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7. 호접지몽(胡蝶之夢) - 04
오래된, 꿈을 꾼다.
이제는 어느 누구도 기억하고 있지 못하지만, 세상에서 단 하나, 그녀만은 기억하고 있는 그 때의 장면을 그려본다. 그녀가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찬란한 기억을 다시금 되새겨본다.
자신은,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일까. 자신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자신은, 어째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일까.
그녀는, 그러한 질문에 대해 어느 것 하나 답을 알지 못하였다. 굳이 대답을 해야만 한다면, 이리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이유 따윈 없었다. 그녀는 정말, 자신의 삶에 아무런 목적도 가지지 못했으며, 아무런 의지도 품지 못하였으며, 아무런 소망도 가지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부질없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도구로서 살다가 도구로서 생을 마칠, 그러한 보잘 것 없는 삶이라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자신에게는, 다른 평범한 사람들과 같은 행복이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버렸기 때문이다.
어느새 인가, 자신을 도구로서 취급하는 주변인들도 익숙해져 버리고 말았다. 그것이야말로 자신에게 주어진 전부라는 사실에 익숙해져버리고 말았다. 삶이라는 기나긴 도정(道程) 속에서, 자신이라는 사람에게는 행복이란 주어지지 않을 보상이라는 사실을, 너무도 쉽게 인지하고 말았다.
...그래. 어느 날, 운명처럼 그와 마주하지만 않았더라면.
그렇게, 그녀를 둘러싼 운명은 뒤바뀌고 말았다. 그 날, 그녀는 인간다움을 감춘 하나의 기계에서, 한 명의 사람이 되고 말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소년이 그녀를 그리 이끌어주었던 것이다.
- 저기, 우리말이야. 다음번에 또 만나는 거지? 아니, 만날 수 있는 거지? 그렇지?
- 뭐, 만나는 게 뭐가 어렵다고. 네가 마음만 먹으면, 우리는 언제든 만날수 있을 걸.
그렇게 누군가와의만남을 기약하는 법을 배웠으며.
- ...으응,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그래도...
- 아, 설마 어른들 눈치가 보여서 그래? 신경 쓰지 마. 네 마음이 제일 중요한 거지. 왜 다른 사람들 눈치를 보고 그러는 거야?
그렇게 자기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법을 배웠으며.
- 재밌었다. 사실, 너와 노는 거 그리 나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너는 어때?
- ...좋았어. 들뜨고 말았어.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누군가와 함께 놀아본 게, 이번이 처음이니까. 전부, 좋았어.
누군가와 함께 행복해하는 법을 배우고 말았다.
그에게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참으로, 참으로 행복했었다. 자신 같은 것이, 이런 행복을 맛보아도 되나 하는 우려가 들었을 정도로, 행복했었다.
그 후로도, 그와 그녀는 몇 번을 더 마주하였다. 마주할 때마다 추억은 쌓여갔으며, 그녀의 마음속에 소중히 간직해야할 보석은 더더욱 늘어만 갔다. 자그맣고,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볼품없을지도 몰라도, 그녀에게는 자신의 망막조차 태워버릴 정도로 아름다운, 그러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소년과 소녀는, 마지막 만남 때 한 가지 약속을 나누었다. 서로의 새끼손가락을 꼭꼭 걸고, 굳은 약속을 맺었었다. 철없고, 치기어린 아이들 사이였기에 나눌 수 있었던, 그러한 약속이었다.
소녀에게는 세상의 그 어떤 약속보다 소중하고, 꼭 지켜야만 하는 그러한 약속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기다렸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하지만, 그 약속은 잊혀지고 말았다. 끝이 없는 기다림의 대가는, 씁쓸한 후회로 돌아오게 될 뿐이었다.
결국, 소녀는 탄식을 내뱉고 말았다. 그가 만약, 그녀와 마주했던 그 때의 그였다면, 그 때의 순수한 소년이었다면, 자신과의 약속을 기억해주고, 자신을 아껴주던 그 무렵의 소년이었다면, 자신을 이리 홀로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라, 한탄을 하고 말았다.
무엇이 잘못이었을까. 분명 자신이 처음이었을 텐데. 그와 가장 먼저 마주하고, 그와 같이하고, 그와 약속을 맺고, 그와 미래를 함께하자는 약속을 맺은 것도 전부, 자신이 처음이었을 텐데. 자신이야말로 그의 옆에 서 있기 가장 합당한 여자임이 분명할 텐데. 어째서 그는 가장 처음인 자신을 버리고 다른 여자와 함께하기만 하는 것일까.
지긋지긋했다. 이제는 모든 게 지긋지긋하기만 했다. 그와 자신의 사이가 진전되는 것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의 존재가 이제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싫기만 하였다. 차라리 짊어지고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더라면, 더욱 행복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바로 그 부분에서, 악마적인 발상이 떠오르고 말았다.
만약, 어디까지나 만약의 영역의 일이기는 하지만, 그와 자신이 처음 만났을 그 때 그 무렵처럼,자신만을 바라봐준다면?
만약, 그가 세속의 모든 것을 잊어버린 채 오직 그녀 밖에 알지 못한다면?
만약, 어떠한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의 옆에 오직 자신 만이 곁에 있어준다면?
그 때에도, 그는 여전히 자신을 받아주지 않을 것인가.
...아니면, 그 때야말로 그는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을까?
****
“...늦었군.”
아이리스는 카스타나 후작가에서 상당히 거리가 떨어진 황량한 공터에 서서 우울한 어조로 그러한 말을 뇌까렸다. 그녀 나름대로 서두른다고 서두른 것이었건만, 비앙카 델 카스타나가 뿌려놓은 ‘청동새’와 ‘바위산의 거인’을 처리하기 위해 무리를 한 것은 결국 실책으로 작용하고 말았다.
완성되지 않은 몸으로 아득한 수준의 검리(劍理)를 재현한 대가는, 참혹하다고 밖에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최대출력도 아니고, 나름대로 힘을 억누른다고 억누른 것이었건만, 아이리스는 천검(天劍)을 휘두른 대가로 결국 하루가 꼬박 넘는 시간 동안이나 기절을 해버리고 말았다.
그 결과가, 바로 이 모양 이 꼴이었다. 그녀가 눈을 떴을 때에는, 모든 상황은 이미 종료가 되어 있었다. 카인과 비앙카 델 카스타나의 약혼식에 참석하지도 못했으며, 당시 카인이 펼친 화려한 활약상도 감상하지 못하였으며.
...불과 하루 전, 카인과 비앙카 델 카스타나가 이곳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을 때도 그녀는 결국 아무 것도 하지 못하였다.
“.....”
그녀는 황량하기 만한 공터 한 가운데에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크기의 크레이터가 입을 쩍하니 벌리고있는 광경을 보며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직경만 따져도 100미터는 훌쩍 넘어갈 성 싶었으며,그 깊이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10여 미터는 될 것 같은 엄청난 크레이터였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크레이터는 자연적으로 생성된 것이 아니라 어젯밤, 누군가의 손에 인위적으로 생겨난 결과물이라는 것이었다.
“...흠.”
아이리스는 크레이터의 단면을 손으로 살짝 매만져 보았다. 크레이터의 단면은, 유리처럼 맨들맨들하기만 하였다. 마치, 그 온도를 감히 측정할수조차 없는 초고열의 화염이 흙에 닿기라도 한 것 마냥.
아이리스가 알기로 이렇게 거대한 크레이터를 생성시킬 정도로 막강한 파괴력과 더불어 초고열의 화염을 동반하는 마법은, 이 세상에 오직 하나 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백염의 탄식인가.”
지금으로부터 10년 뒤, 비앙카 델 카스타나가 직접 개발한, 세상에서 그녀만이 사용할 수 있는 고유 마법. 자신이 펼친 마법의 흔적을 감출 생각조차 하지 않은 비앙카의 대담무쌍함에, 아이리스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참으로 노골적이로군. 아니, 일부로 이런 흔적을 남긴 것인가?”
아이리스는 비앙카의 생각이 손에 잡힐 듯 아른거리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현 시점에서 백염의 탄식이란 이 세상에 ‘아직’ 존재하지 않는 마법. 그 말인 즉 슨, 세상의 어느 누구도 이 크레이터를 보며 비앙카 델 카스타나의 흔적을 찾아낼 수 없다는 말과 일맥상통하였다.
...그래, 바꿔 말하자면 비앙카 델 카스타나와 마찬가지로 10년 뒤에서 회귀를 한 사람이 아니라면 결코 그녀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말이었다.
“...교활한 여자 같으니. 이런 식으로 머리를 굴리는 것은 취향이 아닌데 말이지.”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이 거대한 크레이터는 비앙카 델 카스타나가 남겨놓은 메시지나 다름이 없었다. 만약 자신과 카인을 찾아내고 싶다면, 자신에게 10년 뒤에서 회귀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을 감수해야 할 것이라는, 선전포고나 다름이 없었다.
물론, 이따위 가소로운 엄포에 제국의 황녀인 아이리스가 겁을 집어먹은 것은 아니었다. 예나 지금이나 아이리스 엘 데브하르트라는 여인을 구성하는 본질은 같았다. 뒷구멍에서 행하는 중상모략은 그녀의 취미가 아니었다. 상대가 어떠한 개수작을 부리건, 자신은 정면에서 그것을 통째로 쳐부술 뿐.
그렇게 아이리스가 크레이터를 쳐다보며 고심에 빠져있을 무렵, 그녀의 등뒤에 어떠한 인영이 나타나더니 이내 그녀를 향하여 예를 갖추어 부복을 하였다. 다름 아닌, 황녀의 호위기사인 크리스가 이곳에 도착을 하였던 것이다.
“저하. 지시하셨던 대로 카스타나 후작가에서 정보를 취합해왔사옵니다.”
크리스의 말에 아이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이곳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증인들의 증언부터 읊어 보거라.”
아이리스의 말에 크리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에스텔 공작가로 향하던 모든 수행원들의 몸에는 어떠한 외상도, 부상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그 어떠한 것도 기억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저, 다들 어느 순간 정신을 잃고 바닥에쓰러졌을 뿐이더군요. 하지만, 예외가 한 명 있습니다.”
“예외?”
“예, 카인님께서 전속 시녀라고 데리고 다니던, 아리아라는 자그마한 여아입니다.”
“...아리아.”
그 이름을 들은 순간, 아이리스는 저도 모르게 눈썹을 치켜 올리고 말았다. 그녀 역시, 아리아라는 이름의 하얀 머리 계집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회장에서 그녀와 아리엘 티에르 사이에서 설전이 오고갈 당시, 아리엘을 향해 ‘아줌마’라고 부르던 당돌한 계집. 카인이 언제나 곁에 데리고 다니며 귀여워하는 발칙한 계집. 그리고-
‘...아니, 확실한 것은 아니다.’
순간, 아이리스는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어떠한 가정에 대해 부정을 하고 말았다. 아직은, 확실한 것이 아니었다. 결정적인 증거는 없었다. 그저, 얼굴이 비슷하게 생긴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니, 섣부른 판단은 삼가는 것이 좋다고 판단을 내렸을 뿐이었다.
...그래, 아직은.
“현재 그 아이의 상태가 어떠하기에 그러느냐?”
아이리스는 자신의 내심을 감추고자 최대한 무뚝뚝한 어조로 크리스를 향해 말을 하였다.
“...그것이, 외상은 전혀 없지만 현재 마력 탈진 증상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의사의 말에 의하면, 자신이 다룰 수 있는 마력의 허용치를 넘어선, 분에 넘치는 마법을 다루었을 때 이러한 증상이 나타난다고 하더군요.”
“마력 탈진 증상이라.”
아이리스는 자신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거대한 크레이터를 바라보며 무언가에 수긍이라도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현 시점에서 틀림없는 인류 최강자 중 한 명인 비앙카 델 카스타나를 상대로 하여 꽤나 고군분투를 펼쳤음을 쉬이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비앙카를 상대로 하여 마력 탈진 증상 외에는 어떠한 상처도 없다는 점을 미루어 볼 때 비앙카가 정말 인명 피해를 낼 생각은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고 봐야겠지.
“...으음.”
이만하면 단서는 충분하였다. 아이리스는 크리스로부터 전해들은 여러 가지 정보를 기반으로 하여 마치 퍼즐이라도 맞추듯 사건의 진상에 대한 하나의 구도를 그려나가기 시작하였다.
비앙카 델 카스타나가 흑탑에서 연구한 주요 테마인 ‘인간의기억’
습격자들의 기습에 의해 갑작스럽게 취소가 되어버린 카인과 비앙카의 약혼식.
거대한 크레이터만을 남겨둔 채 모습을 감춘 카인과 비앙카.
단서는, 전부 나와 있었다. 그리고, 일련의 단서가 가리키고 있는 하나의 정답은, 너무나도 뚜렷하였으며, 그렇기에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비앙카 델 카스타나가 정신이 나간 미친년이라는 사실은 익히 잘 알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이렇게 커다란 스케일로 일을 벌일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해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아니면, 굳이 이러한 선택을 내려야 했을 만큼 정신적으로 몰려있는 상황이었거나.
“...크리스, 그 아리아라고 하는 아이가 깨어나려면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하다더냐?”
아이리스의 다소 뜬금없는 질문에도 크리스는 막힘없이 대답을 내놓았다.
“심각한 증세가 아니기에 빠르면 오늘 저녁에 눈을 뜰 것 같다 들었습니다만.”
크리스의 대답에 아이리스는 무언가를 재보기라도 하듯 곰곰이 생각을 해보더니 이내 크리스를 향하여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선, 카스타나 후작가로 돌아가도록 한다. 아리아라고 하는 그 아이가 깨어나면, 그 아이에게서 내 듣고 싶은 말이 있으니 말이다.”
그리 결론을 내린 아이리스가 크리스에게서 몸을 휙 하니 돌렸다. 그리고, 크리스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의 아주 작은 소리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아무래도, 한동안 비앙카 델 카스타나와 기나긴 술래잡기를 해야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만이 들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