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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5화 〉7. 호접지몽(胡蝶之夢) - 06 (55/201)



〈 55화 〉7. 호접지몽(胡蝶之夢) - 06

내가 사흘간이나 정신을 잃고 누워있던 오두막의 바깥은, 한 마디로 말하면 지상낙원과도 같은 곳이었다.

오두막의 주위에서 온갖 형형색색의 꽃들이 저마다의 아름다운 자태를 드리운 채로 수줍은 듯이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어디에선가 따뜻한 봄바람이 이쪽을 향해 불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꽃밭의 주위에는, 온갖 기화요초가 뒤덮여 있었으며  바로 옆에는 시냇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조금만 시야를 위로 돌려보니, 녹음이 감도는 탁 트인 푸른 초원이 나의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초원의 저편에는 나무마다 탐스러운 과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하늘의 저편 위는 구름 한  없이 깨끗하기만 하였다.

문자 그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있다면 이곳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해버렸을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동화책의 삽화에 그대로 박아 넣어도 손색이 없을 지상낙원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나는 오두막 주위의 광경을 보며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몸을 부르르 떨고 말았다. 겉으로 보기에  주위의 풍경은 무척이나 아름다워 보일지도 모르지만, 조금만 시각을 다르게 본다면, 전신에 소름이 돋는 끔찍한 풍경이 아닐  없었기 때문이다.

 주위에 만발하고 있는 꽃들은, 시간, 공간, 계절과 같은 요인을 모조리 무시한 채 봉우리를 활짝 피우고 있었다. 그러니까 봄에만 피는 꽃도, 가을에만 피는 꽃도, 늪지에서만 피는 꽃도, 사막에서만 피는 꽃도, 전부 내가 머무르는 오두막 주위에 한데 모여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었단 말이다.

나무마다 맺혀 있는 과실 또한 마찬가지였다. 제철과일이라는 개념 그 자체를 통째로 무시해버린 듯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탐스러운 과실들은 왠지 모르게 입에 대는 것이 꺼림칙하기만 할 뿐이었다.

자연의 법칙 그 자체를 통째로 거스른 듯한 모습은 어떻게 본다면 끔찍할 정도로 몸서리가 처지는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적어도 나는, 저 꽃밭을 보며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설마 마법을 사용해서 인위적으로 이런 환경을조성한 것인가?”

내가 떨려오는 목소리를 가까스로 감추며 그러한 질문을 던지자 나의 등 뒤에서 한 걸음 떨어진 채로 나를 따라오던 여인은 방긋 웃으며 대답을 해주었다.

“응. 맞아. 그런데 왜? 설마 마음에 안 들어? 최대한 사람이 살기 좋도록 조성을 해보았는데, 당신의 취향이 아니야?”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리 대답을 하는 여인의 모습은, 무척이나 어린아이 같았으며, 자신의 잘못이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는 천진난만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여인의 그러한 모습을 보며, 그녀가 왠지 모르게 귀엽다는 생각을 해버리고 말았다.

아무래도, 그녀가 내게 밝혔던 대로 애인사이까지는 아니더라도 서로에 대해 어느 정도 호감이 있던 사이인 것만큼은 사실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도 아니라면, 저 여자의 잘나빠진 얼굴과 몸매를 보자마자 반해버리고 만 것일 수도 있고.

“...네 이름이 뭐라고 했었지?”

나는 스스로의 감정을 숨기고자 최대한 무뚝뚝한 목소리를 하고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그녀는  따위 것은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사근사근한 어조로 내게 답을 해주었다.

“비앙카. 비앙카라고 해. 비앙카라는 이름이 싫으면 비아, 라고 불러도 괜찮아. 원래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연인들의 이름을 줄여서 부르기도 한데.”

“...비앙카, 라고.”

그녀의 이름을 들은 순간, 다시 한  머리가 지끈하고 아파왔다. 확실하였다. 저 여자, 아니 비앙카와 나는 기억을 잃기 전, 보통 사이가 아니었으리라는 것을 확신할  있었다.

“...그러면, 내 이름은?”

그 질문에 비앙카는 어딘가 모르게 씁쓸한미소를 짓더니 내게 대답을 해주었다.

“카인.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 카인.”

“...카인.”

비앙카의 말 속에는 왠지 모를 아련함과, 그리고  끝을  수 없는 씁쓸함이 담겨 있을 뿐이었다. 비앙카의 대답을 통해,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더 확신할 수 있었다. 저 비앙카라는 저 여자는, 나를 아주 많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동시에 저 여자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비앙카는 지금 자신의 이름만을 내게 말해주었을 뿐, 성을 말해주지는 않고 있었던 것이다.

비앙카가 현재 걸치고 있는 옷이나, 말투나 행동에서 묻어나오는 기품을 미루어 볼 때 비앙카는 귀족 출신임이 틀림없어 보였다. 만약 그녀가 귀족 출신이라면, 그녀와 사랑하는 관계였다던 나 역시 귀족 출신일 가능성이 굉장히 높았다. 신분을 초월한 사랑이니 뭐니 하는 것은 이야기 속에서나 등장하는 개념이지, 현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일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의문 밖에 들지 않았다. 만약 그녀가 고귀한 귀족 출신이라면, 사고로 인해 기억을 잃은 나를 가문으로 데려가 치료하지 않고 이런 한적한 곳에 위치한 오두막에서 나를 간호하고 있던 이유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의 출신 성분이 무엇인지조차 밝히지 않은 채 나를 이곳에 놔두어야만 하는 이유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러한 의문점이 있다고 해서 비앙카를 향해 대놓고 질문을 던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현재의 나는 아무런 힘도 갖추지 못한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비앙카는 계절과 환경을 무시한 채 각종 꽃을 피워낼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마법을 구사할  아는 마법사였다. 힘의 우열이 워낙 명확하였으니, 지금은 그녀에게 정면을 맞서기보다는 어떻게 해서든 정보를 캐내는 것이 현명한 처사이리라.

...하지만, 그녀에게서 정보를 캐내는 것보다, 진실을 밝혀내는 것보다, 우선시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오두막에서 눈을 뜨고 나서 비앙카를 처음 마주한 이후, 줄곧 그녀를 향해 던지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비앙카.”

나는 고개를 돌려 나를 향해 방긋 웃고만 있는 비앙카를 향해 질문을 던져보았다.

“응,  그래?”

“넌, 정말로 괜찮은 거야?”

“뭐가?”

“네가 나에게 이렇게 설명을 하였잖아. 우리 둘은 사랑하는 사이였고, 내가 피치 못할 사고를 겪게 되어 기억을 전부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나의 질문에 비앙카는 아주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자신의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응, 맞아. 그렇게 말을 했어.”

“그러니까 네게 물어보고 있는 거야. 넌 정말로, 내가 처해있는 이 상황에 대해 어떠한 불만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냐고. 정작,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지 않을 지도 모르는데도.”

“.....”

나의 질문에, 비앙카의 두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어떻게 본다면 슬퍼하는  보이기도 했으며, 또 다르게 본다면 동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나는 기억을 잃어버렸어. 덕분에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아. 심지어, 네가 알려주기 전까지는  이름조차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어. 당연히, 너와 함께 했던 시간들 역시 나는 기억해낼 수가 없어.”

“...그건.”

“현재의 나는 아무 것도 기억해내지 못해. 아니, 기억해 낼 수가 없어. 너와 함께한 시간을 떠올릴 방법이 없으니, 결국 현재의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봐야겠지. 정말 유감스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나는 네 얼굴을 보면서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있거든. 어쩌면, 나는 네가 사랑했던 그 사람이 아닐 지도 몰라.”

“.....”

“그렇기에, 네게 묻고 싶어. 비앙카, 넌 정말 괜찮은 거야? 내가 너와 함께한 추억들을 떠올리지 못하고, 너 혼자서만 외롭게 나를 사랑하게 될 지도 모르는데도, 너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이것은, 나를 위한 질문이 아니었다. 이것은, 비앙카를 위한 질문이었다. 도저히 그 속내를 알 수 없지만, 동시에 나를 아주 많이 사랑하고 있는  멍청한 여자의 본심을 알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여전히 나를 사랑할 수 있을지, 물어보고 싶을 뿐이었다.

나의 그러한 질문에, 비앙카는 고개를 절제절레 내흔들었다. 그녀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카인, 당신은 나라는 여자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구나.”

사락-

비앙카는 나를 향해  발짝 사뿐히 걸어오더니 나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을 해주었다.

“...괜찮아. 난, 정말로 괜찮아.”

“...뭐?”

“사실은, 익숙한 일이거든. 누군가가 나를 사랑해주기까지, 참고 기다리는 것은 익숙한 일이거든. 그러니까, 괜찮아. 어쩌면, 당신이 나를 사랑해주었던 기억 같은 것은 아무 상관이 없을 지도 몰라.”

“...상관없다고?”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녀를 향해 그리 묻자, 비앙카는 나의 손을 살포시 잡아주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이리 중얼거렸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이 아닌가 생각해. 그러니까,너무 걱정하지 마. 앞으로, 다시 한 번 둘만의 추억을 쌓아 가면 되는 노릇이니까.”

그리 말을 하는 것과 동시에, 나는 내 입술에 무언가 따스한 것이 말없이 와 닿아 조용히 포개어졌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 말았다. 너무도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피할 틈도 없었다.

그녀의 입술은 따뜻하였고, 그리고 촉촉하였다. 순간, 무언가 달콤한 향을 맛본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였다. 그것은,비앙카의 맛이었다.

“...아.”

입술을 포개고 있는 동안, 비앙카의 호흡을 느낄  있었으며, 비앙카의 체향을 인식하고 있었다. 순간, 눈과 눈이 마주쳤다. 우리는 서로의 눈을 마주치며, 서로의 시선을 결코 피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나는 살며시 나의 두 눈을 감고 말았다. 이대로 눈을 뜨고 있는 것은, 왠지 모르게 무드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찰나인지 영원인지 알 수 없는 시간이 흐르고서야, 우리들은 서로 간의 입술을 떼어낼  있었다. 입술이 떼어지는 순간, 나는 왠지 모르게 아쉽다는 생각을 해버리고 말았다.

“...그거, 알아?”

왠지 모르게 수줍은 듯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는 비앙카.

“방금 그거, 첫 키스였어.”

“...첫 키스?”

...그게 말이 되나? 비앙카와 나는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었나? 그런데 어째서 이것이 첫 키스라는 것이지? 설마 기억을 잃기 전의 나는 수도승 같은 인간이기라도 했던 것인가?

“...그건 비밀. 한 가지 말해두자면, 당신은 상당히 금욕적인 사람이었거든. 그리고, 눈치도 없고.”

뭐가 그리도 우스운 것인지 비앙카는 혼자서 킥킥거리며 웃음을 짓더니 이내 내 옆으로 냉큼 달려와  오른팔에 살며시 매달려 팔짱을 꼈다.

“우리, 산책하자. 사실,  이렇게 당신이랑 함께 산책을 해보고 싶었거든.”

비앙카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한결 더 가벼워져 있었다.

“...함께 산책도 해본 적이 없었나?”

이쯤 되면 기억을 잃기 전의 내가 어떠한 인물인지 궁금증이 들 정도이다. 저런 기가 막힌 미인과 키스를 해본 적도 없는 것도모자라 산책조차 해본 적이 없다니. 혹시 장래희망이 성직자이기라도 했던 것인가?

“아니, 함께 산책 했던 적은 있어. 두 번. 그저, 이렇게 팔짱을 끼면서 산책을 했던 적이 없을 뿐이야.”

그리 대답을 하며 비앙카는 오두막 주위에 피어있던 히아신스 하나를 똑 하나 떼더니 그것을 내게 건네주며 이리 말을 하였다.

“당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주변의 환경을 원래대로 바꿀게. 사실, 나도 조금 과하지 않았나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 당신과 이리 함께 하게 된다면 이리 꽃밭을 조성해보고 싶기는 하였는데, 욕심이 지나쳤나봐.”

어차피 시간은 넉넉하니까 서두를 필요는 없지, 라고 중얼거리는 비앙카를 향해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을 던졌다.

“...꽃밭을 조성하고 싶었다고? 꽃을 좋아했나보지?”

내 딴에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물은 질문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러한 질문을 던진 순간, 비앙카는 언젠가의 과거라도 떠올리기라도 한 것 마냥 아련한 눈빛을 지어보이더니 이내 아주 자그마한 목소리로 이리 중얼거렸다.

“...아니, 사실 나, 꽃 같은 거 하나도 안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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