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8. 비앙카 델 카스타나 - 01
...이제는, 모조리 사라져버린 이야기. 어느 누구도, 기억하고 있지 않은 이야기.
하지만,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히더라도, 너와 함께한 그 순간만은, 여전히 변함없이 나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 날, 너는 내게 이렇게 말을 했었다.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함께하게 될 것이라고. 그리고,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행복해질 것이라고.
나는, 그 말을 믿고 수없는 시간 동안, 너를 기다렸다. 수없는 시간 동안, 뒤를 돌아보지 않고 줄곧 걷기만 하였다. 그렇게, 마음을 꼭꼭 걸어 잠근 채 기나긴 여정을 지속해왔다.
그렇게 걷고, 걷고, 걷고, 쉼 없이, 걷기만 하였다.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무수한 시간을 걸었다. 오직, 너와 함께한다는 그 순간만을 위해, 나는 기다리고, 또 기다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 끝에, 나는 지쳐버리고 말았다. 아득하기만 한 고독한 여정을, 이제는 헤쳐나갈 자신이 생기지 않았다. 내가 그토록 소중히 여겼던 어린 시절의 약속은, 흔해빠진 현실로 전락하여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것만 같이 여겨졌다.
슬펐다. 대체 왜, 나는 내 일생 속에서, 단 한 순간도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가 없는 것인지, 슬프기만 하였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그를 미워할 수가 없었다. 그가 설사 어린 시절 나와 나누었던 모든 것을 잊었다 해도, 그 때 나누었던 약속을 소중히 간직하는 내가 더 없이 미련한 여자라고 해도.
나는 여전히, 너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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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 전, 하늘 아래 가장 위대한 마법사라며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 숭앙을 받던 한 남자가 있었다. 남자의 이름은 카스타나. 마법이란 학문이 자연현상을 인위적으로 재현하는 주술에 불과하던 시절, 현대의 마법사들과 별다를 바 없는 신위를 보였다던 전설적인 대마법사가 바로 그였다.
대륙 위에 단 하나의 제국이 설립된 이후, 카스타나는 황제로부터 후작의 지위를 하사받았으며,그로부터 천 년이라는 세월에 걸쳐 카스타나 후작가는 전 대륙에 걸쳐 마도(魔道)의 명문가라는 지위를 확고히 할 수가 있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대마법사라는 존재는 한 시대에 그 수가 많아야 다섯을 넘기지 못할 정도로 희귀하기가 이를 데 없는 존재. 헌데 카스타나 후작가에서는 한 세대마다 대마법사라는 존재를 주기적으로 배출해 왔던 것이다. 그들에게는 마도의 명문이라는 명성을 이어나갈 자격이 충분하고도 넘쳤다.
...하지만, 정작 카스타나의 마법사들은 세인들이 자신들에 대해 어찌 생각을 하는지, 그리고 어떠한 평가를 내리고 있는지 따위, 하등 관심도 없었다. 정작 카스타의 마법사들에게 있어 마도의 명문이라는 명성 따위, 부풀려진 허명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부터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라면 몰라도, 현재의 카스타나 후작가는 그러한 평가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세상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금 이 순간조차 서서히 쇠해가고,몰락해가는 중이었으니까.
지금으로부터 천 년 전, 마학(魔學)이라는 학문이 발달하지 못해 무식한 칼잡이들보다도 마법사의 위치가 낮았던 야만의 시대. 그러한 시대 속에서 태어난 불세출의 천재, 카스타나는 천후(天候) 그 자체를 뒤바꾸거나 자신의 손끝에서 세계의 법칙을 송두리 째로 뒤흔드는 이적(異蹟)을 행사하는, 현대의 기준에서 보아도 기적이라고 밖에 부를 수 없는 일들을 아무렇지도않게 행사하던 진정한 ‘마법사’였다는 기록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었다.
그리고 천 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 그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마학은 그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였지만, 지난 천 년간 카스타나 후작가에서는 초대 카스타나 후작이 도달했던 경지를 넘어섰노라고 자부를 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카스타나의 혈통에 깃든 마법의 재능은 세월이 흐를수록 점차 쇠퇴를 거듭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카스타나의 마법사들은 초조해지기에 이르렀다. 이대로 가다가는, 천 년 전의 위대했던 카스타나의 이름을 더럽힐지도 모른다는 부담감이 그들의 마음을 옥죄기 시작하였다. 바로 옆에 있는 에스텔 공작령이 천 년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몰락하게 된 것과 같이, 그들 또한 에스텔 공작령과 똑같은 전철을 밟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들을 사로잡고 말았다.
그들은, 결코 그러한 결말만은 인정할수가 없었다. 결단코 그렇게 되어서는 아니 되었다. 지난 천 년간 그래왔듯, 카스타나라는 이름은 앞으로도 영겁토록 ‘마도의 종가’라고 불려야만 했다.
그리하여, 카스타나의 성을 가진 모든 이들이 머리를 맞대고 해결책을 강구하였다. 수없는 의견과 반박이 오고간 끝에, 그들은 광기로 가득 차 있는, 정신이 나간 결론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천 년 전, 초대 카스타나 후작은 세상에 다시없을 우수한 마법사였음이 자명하다. 허나, 그의 혈통에서 비롯된 마법적 재능은 세대를 이어나가고 대를 거듭할수록 옅어진다는 것이 바로 문제였다. 그렇다면 해답은 실로 간단하였다. 자신들의 손으로, 초대 카스타나 후작과 같은 재능을 갖춘 우수한 후계자를 ‘제작’하면 되는 노릇이 아니던가?
그렇게 광기 어린 실험이 시작되었다. 카스타나 후작가에서 마법의 재능이 뛰어나다고 생각되는 이들의 혈액을 채취한 후, 연금술을 사용해 그 혈액으로부터 마법적 재능이 뛰어난 아이를 인위적으로 ‘생산’하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였다. 지난 천 년 간, 위대했던 카스타나의 혈통은 대를 거듭하며 너무도 옅어졌다. 그들은, 조금 더 진한 카스타나의 혈통을 갈구하였다.
그들은 마법을 사용하여 인위적으로 ‘제작’된 아이들을 강제적으로 빠르게 성장시켰으며, 그들을 강제적으로 ‘교배’ 시킴으로서 더욱 빼어난 재능을 가지고, 더욱 진한 카스타나의 혈통을 가진 우수한 아이를 제작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렇게, 3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실험 과정에서 무수한 ‘실험체’가 죽어나가고, 또 그를 대체하기라도 하듯 무수한 ‘실험체’가 탄생되었다. 하지만, 카스타나의 수많은 천재들이 이 실험에 매달렸음에도 특출 난 결과물은 쉽사리 탄생을 하지 않았다. 너무도 많은 실패를 겪게 된 나머지, 이것이 정말 옳은 길이었냐며 모두가 지쳐갈무렵, 결국 그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고대하고 바라던 최상의 실험체를 탄생시키고야 말았다.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마나의 축복’을 받아 마법을 익히기에 완전무결한 신체를 가지고 있는 것도 모자라, 그저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마력을 몸에 쌓는 것이 가능한, 실로 완벽한 개체를 제작해내는 것에 드디어 성공을 하게 된 것이었다.
실험체의 개체명은 541번.
향후 천 년간, 카스타나의 명성을 계속해서 이어나가게 해 줄, 최고의 걸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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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자들의 손끝에서 541번이 탄생한 순간, 카스타나 후작가의 모든 이들은 전율에 빠지고 말았다. 541번의 체내에 내포하고 있는 마법적 재능의 수준은, 현 인류의 그것을 아득히 넘어설 정도로 어마어마하기 그지없던 것이었다. 어쩌면, 541번의 재능은 초대 카스타나 후작의 그것과 동등하거나 혹은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541번은 연구 끝에 나온 결과물이 아니라 그저 우연에 우연이 겹친 끝에 제작된, 일종의 돌연변이와 같은 존재에 불과하였다. 541번의 창조주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 한데 모여 541번과 같은 존재를 인위적으로 재현해보려 했지만, 그들의 모든 시도는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결국, 그들은 541번과 동일한 개체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모든 실험을 중지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논의 끝에, 541번에게 카스타나의 성을 하사해주고, 이름을 붙여주기로 하였다.
541번에게 붙여진 이름은 비앙카. 초대 카스타나 후작의 하나뿐인 딸에게서 따온 이름이었다.
- 541번. 지금 이 순간부터 네 이름은 비앙카다. 카스타나 후작가의 비앙카 델 카스타나가 바로 네 이름이며, 너는 카스타나 후작가의 가주인 시온 델 카스타나의 하나 뿐인 딸로 세상에 알려지게 될 것이다. 너 또한 카스타나의 성을 달게 되었으니,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행동을 하거라. 네 목숨이 우리의 손아귀에 있다는 사실을 명심 하거라. 그리고, 네 본분이 병기라는 사실을, 언제나 잊지 말거라.
그 말이, 바로 그녀의 ‘아버지’ 되는 사람에게서 처음으로 들은 말이었다. 당연하지만, 애정이라고는 한 톨만큼도 섞여 있지 않은, 지독히 싸늘하고 냉정한 말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자신의 딸을 실험체이자 병기라고 생각할 뿐, 어떠한 애정도 품지 않은 사내가 아버지 행세를하며, 자신의 진짜 부모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의 손끝에서 빚어진 ‘물건’에 불과한 그녀가 자식 행세를 한다는, 실소가 절로 나오는 촌극이 시작되고 말았다.
‘...싫어.’
541번, 아니, 이제 비앙카 델 카스타나라고 불리게 된 그녀는, 그저 싫기만 하였다. 무엇이 싫었냐면, 모든 것이 싫을 뿐이었다.
아비와 어미가 존재하지 않는 자신을 탄생시킨 카스타나 후작가도, 그녀의 출생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뻔뻔스레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라 하는 카스타나 후작도, 그리고, 이렇게 태어나 버린 자기 자신도, 그리고 이런 자기 자신을 태어나게 한 이 세상도, 전부 싫고, 밉고, 증오스럽기만 하였다.
...모든 것이 증오스러웠다. 너무도 많은 것을 증오한 끝에, 대체 무엇을 증오해야하는지 잊어버릴 정도로, 그녀는 세상 그 자체를 증오하게 되었다.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된 것부터 그녀의 의지가 아니었으며, 현재 살아가고 있는 것 또한 그녀의 의지가 아니었으며, 심지어 스스로의 죽음조차 그녀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영역에 걸쳐져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자살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만약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면 카스타나 후작가에서는 그녀의 시체를 가지고 또 다시 어떠한 광기 어린 실험을 자행할지도 몰랐다. 그래서야, 아무 것도 해결되는 것이 없었다. 비앙카는자신과 같은 불쌍한 실험체가 제작되어, 자신과 같은 괴로움을 맛보기를 결코 원하지 않았다. 자신과 같은 불행한 도구는, 자신 하나면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렇기에, 그녀는 한탄만을 내뱉을 뿐이었다. 자신은, 대체 이 세상에 왜 태어난 것일까. 자신은, 무엇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여신이 아니라 사람의 손끝에서 빚어짐으로서 탄생한 이런 괴물 같은 자신에게도, 과연 다른 사람들만큼의 가치가 있기는 한 것일까. 어째서, 자신을 둘러싼 이 세상은, 왜 이렇게 나는 싫어하는 것일까-
세상 어디에도, 비앙카의 편이 되어주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카스타나 후작가에 있는 모든 이들은 그녀를 경원시하기만 하였으며, 진실을 알고 있는 극소수의 이들은 그녀를 향해 비웃음만을 흘릴 뿐이었다.
결국 그녀는 기계였고, 도구였으며, 병기에 불과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그리 취급하였으며, 그녀 자신 또한 스스로를 그리 다룰 뿐이었다.
비앙카가 이 세상이 무채색이라고 생각하였다. 세상 어디를 보아도 누군가를 위한 애정이, 타인을 향한 사랑이 가득하였지만, 정작 그녀의 손에서는 마치 모래처럼, 손바닥에서 넘쳐흐르고 만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인생에 가치라고는 없었다. 희망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자신을 이해해 주고, 아껴주고, 사랑해줄 누군가를 갈구하는 것도, 이제는 지쳐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비앙카가 끝이 없는 어둠 속에서 추락을 거듭하고 있던 그 때, 기적은 불현듯 찾아오고 말았다.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비앙카의 삶 속에서, 행복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희망을 가르쳐주며, 삶의 의지를 일깨워준 끝에, 그녀를 구원해 준, 단 한 명의 사람이 나타난 것이었다.
그의 이름은 카인 폰 에스텔.
줄곧 무채색이었던 그녀의 세상을,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무언가로 환하게 밝혀준, 그녀의 구원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