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0화 〉7. 호접지몽(胡蝶之夢) - 11 (60/201)



〈 60화 〉7. 호접지몽(胡蝶之夢) - 11

“...뭐라고?”

순간, 아이리스는 자신의 귀에 어떠한 장애가 생긴 것인지 의심을 품고 말았다. 물론, 마스터의 경지에 도달하여 통상적인 인간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그녀의 육신이 이상을 일으킬 리가 없었다. 단지, 방금  키리에 엘 데나리스의 입에서 튀어나온 소리는 그만큼 아이리스의 상식을 아득히 뛰어넘는 파괴력을 지니고 있던 것뿐이었다.

‘대여?’

 말을 들은 순간, 아이리스의 입에서는 헛웃음밖에 새어나오지 않았다. 사람은 물건이 아닐지 언데 ‘대여’라는 표현을 써도 되는가는 둘째치더라도, 자신의 일생에 다시없을 하나 뿐인 반려자를 다른 여자에게 대여해준다는 터무니없는 말을 지껄이는  여자는 정녕 제정신이란 말인가?

‘키리에 또한 카인을 마음에 품고 있던 것이 아니었나?’

아이리스는 알고 있었다. 지난 1년, 원정대에 속해있으면서 꽤나 많은 시간을 함께 하였기에 깨달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키리에  데나리스라는 늙지 않는 괴물 또한, 카인  에스텔이라는 남자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하기야, 그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기도 하였다. 키리에 엘 데나리스에게 눈이라는 것이 달려 있다면 그녀 또한 카인의 진가를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평생 동안 무(武)만을 숭배해 왔으며, 검을 일생의 벗으로 삼아온 아이리스조차 어느새 별과 같이 눈부시게 빛나는 그 남자를 동경하게 되었고,  끝에 사랑하게 되고 말았으니까.

그렇기에, 아이리스는 키리에가 종적을 감추어버린 카인을 찾아내는 일에 어떠한 방식으로든 협조를 해줄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녀가 알기로, 엘프라는 족속들은 자신들의 기나긴 일생 속에서 단 한 명의 반려만을 바라보고 그와 일평생을 함께하는, 로맨틱한 것들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찾아내는 일에 대해 다른 여자의 손을 빌린다는 행위  자체가 그녀의 자존심을 거스르는 불쾌한 행위이기는 하였다. 허나, 카인이 비앙카 델 카스타나의 사악한 손아귀에 떨어져 어떠한 일을 겪게 될지 모르는, 한시가 급한 상황 속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린다는 사치스러운 행동을  수가 없었을 따름이었다.

그렇게 아이리스는 스스로의 자존심을 전부 내려놓은  키리에를 향해 협력을 요청하였건만, 정작 그 당사자의 입에서는 ‘대여’라는  짖는 소리만이 흘러나올 뿐이었다.

‘...미친년 같으니.’

확실했다. 키리에  데나리스는 너무 오랜 시간을 살아온 나머지, 머리가 맛이 가버린 것이 틀림없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이제  때가 다 된 나머지 치매에 걸린 것이 분명하던가.

아이리스가 황망하기 그지없는 눈길로 키리에를 바라보았음에도, 키리에는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그녀의 시선을 흘려 넘길 뿐이었다. 고작해야 30여년 밖에 살아오지 않은 인간 계집애가 이해하기에는 조금 어려운 고차원적인 이야기였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키리에. 카인은 물건이 아니다. 또한, 그대의 소유인 것은 더더욱 아니지. 그런데 그대는, 마치 카인을 자신의 주머니에 들어 있는 물건 취급을 하고 있군. 방금 전의 그 발언은, 나에 대한 선전포고라고 해석을 해도 괜찮겠는가?”

분기를 참지 못한 아이리스가 자신의 허리춤에 매여 있는 검으로 손을 뻗기 시작하자, 키리에는 방금 전과 단  치도 달라지지 않은 얼굴을 한 채로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이리스 엘 데브하르트. 당신은 그와 몇 년을 함께 했었지요?”

“...뭐라고?”

“제 기억이 틀림없다면 2년, 아니 3년은 되는 것 같군요.  때의 당신은 굉장히 탐욕스러웠죠. 자신 혼자서 그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그토록 뻔뻔스럽게 행동할 것이라고는 미처 상상도 하지 못했어요. 덕분에 크게 한 방 먹었답니다.”

설마 그를 그대로 보쌈해서 도망칠 줄은 몰랐답니다, 라고 말을 하며 미소를 지어보이는 키리에를 향해 아이리스는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지금, 키리에가 자신을 향해 늘어놓고 있는 말은 분명...

“뭐어, 거기까지는 이해해   있었어요. 왜냐하면 아리엘 티에르, 여신의 대행자라고 불리던 그 여자 또한 만만치 않게 굴었거든요. 아니, 그녀야말로 우리 중에 가장 욕심쟁이임이 틀림없었던  같네요. 왜냐하면 자신의 의무고 책임이고 전부 내팽겨 치고, 그에게 강아지 마냥 쪼르르 달려갔었거든요. 그녀에 비한다면, 당신은 정말 양호한 편에 속하는 것이지요. 암, 그렇고 말고요.”

“.....”

아이리스는 슬슬, 자신의 눈앞에 있는 여자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도무지 이해를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키리에가 지껄이고 있는 말을 액면가 그대로 받아들이자면, 그것은 분명-

“그런데 말이에요. 당신들끼리 번갈아가며 그를 독점하는 동안, 단 한 번도 그에게 손가락 하나 대보지 못한 가련하고 비참한 여인이 한 명 있었답니다. 그녀가 누군지 짐작이 가시나요? 아이리스?”

쿡쿡하고 웃으며 키리에는 아이리스를 향해 그러한 질문을 던졌지만, 애당초 제대로 된 답변이 돌아올 것이라고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여기서부터는 아이리스 엘 데브하르트가 알지 못하는 영역에 걸쳐져 있는 이야기였으므로.

“정답은 바로 지난 20년간 오직 카인 하나만을 쳐다보고, 그를 사랑하였고, 그에게 헌신하였지만  한 순간도 보답을 받지 못한 불쌍한 여자, 비앙카 델 카스타나였답니다.”

아아, 안타깝기도 하죠. 라고 희극배우인  마냥 말을 읊조리고 있는 키리에의 모습이 아이리스는 어딘가 소름끼치게 느껴지기만 할 뿐이었다.

“물론, 자업자득인 측면도 없지 않아 있긴 했었죠. 아이리스, 당신만큼은 아니지만 카인 또한 스스로에게 엄하고 고지식한 사람이잖아요? 차라리 당신이나 아리엘처럼 대놓고 고백을 했더라면 상황이 조금쯤은 바뀌었을까요?”

“.....”

“뭐, 무리였겠죠. 일평생 사랑이라고는 알지 못하고, 받아 보지도 못한 여자가,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줄 수 있을까요. 결국, 그 둘의 이야기는 시작부터 파국이 예정되어 있던 것이나 다름이 없었을 테지요.”

이야기가 그쯤 진행되자 아이리스는 뭔가 이상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키리에라는 여자는 분명 카인을 제외한 원정대의 다른 여인들의 개인사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았건만, 비앙카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리 세세한 정보를 꿰뚫고 있단 말인가?

“아이리스, 당신은 그녀가 불쌍하지 않나요? 당신들은 고작해야 1년 만에 그의 옆자리를 꿰찰 수 있었지만, 그 여자는 30년이라는 시간동안 단 한 순간도 자신의 소망을 이루어본 적이 없었어요. 한 명의 사람으로서, 그리고 한 명의 여자로서, 단 하루도 행복을 누리지 못했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결론이 대체 뭐지? 키리에, 그대는 내게 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이지?”

아이리스의 말에 키리에는 얼굴의 만면에 빙그레 미소를 지어보였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간단해요. 비앙카 델 카스타나 또한, 이제  번 쯤은 행복해도 되지 않나, 그녀에게 카인을 빌려줌으로서 당신들이 누렸던 행복을  번 쯤은 맛봐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했던 말이랍니다. 자고로, 경쟁이란 공평해야 제 맛이 아니겠어요?”

“...허.”

키리에의 정신이 나간 듯한 결론에 결국 아이리스의 얼굴이 구겨지고야 말았다.

“...그러니까, 카인은 그대의 소유물이 아니...”

그리고 그 때였다.

“...쉬잇.”

키리에가 자신의 가느다란 검지 손가락을 치켜들어 아이리스의 입을 살짝 하고 막은 것이.

“아이리스. 제발 조용히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아무 것도 모르는 주제에, 그리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면 너무도 품위가 없어 보이잖아요. 제국의 황녀의 위엄을 갖추지 못한 당신은, 그저 야만적인 원숭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어째서 몰라주시는 것일까요.”

아이리스를 향해 그러한 말을 내뱉는 키리에의 두 눈에서 날카로운 안광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현재의 키리에에게서는, 이 주위를 가득 채우는 알 수 없는 위압감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아이리스. 당신은 제게 이렇게 말을 하셨죠. 카인은 물건이 아니며, 제 소유는 더더욱 아니노라고.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에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맞는 말인 것 또한 아니지요. 카인은 물건이 아니기는 하지만, 제 소유인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랍니다.”

“왜냐하면, 저와 카인은 이미 모든 것을 공유하고 있는 사이거든요. 심지어, 우리들의 수명마저도 말이에요.”

“...뭐라고?”

키리에의 입에서 그러한 말이 튀어나온 순간, 아이리스의 말문은 턱하고 막혀버렸다. 카인과 키리에가, 수명을 공유하고 있다고? 그녀가 알기로, 일생에 단 한 번 스스로의 반려를 정하는 엘프가 타인과 수명을 공유하는 경우는 오직 하나 뿐이었다. 그것은 바로-

“그런 의미랍니다. 카인과 함께하고, 그와 사랑을 나눈 전력이 있는 사람은, 당신과 아리엘뿐만이 아니었다는 의미이죠. 자, 이제 제게 카인의 소유권을 주장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 하시겠나요?”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숨을 죽인 채로 킥킥거리는 키리에를, 아이리스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키리에, 설마 그대 또한...”

“뭐어, 그런 것이랍니다. 자세한 것은 당신에게 말을 해주기 싫군요. 왜냐하면, 부부 사이의 사적인 일을 ‘타인’에게 함부로 공유한다는 변태적인취미는 없거든요. 그 정도는 이해해주실 수 있지요, 아이리스?”

“.....”

“에에, 그러니까, 그런 의미의 이야기였던 것이랍니다. 저와 수명을 공유하고 있는 카인은, 보통의 인간은 꿈도 꾸지 못할 어마어마한 세월을 살아가게 되겠죠. 물론, 카인 또한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겠지만 적어도 당신이 늙어 죽는다 할지라도 그는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있을 것이라 제가 보장하도록 하죠.”

아마 당신이 추레하게 늙은 다음에도 그는 여전히 젊음을 유지할 거에요, 라는 아무 짝에 쓸모없는 말을 덧붙이는 키리에.

“앞으로, 저와 그가 함께할 시간은 정말로 무궁무진 하겠죠. 통상의 인간은 감히 헤아릴 수도 없을, 기나긴 삶이 될 것이에요. 그런 만큼, 저는 카인의 삶 속에서 오직 저 하나만을 강요할 생각은 추호도 없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더라도 똑같은 음식만 먹으면 질리게 되는 법이지 않나요? 가끔씩은, 간식도 먹어야 입맛이 도는 법이지요.”

터벅.

그리 말을 하며 키리에는 아이리스를 향해 한 발짝 앞으로 다가왔다.키리에의 얼굴에 가득한, 광기어린 미소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발짝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이제 이해를  하시겠나요? 저는 카인이 다른 여자를 만나도 상관없고, 다른 여자와 사랑을 나누어도 상관없어요. 왜냐하면, 어차피 제가 그의 처음이자,끝인걸요. 카인이 살아가면서 만나게  여자들의 모든 시간을 합쳐봐야, 제가 그와 함께했던 모든 시간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겠죠. 다른 여자들은, 고작해야 스쳐지나가는 인연에 불과할 따름이니까요.”

“뭐어, 그렇다고 해서 어중이떠중이나 받아주겠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말이에요. 사실, 그렇게 마음이 들지는 않지만 당신들 셋 정도라면 그럭저럭 납득을 할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하고 있답니다. 전, 이해심이 넘치는 여자이니 말이에요.”

“...납득? 이해?”

자신은 이미 그의 정실이며, 나머지 여자들은 전부 측실로 대하는 것에 주저 없는 키리에의 광기 어린 말에 아이리스는 끝내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이것으로서 아이리스는 확신할 수 있었다. 저 엘프는, 키리에의 머리는 완전히 돌아있었다.

“...미쳤군. 완전히 돌았어. 키리에. 넌, 제정신이 아니군 그래.”

아이리스의 말에 키리에는 생긋하고 웃으며 이리 답을  뿐이었다.

“기왕이면 사랑에 살고 사랑에 죽는 순정파적인 여자라고 해주시면 안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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