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인지 이젠 기억조차 가물가물해. 개인적으로 그대를 이렇게 만나 무척이나 반가울 따름이라네.”

황녀는 마치 십수년 동안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 헤어졌다가 오늘에야 다시 재회를 하게 된 사이인 것 마냥 나를 무척이나 살가운 태도로 반겨주었다. 하지만, 내가 황녀를 마주하자마자 느낀 감정은 그녀를 향한 반가움이 아니라 의아함뿐이었다.

“...어째서 황녀님이 이곳에 계시는 것입니까?”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루멘티움의 황궁에 있어야할 황녀가 비앙카와 내가 머무르고 있는 이 조촐한 오두막에 나타난 이유가 대관절 무엇이란 말인가? 게다가 이 주위는 비앙카가 쳐놓은 강력한 결계로 인하여 외부인의 출입이 불가능할 텐데?

“그것 참. 섭섭한 말을 하는군.  몸소 이렇게 자네를 데리러 왔건만 반갑다는 말은 하지 못할망정 내가 왜 이곳에 있냐는 말부터 하다니. 자네는 참으로 나쁜 남자가 아닐 수 없군, 카인 경.”

그리 말을 하며 황녀는 자신의 어깨를 으쓱하고 들어올렸다. 말과는 달리, 그리 화가 나지 않은 듯한 표정이었다.

“내가 이 먼 곳까지 그대를 마중 나온 이유는 실로 간단하네. 그대가 비앙카 델 카스타나의 손에 납치 되었으니 내 이렇게 만사를 제쳐두고 그대를 찾으러  것이 아니겠는가?”

“.....”

...납치라. 확실히, 황녀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비앙카가 나를이곳으로 끌고 오는 과정이 그렇게 온순하고 평화적이었다고는 말을  수 없을 테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나 역시 납치 과정에서 어떠한 사상자가 나오지 않은 것만 해도 기적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대와 비앙카 델 카스타나가 약혼을 맺는다는 말에 카스타나 후작가로 부리나케 달려가는 도중, 자네가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네. 아무리 보아도 그 계집에게 납치당한 것 같은 그대를 찾아내기 위해 내가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자네는 모를 것일세.”

“카스타나 후작가에 갔다가, 에스텔 공작가로 달려갔다가, 작은 실마리라도 얻고자 하는 마음에 대수림(大樹林)에 거북이마냥 틀어 박혀있는 키리에 엘 데나리스를 마주하는 등, 요 며칠 간  생애에서 가장 숨 가쁜 시간을 보냈던 것 같네. 뭐,  결과 이렇게 몸 성한 자네를 찾아낼 수 있었으니 결코헛된 시간은 아니었던  같지만.”

“.....”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10년 후에서 회귀를 한 이후 황녀와 인연을 맺은 적이 없었다. 물론, 루멘티움에서 황제를 알현하며 안면을 조금 트기는 하였지만, 고작 그 정도 만남을 일컬어 ‘인연을 맺었다.’라고 표현을 할 수 있다면 비앙카와 나는 이미 사실혼이라도 맺은 사이일 것이다.

이번 생에서는 나와 어떠한 관계도 없는 황녀가, 나와 비앙카의 약혼 소식에제도에서 카스타나 후작가로 부리나케 뛰어오는 것도 모자라, 겉으로는 ‘밀월여행’을 떠났다고 알려진 나와 비앙카의 행방을 뒤쫓기 위해 사방팔방을 뛰어다녔다는 것은 실로 웃기는 소리임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이 상황을 명쾌하게 설명해줄 수 있는 해답은 오직 하나 밖에 없었다. ‘겨울의 마녀’의 심장에 검을 꽂은 이후, 10년 전으로 회귀를  사람은 나와 비앙카 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전부, 기억하고 계셨던 것입니까?”

나의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황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하였다.

“물론. 그리고 자네뿐만이 아니라 비앙카 델 카스타나 또한 과거로 돌아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네. 아리엘 티에르는 아직 조금 긴가민가하긴 하지만.”

황녀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자하니, 그녀는 내가 10년 뒤에서 회귀 했다는 사실을 진작부터 눈치 챈 것 같았다.

“대체 언제부터 눈치를 채신 것입니까?”

나의 질문에 황녀는 순순히 입을 열어 대답을 해주었다.

“자네가 루시안 폰 투르니젠과의 결투에서 ‘흐르는 별’을 사용했을 때부터.”

...역시,  때 들킨 것이었나.

“...그  황녀님께서는 자리에 계시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확실히, 나는  자리에 있지 않았지만 대신 나의 눈이 되어준 자가 그 자리에 있었다네. 뭐, 상당한 운이 따라주긴 하였지. 자네와 루시안 폰 투르니젠의 결투를 지켜본 자가 ‘흐르는 별’에 대해 알고 있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직도 자네의 회귀 여부에 대해 긴가민가하고 있었을 테니 말일세.”

그리 말을 하며 황녀는 나를 향해 살포시미소를 지어보였다.

“카인, 제 아무리 ‘흐르는 별’이라는 검술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이가 극히 적다고는 하지만 다른 곳도 아닌 황궁에서 그리 대놓고 사용을 하면 어찌 하는가. 뭐, 덕분에 자네가 나와 마찬가지로 10년 뒤의 미래에서 회귀를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지만 말일세.”

그리 말을 하며 실로 재미있다는  웃고만 있는 황녀를 보며 나는 암담한 심정에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저는 어찌되는 것입니까? 정말로,  팔다리를 자르실 생각이십니까?”

“응?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제게 ‘흐르는 별’을 가르쳐 주실 당시, 황녀님께서 그리 말씀하셨잖습니까. 만일, 흐르는 별을 타인 앞에서 함부로 사용하는 것을 들킨다면 팔다리를 자를 수도 있는 노릇이라고.”

나의 말이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지 황녀는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내가 자네에게 그런 말까지 했었나? 헌데 난 그런 말을 한 기억이 없는데? 자네가 어떻게 안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확실히 그런 규율이 있긴 하다네. 허나 만들어진지  년이 넘는 고리타분한 규율 따위를 뭐 하러 지키겠는가? 설마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흐르는 별’을 배운 외부인이 자네 하나뿐이라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

황녀의 대답에 나는 그제야 마음을 내려놓을  있었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벗어나자마자 제도로 압송되어 팔다리가 잘려나갈 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상상은 접어두어도 괜찮을  같았다.

“그나저나 카인, 비앙카  카스타나와의 밀월여행은 잘 즐겼는가?”

“예?”

“에스텔 공작이 이미 모든 것을 상세히 말해주었으니 숨길 필요 따위 없다네. 그가 내게 이리 말을 해주더군. 얼마 전, 자네가 비앙카 델 카스타나와 손을 꼭 잡은 채 자신을 찾아와서 그녀와 함께 ‘밀월여행’을 다녀오겠다고통보를 하였다면서?”

그러한 말을 내뱉고 있는 황녀의 말투 속에 뾰족한 가시가 돋힌  같다 느껴지는 것은 결코 착각이 아니니라.

“...그건, 어쩔  없는 사정이...”

“사정? 어쩔 수 없는 사정?”

황녀는 피식하고 웃으며 몇 시간 전까지만 하더라도 비앙카와 내가 함께 뒹굴었던 침대 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주위가 어두컴컴한 와중에도, 침대시트 위에 새빨간 핏자국이 남아 있는 모습이 여기서도 아주  보이기만 하였다.

“저 앵혈(鶯血)도, 자네가 말하는 ‘어쩔  없는 사정’에 포함되는 것인가? 응?”

“.....”

황녀의 서슬 퍼런 추궁에 나의 등줄기에서 결국 식은땀이 흘러내리고야 말았다.

“...뭐, 아직 그대와 혼인을 올리지 않았으니 현재의 그대가 다른 여자와 어떠한 관계를 맺었는지에 대해서는 그리 신경 쓰고 싶지 않다네. 별로 관심이 없기도 하고. 하지만 도를 넘지는 말게나.  아무리 나라고 하더라도, 그대 주변에 측실들이 넘쳐나는 장면 따위는 추호도 보고 싶은 생각이 없으니 말일세.”

“....네?”

나는 황녀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아 그녀에게 반문을 하려 했지만, 아무래도 개인적인 호기심이나 충족시키고 있을 만큼 상황이 그리 여유롭게 돌아가고 있는  같지가 않았다. 왜냐하면-

쿠르르르-

콰콰콰콰쾅-!

방금 전부터 오두막의 바깥에서 흡사 천지가 뒤집히는 듯한 소리가 계속해서 울려 퍼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주변에 멀뚱멀뚱 서있다가는 뼛가루도 남기지 못할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흠, 정말 요란하게도 싸우는군. 그나저나,  비앙카 델 카스타나에 맞서 이리 호각을 이루는 것을 보아하니, 역시 데리고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군.”

“...이곳에 혼자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까?”

내가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질문을 던지자 황녀는 고개를 좌우로 내저을 뿐이었다.

“그럴 리가. 대마법사가 어떤 수작을 부려놓았을지 모르는 공방(工房)에 홀로 잠입을 할 정도로 머저리는 아니라네. 자네의 전속 시녀, 아리아라고 하는 소녀와 함께 이곳을 찾았다네. 참고로, 비앙카 델 카스타나가 쳐놓은 결계를 해체시킨 것 또한 그 아이의 위업이라네.”

“...아리아가, 이곳을.”

황녀의 대답에 나는 결국 신음성을 흘리고 말았다.

예상은, 익히 하고 있었다. 내가 비앙카에게 납치를 당할  두 눈 뜨고 그 광경을 전부 지켜보고 있던 아리아라면 언젠가 이곳에 당도할 것이라고 예상하긴 했었지만, 설마 황녀를 끌어들인 것도 모자라 비앙카와 정면으로 충돌을 할 것이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단 말이다.

꽈르르르릉-!

“...그렇다면, 저 소리는...”

“그래. 아리아 그 아이와 비앙카 델 카스타나가 현재 미친 듯이 싸우고 있다는 명확한 증거라네.”

황녀는 현재 돌아가는 상황이 실로 재미있다는  유쾌하기만  어조로 그리 말을 하였지만 정작 나의 마음은 심란하기 그지없었다.

대륙이 금방이라도 멸망해버릴  같은 이 끔찍한 소리가 아리아와 비앙카가 한  하고 있다는 신호였던 것인가.

순간, 나의 머릿속에 여인의 얼굴이 스치고 지나간다.

나를 향해 언제나방실방실 웃는 표정을 지어 보이는 아리아.

어젯밤, 나를 향해 수줍은 듯 사랑을 고백하던 비앙카.

그리고, 지금 두 여인이 서로를 향해 혈투를 벌이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기 위해 미친 듯이 싸우고 있는 것이다. 그 싸움의 끝은, 어쩌면 둘 중 하나가 죽어야만 끝을 맺을 지도 모른다.

“...빌어먹을.”

상념은 길었지만 판단은 찰나에 이루어졌다. 나는 나지막하게 욕지기를 내뱉으며 침대 근처에 벗어두었던 겉옷을 몸에 대충 두른다.

“자, 아리아가 비앙카 델 카스타나를 상대로 시간을 끄는 사이 우리는 이곳을 탈출하도록 하지. 이제 자네의 위치를 특정하였으니 이젠 더 이상 눈치 볼 필요 없이...”

“황녀님, 말씀 중에 죄송한 노릇입니다만.”

나는 황녀의 말을 중간에 끊는다는 무례를 범하는 것과 동시에 입을 열었다.

“저는 저쪽에 용건이 있어서 말입니다. 황녀님의 제안은 거부하도록 하겠습니다.”

“...뭐라고?”

순간, 황녀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를 하지 못하였는지 자신의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카인,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이지? 지금 도대체, 어디를 간다는 것이지?”

“그야, 이 상황에서 제가 갈 곳은 한 곳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나는 지평선 너머에서 화염이 넘실거리며 뇌전이 내리꽂히는 한 편의 지옥도를 가리키며 이리 대답을 하였다.

“일이  커지기 전에 누군가는  여자들을 말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대답에, 황녀는 더더욱 알 수가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러니까, 그 일을 왜 자네가 하려고 하는것인가?”

“그야, 저 여자들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가 제 것을 가지러 가는 것뿐인데, 굳이 거창한 이유까지 대야 하는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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