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0화 〉7. 호접지몽(胡蝶之夢) - 01 (50/201)



〈 50화 〉7. 호접지몽(胡蝶之夢) - 01

그리하여, 연회장 내의 싸움은 결판이 났다.

열린 창문 사이로, 장내에  줄기 바람이 불어 들어온다. 식장 안의 열기를 조금이나마 식혀주는  바람에, 이 자리에 있던 모두는 미몽(迷夢)에서 깨어난 사람 마냥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모든 이들의 시선은 식장 안에서 홀로 우뚝 서 있는 어느 한 청년의 뒷모습을 향하고 있기만 할 뿐이었다.

...실제로 싸움이 이루어진 것은, 고작해야 1분 남짓한 시간에 불과하였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욱 짧을지도 모르는, 극히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 모여 있는 모든 하객들은 그 시간이 영겁에 가까운 시간이 아닌가 생각을 해버리고 말았다. 방금 전, 서로가 서로를 인정할 수 없다며 상대방을 향해 흉험한 살기를 뿜어내던 그들의 모습은,  자리에 모여 있던 모든 이들에게 크나큰 인상을 남기고 말았던 것이다.

어떻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지도 모른다. 평생을 우아하고 고아하게 살아온 대부분의 귀족들에게 있어, 그토록 원초적이고 야만적인 살기가 오고가던 전쟁터의 광경은, 결코 있을 수도 없고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는, 그러한 종류의 무언가임이 틀림없었던 것일 테지.

싸움은, 끝났다.

패자는 저만치,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 있었으며, 승자는 홀로 남아 고고히 자신의 뒷모습만을 모두에게 비추고 있을 뿐이었다.

 자리의 모두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그저 승자의 등을 바라보고 있기만  뿐이었다. 감히, 숨소리조차 함부로 낼 수 없었다.  장내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그러한 분위기가 형성이 되어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그의 뒷모습은 추레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등은 땀으로 흠뻑 젖어 축축하기 이를 데 없었으며, 그가 입고 있는 정복은 상대의 검에 수차례 베인 탓인지 옷이 아니라 넝마에 가까운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손끝은 짓뭉개져 있고, 검상을 수도 없이 입은 그의 손에서는 피와 진물이 끝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의 전체적인 모습은, 아무리 보아도 승자의 뒷모습이라는 할  없었다. 승자의 모습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그의 모습은, 차라리 패배자에 가깝게 보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자리의 어느 누구도 그를 보며 추레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식장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겉모습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눈에는, 저 청년이야말로 세상 어느 누구보다 승리자에 가까운 존재임이 틀림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보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함부로 거동을 하지 못하는 자신의 약혼녀를 지키기 위해, 자신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상대를 맞아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당당하게 맞서 싸운 그의 모습을. 손에 무기 하나 없었음에도, 맨손으로나마 그에 맞섰던 그의 투혼을. 그러한 그의 몸에 나 있는 모든 상처는 훈장이었으며, 동시에 명예로운 전흔(戰痕)이었다.

그의 모습은, 참으로 용감하고 씩씩했다. 그렇기에, 모두가 이렇게 생각을 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자신의 약혼녀를 위해 죽음과 맞섰으며, 끝끝내 죽음조차 이겨내었노라고.

“...카인 폰 에스텔.”

누군가의 입에서, 그의 이름이 주문처럼 흘러나온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귀족들은, 그에 대해 알고 있었다. 어찌 모를 수가 있겠는가. 제국의 4대 공작가 중 하나. 에스텔 공작가의 소공작. 그리고, 별다른 특색을 가지지 못한, 평범하기 이를  없는 청년.

솔직히 말하자면, 얕보고 있다고 해도 좋았다. 다른 4대 공작가의 후계자와는 다르게 두각을 드러내지도 못하고, 오히려 온갖 소문을 몰고 다니는 그에게, 공작가의 후계자로서의 숭경(崇敬) 받을 자격이 없다 생각을 해버리고 말았다. 에스텔 공작가가 쇠락에 쇠락을 거듭해 나갔다는, 산증인과 다름이 없다 단정을 지어버리고 말았다.

비앙카  카스타나와의 약혼 또한, 카인  에스텔에게 있어 너무 과분한 약혼이라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그가 공작가의 적손이 아니었다면, 카스타나 후작가의 하나 뿐인 후계자와 이어질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라며 남몰래 그를 비웃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착각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이 자리의 모두를 설득하기 위해 어떠한 거창한 말을 지껄일 것도 없이, 행동으로서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지를 강하게 웅변해보였다. 그는 스스로의 행동을 통해,  자리의 모든 귀족들에게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해보였던 것이다.

“....아.”

...그리하여, 싸움은, 끝이 났다.

식장을 떨쳐 울리던 거대한 폭음도, 격렬하게 오고가던 검극(劍戟)도, 이미 온데 간데 사라지고 없다. 이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형편없지만, 결코 꺾이지 않을  같은 등을 지닌 한 청년뿐이었다.

청년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모든 귀족들은, 이내 약속이라도 했던  마냥 그의 뒷모습을 향해 예를 담아 목례를 올리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눈에, 카인 폰 에스텔은 그들의 배례(拜禮)를 받을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었던 것이다.

주위는, 그저 적막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는, 자신을 향해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의 품에 매달려 있는 아리아의 머리를 조용히 쓰다듬고 있을 뿐이었다.


****


“카인님, 이제 정말 집으로 돌아가는 거 맞죠? 그렇죠? 이런 이상한 곳에는 다시는 오지 않는  맞죠?”

카스타나 후작가가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눈을 샐쭉하게 뜨며 그리 질문을 하는 아리아를 향해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아리아의 등을 한차례 토닥여주었다.

“...그래, 이제 정말로 끝이다. 이제는 진짜 집으로 돌아가는 거야. 아리아.”

나는 카스타나 후작가에 머무르는 동안 겪어야만 했던 알콩달콩한 좆같은 추억들을 다시금 되새기며 아리아를 향해 그리 대답을 해주었다. 나의 말은 사실이었다.

카스타나 후작가의 뒤에 암약하고 있던 쥐새끼들의 흔적을 잡는 것에 성공함에 따라, 나와 비앙카의 계약은 자동적으로 종료가 되고 말았다. 그 말인 즉 슨, 이제는  이상 비앙카 그 계집애의 약혼자 시늉이라는, 실로 소름이 끼치는 연극을 지속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말과 일맥상통한 말이었던 것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녀석들의 습격사건으로 인하여 나와 비앙카의 약혼식은 그대로 흐지부지 되어버렸다. 뭐,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기는 하였다. 카스타나 후작가의 이름을 걸고 개최한 약혼식의 한 가운데에서, 그 당사자들이 습격을 받았다는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절반 정도는 자신들이 의도한 감도 있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자면 카스타나 후작가는 스스로의 얼굴에 먹칠을 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점에 대해 내가 카스타나 후작에게 물어보니, 그는 나의 질문에 이리 답변을  뿐이었다.

- 카스타나 후작가는 고작해야 그 정도의 일에 흔들릴 정도로 약하지 않다네. 오히려, 이만한 일로 이들을 잡아낼 수 있었으니 싸게 먹힌 것이라 해야겠지.

...뭐, 내가 보기에는 결코 이득이라고 할 수 없었지만 가주가 그렇다고 하는데 외부인인 내가 오지랖을 부릴 일은 아닌  같았다. 애당초, 에스텔 공작가와 카스타나 후작가는 그런 안부 인사가 오고갈 만큼 사이가 좋은 가문도 아니었고. 나는 카스타나 후작에게서 그들로부터 알아낸 정보를 공유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후 자리에서 순순히 물러났다.

이제 끝이었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이런 일이 자꾸만 벌어진다면 심장에 급격한 무리가  지도 몰랐다. 이제는 에스텔 공작령에 쳐박혀 유유자적한 삶을 즐기리라 굳게 맹세를 하며 한창 짐을 싸고 있을 때였다.

벌컥!

사전에 어떠한 예고도 없이 문이 열린다. 노크라는 것을 배우지 못한 어떠한 야만인이 이런 무례한 짓을 저질렀나하고 고개를 돌려보니, 문 앞에 서서 숨을 거세게 몰아쉬고 있는 비앙카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카인, 너 지금 뭐하는 거야? 짐은 도대체 왜 싸는 거고?”

나에게 그리 질문을 하는 비앙카의 목소리는 벌벌 떨리고 있었다. 마치, 속에서 급격히 올라오고 있는 무언가를 참아내지 못하는 기색인 것 같았다. 나는 비앙카의 그러한 모습을 보며 눈을 깜빡이고 말았다. 도대체 얘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였다.

“뭘 하고 있냐니. 당연히 집에 가려고 짐을 싸고 있는 중이잖아. 처음에 너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대로 그 수상쩍은 녀석들을 전부 잡았으니까. 자동적으로 우리들의 계약 관계도 종료가 된 것이나 다름없지. 그러니 더 이상 내가 이곳에 있을 이유 또한 사라진 것이 아니겠어?”

계약으로 받아낼 금액은 카스타나 후작이 추후에 에스텔 공작가에 직접 전달해 주기로 하였으니 이곳에 남아 있을 이유는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나의 그러한 말에 비앙카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난다. 마치, 내가 이렇게 나오리라고는 상상조차 해보지 않은 기색이었다.

“야, 약혼은? 우리, 약혼식을 맺기로 했잖아. 그리고, 습격 때문에 약혼식을 제대로 치루지도 못했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에스텔 공작가로 돌아가겠다고?”

“....? 약혼식은 어디까지나 녀석들을 잡기 위한 명분에 불과한 것 아니었나? 그 목적을 달성한 이상, 굳이 그러한 연극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되는데.”

나의대답에 비앙카의 숨이 가빠지기 시작하였다. 마치, 나의 대수롭지 않은 대답에 점차 이성을 잃어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원정대에서 쌓아온 짬밥에 의하면, 그녀의 저러한 모습은 분노가 폭발하기 일보 직전의 태도임이 틀림없었다. 대노(大怒)의 전조현상이었단 말이다. 그 모습에 나는 옆에 서 있던 아리아를 힐끗하고 쳐다본다. 만약, 비앙카가 빡돌아버려서 나를 쳐죽이기라도 하려 한다면, 아리아만이 나의 유일한 희망이었으므로.

“...그러면, 나를 사랑한다고 모두의 앞에서 선언했던 것은? 그건 뭐였는데?”

“...그건, 그런 말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잖아.  약혼을 하냐고 질문을 던져오는데, 계약 관계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말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

순간, 비앙카의 거칠어졌던 숨소리가 뚝하고 멈춰졌다. 아무래도, 그녀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임계점을 넘은 것이 아닌가 추측될 따름이었다.

“...그럼, 나를 홀로 놔두지 않겠다고 말했던 것은? 그리고, 언제나 나의 곁에 있어주겠다고 말했던 것은?”

“.....”

그제야 나는 상황이 조금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챌  있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아무래도 비앙카는 ‘거짓 약혼’이라는 소꿉장난에 조금 과도하게 몰입을 해버리게 된 것 같았다. 아니면, 내가 그 때 내뱉었던 말이 그녀의 어떠한 감성을 건드리고 말았던 것이거나.

“비앙카.”

“...어, 어? 왜?”

내가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자 비앙카는 왠지 모르게 어린 시절로 퇴행을  것 마냥 얼떨결한 기색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그러한 모습은, 왠지 모르게 나에게 그리운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듯 하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 뿐이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으며 그녀를 향해 하나의 결론을 내놓는다.

“너도  알고 있잖아. 에스텔의 후예와 카스타나의 후예가, 서로를 사랑하고, 그 끝에 이어진다는, 통속극 같은 이야기가 현실에 일어날 리가 없다는 것을 말이야.”

“...뭐?”

나의 발언에, 비앙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져간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것은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천천히 말을 이어나간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네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다만, 네가 거짓 약혼에 꽤나 진지하게 임하고 있었다는 것쯤은 나도 알  있을  같아. 그러니,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하나 밖에 없어.”

“뭔데?”

“그냥, 꿈을 꾸었다고 생각해. 비앙카.”

나의 말에, 비앙카의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무언가가 흘러넘칠 것만 같았다. 나는 그녀의 그러한 모습을 보며, 마음 속 깊이 떠오르는 어떠한 가정을 애써 부정한다. 비앙카  카스타나라는 여인은, 나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여인으로 남아있어야만 하므로.

“...꿈?”

비앙카가 나를 향해 애절한 목소리로 되묻는다.

“그래, 꿈. 너는, 그냥 꿈을 꾼 거야. 잠에서 깨어나면, 아무렇지도 않게 잊혀지는, 그런 꿈을.”

나의 말에, 비앙카의 두 손이 부들부들하고 떨린다.

“...거짓말이었어?”

“뭐?”

“그 때, 할아버님 앞에서 말했잖아. 모두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서 말했잖아. 어린 시절, 나와 약속을 나누었다고. 함께 하기로, 약속했다고. 그것조차, 네게는 거짓이었어? 네게는, 한바탕 꿈에 지나지 않는 그러한 일이었어?”

비앙카의 말에 나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거짓말은 아니었어.  나름대로, 진심을 담아 한 말이었어.”

“그럼, 그러면, 대체 왜? 대체 왜 그러는 건데? 왜?”

“하지만, 그건 우리가 철이 없던 시절 나눈,  시시한 이야기에 불과할 따름이잖아.”

‘시시한’이라는 나의 말에, 비앙카의 몸이 완전히 정지해버리고 만다.

“비앙카. 우리는 이제 어른이잖아. 우리는 이제 스스로의 등에 짊어지고 있는 것이 너무 많은 어른이 되어버렸다고. 우리는 더 이상, 자기 자신만을 생각할  있는 그런 나이가 아니라는 것을, 어째서 몰라주는 것일까.”

“...카인. 너...”

“비앙카, 나는 장차 에스텔 공작가를 승계 받아야 하는 소공작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야. 날 때부터 에스텔 공작령의 모든 신민들의 위에 선 대가로, 그들을 보살펴야  의무를 지닌 사람이라고. 나는, 이런 나를 ‘소공작’이라 부르며 믿어주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혼자만을 생각할 수는 없어. 스스로를 절대로 굽힐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리 말을 하며 나는 아리아를 향해 눈짓을 하였다. 나의 신호를 쉽사리 알아들은 아리아는, 이미 다 싸놓은 짐가방을 나에게 건네준다. 나는 커다란 충격이라도 받은 것 같은 비앙카를 아무 미련 없이 지나치며, 이러한 말을 남겼다.

“그럼, 안녕히. 사실, 너의 약혼자 시늉을 하는 거, 그리 나쁘지는 않았어.”

쾅!

바람이 세차게 불었던 탓인지, 방문은 거센 소리를 내며 닫힌다.

그리하여, 모든 것은 끝이 났다. 아마도.


****


“.....”

오래도록, 비앙카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텅 빈 방 안에 홀로 외로이 남아있었다. 아무런 생각조차  수 없었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그녀를 구성하고 있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요 며칠 간, 그녀가 느꼈던 모든 행복이 거짓된 허상이라는 생각이 들고 말았다. 그렇다. 손에 넣었다고, 완벽하기 그지없었다고 자부하고 있었건만, 사실은 허상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모래 위에 쌓아올려진,  채의 성에 불과한 행복에 불과했던 것이다. 언제든지 무너질 준비가 되어 있는,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 허깨비.

털썩.

무릎을 꿇고 말았다. 눈앞에 있는 침대에 자신의 얼굴을 묻고 말았다. 이대로 울어 버린다면 소리가 새어 나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문득, 침대 시트에 그의 잔향(殘香)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침대 시트를 움켜 쥔 채로 그의 냄새를 맡고 있는 자기 자신이존재하고 있었다.

“...미친년.”

스스로를 향해자조적인 욕을 내뱉으면서도 손에서 침대 시트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그의 냄새가 남아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침대 시트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과 같았다.

“...아, 흑...”

그의 냄새를 맡고 있나니, 그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그 순간, 비앙카는 깨달았다. 자신이라는 여자는, 그에게서 떨어지고는 도무지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을. 한 번 그와 함께하는 행복을 맛본 이상, 이제 그가 없는 삶으로는 돌아갈 수가 없다는 것을.

...하지만 동시에 그가 싫었다. 미웠다. 사라 세르나드와 약혼을 한 이후, 10년 만에 그와 다시 재회했을 때 이상으로, 그가 너무너무 싫기만 하였다.

그는, 부정하였다. 자신에게 있어서는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어린 시절의 빛나는 추억을, ‘시시하다’라며 부정하였다. 자신의 손으로, 그 추억을 진창 속에  박아 넣었다.

그렇게 그는, 자신으로부터 도망가고 있었다. 자신에게서 도망가고 있었다. 그 끝에, 자신을  팽겨둔 채 다른 여자와 만나려하는 그의 모습을 상상하니, 저도 모르게 머리가 새하얗게 변해버리고 말았다. 분노로, 증오로, 손끝이 벌벌 떨려오기만 하였다.

또다. 또 빼앗기고 말았다. 사라 세르나드에게 빼앗겼고, 원정대의 다른 여자들에게 빼앗겼으며, 하얀 머리 계집에게 빼앗기기까지 하였다. 그렇게, 자신은 한 번도 그를 독점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 단 한 번도.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틀어, 단  번도.

싫다. 싫다. 싫다. 이제는 싫었다. 무기력하게 그를 빼앗기기만 하는 자신도, 자신의 인생도, 다른 계집들도, 전부 다 싫었다. 그가 자신만을 바라봐주었으면 했다. 자신만을 사랑해주었으면 했다. 그의 아이를 낳고 싶었다. 그 끝에, 둘이서 행복해졌으면 한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언제나 최악의 가정으로만 남겨둔, 결코 실행해서는 아니된다 다짐하였던, 그런 생각이.

“...뭐야, 답은 간단했었네.”

비앙카의 입이 기묘하게 뒤틀린다. 그녀는 어딘가 고장 난 듯 킥킥 웃음을 지은 끝에, 해답을 찾아내기라도  것 마냥 환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이번에는, 다른 곳으로 절대로 도망치지 못하게 설득하면 되는 일이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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