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화 〉7. 호접지몽(胡蝶之夢) - 09
지난 한 달, 나는 비앙카라고 하는 여인과 동거 아닌 동거를 함께 하며 그녀라는 사람에 대해 많은 사실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비앙카라는 여자의 정체를 밝혀냈다는 것이 아니라, 한 명의 인간으로서의 비앙카에 대해 많은 사실을 파악할수 있게 된 것이었다.
우선, 그녀는 요리에 대해서는 정말 젬병이었다. 어찌나 요리에 소질이 없던지, 단순히 빵을 굽더라도 금세 숯덩이로 만들어버리기 일수였으며, 한낱 수프를 끓이더라도 새까맣게 태워먹기 일수였다. 어느 누가 보아도, 비앙카라는 여자에게 있어 요리라는 기능은 탑재되어 있지 않은 것이 분명해보였다.
그리고, 그렇게 요리를 망칠 때마다 비앙카가 내뱉는 변명 또한 언제나 한결 같았다.
‘사실 마법으로 요리를 할 수 있지만, 하지 않는 것 뿐 이니까 괜찮아.’
덕분에 이 오두막에서 음식을 조리하는 역할은 내가 맡을 수밖에 없었다. 굶어죽지 않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하였다.
그렇게 내가 음식을 다 만들면 우리는 테이블 위에 도란도란 모여 앉아 식사를 함께 하였다. 나와 그녀가 식사 중에 나누는 말은, 정말로 별 것 없었다. 서로의 얼굴을 마주한 채로, 오늘 하루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시시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를 나눌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시시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를 나눌 뿐인데도, 비앙카의 얼굴은 언제나 밝고 환하기만 할 뿐이었다. 마치, 자신이 원하던 것은 이러한 것이 전부였다는 듯이.
또, 비앙카는 나와 손을 잡는 것을 참 좋아하였다. 비앙카와 함께 오두막 주위를 산책할 때면, 그녀는 나의 곁으로 쪼르르 달려와 나의 손을 꼭하고 붙잡고는 하였다. 그 모습은 마치, 주인을 따르는 대형견과 비슷하지 않은가 하고 생각을 해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비앙카의 모습은 귀여웠으니까 허용 범위라고 할 수 있었다.
비앙카는 나와 입맞춤을 나누는 것을 좋아하였다. 내가 처음으로 눈을 뜬 날, 그녀와 입을 맞춘 이후, 우리는 가끔씩 키스를 하곤 하였다. 그녀에게는 자신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버릇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입을 맞출 때마다 내 쪽을 향해 혀를 살짝 하고 내민다는 점이었다. 비앙카의 그러한 모습은 어찌 보면 귀엽기만 하고, 또 다르게 보면 남자를 전혀 알지 못하는 숫처녀와 같이 느껴져, 그녀가 무척이나 사랑스럽게 여겨지고는 하였다.
덕분에 비앙카와 입맞춤을 할때면 필연적으로 나와 그녀의 입술이 뒤엉키고는 하였다. 하지만, 나는 비앙카의 그러한 모습을 보며 단 한 순간도 그녀가 음탕하다고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나를 향한 그녀의 눈 안에는 언제나 나를 향한 사랑이 깃들어 있었기에.
그 정도로 그녀는 나를 아주 많이 좋아하고 있었다. 아니, 좋아한다는 말로는 부족하였다. 그녀는, 나를 아주 많이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위해서라면 그 무엇이든 할 수 있을 정도로, 헌신적이기 이를 데가 없었다.
사실, 나라고 해서 그녀의 사랑이 싫게 느껴질 리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싫다고 말한다면 그 쪽이 거짓말일 것이다. 나도 엄연한 사내였다. 비앙카 정도의 미녀가 혀 안의 사탕처럼 굴며, 나만을 맹목적으로 바라보는데, 그러한 모습을 보며 애정을 느끼지 않는다고 한다면 말도 안 되는 일임이 분명하겠지.
그렇게 나와 비앙카의 관계는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찌 보면, 그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한창 때의 남녀가 한 지붕 아래 살고 있으며, 그 중 한 쪽이 상대방을 향해 넘쳐흐를 정도의 애정을 품고 있는데 두 사람 사이에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 더욱 이상한 일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마음 속 깊은 구석까지 그녀에게 허락을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실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은 오롯이 나의 의지에서 비롯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저 비앙카라고 하는 여자는, ‘심신의 안정’이라는 핑계를 명목으로 하여 나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깥 세상에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는 나는 알 수가 없었지만, 그녀는 이곳을 벗어나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여주곤 하였으니까.
그럼에도 저 여자를 향해 나의 마음이 점차 끌리는 것만은어찌할 노릇이 없었다. 어쩌면, 비앙카의 말대로 기억을 잃기 전의 나와 그녀가 사랑을 했던 사이라는 것이 사실일지도 몰랐다. 떠올려서는 아니 될 상상이기는 하였지만, 이대로 그녀와 이 자그마한 오두막에 쳐 박힌 채 그녀와 함께 살아가는 것 또한 나쁜 선택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래서는 아니 되었다. 바깥세상의 모든 것을 잊고 비앙카와 단 둘이서 유유자적하게 살고 싶다는 유혹이 들 때마다, 나의 머릿속 한 구석에서 머리가 지끈하고 아파오는 두통이 동반되곤 하였다. 아마, 내가 잃어버린 기억이 나의 그러한 행동을 막는 최후의 보루 역할을 해주고 있음이 틀림없는 것 같았다.
지난 한 달, 나는 이 오두막에 기거하며 밥만 축내거나 혹은 비앙카와 닭살 돋는 애정행각만 벌였던 것이아니었다. 내게 일어난 현상, 내가 던지는 여러 질문에 대한 비앙카의 반응 등을 살펴보며 현재 내가 처해있는 상황이 어떠한 지에 대한 진상을 파악하고자 부던한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였단 말이다.
사라져버린 기억을 억지로 떠올릴 필요는 없었다. 현재 나를 둘러싼 상황을 유심히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이지 쉬이 짐작이 갔으니까.
“카인-!”
그 때였다. 오두막의 창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어느 한 여인이 상체를 기울이며 나의 이름을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식사할 시간이야! 빨리 들어 와! 음식 식기 전에!”
빵도 제대로 굽지도 못하는 주제에 또 어떤 괴이쩍은 음식을 만들어낸 것인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세상 밖으로 나간다면 어디를 가더라도 대접을 받은 만한 마법사인 주제에 이런 한적한 오두막에 처박혀 평범한 시골 처녀인 것 마냥 끼니 걱정이나 하는 그녀를, 나는 도무지 미워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벌써 이곳에 머문 지 한 달이나 지났던가.”
자그마한오두막에 처박히고 난 후 그녀의 소꿉장난에 함께 어울려 준지 어연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아무래도 조만간, 모든 것을 결판 내야할 시간이 찾아올 것 같았다. 그리 생각을 하며, 나는 찌뿌둥한 몸을 일으키며 비앙카와 함께 기거하고 있는 아기자기한 오두막으로 발걸음을 옮겨갔다. 보나마나 사람이 주워 먹을 만한 음식을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닐 테니, 내가 처음부터 다시 만드려면 꽤나 시간이 걸릴 것 같다는 발칙한 생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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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의 북동쪽에는, 사람들이 대수림(大樹林)이라 칭하는 거대한 숲이 존재한다. 대륙에서는 흔히 찾아볼 수 없는 거대한 나무들이 자라나며, 엘프들의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정령들이나 요정의 자취를 쉽사리 찾을 수 있는, 마치 동화 속의 한 장면과도 같은 곳.
또한, 대수림의 한 가운데에는 창세 이후부터 지금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세상 그 자체를 수호하고 있다고 전해지는 거대한 세계수가 자리하고 있다 전해진다. 대수림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기묘한 안개 덕분에 그 실체를 확인한 사람은 아무도 없긴 하지만.
“허어, 소문으로는 익히 전해 듣기는 하였지만, 참으로 기묘한 장소가 아닐 수 없도다.”
그리고, 대수림을 둘러싼 기묘한 안개를 헤쳐 나가며 아이리스는 저도 모르게 감탄을 내지르고 말았다. 현재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이 안개는,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그녀의 감각마저 일부 방해하는 효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과연, 지난 천 년 간 그 어떠한 인간도 엘프들의 허락 없이는 이 숲에 발도 들여놓지 못한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것 치고는 너무 막힘없이 걸어 나가시는 것 아니신가요?”
허나, 그러한 말을 내뱉는 것 치고는 단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앞을 향해 걸어 나가는 아이리스의 모습을 보며 아리아는 황당하다는 듯 말을 내뱉고 말았다.
“비록 이 안개가 내 오감을 방해하고 있다지만 무인으로서 갈고 닦아온 감각마저 방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그대야 말로 내 뒤를 잘 쫓아 오거라. 이런 숲에서 미아가 되면 쉽사리 찾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자신을 아이 취급하는 아이리스의 말에 아리아는 살짝 심통이 나려고 했지만 이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적어도 카인의 행방을 찾아낼 때까지는 아이리스의 도움이 필수적이었으므로, 그녀와 다퉈봐야 좋은 것이 하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이리스와 아리아가 아무 말 없이 안개로 가득 찬 숲을 헤치고 나아가던 그 때였다. 어디선가 느껴지는 기묘한 감각에, 아이리스는 자신의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흠. 이제야 손님을 맞이하러 왔는가. 내 예상보다 한참이나 늦었군. 숙녀를 에스코트 하는 것에 있어 이리 게으름을 피우다니, 숲의 종족이라는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행보가 아닐 수 없구나.”
쐐액-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안개를 꿰뚫고 아이리스를 향하여 화살이 대 여섯 개가 날아들었다. 자신을 향해 화살이 날아드는 광경을 보았음에도, 아이리스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그것을 멀뚱멀뚱 바라볼 뿐이었다.
애당초 이 따위 화살쯤은 그녀의 몸에 아무런 해를 입힐 수 없었을 뿐더러, 그녀와 동행하고 있는 귀여운 마법사의 실력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파지직-!
아리아의 손에서다섯 갈래의 전류가 튀어 오르더니 아이리스의 향해 덮쳐들던 화살을 모조리 튕겨내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화살을 쏜 장본인인 남자 엘프는 그 광경에 저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그 찰나의 순간에 화살을 튕겨낼 정도의 마법을 캐스팅 해내다니!’
눈으로 보았음에도 도무지 믿기가 힘든 광경이었다. 그가 화살을 쏘아내고 목표물에 도달하기까지 고작해야 2초미만의 시간 밖에 존재하지 않았거늘, 그 짧은 시간에 자신의 화살을 튕겨낼 정도로 강력한 마법을 구사해내었단 말인가? 게다가, 그가 쏘아낸 화살은 정령의 힘이 깃들어 있어 보통의 힘으로는 도저히 떨쳐낼 수 없었을 텐데! 설마 저 하얀 머리 여자는 대마법사의 경지에라도 오른 것이란 말인가?
“...어째서 피하시지 않은 것인가요?”
“그야, 급소를 노린 공격이 아니었으며, 결정적으로 그대를 믿고 있었기 때문이지. 그나저나 캐스팅 속도가 참으로 빠르군. 마법 구사 능력만을 따진다면 비앙카 델 카스타나와 비교를 하더라도 그리 떨어지는 수준은 아니겠어.”
“마치 그 여자에 대해 잘 아시는 것처럼 말씀을 하시네요.”
“그야, 내가 비앙카 델 카스타나와 알고 지낸 기간이 꽤나 길었기 때문이지. 공식적으로는 어떠한 왕래도 없던 사이에 불과하지만.”
그렇게 아리아와 아이리스는 긴장감 따위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말투로 서로를 향해 말을 주고받더니, 불현 듯 생각나기라도 한 것 마냥 자신들을 향해 화살을 쏘아낸 엘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 알겠는가? 본인은 엘프들과 적대를 하고픈 생각은 추호도 없다네. 그저, 용건이 있어서 이곳을 찾아왔을 뿐이라는 것을 이해해주었으면 좋겠군.”
“...우리는 사전에 허락을 맡은 이가 아니라면 내부로의 출입을 허용하지 않는다.”
엘프의 딱딱하기 그지없는 말에 아이리스는 어깨를 으쓱이기만 할 뿐이었다.
“그건 나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현재 본인은 워낙 바빠서 말일세. 일분일초가 아쉬운 상황인데 한가롭게 그대들의 허락이나 맡을 정도로 시간이 넘쳐흐르지는 않다네. 물론, 이리 무례하게 그들을 대하게 된 것은 사죄를 하도록 하지.”
그리 말을 하며 자신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는 아이리스를 향해, 엘프는 난감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말투로 보나 행동으로 보나, 눈앞의 저 인간여자는 보통 신분이 아닌 것이 확실해보였다. 그렇기에 저 여자들을 무작정 적대하기보다는 우선 대화를 나누어 보기로 결정하였다.
“...인간 여자여. 그대의 용건은 대체 무엇인가?”
엘프의 말에 아이리스는 살짝 미소를 짓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내 용건은 오직 하나. 세계수의 수호자인 키리에 엘 데나리스, 그녀와 나누어보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뿐이라네. 나는 엘프들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 따위에 관심이 없다네. 그저, 그 여자와 허심탄회하게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뿐.”
아이리스의 말에 엘프는 자신의 눈을 가늘게 뜨고 말았다. 고작해야 대수림의 외곽지대의 경계를 맡고 있는 수호자인 자신에게 이들을 통과시킬 권한 따위가 없다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저 인간 여자들이 지니고 있는 무력이 자신의 예상을 훨씬 상회하고 있다는 것을 쉽사리 눈치 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저들의 무력에 순순히 굴복하여 길을 열어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엘프의 고뇌가 차츰 깊어져가기만 하는 그 순간이었다.
[...그렇게 하시지요. 레인. 저들을 제가 있는 곳까지 안내하도록 하세요.]
그 때였다. 분명 그들의 근처에는 어떠한 인기척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람을 타고서 어떤 청량한 목소리가 그들의 귀에 와 닿은 것이.
“...어? 어떻게?”
그 목소리를 들은 아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주위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이 숲에 들어오고 나서 단 한 순간도 주위의 경계를 늦춘 적이 없었는데 이 목소리는 어디서 들려온 것이란 말인가?
“보나마나 숲의 정령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한 것이 틀림없겠지. 그 여자는 예나 지금이나 신비한 척 하기를 즐기는 여자이니 말이다.”
“...수호자님을 모욕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엘프가 왠지 모르게 지친 듯한 목소리로 아이리스를 향해 말을 하자 그녀는 능청스러운 목소리로 이리 대꾸를 할 뿐이었다.
“오오, 그거 미안하게 되었군. 그래도 그대가 이해를 좀 해주게나. 오랜만에 옛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인지라 긴장이 된 나머지 농지거리를 내뱉어본 것에 불과하니 말일세.”
키득키득 거리며 그러한 말을 내뱉는 아이리스의 옆에서 아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말았다.
“...황녀님, 아까는 대수림에 오는 것이 오늘이 처음이라고 하시지 않았었나요? 그런데 어떻게 세계수의 수호자와 친구 사이가 될 수 있는 것인가요?”
아리아의 질문에 아이리스는 그녀를 힐끗하며 돌아보더니 피식하고 웃음을 지어보일 뿐이었다.
“가끔씩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친구 관계라는 것이 성립될 수도 있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그래, 그대와 카인이 주종관계를 맺게 된 것처럼, 말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