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8. 비앙카 델 카스타나 - 04
“그래, 비앙카 델 카스타나. 지난 40일 간, 연인놀이는 많이 즐겼니? 힘으로서 카인님을 납치하고, 카인님의 머릿속에 수작을 부린 끝에,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카인님 곁에 앉아 자신을 연인 행세를 하니 그리도 행복했니?”
“그 분의 곁에 앉아 스스로를 연인이라 소개하고, 그 분이 짓는 웃음을 너 혼자서 독차지 하고, 그 분과 모든 것을 함께 나누니 자기가 정말 그 분의 아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니? 만약 그랬다면, 그건 정말 순수하게 역겨운 일이 틀림없는데 말이지.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비앙카 델 카스타나?”
깔깔하고 실소를 터트리고 있는 아리아의 목소리가, 사방 천지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현재 이 넓직한 공간에서 아리아의 말을 들어주고 있는 청중은 오직 단 한 명, 비앙카 밖에 없었지만 그녀는 현재 아리아의 말을 들으며 마치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가벗고 모욕을 받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고 있었다.
“.....”
...각오는, 익히 하고 있던 바였다. 더 이상의 ‘거짓 약혼’은 무의미하다며 그가 자신을 아무 미련 없이 떠나던 그 날, 자신은 마음속으로 굳게 맹세하지 않았던가. 가슴 속 깊이 다짐을 하지 않았던가. 이제는, 어떠한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고 그를 차지하겠노라고. 세간의 시선이나 비난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 그와 함께 하는 미래를 만들어 나가겠노라고.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비앙카는 아리아의 말을 들으며 가슴이 아려올 정도로 아파오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말았다. 지금 아리아가 신랄한 어조로 그녀를 향해 비판하고 있는 것들은, 비앙카가 애써 외면하고자 했던, 그녀의 약하고 추악한 부분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기분은 좋았니? 아, 하기야 좋을 수밖에 없었겠구나. 왜냐하면, 넌 차였잖아. 내가 모든 것을 뻔히 보고 있는 가운데서, 넌 카인님께 볼썽사납게 차였었잖아. 자신을 거부하고 떠난 남자를 다시 차지할 수 있었으니 기분이 얼마나 좋았을까. 적어도, 보통의 인간은 평생토록 맛볼 수 없는 어마어마한 배덕감(背德感)이었겠지? 안 그래?”
“네가 한 짓은, 정말로 역겹기 그지없는 행위야. 타인의 기억을 멋대로 없애고, 그 옆에서멋대로 연인행세를 한 끝에, 멋대로 사랑을 교류 해나가고, 그 끝에 사랑을 나누었다니. 비앙카 델 카스타나. 네가 카인님께 행한 일은 지극히 제멋대로인, 일방통행적인 애정행각에 불과해. 그건 결코 사랑이 아니야. 절로 구역질이 날 정도로, 지극히 추악한 행위에 불과하지.”
아리아가 내뱉는 말 하나하나가, 비앙카의 폐부를 정확히 찔러나간다.
...그렇다. 아리아가 비앙카를 향해 내뱉고 있는 말은, 어느 것 하나 틀린 말이 없었다. 아리아의 말이 옳았다. 아리아의 말대로, 자신은 추악한 여자임이 틀림없었다. 자신은 다른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고,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에 이렇게 일그러진 방법으로만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결함이 있는 여자였다.
30년 전 그 날 이후, 그를 끝없이 갈구하였지만 끝내 그를 가지지 못하였기에, 그를 향한 온갖 수작을 부리고, 그를 속이고, 그를 기만하였으며, 그 끝에 그의 사랑을 갈구한, 반쯤 정신 나간 여자임이 분명하였다.
특히, 그의 곁에 머무르기 위해, 그리고 그의 사랑을 받기 위해 카인의 기억에 장난을 친 일은, 지옥의 가장 밑바닥에 떨어지더라도 할 말이 없을 만큼 잘못된 행위였다는 것쯤은,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딱 한 가지, 아리아의 말 중에는 그녀가 도저히 용인할 수가 없는 말이 한 가지 있었다. 아리아의 말은 전부 옳았지만, 어젯밤 그녀와 카인이 나눈 사랑만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째서인지는 잘 모르지만, 그 때의 카인은 모든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진실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 것인지, 자신이 어떠한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인지, 전부 깨닫고 있었단 말이다.
그럼에도, 카인은 그녀는 용서해주었다. 그녀의 존재를 용인해주었다. 그리고 그 끝에 온전한 스스로의 의지로, 비앙카와 사랑을 나누어주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는 어젯밤에 일어났던 일을 생생히 기억할 수 있었다. 자신을 향한, 그의 온기를. 그의 배려를. 그의 친절을. 그리고, 그의 사랑을.
그와 하나가 되는 동안, 비앙카는 그 속에 깃들어 있는 그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그녀를 거칠게, 때로는 부드럽게 다루기도 하였지만, 그 안에는 그녀를 향한 온기가 가득하였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단 말이다.
...그렇기에, 비앙카는 아리아의 말을 결코 인정할 수 없었다. 자신은 얼마든지 비난해도 좋았다. 아리아의 말대로, 자신은 추악하고, 역겹기 그지없는 여자가 맞았으니까. 하지만 그와 사랑을 나눈 것만은 부정을 해서는 아니 되었다. 왜냐하면 그마저 아리아의 말이 맞다고 인정을 해버린다면, 그녀에게 사랑을 나누어진 카인을 싸잡아서 욕하게 되는 꼴이 되었으므로.
다른 것은 몰라도, 그녀가 사랑하는 카인 폰 에스텔이라는 남자가 다른 이로부터 비난을 듣는 것만은 도저히 참아낼 수가 없었다. 특히, 그 사람이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혐오하는 어떠한 여자라면 더더욱.
“...가만히 듣고만 있어주니 아주 신이 나서 떠벌리는구나.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주제에,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주제에, 그리 입을 함부로 놀리다니. 자고로 입이란 모든 재앙의 근원이라는 말조차 알지 못하는 것이니?”
참다못한 비앙카가 아리아를 향해 으르렁 거리자, 아리아는 비앙카의 모습을 보며 코웃음만을 칠뿐이었다.
“그건 내 쪽에서 할 말이야. 비앙카 델 카스타나. 당신이야말로, 혓바닥이 너무 길어.”
“어머, 혓바닥이 긴 것은 네 쪽이 아니었니? 처음에는 자기 혼자 똑똑한 척, 이지적인 척을 하다가 카인과 내가 사랑을 나누었다는 말을 듣자마자 싸움에서 진 개 마냥 짖어대는 꼴이 아주 우습기만 하구나.”
“더러운 수작을 부려 한 발짝 앞선 주제에 벌써부터 승리자 행세를 하면 좀 곤란한데?”
아리아는 당장이라도 비앙카를 향해 덤벼들어 저 여자의 머리털을 온통 쥐어 뜯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애써 꾹꾹 누르며 최후통첩을 하였다.
마음 같아서는 저 여자를 지우개로 문대듯 세상에서 지워버리고 싶었지만, 비앙카 델 카스타나가 카인의 약혼녀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이상 그렇게 쉽게 죽어서도 카인의 입장이 곤란해질 따름이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충고 해주지. 내가 보기에, 당신이란 여자는 카인님 곁에 있을 자격이 없어. 당신과 같이 반쯤 정신이 나가 있는 여자가 카인님 곁에 계속 머물러 있다가는, 결국에는 그 분께 커다란 위험이 될 것이 자명한 사실이니까.”
“...뭐라고?”
아리아의 말에 비앙카의 두 눈에서 안광이 번뜩이고 말았다. 안 그래도 화기애애한 분위기라고는 말할 수 없었던 두 사람 사이의 공간이, 삽시간에 거센 살기로 뒤덮여 간다.
“위험이 된다고? 내가, 그 이에게 위험이 될지도 모른다고?”
실로 웃기는 소리였다. 설사 태양이 서쪽에서 떠서 동쪽으로 진다고 할지라도 그런 일만은 없을 것이다. 만에 하나, 자신이 그 이에게 해가 된다면 일이 그렇게 돌아가기 전에 먼저 자신의 손으로 스스로의 심장을 가르는 편을 택할 테니까.
그리고,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이에게 가장 큰 해악을 끼친 주범이라 할 수 있는 ‘겨울의 마녀’의 입에서 저 따위 말이 튀어나오다니! 지금 이 자리에서, 그에게 가장 큰 죄를 범한 것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주제에!
“그건 내가 할 말이야, 마녀. 너 때문에, 그가 죽었어. 너 때문에 카인이 죽었다고! 완전히 미쳐버린 널 막기 위해,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고 말았다고!”
그가 그 때 맞이했던 죽음을 떠올리니, 비앙카의 주위에서 마력이 광폭하게 넘실거리기 시작한다.
“그 이의 심장에 검을 박아 넣은 장본인이 누구였는지 벌써 잊어버린 것이니? 겨울의 마녀?”
“...그건 또 무슨...”
비앙카가 하는 말이 도무지이해가 가지 않았던 아리아가 눈살을 찌푸리자, 그 광경을 보며 비앙카는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아, 그래. 내가 그만 깜빡해버리고 말았구나. 넌 지금 벌레가 되어 버리고 말았지. 이 대륙 전체를 아무렇지도 않게 얼려버리는 신위를 발휘하던, 세상을 오시하던 절대자의 위치에서 한낱 벌레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는 것을 내 잊어버리고 말았어.”
“하지만 말이지. 기억상실이라는 것이 모든 죄목의 면죄부가 되는 것은 아니란다. 그러니 너는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만은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해. 네가 그렇게 좋아하고, 숭앙하고, 사랑하고 있는 카인의 심장에, 네 손으로 직접 검을 박아 넣었다는 것을.”
그리 말을 하며 비앙카는 자신의 두 손을 들어올렸다. 그녀의 두 손에는, 그의 시체를 매만졌던 당시의 싸늘한 감촉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었다.
“우리는 말이지, 그 이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단다. 나 또한, 그 이 덕분에 과거로 돌아와 또 한 번의 기회를 붙잡은 것이나 마찬가지고.”
“그러니까, 그를 위해서라면 내 목숨 따위는 전혀 아깝지 않아. 그런 사실을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네가, 감히 그 따위 말을 함부로 지껄여?”
한편, 비앙카의 입에서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리가 새어나오는 것을 전혀 아랑곳 하지 않은 채, 아리아는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기만 할 뿐이었다.
‘...과거로 돌아왔다고? 그리고, 내가 카인님을 죽였다고?’
아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의 입술을 꽉하고 깨물고 말았다. 이성적으로 판단하였을 때, 비앙카의 말은 헛소리임이 분명했다. 과거로 돌아왔느니, 자신이 카인의 심장에 검을 꽂아 넣었느니, 그 따위 소리는 길거리의 취객이 지껄이는 소리와 하등 다를 바가 없는 헛소리임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아리아의 마음 속깊은 곳 어딘가에서는 비앙카의 말이 마냥 헛소리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무언가, 분명히 있었다. 기억이 아니라, 그녀의 영혼 깊숙한 곳에 새겨진 무언가가, 그녀를 향해 진실을 호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비앙카는, 혼란에 빠져 있는 아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저것은, 너무 위험한 존재이다. 그동안은 카인의 낯을 보아 참고 넘겼지만, 더 이상은 저것이 가만히 설치도록 놔둘 수가 없을 듯 하였다. 저것은 거대한 재앙의 근원이자, 위험 요소였으며, 만악(萬惡)의 원흉이기도 하였으니까.
‘겨울의 마녀.’
지금은 모든 기억을 잃었기에 인류에 있어 지극히 무해한 존재였지만, 만약 저것이 기억을 되찾는다면? 자신이 누구였는지 알게 되고, 자신이 미래에 어떠한 짓을 자행하였는지 깨닫게 된다면?
그렇다면 이번에야말로, 인류는 멸망을 하고 말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인지할 틈 사이도 없이 멸망하게 될 것이다. 그만큼 ‘겨울의 마녀’가 가지고 있는 힘은, 현 인류의 이해를 아득히 뛰어넘은 재앙 그 자체였으니까.
그에 반해 인류는 10년 후와는 다르게 ‘겨울의 마녀’를 토벌할 힘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늙지도 죽지도 않는 키리에는 제외하더라도, 비앙카 자신을 포함한 황녀와 성녀는 현재 10년 뒤 전성기에 비하자면 절반의 기량도 가지지 못한 상태였으니까.
그러니 이곳에서 없애둔다. ‘겨울의 마녀’로 인해 벌어질 참극이 다시 한 번 되풀이 된다면, 10년 뒤에 스스로를 희생한 카인의 숭고한 희생이, 그저 개죽음으로 전락을 하게 될 수도 있었기에.
“네게 그다지 사감(私感)은 없지만, 너는 너무도 위험해. 유감스럽지만, 널 이 자리에서 죽여 둬야겠어.”
비앙카가 아리아를 향해 한 발짝 성큼 다가간다. 비앙카는, 나름대로 진심이었던 것이다.
“...미안하지만, 그건 내가 할 말이야. 그리고, 나는 사감이 넘치니까 유감스러워 할 필요는 없을 걸?”
가슴 속에서 일어난 파문은 잠시 접어둔 채, 아리아 역시 비앙카를 향해 그리 응수를 한다. 이윽고, 그 둘의 몸에서 가공할 만한 마력과 살기가 폭포수처럼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쿠구궁-
둘의 마력이 거세게 충돌하는 것과 동시에, 근처의 공간이 일그러지며 그 힘을 견뎌내지 못하고 차츰 붕괴해나가기 시작한다.
다운 폴. 동위열 공간 전소 현상. 한계가 넘는 마력이 작은 공간에 집중되었을 때, 공간 그 자체가 무너지면서 모든 물체를 전소시키는 일컫는 단어.
인간이 지닐 수 있는 마력의 한계에 도달했다는 대마법사나 구현해낼 수 있다는 그 현상이, 비앙카와 아리아의 사이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재현되고 있었다.
“오늘에야말로 10년 뒤의 설욕을 해주지. 각오해두는 게 좋을 걸? 싸움이 너무 쉽게 끝나면, 그보다 시시한 일은 없을 테니까 말이야.”
화르르-
비앙카의 전신에서 초고열의 백염(白炎)이 넘실거리기 시작한다. 적염(赤炎)과 창염(倉炎)의 온도 따위는 훌쩍 뛰어 넘은 백염은,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비앙카 주위의 대지를 흐물흐물하게 녹여버리는 무시무시한 위력을 자랑하였다.
“대체 당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이해는 못하겠지만, 한 가지는 나와 의견이 일치하는 것 같네. 나 역시, 당신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이 지긋지긋하던 찰나였으니까.”
파지직-!
아리아가 두르고 있는 강렬한 뇌전에 의해 그녀 주위의 모든 물체가 분자 단위로 분해되는 것과 동시에, 기체 상태를 뛰어넘어 종국에는 플라즈마로 화하기 시작한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최강의 창이자, 최강의 방패가 되어주는 물질의 궁극적 형태.
비앙카와 아리아, 두 여인은 서로의 몸에 불꽃과 뇌전을 가득 두른 채 서로를 잠시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콰아아아앙-!
천지가 포효하는 듯한 굉음을 내며, 이내 격돌을 개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