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7. 호접지몽(胡蝶之夢) - 03
“...카인. 제발, ‘그렇다.’라고 말을 해줘. 네가 짊어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리고, 나에게 와주겠다고 고개를 끄덕여줘. 그러면, 나 또한 내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너와 함께 할 테니까...”
그리 말을 하며 내 뺨을 쓰다듬고 있던 비앙카의 손길이 점점 나의 입술 쪽을 향한다. 그녀의 손길은, 참으로 노골적이었으며, 그렇기에 너무나도 치명적이었다.
“...비앙카.”
“카인.”
내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비앙카는 기쁜 듯 나를 쳐다본다. 그녀의 눈동자 안에는, 내가 자신을 말을 따라줄 것이라는 굳은 신뢰와, 나를 향한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
...이쯤 되면, 머저리가 아닌 이상 눈치를 챌 수밖에 없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제는 인정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간, 한사코 부정을 해왔다. 그런 일만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을 해왔다.
무려 천 년이라는 시간동안이나 지속되어 왔던 에스텔과 카스타나의 반목.
아름답고, 지체 높으며, 부유한 카스타나 후작가의 적손인 비앙카 델 카스타나와, 몰락하고 쇠락해가는 에스텔 공작가의 후계자인 카인 폰 에스텔.
원정대에 속해있을 당시, 왠지 모르게 나를 마땅치 않은 눈빛으로 바라보며, 나를 무던히도 괴롭혔던 비앙카.
장애물은, 많았다. 눈치 채지 못할 이유 또한 많았다. 그녀의 마음을 인정해야할 이유보다, 부정해야 할 이유가 훨씬 차고 넘쳤다. 어쩌면, 인정을 하기 싫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내 마음 속에서, 비앙카 델 카스타나라는 여자는 그저 악독하기만 한 여인으로서 남아있는 편이 훨씬 간편하고, 마음이 편했으니까.
그녀가 어째서 나를 향해 저런 말을 하는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그녀는 성숙한 어린아이였다. 몸은 10년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성숙하게 변하였지만, 그녀의 정신은 그 때 그 시절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어른이 된다면 함께하자는 어린 아이들의 치기 어린 약속을 철썩 같이 믿은 채, 아직까지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언젠가는, 내가 자신을 맞이하러 올 것이라는 그러한 기대감을 품은 채로.
“...비앙카.”
참으로, 멍청한 여자였다. 어째서, 그 따위 약속을 철석 같이 믿은 채,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일까. 그런 약속 따위, 정말 아무 것도 아니었을진데. 그냥,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이 분명하였을 텐데.
여기까지 와서 도망을 칠 수는 없었다. 그녀가 나를 향해 이리 진심을 내보인 이상, 나 역시 그녀에게 답변을 줄 의무가 있었다. 그리 마음을 먹은 내가, 천천히 그녀를 향해 입을 떼려고 하던 찰나였다.
“...비앙카님, 지금 뭐하시는 것인가요?”
아리아의 날이 선 목소리가, 비앙카를 향한다.
“아무리 카인님과 단 둘이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그랬다고는 하지만, 모든 일에는 시기와 절차가 있는 법입니다. 에스텔 공작가로 향하는 행렬을 기습한 것도 모자라, 힘을 앞세워 카인님을 겁박하는 모습은,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카스타나 후작가의 영애라고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모습이군요.”
“...아아, 그러고 보니 그 이의 옆에 너도 있었구나. 내 사죄하도록 하마. 너무 보잘 것 없고 초라해서, 그만 너를 들짐승이나 뭐 그런 것이라 생각해버리고 말았으니까.”
피식 웃으며 비앙카는 아리아를 향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비앙카가 짓고 있는 미소는 너무도 섬뜩하였고, 동시에 너무도 아름다웠다.
“...완전히, 미쳤군요. 스승님께서 말씀하시길, 마법사는 어느 누구보다 이성적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한다 그리 당부를 하셨는데, 비앙카님은 너무도 감정적이고, 거기에 제정신이 아니기 까지 하군요.”
“...아리아.”
비앙카를 향해 신랄한 말을 퍼붓는 아리아를 보며 내가 그녀를 제지하려고 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있었다.
“...정말, 마음이 들지 않는 계집이구나. 참으로 건방지기가 이를 데 없어. 내 너를 금방이라도 찢어죽이고 싶은 것을, 카인의 낯을 보며 참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주제에, 입은 참으로 청산유수로구나.”
아리아를 향하는 비앙카의 목소리는 나른하기가 이를 데 없었지만, 그 안에는 흉험하기 짝이 없는 살기가 깃들어있다는 것을 금세 눈치 챌 수 있었다. 역시, 내가 카스타나 후작가에 당도한 날 느꼈던 살기는 거짓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비앙카!”
나는 다급하게 비앙카의 이름을 외쳤다. 안 된다. 현재의 아리아는 결코, 비앙카에게 미치지 못한다. 물론, 아리아는 언젠가 마법사로서 비앙카가 이룩한 경지를 훌쩍 뛰어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날은 결코 오늘이 아니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강한 이는 비앙카였다. 아리아가 비앙카에게 맞서게 된다면, 승산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저 개죽음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결말 따위는 요만큼도 바라지 않았다.
“...약속했었잖아. 나와, 아리아를 카스타나 후작가의 손님으로서 대우를 해주겠다고 말이야. 네 입으로 한 약속을, 네입으로 깨뜨릴 생각인 것인가?”
“.....”
나의 말에 비앙카는 잠시 멈칫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이내 피식하며 웃음을 지어보였다.
“...아아, 카인. 당신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 같은 사람이로구나. 당신에게 있어 원수라고 할 수 있을, 겨울의 마녀조차 긍휼히 여기다니 말이야.”
겨울의 마녀.
그 말이 비앙카의 입에서 나온 순간, 나는 저도 모르게 두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하지만, 의외로 커다란 충격은 받지 않았다. 그냥, 드디어 올 것이 오고 말았다는 생각만이 들 뿐이었다. 사실, 어느 정도는 짐작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스타나 후작가에서 비앙카가 아리아를 처음 보았을 때, 그녀가 아리아를 향해 살기를 뿜어내던 모습을 보며, 실은 그녀에게도 미래의 기억이 있는 것이 아닐까 추측을 하기도 했었다.
...그저, 그것을 현실로서 받아들일 용기가 부족할 따름이었다. 어딘가 다 함께 야유회를 다녀온 것도 아니고, 마녀를 토벌하기 위해 함께 원정대 생활을 함께 했던 기억은, 나에게 있어 결코 아름다운 기억이라고는 할 수 없었으니까.
“그래, 내가 너무 멍청했었어, 카인. 설마하니, 과거로 돌아온 것이 세상에서나 혼자뿐이라는, 그런 오만한 생각을 해버리고 말았단 말이야.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을 해보아도,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훨씬 높은데 말이지.”
비앙카는 연신 키득거리더니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뭐어, 그리 놀랄 필요는 없어. 당신이나와 마찬가지로 10년 뒤에서 회귀했다는 것을 알아 챈 것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우리의 약혼식이 있던 날, 당신이 ‘흐르는 별’을 사용하여 그 버러지의 마법에 간섭을 하는 광경을 보고서야, 겨우 눈치 챌 수 있었다고.”
“...그런.”
비앙카의 말에 나는 허탈한 웃음을 내비추고 말았다. 새삼스럽지만, 지금까지의 나의 행동이 너무도 경솔하게만 느껴졌다. 특히, 내가 황녀에게 흐르는 별을 배울 당시, 코앞에서 뻔히 지켜보고 있던 것도 모자라 어느 정도 훈련에 도움까지 준 비앙카의 앞에서 흐르는 별을 사용했으니, 이건 뭐 정체를 들키고 싶어서환장을 한 사람의 행태로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깜짝 놀랐지 뭐야. 설마, 저것에게 이름까지 붙여주고, 시녀로 데리고 다니고, 마법을 익히게 해준것도 모자라, 그렇게 감싸주기까지 하다니.”
그리 말을 하며 아리아를 쳐다보는 비앙카의 눈은, 약간이지만 씁쓸함이 깃들어 있었다.
“...당신이 호인(好人)이라 그런 것일까. 아니면 저것이 그만큼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 어느 쪽이든, 정말 부럽기 짝이 없는 일이 아닐 수가 없네. 나는 아무 것도 가지지 못했는데, 내가 손에 넣은 것은 모래마냥 전부 새어나가기만 했는데, 저것은 어떠한 노력도 없이 당신의 옆자리를 꿰찼구나.”
“...익숙한 일이기는 해. 언제나 그래왔었지. 내 인생에서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반복되어온 일이니까. 카인, 당신의 옆에 다른 여자가 서있는 그러한 광경은, 이젠 익숙하기만 해.”
“.....”
“처음엔 기다렸지. 아니,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생각했었어. 그렇게 쭉, 참고 기다리기만 하였지. 그래, 당신 옆에 사라 세르나드라고 하는, 이상한 창녀가 들러붙기 전까지는.”
비앙카의 입에서는 이미 웃음이 걷혀있었다. 현재의 그녀에게서는, 회한과, 원망과, 그리고 나를 향한 증오만이 느껴지고 있었다.
“난 그래도 참았어. 그 뒤로 10년을 참았어. 하지만, 그 때도 당신은 내 곁에 존재하지 않았지. 아이리스 엘 데브하르트, 아리엘 티에르, 그리고 키리에 엘 데나리스. 당신 곁에는 언제나 새로운 여자만이 가득하였지.”
“...있잖아, 카인. 난 욕심쟁이인 것 같아.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어. 누군가가 당신 곁에 있는 것을, 참을 수가 없어. 당신도, 나와 약속했잖아. 어른이 된다면, 나와 함께 해주기로. 내 곁에 있어주기로. 그러니까, 당신에게 간청할 따름이지. 부디, 내 손을 잡아줘. 나를, 당신의 곁으로 이끌어줘, 카인.”
애절한 얼굴을 한 채로 나를 향해 손을 뻗는 비앙카의 모습은, 마치 스스로의 죄가 사해지기를 바라는 죄수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비앙카.”
이것은, 나의 잘못이었다. 결코 다른 곳을 향해 눈을 돌릴 수 없으며, 돌려서도 안 되는 나의 원죄였다.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내뱉어 놓은 채, 끝끝내 자신의 말에 책임지지도 못하고 있는, 한심한 겁쟁이의 한탄이었다.
...그러니, 나는 그녀의 손을 잡을 수 없었다. 에스텔과 카스타나의 결혼은, 아무리 따져도 득보다는 실이 더욱 많은 결혼임이 틀림없었다. 언제든 손바닥 뒤집듯 취소할 수 있는 ‘약혼’과, 한 번 맺어진다면 쉽사리 무를 수 없는 ‘결혼’은, 그 정도의 간극을 지니고 있었단 말이다.
작게 본다면 두 가문의 구성원의 어마어마한 반대에서부터 시작하여, 크게 본다면 천 년간 지속되어 온 4대 공작가 사이의 균형이 무너질지도 모르는 거대한 사안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에스텔과 카스타나의 힘의 차이는 너무나도 컸다. 작위가 더 높은 에스텔과 세력이 더 강성한 카스타나. 우리들이 결혼을 한다 가정하면, 두 가문이 하나로 통합되는 가운데에서 얼마나 많은 잡음이 일어날지는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에스텔도, 카스타나도 서로 자신만의 이득을 생각하며 상대방을 배려해줄 리가 없으니 말이다.
결국, 나와 비앙카의 행복만을 생각하며 그녀의 손을 쉽사리 붙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 당신은, 스스로의 행복이 아니라, 스스로의 욕망을 쫓기로 한 것이구나.”
그렇게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뇌까리던 비앙카는, 우울한 기색으로 나를 힐끗 쳐다본다.
“...그렇다면 잊어버려. 전부 잊어버려. 나와 함께한다면, 에스텔도 카스타나도, 그따위 것은 신경도 쓰지 않게 해줄게. 스스로의 행복만을 쫓게 해줄게. 카인, 내가 당신을, 반드시 행복하게 만들어 줄게.”
그리 말을 하는 비앙카의 손가락이 서서히 위로 올라간다. 나의 입술을 지나치고, 볼을 살짝 쓰다듬은 후, 나의 귓불을 매만지고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위로 올라갔다.
“...비앙카, 이건 무슨...”
왠지 모를 섬짓한 기분에 그녀의 이름을 나지막하게 부르는 바로 그 때였다.
파지직-!
콰콰쾅-!
순간, 내 앞에 서 있던 비앙카에게 벼락이 떨어지고, 비앙카가 그 벼락을 피해 순식간에 10미터를 뒤로 물러난 것은 전부 찰나 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리아는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이내 입술을 꽉 깨물며 이리 말을 하였다.
“...카인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저는 이 순간을 위해, 카인님의 힘이 되어드리기 위해, 마법을 배운 것이니까요. 비록, 카스타나 영애에게는 미치지 않겠지만, 적어도 카인님과 이 자리에서 이탈하는 것쯤은 쉬이 할 수 있다고 자부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러한 아리아의 말을 들은 비앙카는 의외로 어떠한 조롱도 던지지 않았다. 아니, 입가에 살짝 미소마저 띠운 채 이러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당신이라면, 아니 당신이기에 그런 말을 할 자격은 충분하다 생각해. 겨울의 마녀. 제 아무리 영락하고 쇠한 끝에 그런 비참한 모습을 하고 있다지만,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 진리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던 당신을 향한 경의를 표하도록 하지. 이것이, 당신이라는 재앙에 대해 내가 내놓은 하나의 대답이니까.”
그리고 비앙카의 말이 끝난 그 순간, 하늘에서 엄청난 광량이 쏟아졌다. 새까만 밤에서, 밝디 밝은 대낮으로, 환경이 단숨에 뒤바뀌고 말았다.
하늘을 쳐다보니, 휘영청한 보름달 옆에, 태양이 하나 더 떠올라 있었다. 그 태양으로부터 쏟아지는 빛이, 이 주변을 낮으로 바꿔놓은 것이 분명하였다. 태양으로부터 쏟아지는 엄청난 복사열에, 나와 아리아가 서 있는 바닥이 지글지글 끓어오르기 시작하였다.
단순히 세계의 이치를 비트는 수준이 아니라, 세계의 섭리를 바꿔버리는 듯한 그 마법을 보며, 나는 저도 모르게 기억의 저편에 있던 어느 한 마법의 이름을 내뱉고 말았다.
“...백염(白炎)의 탄식.”
10년 뒤, 비앙카가 독자적으로 고안해 낸 고유마법이자, 화력이라는 면만 살펴보자면 마녀의 마법과 대등하다 일컬어지는, 인류가 구사할 수 있는 최강의 마법이 이 자리에서 구현이 된 순간이었다.
“어떠한 이도 죽이지는 않아. 약속은약속이니까. 하지만, 당신만큼은 양보 못 해. 나는, 내가 지니고 있는 것을 전부 내버릴 각오로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니까.”
“으, 으윽....!”
그 압도적인 마력과, 압도적인 화력과, 압도적인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아리아는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다. 어떻게든 대항을 하려하지만, 그것은 무리였다. ‘겨울의 마녀’가 아닌, 카인 폰 에스텔의 전속 시녀 아리아는, 비앙카 델 카스타나에게 결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카인, 걱정하지 마. 다음에 눈을 뜰 때에는, 그런 사소한 걱정 따위는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
그 말과 동시에 비앙카는 손가락을 아래로 까닥하고 움직였다.
이윽고, 지상에 두 번째 태양이 낙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