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7. 호접지몽(胡蝶之夢) - 12
“이제 좀 상황파악이 되시나요? 전 딱히 비앙카 델 카스타나의 행적을 찾아내는 일에 대해 당신에게 도움을 제공하고픈 생각이 들지 않는군요. 어차피, 비앙카 델 카스타나와 저는 맹약으로 묶여 있는 관계이니 직접적으로 도움을 줄 수도 없는 노릇이긴 하지만요.”
그리 말을 하더니 키리에는 아이리스에게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휙 하니 돌렸다. 그것은 명백한, 축객령임이 틀림없었다.
“.....”
그리고 아이리스는 자신을 향해 축객령을 내리는 키리에를 아무 말 없이 쳐다보고 있기만 할 뿐이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가만히 보고 있자하니, 저 정신이 나간 엘프는 카인의 행방을 찾아내는 것에 어떠한 협조도 해주지 않을 생각임이 분명해보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저 엘프에게 애걸복걸을 해봐야 자존심만 구겨질 뿐, 제대로 된 성과는 얻지 못하게 될 것이 자명한 결과이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키리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물러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겨우 찾아낸 단서였다. 카스타나 후작가와 에스텔 공작가를 거쳐, 북부의 반 바퀴 정도를 일주한 끝에 얻어낸, 실낱같은 단서였단 말이다.
‘강제로 입을 열게 만들어야 하나?’
아이리스는 마음속으로 저 늙지도, 죽지도 않는 괴물과 검을 겨루었을 때 자신에게 승산이 얼마만큼 있는지 점쳐보았다.
‘...절망적이군. 높게 쳐봐야 일할 정도인가.’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아이리스는 강하다. 제 아무리 10년 뒤에 비하면 많은 손색이 있다 하더라도, 단순한 ‘강함’만을 놓고 보았을 때 그녀는 현 대륙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무위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나빠도 너무 나빴다. 키리에 역시, 그녀와 마찬가지로 대륙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강대한 무력을 지니고 있는 이였으니까. 또한, 키리에에게는 아이리스와는 다르게 회귀로 인한 어떠한 패널티도 존재하지 않았다. 비앙카, 아리엘, 그리고 아이리스는 10년 전으로 회귀함에 따라 과거의 단련되지 않은 육체를 소유하게 되어 전투력이 약화된상태였지만, 키리엘은 이미 수 백년 전부터 육체가 완성되어 있는 이였기 때문이다.
또한, 이곳은 엘프들의 홈그라운드라고 할 수 있는 대수림이며 키리에의 지척에는 엘프들에게 갖은 축복을 내려준다는 신목(神木), 세계수가 자리하고 있었다. 어떠한 수단을 사용하더라도, 키리에에게서 판정승을 따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임이 분명하겠지.
‘...결국, 여기까지 와서 물러나야만 하는 것인가.’
아무리 재어 봐도 키리에를 향해 검을 뽑아드는 것은 악수(惡手)에 가까운 무모한 행위였다. 굴욕적이기는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서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바로 그 때였다.
“키리에님. 외람되지만 제가 이 자리에서 한 말씀 올려도 괜찮을런지요?”
아이리스와 키리에가 나누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기만 하던 아리아가, 그들을 향하여 조용히 한 발짝 앞으로 나선 것이.
“...말씀하시지요. 당신에게는, 그럴 만한 권리가 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예상 외로 키리에가 아리아를 향해 선선히 수긍의 뜻을 던지자, 아이리스는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속으로는 무척이나 놀라고 말았다. 왜냐하면, 인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키리에가 다른 사람을 향해 저리 공손하게 대하는 것 자체가 무척이나 이례적인 일아 아닐 수가 없었으므로.
“키리에님. 당신께서는 방금 전 이리 말씀을 하셨죠. 카인님과 키리에님은, 수명조차 공유하고 있는, 결코 쉽사리 떼놓을 수 없는 사이임이 분명하다고 말이에요.”
“...그렇습니다. 분명, 아이리스를 향해 그리 말을 하기는 했었죠.”
“믿기 힘든 노릇이긴 하지만 키리에님께서 카인님과 정녕 그런 사이라면, 현 사태를 가만히 좌시해서는 아니 될 노릇이 아닌가요? 비앙카 델 카스타나는 본인의 강대한 무력만을 앞세워 카인님의 의사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그 분을 강제로 납치해간 것이 바로 현 상황입니다. 그 분에 대한 정당한 소유권을 주장하시는 분이, 정작 이럴 때 두 손을 놓은 채로 방관을 하는 것은 너무도 무책임한 처사가 아닌가 합니다만.”
키리에를 향해 그러한 말을 내뱉는 아리아는 결코 비굴해보이지 않았다. 키리에를 바라보는 그녀의 두 눈은 그저 곧고, 당당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필시,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 없는 게 분명하겠지. 아이리스는 그녀의 저러한 두 눈이야말로 그녀의 인격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생각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동시에 아리아의 발언은 지나치게 순진한 발언이 아닐 수 없었다.카인을 당연한 것처럼 자신의 물건이라 생각하며, 다른 여자에게 ‘대여’를 해준다는 미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운운하는 여자였다. 그런 정신이상자가, 고작해야 아리아의 몇 마디에 자신의 고집을 쉽사리 꺾을 리가 만무하지 않겠는가?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군요. 좋습니다. 이번만큼은 그대들에게 협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뭐라고?”
그래, 아리아의 말에 키리에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봐, 키리에. 방금 전의 그 말은, 아리아의 말에 찬성의 의견을 표한다는 의미인가?”
“흠, 몸이 튼튼한 것 외에는 별다른 재주도 없는 주제에 이젠 귀까지 멀었나 보군요. 어디를 보아도 제가 저 분의 의견에 찬성한 것이지 않나요?”
“...그럼, 방금 전 내가 도움을 요청하였을 때는 왜 거절을 한 것이지?”
아이리스가 두 눈에서 불꽃을 활활 태우며 으르렁거리는 것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으며 키리에는 심드렁한 태도로 답변을 하였다.
“그야 아이리스, 당신에게는 요만큼의 도움도 주기 싫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정글 속을 누비는 것이 딱 어울리는 야만적인 고릴라 같은 인간을 존중해주어야 할 이유가 있나요?”
순간, 아이리스의 이마에 핏줄에 가득 서고 말았다. 마음 같아서는 키리에의 협조고 나발이고 우선 저 빌어먹을 년의 혓바닥부터 그대로 뜯어버리고 싶었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을 동원해 가까스로 진정을 할 수 있었다.
“...비앙카 델 카스타나와 나누었다는 맹약을 함부로 어겨도 괜찮은 것인가?”
아이리스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최대한 무뚝뚝한 어조로 말을 하였다. 물론, 전신에서 넘실거리는 살기만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지만.
“괜한 걱정 마시죠. 저는 당신들에게 비앙카 델 카스타나의 행방에 대해 알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그녀의 행방을 알아낼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을 제공하는 것 뿐 이랍니다.”
그리 말을 하며 키리에는 세계수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더니 이내 세계수의 밑둥 쪽에 나있던 자그마한 가지를 하나 꺾은 후 아리아에게 건네주었다.
“이것은 세계수의 가지. 특정인의 마력을 접촉시키면 그 사람의 현재 위치가 어디인지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효용을 지니고 있는 나뭇가지입니다. 뭐, 이 정도 크기라면 딱 한 번 밖에 사용할 수 없겠지만...”
키리에는 쿡하고 웃으며 세계수의 가지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아리아를 귀엽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한 번이면 충분하고도 남는 기회가 아닌가요? 뒤쫓을 사람이 두 명이나 있지는 않을 테니 말입니다.”
“...그런데, 애당초 세계수의 나뭇가지를 함부로 꺾어도 괜찮은 노릇이란 말인가? 엘프들에게 있어서는, 세상 그 무엇보다 신성시되는 신목이 아니었던가?”
그래도 나름 신경 써서 던진 질문이었지만 아이리스를 향해 키리에는 뻔뻔스럽기 그지없는 얼굴로 이리 답변을 할 뿐이었다.
“저는 세계수의 수호자로서 가지치기를 한 것에 불과하답니다. 그리고, 제가 바로 세계수의 의지를 대변하는 자인데 누가 감히 저의 행사에 토를 달 수 있을까요?”
“.....”
이쯤 되니 세계수라는 존재는 어찌하여 저 미치광이 엘프를 자신의수호자로 삼은 것인지 의구심이 들기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아이리스에게 있어서는 결코 나쁜 전개는 아니었기에 그녀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며 키리에를 향해 감사의 인사를 표하였다.
“고맙군. 이 은혜는, 결코 잊지 않도록 하겠다. 키리에 엘 데나리스.”
그리고 아이리스의 감사 인사에 키리에는 피식하고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착각하지 마시지요, 아이리스. 저는 당신이 예뻐서 도움을 드린 것이 아닙니다. 그저, 저 분의 낯을 보아 도와드렸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주셨으면 하는군요.”
키리에는 세계수의 나뭇가지를 보물처럼 받들고 있는 아리아를 쳐다보며 그리 말을 하였다. 확실히, 그들은 이런 낯부끄러운 말이 오고갈 정도로 그리 좋은 사이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키리에, 마지막으로 그대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답해줄 수 있겠는가?”
“제가 답할 수 있는 문제라면.”
키리에가 수긍의 의미로 고개를 한 차례 까닥이자, 아이리스는 천천히 입을 열어 질문을 던졌다.
“과거로 회귀한 이후, 그대는 어째서 이곳에 가만히 있던 것인가? 아리엘 티에르, 비앙카 델 카스타나 같은 이들은 카인의 얼굴을 보기 위해 온갖 수작을 부려대었건만, 그의 진정한 반려를 주장하는 그대가 이곳에 얌전히 머무르고 이유가 무엇인지 대관절 궁금하기만 하군.”
아이리스의 질문에 키리에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을 해주었다.
“겨울을 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겨울?”
“모두가 아련한 봄의 향수에 취해있을 때, 어느 누군가는 겨울을 대비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법이니 말입니다. 특히.”
키리에는 저만치에 서 있는 아리아를 한 차례 힐끗 쳐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이리 중얼거렸다.
“10년 뒤의 일어날 끔찍한 참극을 되풀이하기 싫다면 더더욱, 그러한 노릇이겠지요.”
****
어느덧, 비앙카와 이 지상낙원에서 생활을 함께한 지 한 달하고도 열흘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일수로 따진다면 대략 40여일쯤 되었을까. 그 시간동안, 나는 실로 부족함이 없는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확실히, 비록 더럽게 맛이 없긴 하지만 밥도 제때 딱딱 나오지, 따뜻한 온수는 비앙카가 제공해주지, 아늑하고 단란한 잠자리도 제공이 되는 이곳은 사람이 나태해지기 딱 좋은 공간이 아닐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1년쯤 지나게 된다면 아무 짝에 쓸모가 없는 인간쓰레기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멍청한 생각을 하며 나는 지평선 너머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광경을 멍하니 쳐다보고있기만 하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눈이 빠지도록 주위를 관찰하였지만, 공간에 균열이 일어나기는커녕 사방은 조용하고 평화롭기만 할 뿐이었다. 한 마디로, 오늘 하루도 비싼 밥 먹고 헛수고만 잔뜩 했다는 의미였다.
“...정말, 늦는군. 이러다가 할아버지가 될 지도 모르겠는데?”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희망을 가져 보았지만 역시 현실은 소설과는 확연히 다른 법이었나 보다. 나에게 도움이 되어줄만한 시의적절한 조력자가 등장하기는커녕, 내가 현재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는 맨주먹 붉은 피 밖에 없었으니까.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밀월여행이라는 말은 꺼내지 말 걸 그랬나.”
가끔씩은 설정이 너무 과해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는 교훈을 가슴 속 깊이 새긴 채 나는 오두막 쪽을 향해 휘적휘적 걸어갔다.
끼익-
“흥, 흐흥.”
문을 열고 오두막 안으로 들어서자, 벽난로 앞에서 흔들의자에 앉은 채 뜨개질에 열중 하고 있는 비앙카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최근 들어 비앙카는 나를 위한 목도리를 짜주겠다며 실과 바늘이라는 녀석들과 생사투를 벌이고 있었는데, 겨울이 찾아오려면 아직 멀었는데 벌써부터 뜨개질에 열중을 하고 있는 이유를 나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뭐, 본인이 좋으면 됐나.’
그리 생각을 하며 나는 근처에 있던 의자를 하나 빼어 비앙카 옆에 털썩하고 걸터앉았다. 결과가 어찌 될 지는 나 또한 알 수 없었지만, 오늘이야말로 비앙카와 진솔한 대화를 나누어보기 위함이었다.
“...응? 카인, 왔어? 산책은 잘 하고 왔어? 그런데 오늘은 조금 일찍 들어왔네?”
최근 들어 마음을 놓은 것인지 비앙카는 내가 산책을 하는 것에 더 이상 강아지 마냥 졸졸 따라오지 않고 있었다.
“응, 오늘 산책은 충분히 한 것 같거든. 그리고 비앙카, 너와 나누고 싶은 이야기도 있어서 말이야.”
“...나와 나누고 싶은 이야기? 뭔데?”
나의 말에 고개를 살짝 하고 갸웃거리는 비앙카. 그리고 나는 그러한 비앙카의 모습을 보며 그녀가 사랑스럽다는 생각을 해버리고 말았다. 나는 대체 왜 비앙카를 사랑스럽다고 생각해버리고 만 것일까. 이것은 애증일까? 아니면 나는 정말로 그녀를 내 마음에 품게 되고 만 것일까?
“비앙카, 최근에 기분이 어때?”
“기분이 어떻냐고? 그게 무슨 소리야?”
나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지 나에게 반문을 하는 비앙카. 나는 비앙카의 머리를 살짝 옆으로 넘겨주며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졌다.
“그러니까, 나와 함께했던 최근, 행복했었냐고.”
나의 말에 비앙카의 얼굴이 살짝 하고 붉게 달아오른다. 그녀의 그러한 모습은, 나로 하여금 달이 스스로의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껴 구름 속에 자신의 모습을 감추었다는 옛 이야기를 연상시키고 말았다.
“...응. 행복해. 내가 정말로 이리 행복해도 되는 것인지 의문이 들만큼, 행복해.”
마치 꿈이라도 꾸듯 몽롱한 얼굴로 그러한 말을 내뱉는 비앙카를 보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렇구나. 그건 참, 다행이네. 비앙카.”
나 또한 바라였다. 그녀가 꿈속에서나마 행복하기만을 기원하였다. 수십년의 세월 동안 내가 본의 아니게 그녀에게 선사했던 끔찍한 불행이, 이런 식으로 조금이나마 씻겨나가기를 빌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런 질문은 왜 하는 거야, 카인?”
순진무구한 얼굴로 나를 향해 그런 질문을 던지는 비앙카를 보며 나를 다시금 그녀의 머리를 찬찬히 스러 넘겨주었다. 전부, 나의 잘못이었다. 나의 과오였다. 이 가련한 여자에게 잘못이 있었다면, 어느 멍청한 남자를 사랑한 잘못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소꿉장난은 이쯤에서 멈추어야만 했다. 이 이상으로 간다면, 비앙카는 필연적으로 자신이 추구하던 행복 이상의 것을 탐하게 되겠지. 그렇게 된다면, 그녀는 필시 불행하게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나와함께 했던 이 꿈 같은 시간 또한, 저주가 될 지도 몰랐다.
결국 꿈은, 꿈으로서 남아야만이 아름다운 법이었으니까.
“비앙카, 네게 한 가지 더, 묻고 싶은 질문이 있어.”
“...응, 뭔데?”
그리고 나는, 우리를 꿈속에서 깨어나게 할 마법의 주문을 자아낸다.
“우리가 사랑하는 연인 사이였다는 말, 사실은 거짓말이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