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7화 〉7. 호접지몽(胡蝶之夢) - 08 (57/201)



〈 57화 〉7. 호접지몽(胡蝶之夢) - 08

흔히들, 사람들은 스스로가 도저히 주체할 수가 없을 만큼 빡쳤을 때, 이러한 표현을 즐겨 사용하곤 한다. 자신은 지금, 손발이 부들부들 떨려올 정도로 화가 났다고.

뭐, 상당히저속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아이리스는 그러한 표현이 단순한 비유였던 것이 아니라 현실  자체를 반영한 극사실주의적인 표현이었음을 깨닫고 말았다. 왜냐하면, 카인과 비앙카가 ‘밀월여행’을 갔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 현재 자신의 손발이 수전증 환자인 것 마냥 주체할 수가 없을 정도로 부들부들 떨려오고 있었으니까.

진정을 하기 위해 손발에 힘을 주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아니,오히려 역효과가 일어날 뿐이었다. 손발에 힘을 주니 오히려 더욱 미친 듯이 떨리기만  뿐이었다. 에스텔 공작이 아이리스에게 밝힌 ‘진실’이란 그 정도의 파괴력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밀월여행? 감히, 감히 나를 제치고 그 빌어먹을 계집과 단 둘이서 밀월여행을 떠났다고?”

쩌적-

아이리스에게서 분출되는 살기를 이겨내기 못하고 현재 그녀가 밟고 있는 바닥의 타일에 금이 가고 말았다. 물론, 그 따위 것은 아이리스에게 있어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타일 따위에 금이 간 것은 돈으로 해결이 가능한 일이었지만, 단 둘이서 여행을 떠난  연놈을 붙잡는 일은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카인.”

회귀 전, 아이리스는 카인과 참으로 많은 처음을 공유했던 관계였었다. 자신과 그는 서로 간의 첫 번째 애정을 주고받았으며, 서로 간의 첫사랑을 주고받았고,  끝에 서로 간의 처음을 주고받기까지 하였다.

여인에게 있어 목숨보다 더욱 소중히 간직해야 할 처음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까지 아이리스는 그와 처음을 주고받았다는 사실에 대해 단 한 순간도 후회를 해  적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좋기만 하였다. 그에게 자신의 처음을 줄 수 있었다는 사실에 기쁘기만 할 뿐이었다. 자신의 일생에 있어, 그 외의 다른 남자는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조차 그와  둘이서 여행을 떠나는 것과 같은 추억만큼은 쌓지 못하였다. 제국의 공작과, 황녀라는 지위는 그 둘에게 넉넉한 휴가를 보장해  정도로 한가로운 직업이 아니었던 탓이다. 모든 일정을 소화한 후, 함께 티타임을 즐기는 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사치였었다.

...그랬기에, 아이리스는 현 상황이 싫기만 하였다. 너무도, 싫었다. 회귀 전에는, 오직 자신만이 혼자서 그를 독점할 수 있었는데. 그의 곁에는 오직 자신만이 있었을 뿐이었는데. 그는 오직 자신만을 바라보고 자신만을 사랑해주었는데!

용서할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자신은 오직 그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인데. 정작 그는 자신을 제쳐두고 다른 여자와 먼저 여행 따위를 떠나다니!

만약의 일이기는 하지만, 카인이 그 계집과 함께 길거리를 나다니거나, 서로의 눈을 그윽하게 쳐다본다거나, 서로의 귓가에 대고 밀어(蜜語)를 속삭이는 등의 상상을 하니 속이 뒤집히는  같았다. 어째서 자신은, 회귀하고 난 이후 그의 처음을 차지하지 못하는 것인지 하늘이 원망스럽기까지 하였다.

“...저하, 이제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렇게 분노를 주체하기 못한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아이리스를 향해 크리스가 아주 조심스러운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그가 보기에, 더 이상 카인 폰 에스텔의 행적을 쫓는 것은 큰 의미가 없어보였다.

이미 에스텔공작이 아이리스에게 증언을 하지 않았던가. 그 중간 과정이야 어찌되었건 간에, 카인 폰 에스텔은 비앙카 델 카스타나의 손을 꼭 붙잡은 채 에스텔 공작을 찾아와 함께 여행을 다녀오겠다며 허락까지 받은 몸이노라고.

“...조용히 해 보거라. 크리스. 잠시 생각할 것이 있으니 말이다.”

사실, 아이리스 또한  상황이 막막하기만  뿐이었다. 카인과 비앙카  카스타나가  둘이서 밀월여행을 떠났다는 정보는 아이리스에게 있어  눈이 뒤집힐 만한 엿 같은 소식인 것이 분명하였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저 약혼 관계의 한 쌍의 남녀가 여행을 떠났다는  것 아닌 소식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냥 순순히 물러날 수도 없었다. 에스텔 공작의 설명에 납득을 하며 팔자 좋게 관광이나 하러 돌아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단 말이다.

왜냐하면, 그리 순순히 포기를 할 것 같았으면 그 고생을 하면서까지 여기에 부리나케 달려온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논리도, 근거도 아무 것도 없었지만 아이리스는 분명히 무언가를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확신하고 있었다.  별 것 아닌 헤프닝처럼 보이는 사건의 배후에는, 비앙카 델 카스타나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말았단 말이다.

그러니, 그 의심을 지속한다. 눈앞의 몇 가지 단서에 현혹되는 것이 아니라, 최초로 품은 의심을 끝까지 유지할 따름이다.

“크리스.”

“예, 저하.”

크리스를 향해 입을 열려고 했던 그 순간, 아이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어느 재수 없는 계집의 얼굴을 떠올리며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어떠한 형태로든 그 계집과 엮이는 것은 정말이지 사양하고 싶은 일이 아닐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고  것을 가려가며 삼킬 때가 아니었다. 비앙카 델 카스타나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손에 지니지 못한 지금, 그 여자가 카인을 데리고 제국의 눈이 닿지 않는 곳으로 종적을 감추었을 가능성 또한 염두에 두어야만 하였기 때문이다.

“너는 지금 즉시 카스타나 후작령으로 돌아가 정식으로 후작에게 부탁을 하려무나. 제도와 카스타나 후작가를 잇는, 원거리 전언 마법을 사용하게 해달라고 말이다.”

참고로 카스타나 후작령과 제도 사이의 엄청난 거리를 격하고 영상과 소리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최소 대마법사급의 마력을 가진 이의 협조가 필수불가결한 사항이었다.

“제국의 정보부에 이와 관련된 정보를 요청하는 것과 동시에, 제도의 신전에 기거하고 있는 아리엘 티에르에게 정식으로 협조를 부탁한다는 공문을 보내거라. 제 아무리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는 음험한 계집이라고는 하지만, 카인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을 지도 모르는 이 사태에 대해서  손을 놓고 가만히 있을 계집 또한 아니니 말이다.”

마치 미리 생각이라도 해둔  막힘없이 흘러나오는 아이리스의 대답에, 크리스는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저하는 어찌하실 예정이십니까?”

“나는 당분간 따로 행동할 예정이니라.”

“...정녕 괜찮으시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수행원 하나 없이 홀로 돌아다니시는 것은 조금 위험한 노릇 아니겠습니까?”

크리스의 걱정이 되는 듯한 눈길로 그녀를 쳐다보자 아이리스는 피식하고 웃음을 지어보일 뿐이었다.

“크리스, 넌 참으로 걱정이 많구나. 한낱 도적떼나 마수 따위가  몸을 해할 것이라 생각하여 그리 묻는다면,  대답은 오직 하나뿐이다.  질문은, 그저 기우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라고.”

“.....”

아이리스의 자신만만한 대답에 크리스는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단 일격으로 세상 그 자체를 두 조각으로 갈라버리던 그녀의 모습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어, 그런 것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나의 행선지를 네게 밝혀두겠다. 나는 에스텔 공작가를 나서는 즉시 대수림(大樹林)으로 가볼 생각이니라.”

“...대수림이라면, 엘프들이 모여 사는 숲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이 대륙에 그곳 말고 또 다른 대수림도 존재하더냐?”

아이리스의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크리스는 결국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에스텔 공작가에서 대수림까지의 거리가 하루 이틀 걸리는 짧은 거리가 아니라는 점은 차치해두고서라도, 대체 왜 카인 폰 에스텔의 행적을 찾아내는 일에 엘프들의 영지를 방문하려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유 말이더냐. 그거라면 간단하지. 네가 저번에 내게 가져다준, 비앙카  카스타나의 지난 행적과 관련된 정보에 의하면, 비앙카 델 카스타나는 흑탑을 방문하기 직전에 대수림에 들렀던 적이 있기 때문이니라.”

아이리스가 알고 있는 비앙카 델 카스타나는 전형적인 마법사다운 성격을 지니고 있는 여인이었다.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가장 먼저 효율부터 따지고 들며, 자신에게 있어 의미가 없는 일은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 싫어하는, 세상만사를 자신의 척도를 통해 재단하려고 드는 오만방자하기 그지없는 마법사.

그러한 성격의 소유자인 비앙카가 단순히 관광이나 하기 위해 대수림 같은 곳을 들릴 리가 없었다. 비앙카 델 카스타나는 분명, 어떠한 특정한 목적을 품고서 대수림을 방문한 것이 분명하였다. 그곳에 간다면, 이번에야말로 비앙카  카스타나의 목덜미를 붙잡을 수 있는 단서를 포착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래, 비록 대수림에서 그리 달갑지만은 않은 얼굴과 마주하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아이리스는 무언가 불쾌한 추억을 떠올리기라도 하듯 왠지 모르게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보일 뿐이었다.

“세계수의 수호자, 키리에 엘 데나리스. 그 늙지도, 죽지도 않는 괴물이라면 이번 사건에 대해 무언가 단서를 가지고 있을 지도 모르는 노릇이니까.”

****


“...저하, 그럼 저는 이제 카스타나 후작가를 향해 출발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 하거라, 크리스. 이번 일에는 네게 맡겨진 임무가 막중하다는 것을 잊지 말도록 하여라.”

아이리스는 그렇게 크리스를 배웅해주는 것과 동시에, 몸을 빙글하고 돌렸다. 이제 자신 또한 슬슬 대수림으로 출발을 해야  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객이 된 입장으로서 에스텔 공작에게 말없이 떠나는 것은 예가 아니었으므로 그를 만나보기 위해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고 있던 그 찰나였다.

“...황녀님. 황송하오나, 제국의 신민이 된 입장으로서 황녀님께 한 말씀 올려도 될런지요?”

그런데, 그 때였다. 아이리스의 등 뒤에서 어떠한 소리도, 기척도 동반하지 않은 채 어떤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

“.....!”

순간, 아이리스의 등줄에 식은땀이 흐르고 말았다. 왜냐하면, 아이리스가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이후 그녀의 감각을 감쪽같이 속인 채 등 뒤를 점했던 인간은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녀와 동등한 경지에 오른 마스터들이나 날렵하기로는 대륙의 일절을 자랑하는 키리에조차 이러한 일을 저지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거늘!

아이리스가 자신의 눈동자에 경악만을 담은 채로 서서히 등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그녀 또한 익히 알고 있는 하얀 머리 소녀가 자신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이리 밤손님마냥 몰래 접근을 하는 것이 예가 아님은 잘 알고 있었지만, 황녀님께서 급하게 어딘가로 향하시려는 기색을 보이시기에 무례를 무릅쓸 수밖에 없었답니다.”

그리 말을 하며 아리아는 자신의 치맛단을 살짝 들어 올리는 것과 동시에 허리를 숙여보였다.

“...대체 무슨 거창한 용건이 있기에 본인을 이리 불러 세운 것이란 말인가?”

별 것 아닌 용건이었다면 결단코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은은하게 기세를 내뿜어보았지만,  기세를 정면에서 받아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리아는 얼굴에 미동 하나 보이지 않을 따름이었다.

“황녀님. 혹시 제가 황녀님과 동행하기를 원한다면, 황녀님께서는 이를 허락해주실  있을 런지요?”

“...뭐라고?”

그 대담하기 이를  없는 발언에 아이리스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가고 말았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리아는 담담하기만 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황녀님께 무례를 무릅쓰고 한 말씀 올리고 싶습니다. 사실 저는, 방금  황녀님과 호위 기사님께서 나누신 말씀들을, 전부 들었답니다.”

“.....”

자신과 크리스가 나누었던 말을 쥐새끼마냥 훔쳐 들었다고 당사자의 앞에서 당당하게 고하는 아리아의 발언은, 대담하다고 해야 할지 뻔뻔하다고 해야 할지 도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본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의견 또한, 황녀님과 마찬가지입니다. 카인님께서는, 비앙카 델 카스타나와 단 둘이서 여행을 떠난 것이 아닙니다. 아니,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이  결론입니다. 카인님께서는, 그 여자를 그리 탐탁지 않아 하셨으니 말입니다.”

그러한 말을 내뱉고 있는 아리아에게서는, 비앙카 델 카스타나에 대한 숨길 수 없는 증오가 뭉글뭉글 새어나오고 있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아이리스는 그러한 아리아의태도 하나는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왜냐하면, 그녀 또한 비앙카  카스타나를 아주 많이 싫어하고 있었으므로,

“저는 카인님의 전속 시녀입니다. 만약 카인님께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제가 몸을 바쳐서라도 방패노릇을 했어야 했건만, 저는 상처 하나 없이 뻔뻔스럽게 살아 돌아왔을 뿐입니다. 그러한 사실이, 너무도 부끄러워서 고개를  수가 없을 따름입니다. 정말로,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

“그러니, 카인님의 행적을 뒤쫓는 여정에 저 또한 동참하고 싶습니다. 결단코, 방해는 되지 않을 것이라 약속드리겠습니다. 비앙카 델 카스타나의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저 또한 웬만큼 마법을 사용할 줄 안다 자부하는 몸이니, 미약하나마 도움이 될 것이라 자부합니다. 그러니, 부디 저를 데려가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황녀님.”

그리 말을 하며 아리아는 아이리스는 향해 고개를 꾸벅하고 숙였지만 그 모습은 결코 비굴하다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아이리스가 보기에는 왠지 모를 기품이 서려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흐음.”

순간, 아이리스는 고민하고 말았다. 저 아리아라고 하는 소녀를, 과연 데리고 가도 괜찮은 것인가? 혹시 모를 위험요소로 작용할 지도 모르는 저 소녀에게, 자신의 등을 믿고 맡겨도 괜찮을 것인가?

“고개를 들라.”

고민은 짧았다. 아이리스는 자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아리아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네 말에도 일리가 있구나. 무릇, 신하라면 자신의 주인을 보필할 의무가 있는 법. 네 충정을 높이 사도록 하겠다. 좋다. 내 너를 데려가 주도록 하마.”

“...감사합니다, 황녀님.”

아리아의 동행을 허락한 이유는 별 것 없었다. 굳이 말을 하자면, 단순한 변덕에 불과하였다. 아리아라고 하는 이름을 가진  소녀가,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으며, 어디까지 할  있을지 확인해보고 싶다는, 자그마한 변덕.

아리아는 아이리스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를 향해 다시  번 고개를 깊이 숙이며 예를 표할 따름이었다.

“이번에는 결코, 방해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카인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를 간악하고 사악하기 이를  없는 비앙카 델 카스타나의 손에서 구출해내고 말 것이다.

그래.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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