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7. 호접지몽(胡蝶之夢) - 05
카스타나 후작가에는 자그마한 손님방이 여러 개 마련되어 있다. 귀족과 같이 지체 높은 이들을 머무는 용도로 쓰이는 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용인들이 몸을 뉘이는 정도로 후줄근한 정도도 아닌, 딱 평균적인 크기의 방. 카스타나 후작가의 '손님'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공을 들일 필요까지는 없다고 판단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방이었다.
그리고, 어느 하얀 머리 소녀는 그러한 손님방에 마련되어 있는 침대 위에 얌전히 앉은 채로 창문 밖을 내다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
하얀 머리 소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 것인지 창문 밖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창문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자신의 머리가 흩날리는 것조차 개의치 않은 채 우수에 젖은 눈길로 바깥 풍경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하얀 머리 소녀에게 질문을 던지기 위해 이 자리를 찾은 모든 이들은 그러한 광경을 바라보며 모두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 마냥 그녀를 말없이 쳐다보고 있기만 할 뿐이었다. 그것은, 실로 말로 표현할 수가 없는 무언가 였다. 하얀 머리 소녀의 조형과도 같은 외모도 외모였지만, 그녀에게서는 인세의 미를 가볍게 넘어선 초월적인 무언가가 느껴지고 있었다.
하얀 머리 소녀의 모습을 보며 아이리스는 어릴 적 신전의 벽화에서 보았던 ‘겨울의 여신’의 모습을 떠올리고 말았다. 어딘가 모르게 신성하고 장엄하기가 이를 데 없는 영기를 풍기는 소녀의 모습을 보며 아이리스는 저 하얀 머리 소녀에게 ‘아리아’라는 이름보다 더욱 어울리는 이름이 없으리라는것을 인정하고 말았다.
그렇게 이 자리의 모두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적막에 휩싸여 있을 무렵, 이 방 안에 형성이 되어 있던 고요한 침묵을 깨뜨린 인물은 다름 아닌 카스타나 후작이었다. 원래, 마법사라는 인종은 감수성과 공감력이 현저히 부족한 반사회적 인물이 대부분이었으며 카스타나 후작 또한 그 예외에서 벗어나지 않는 전형적인 마법사였기 때문이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한시라도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원론적인 생각밖에 자리하고 있지 않았다.
“...저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저 소녀에게 묻고자 하는 질문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살짝이지만 목소리 안에 마력을 담은 카스타나 후작의 외침에, 이 자리에 모여 있던 전부는 그제야 하얀 머리 소녀의 모습에서 비롯된 마법에서 헤어 나올 수 있었다. 그것은 아이리스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리스는 이 자리의 다른 이들과는 조금 다른 시선으로 아리아를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역시, 카인이 데리고 다니던 저 시녀는 결코 경시해서는 아니 될 계집임이 틀림없다는 확신을다시 한 번 굳히면서.
“네 이름이, 아마 아리아라고 했던가. 우리는 구면이라 할 수 있는 관계이지. 그렇지 않은가?”
황녀의 질문에 아리아는 지그시 눈을 감더니 아주 살짝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제국의 황녀에게 답변을 하는 태도치고는 그보다 더욱 불경할 수가 없는 태도였다.
"...이런 건방진..."
아리아의 그러한 모습에 황녀의 충견이라고 할 수 있는 크리스가 발끈하며 그녀에게 한 소리를 던지려고 했지만 아이리스는 눈짓으로 그를 말렸다. 어차피, 현 상황에서 아이리스를 향한 태도 따위는 전혀 중요한 바가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 좋다. 내 너에게 친히 물어보고 싶은 바가 있노라. 그날 밤, 에스텔 공작가로 향하는 행렬 속에서 카인 경과 너에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말이지.”
아이리스의 질문에 아리아의 눈동자에서 불이 꺼지고 말았다. 이윽고, 아리아는 자신의 몸을 부들부들 떨기만 하더니, 고개를 푹 숙이며 자그마한 목소리로 이리 중얼거릴 뿐이었다.
“...지 않아요.”
“...뭐라고?”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아요. 아무 것도.”
그 순간, 아이리스는 아리아가 자신의 주먹을 꽉하며 쥐는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카인님과 저는 마차를 타고 에스텔 공작가로 돌아가는 와중이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마차가 흔들리고, 주변에서 소리가 사라졌어요. 그리고...”
“그리고?”
“거기서부터는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아요. 마치, 누군가가 그 순간의 기억을 도려낸 것 마냥 말이에요.”
“.....”
아리아의 대답에 아이리스는 곁눈질로 카스타나 후작을 힐끔하고 쳐다보았다. 그리고 아이리스의 시선에 어떠한 의미가 담겨 있는지 금세 눈치 챈 그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아리아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의 아버지이자 전대 카스타나 가주 또한 아리아의 말에 거짓이 없다고 확언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역시, 그러한가.”
하지만 아이리스는 전혀 실망스러운 기색 없이 아리아의 말에 수긍을 할 뿐이었다. 애당초, 아리아에게서 무언가를 얻어낼 것이라고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비앙카 델 카스타나 같은 철두철미한 여자가 목격자를 남기는 것과 같은 초보적인 실수를 저지를 리가 없었으니까.
'이로서 상황은 다시 원점이로군.'
하지만 완전히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비앙카 델 카스타나에게는, '인간의 기억'에 간섭을 할 수 있는 모종의 기술이 있음이 확실시 할 수 있었다. 그것만 하더라도 큰 소득이기는 하였지만, 동시에 현 상황을 타파하는 것에는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정보인 것 또한 사실이었다.
"....."
그리고, 카스타나 후작은 현 상황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한숨을 내쉬는 아이리스를 그저 옆에서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어찌하여 제국의 황녀씩이나 되는 인물이 아무런 언질도 없이 카스타나 후작가에 방문을 한 것인지, 그리고 에스텔 소공작과 비앙카가 함께 종적을 감추었다는 가십거리에 대해 이토록 열렬한 관심을 가지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애당초, 카스타나 후작은 이 사태에 대해 크게 경각심을 돋구지조차 않고 있었다. 왜냐하면, 카스타나가 천 년에 걸쳐 빚어낸 걸작품인 비앙카 델 카스타나가 누군가에게 당한다는 장면은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마, 비앙카가 그리 죽고 못사는 카인 폰 에스텔과 단 둘이 된 상황을 노려 어딘가 여행이라도 떠난 것이 틀림없다 단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카스타나 후작가 역시 4대 공작가와 더불어 지난 천 년 간 제국을 수호해온 유서 깊은 명문가. 그는 제국의 황녀가 카스타나 후작가를 들쑤시고 다닌다는 별로 달갑지 않은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이번 일을 최대한 빠르게 해결해야할 필요성을 느끼고 말았다.
그가 보기에, 황녀를 카스타나 후작가에서 치워버리는 손쉬운 방법은 오직 하나 뿐이었다. 황녀의 관심을, 이곳이 아닌 아예 다른 곳으로 치워버리는 것.
“저하, 그렇다면 에스텔 공작가에 가보시는 것은 어떠십니까?”
“...에스텔 공작가에? 그건 또 어째서인가?”
“지금쯤이면 에스텔 공작의 귀에 이 소식이 들어갔을 텐데도 에스텔 공작가에서는 어떠한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에스텔 공작은 소공작을 끔찍하게 아끼는 인물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가만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함은 저희들이 알고 있지 않은 어떠한 정보를 쥐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할 따름입니다.”
사실, 아주 틀린 말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카스타나 후작은 마법사다운 추론을 거쳐 에스텔 공작가에 무언가 단서가 있으리라는 것은 나름대로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에스텔 공작가에 황녀님께서 원하시는 답이 있을 지도 모르는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
자신의 바로 앞에서 제국의 권력에 최정점에 서있는 황녀나 카스타나 후작과 같은 인물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쯤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아리아는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백옥과 같은 손바닥의 한가운데에서는, 피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방금 전, 황녀에게서 질문을 받을 당시, 스스로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주먹을 너무 꽉 쥔 나머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 든 것이다.
방금 전, 아리아는 황녀를 향해 이리 대답을 하였다. 마치 무언가가 그 순간을 도려낸 것 마냥, 아무 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사실은, 아니었다. 기억이 없다는 것 자체는 거짓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떤 장면 하나만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지상을 향해 떨어지는 거대한 태양, 곳곳에 가득 차 있는 죽음의 냄새, 그리고 그 절망 속에서, 자신을 구해낸 카인 폰 에스텔의 얼굴을, 그녀는 아직까지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또다. 또 도움을 받았다. 이제는,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이것이 도대체 몇 번째일까. 그는 언제까지 자신에게 손을 뻗어줄 것이며, 자신은 언제까지 그가 내민 손을 붙잡기만 할 것인가. 대체 언제까지고, 자신은 그에게 도움만 받게 될 것인가.
부르르.
몸이 떨린다. 부끄러움과, 수치심과, 자기 자신만이 안전한 곳에 놓였다는 죄책감이 버무려져서, 아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의 몸을 부르르 떨고 말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처럼 눈물을 글썽이지 않았다. 그리고, 좌절하지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리아 또한 마음을 단단히 굳혔기 때문이다. 침대 위에 가만히 앉아서 자신을 책망하거나, 혹은 눈물을 흘린다고 해서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현 상황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행동하는 자만이 지닌 특권이었다.
그리하여 아리아의 두 눈에 굳은 각오가 깃들었다. 그래, 인정하겠다. 비앙카 델 카스타나. 첫 판은, 당신이 이겼다. 당신의 승리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두 번째 판부터는 결코 순순히 당해줄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음번, 비앙카 델 카스타나. 당신을 만난다면. 당신과 마주한다면. 그 때야말로 반드시 오늘의 굴욕을 되갚아 주리라.
그리고, 그 여자의 얼굴이 지독할 정도로 일그러지는 꼴을 반드시 이 눈에 담고 마리라.
그래, 반드시.
****
“...으음.”
눈을 뜬다. 그와 함께, 의식이 천천히 부상한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낯선 공간에서 눈을 떴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
“...아.”
머리가 지끈, 하고 아파왔다. 마치, 오랫동안 기나긴 꿈을 꾼 것 같은 기묘한 감각이 머릿속을 점령하고 있었다.
“...여긴 대체 어디지.”
나는 누워 있던 침대에서 몸을 반쯤 일으켜 내가 머무르고 있던 이 공간을찬찬히 살펴보았다. 이곳은, 한 마디로 말하자면 단란한 오두막이었다. 오두막 그 자체나, 오두막의 내부를 꾸미고 있는 물건들이나, 전부 동화책에서 그대로 튀어나오기라도 한 것 마냥 아기자기하고 단란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문제가 한 가지 있었다. 문제가 뭐였냐면,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더욱 커다란 문제는, 정말 아무 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작게는 내가 왜 이런 곳에 누워있게 되었는지 에서부터 시작해서, 크게는 내가 대체 누구였는지, 아무 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뭐야, 기억상실증인가?”
순간, 나의 입에서는 실소가 흘러나오고 말았다. 옛날이야기나 민담에 심심하면 튀어나오는 그 놈의 기억상실증을 내가 직접 겪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해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다행히 일상적인 지식 같은 것은 잊지 않았다는 사실을 한 줄기 위안으로 삼아야하는 것일까. 일상적인 지식도 몽땅 까먹었으면 밥숟가락 뜨는 법을 잊어버린 치매 환자 같은 꼴이 되었을 지도 모르니까.
‘...아니, 나는 정말로 기억을 잃어버린 것인가?’
사실, 뭔가 위화감이 들고 있었다. 왜냐하면, 아까부터 머리 한 구석이 근질근질하였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내 머릿속에 무언가가 꽉 차 있어 기억을 꺼낼 수가 없는 이상한 느낌이 들고 있었다. 무언가 사소한 계기만 있다면 이 위화감을 해소할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한데-
끼익-
그 때였다. 오두막의 문이 열리고, 어느 한 여인이 이곳으로 들어왔다. 그 여인은 내가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킨 것을 눈으로 확인하자마자, 싱긋하며 미소를 짓더니 이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드디어 눈을 떴구나. 이제 슬슬 깨어날 때라고 생각은 했지만, 예상보다 조금 빨랐네.”
“...너는.”
적발에 적안을 한 저 여인의 얼굴을 본 순간, 다시금 머리가 지끈하고 아파왔다. 분명하다. 나는, 저 여인을 알고 있었다. 어떠한 관계였는지 까지는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저 여자와 내가 보통 사이가 아니었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무리는 하지 마. 당신은 꼬박 사흘이 넘는 시간동안이나 침대 위에 누워있었으니까. 정말, 무리가 많이 가는 남자가 아닐 수 없다니깐.”
그러한 말을 내뱉는 그녀의 두 눈에는, 명백히 나를 향한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 그녀의 눈길은 너무도 노골적이었던지라, 그러한 방면에는 눈치가 없는 나조차도 쉬이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여자의 그러한 모습을 보며 나의 입이 저절로 열리고 말았다.
“...하나, 네게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뭔데? 뭐든 물어봐도 돼. 당신 질문이라면 뭐든 답해줄 테니까.”
나를 향해 여전히 아리따운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를 쳐다보며, 나는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넌 누구지? 그리고, 우리는 무슨 관계이지?”
나의 그러한 질문에, 여인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녀는 손가락을 하나 들어 나의 입술에 살며시 가져다 대더니, 킥하고 웃으며 나의 질문에 이리 답변을 하였다. 마치, 나의 그러한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마냥.
“나는,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네 애인. 그리고...”
여인의 손가락이 나의 입술에서 떨어지고, 그녀는 자신의 오른손을 살짝 들어 나의 뺨을 조용히 매만졌다. 마치, 세상에 다시 없는 보물을 매만지기라도 하는 듯한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