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7. 호접지몽(胡蝶之夢) - 10
“...실로 장관이로군.”
엘프의 인도를 따라 안개로 둘러싸인 숲을 빠져 나오니, 아이리스와 아리아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모습은 하늘 그 자체를 떠받들고 있는 것 같은 거대한 크기의 나무가 숲의 정중앙에 심어져 있는 광경이었다. 그 높이가 어찌나 높은지 천공 그 자체를 관통한 것도 모자라 높은 하늘 위의 구름을 옷처럼 두르고 있는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감탄사를 내뱉게 하고 있었다.
“그렇군. 이것이 말로만 듣던 세계수인가.”
아홉 갈래의 나뭇가지를 뻗어 세계의 균형을 이어준다는 신목.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을 관장하는 네명의 여신께서 이 땅에 모든 생명에게 스스로의 자비로움이 임하였음을 증거 하는 상징.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시간을 통틀어 그 어떠한 시공에도 이미 존재 한다 전해지는 신성의 결정체.
그리고 인간의 눈으로는 도무지 그 둘레를 잴 수가 없을 정도로 거대하기만 한 나무의 밑둥 아래, 어느 한 여인이 두 눈을 감은 채로 얌전히 앉아 있었다.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여인은 아름다웠다. 엘프들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길고 뾰족한 귀, 허리까지 닿는 윤기 나는 녹색의 머리카락, 그리고 미의 종족이라 불리는 엘프들 가운데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아름다운 얼굴. 여자가 같은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음에도 감탄을 금치 못할 정도로 여인의 얼굴은 아름다웠으며, 전신에서는 신비로운 영기(靈氣)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어디 그것뿐이랴. 수 킬로미터 밖에서 눈을 가리고도 적을 정확히 꿰뚫을 수 있는 대륙 최고의 활솜씨를 지녔기에 신궁(神弓)이라는 이명을 지녔으며, 그 강대한 무력을 발판으로 삼아 수 백년이 넘는 시간동안 세계수를 수호해 온 대륙 최강자 중 한 명.
세계수로부터 부여받은 여러 축복을 통해 종족의 한계수명조차 뛰어넘어 도대체 몇 년을 살아온 것인지 파악할 수가 없다는 걸어다니는 역사서.
세계수의 수호자, 키리에 엘 데나리스가 바로 여인의 정체였다.
“레인, 이곳까지 그들을 인도하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제가 그들을 맞이할 테니 이만 물러가셔도 괜찮을 것 같군요.”
흡사 천사와 같은 얼굴을 하며 키리에가 남자 엘프에게 그런 말을 던지자 남자 엘프는 감격한 얼굴로 황급히 고개를 숙여보였다.
“수고라니요. 이것이 제가 맡고 있는 당연한 역할에 지나지 않으니 그러한 말은 거두어 주시지요. 수호자님.”
그러한 말을 하며 남자 엘프는 키리에를 향해 다시 한 번 예를 담아 고개를 숙이더니 극진하기 그지없는 태도를 유지하며 이 자리에서 조용하게 물러났다. 아이리스의 눈에는 키리에를 대하는 엘프의 태도가 마치 황제를 대하는 귀족들의 태도와 별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해버리고 말았다.
“오랜만이네요, 제국의 황녀. 아이리스 엘 데브하르트.”
남자 엘프가 물러나고 이 자리에 키리에와 아이리스, 그리고 아리아만이 남게 되자 키리에는 싱긋하고 미소를 지으며 아이리스를 향해 인사를 하였다.
“오랜만이라. 마치 우리가 예전에 만나본 것처럼 말을 하는군. 키리에 엘 데나리스.”
아이리스가 심드렁한 어조로 그리 대꾸를 하자 키리에는 쿡쿡하고 웃음을 지어보일 뿐이었다.
“이거 섭섭하군요, 아이리스. 당신에게 있어서 우리가 함께 한 1년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는 뜻인가요? 여정 그 자체를 부정하고 싶을 만큼, 어떠한 가치도 없는 시간이었다고 해석을 해도 되는 것일까요?”
키리에의 말에 아이리스의 미간이 살포시 일그러지고 말았다. 키리에와 함께한 추억 따위는 근처의 적당한 쓰레기통에 처박힌다고 해도 아무 상관없었지만, 카인과 함께한 빛나는 추억까지 도매금으로 부정해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아니, 그 말에는 결코 수긍을 할 수가 없군. 그와 함께한 시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 중 하나였으니 말이다. 여전히 교활하기 그지없군, 키리에. 그대처럼 그토록 오랜 세월을 살게 되면 뱀과 같은 혓바닥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인가?”
아이리스의 빈정거림에도 키리에는 얼굴에 어떠한 미동도 없이 여유로운 미소만을 지어보일 뿐이었다.
“뭐어, 연륜이라고 생각해주시죠. 그나저나, 아이리스. 그대는 참 젊군요. 고작 이런 말장난에 발끈을 하다니 말입니다.”
“그대와 비교한다면 이 세상에 젊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리 투덜거리던 아이리스는 갑자기 무언가가 생각난 듯 눈살을 찌푸렸다.
“뭐, 그래도 키리에 그대가 아리엘 티에르 그 계집보다는 훨씬 나은 것 같군. 교활한 것만 따진다면 피장파장이긴 하지만 적어도 의뭉을 떨지는 않으니 말이다.”
“아리엘 티에르? 여기서 갑자기 그 이름이 왜 나오는 것이지요?”
키리에가 의아하다는 듯이 되묻자 아이리스는 얼굴에 대놓고 불쾌하기 짝이 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이리스에게 있어 아리엘이라는 여자는 그 얼굴을 떠올리는 것조차 짜증을 유발시키는 빌어먹을 계집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계집은 내 앞에서 끝까지 시치미를 뗐거든. 성녀를 자처하는 주제에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을 입에 담고 의뭉이나 떨다니, 참으로 괘씸하기 짝이 없는 행태가 아니던가?”
“아리엘은 평소부터 부끄러움이 많은 성격이었죠. 그것도 아니라면, 아직 어린 나이라서 그리 행동을 한 것이 아닐까요. 제가 기억하기로 아리엘은 당신보다 한 살 적었으니 말입니다.”
방금 전에 받았던 공격을 그대로 돌려주기라도 하는 듯 키리에가 자신의 나이를 들먹이자 아이리스의 얼굴이 더더욱 일그러지고 말았다. 나이로 따진다면 원정대에 속해 있던 모든 인간들의 나이를 합친 것보다 더 나이가 많은 키리에가 저 따위 말을 지껄이니 도무지 참아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허. 그대는 나이가 ‘너무’ 많아서 그런 것인지 혓바닥을 놀리는 것에 거침이 없군 그래. 그대에게 가르침을 줄만한 인물은 이미 관짝에 들어간 지 오래라서 그런 것인가?”
아이리스의 말에 싱글벙글 미소만을 짓고 있던 키리에의 얼굴에 살짝 금이 가고 말았다. 겉으로 티는 내지 않고 있었지만, 세상의 그 어떠한 여자도 자신의 나이를 운운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법이었다. 특히, 자신의 연적과도 같은 여자 앞에서라면 더더욱.
“...하, 고작해야 삼십여 년 밖에 살지 않은 핏덩이 주제에 말이 아주 거침이 없군요. 아아, 그러고 보니 당신, 얼굴이 상당히 어려졌군요? 10년 뒤보다 한참이나 어린 얼굴을 하고 있으니 그렇게 기고만장을 하며 날뛰고 있는 것인가요?”
“흥, 몇 백 살이나 묵어놓고 주름살 하나 없는 쪽이 괴물이라는 생각은 대체 왜 하지 않는 거지?”
“고작해야 몇 십 년만 지나도 얼굴이 추하게 변하는 것보다는 백배는 낫다고 생각하는데요? 아아, 그러고 보니 당신은 오러를 각성했으니 일반적인 인간 여자보다는 오래가긴 하겠군요. 그래봐야, 당신보다 더욱 젊고 아름다운 여인들에게는 미치지 못하겠지만요. 예를 들어, 당신보다 한 살 어린 아리엘 티에르라던가.”
키리에가 생글생글 웃으며 날린 도발에 결국 아이리스의 몸에서 살기가 새어나오고 말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이가 들어가며 스스로의 미모가 쇠해지는 사실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는 여자는 없는 법이었으므로.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는군. 예나 지금이나, 그대는 정말 나와 궁합이 맞지 않는 것이 분명해.”
“이런, 아이리스. 그것 하나는 저와 마음이 맞는군요. 저 또한 원정대에 속해있던 다른 인간 여자는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 특히 당신 같이 혈통만을 믿고 건방지게 구는 여자는 더더욱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답니다.”
그렇게 아이리스가 키리에가 서로를 향해 반가워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자, 결국 보다 못한 아리아가 한 발자국 나서고 말았다. 도대체 저 둘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만, 이래서야 오늘 밤이 새도 본론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황녀님, 말씀을 나누시는 중에 끼어들어서 죄송하지만,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면 안 될까요?”
아리아가 아이리스를 향해 작은 목소리로 그리 속삭이자, 이제야 아리아의 존재를 인식한 키리에의 눈에 이채가 스치고 지나갔다.
“...아이리스. 당신과 동행한 저 분의 소개를 들을 수 있을까요?”
아리아의 얼굴을 쳐다보며 키리에가 침중한 목소리로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자 아이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하고 웃고 말았다. 세상에 무서울 것 하나 없을 것 같이 굴던 저 엘프 또한 자신의 동요를 감추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아리아. 카인이 직접 거둔 그의 가신인 동시에 나의 일행이라고 할 수 있는 아이라네.”
“...아리아.”
키리에는 아이리스에게서 그 이름을 들은 순간, 입가에 쓴웃음을 피어올리고 말았다.
“공교롭군요. 이게 정말 우연인지, 필연인 것인지 확신이 들지 않을 만큼 공교로워요.”
“뭐?”
키리에의 말에 아이리스가 당혹스러워하자 키리에는 황급히 말꼬리를 돌렸다. 마치, 지금의 화제는 더 이상 언급하기 싫다는 것 마냥.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냥, 제가 잠시 착각을 한 것 같네요. 그나저나, 이제 슬슬 본론으로 넘어가고 싶군요. 저분과 함께 대수림 깊숙한 곳에 머무르고 있는 저를 방문한 이유가 대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키리에의 그러한 태도에 아이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뜨고 말았지만 이내 그녀의 수작에 순순히 어울려주기로 결심을 하였다. 현재의 자신에게는 그따위 사소한 호기심보다 훨씬 더 중대한 사안이 있었으므로.
“...흥. 좋다. 그대가 원하는 대로 본론으로 넘어가도록 하지. 내가 그대를 만나기 위해 대수림을 찾은 이유는 간단하다. 비앙카 델 카스타나, 그 여자의 행적을 뒤쫓던 중 그녀가 이곳에 들렀다는 사실을 확인하였기 때문이지. 그러니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도록 하지. 비앙카 델 카스타나 여기에 왔었는가? 그리고, 그녀를 마주한 적이 있는가?”
아이리스의 질문에 키리에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녀 또한 대수림을 방문한 적이 있었어요. 또한, 제가 그녀와 얼굴을 마주한 것 또한 사실입니다.”
키리에에게서 예상 외로 순순한 대답이 흘러나오자 아이리스의 눈이 번쩍 하고 떠졌다. 에스텔 공작가에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이후 도무지 그 종적을 붙잡을 수가 없었던 비앙카의 행방을 드디어찾아낸 것이었다!
“비앙카 델 카스타나는 대체 무슨 용건 때문에 이곳을 방문한 것인가?”
아이리스가 다급한 목소리로 질문을 하자 키리에는 고개를 살짝 내저으며 답을 하였다.
“비밀이에요.”
“그렇다면 그녀가 이곳에서 행한 일은 무엇이지?”
“비밀이에요.”
“...그대가 비밀이라고 답변하지 않을 수 있는 질문은 대체 뭐지?”
“그것 역시 비밀이군요. 죄송해요.”
이쯤 되니 결국 아이리스의 관자놀이에서 힘줄이 솟아오르고 말았다.
“...키리에 엘 데나리스. 지금 나랑 장난이라도 치자는 건가?”
“죄송하지만, 저는 진지할 따름이에요. 그녀와 저는 세계수에 걸고 ‘마나의 맹약’을 나누었거든요. 지금 이 자리에서 심장이 펑, 하고 터져 죽고 싶지는 않으니 제게는 비밀을 유지해야 할 의무가 있답니다.”
키리에의 대답에 아이리스가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그녀의 말을 그대로 신뢰하자면, 지금 이 자리에서 키리에 엘 데나리스는 아무 짝에 쓸모없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였으므로.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놓치고 놓친 끝에 겨우 붙잡은 비앙카의 행방이었다. 이 자리에서 그 어떠한 단서도 얻지 못한다면, 비앙카와 카인이 어디로 숨었는지 평생토록 알아내지 못할 지도 몰랐다.
“...비앙카 델 카스타나. 그 계집이 현재 카인을 납치한 것일지도 모르는 상황이라도 말인가?”
아이리스의 말에 키리에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말았다.
“납치요? 비앙카 델 카스타나가, 카인을 말인가요?”
“그래.”
아이리스의 대답에 키리에는 더더욱 이해할 수가 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게 뭐 어때서요? 제가 아는 비앙카 델 카스타나는 카인에게 애정을 품고 있었는데 말이지요. 설사 납치를 했다 하더라도 그녀가 카인을 해할 가능성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나요?”
키리에의 멍청하기 짝이 없는 답변에 아이리스는 답답함만을 느낄 뿐이었다. 저 엘프는 인간의 몇 배나 되는 세월을 살아왔다면서 왜 저렇게 멍청하게 구는 것이란 말인가? 한창 때의 남녀가 한 공간에 찰싹하고 붙어 있는데 아무런 일도 없이 돌아올 것이라는 순진한 상상을 하는 중이란 말인가?
“...하아, 굳이 내가 말로 설명을 해야만 하는 것인가? 그러니까, 그 제정신이 아닌 음흉한 여자가 카인을 데리고 있는 동안 무슨 수작을 부릴지 아무도 모르...”
“아아, 그러니까.”
키리에는 손사래를 치며 이제야 그녀의 말이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리스. 당신은 지금 이러한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군요. 비앙카 델 카스타나가, 카인과 함께 지내는 동안 그에게 어떤 이상한 수작을 부릴 지도 모른다는 걱정 말이에요.”
“그래. 이제라도 이해를 했으니 다행이로군.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그 계집의 행방을 찾아야...”
“아니요. 저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그 때였다. 키리에가 아이리스의 말을 중간에서 끊는 것과 동시에 이러한 말을 내뱉은 것이.
“대체 왜 그들을 찾아야 하는 것인가요?”
그리고, 아이리스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정신 나간 말을 내뱉은 것이.
“이건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 불쌍한 여자에게 카인을 한 번 쯤은 ‘대여’해 줄 수있는 노릇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