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6. 헛소동 - 17
약혼식이 시작되기 대략 1시간 전.
“후작님, 저를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만.”
비앙카로부터 전언을 전해들은 카인이카스타나 후작의 집무실로 들어서니, 어딘가 모르게 굳은 얼굴로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는 카스타나 후작이 그를 맞이해주고 있었다.
“...어서 오게, 에스텔 소공작.”
“무슨 일로 저를 부르신 것입니까? 이제 약혼식까지 정말 얼마 남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카인의 의아함이 섞인 질문에 카스타나 후작은 한숨을 푹 내리쉬며 답을 해주었다.
“그대 앞이니 내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하겠네. 얼마 전, 카스타나 후작가에 스며들은 간자의 정체를 특정 지을 수 있었다네.”
카스타나 후작의 말에 카인의 눈이 반짝하며 빛나고 말았다.
“그거 참다행인 소식이군요. 그럼, 조금 늦은 감이 있기는 하지만 약혼식은 자동적으로 취소가 되는 것입니까?”
여기까지 와서도 도망칠 생각으로 가득한 카인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카스타나 후작은 머리를 좌우로 조용히 내저었다.
“유감스럽게도, 약혼식은 그대로 강행을 해야 할 것 같다네. 애초에, 자네에게 그것을 부탁하기 위해 보자고 한 것이라네.”
“...네?”
카스타나 후작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눈살을 찌푸리는 카인에게,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를 향해 책 한 권을 건네준다.
“이건무엇입니까?”
“직접 보면 안다네.”
그 말에 카인은 그에게서 책을 받아들은 후 그 내용을 차근차근 읽어보기 시작하였다.
“...하.”
그리고 머지않아, 책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전부 읽은 카인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카스타나 후작이 자신에게 건네준 책의 내용이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었던 것이다.
“이건 대체 무엇입니까?”
아까와 똑같은 질문이었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의미는 달랐다. 카스타나 후작 또한 그것을 잘 알았기에 이번에는 순순히 대답을 해주었다.
“간자의 방에서 발견된 일기장이라네. 자네도 보았다시피, 자신이 어째서 후작가를 배반하였는지, 그리고 장차 무슨 일을 저지를 것인지에 대해 개인적인 심정을 잔뜩 저술해 놓았지.”
카스타나 후작의 대답에 카인의 눈이 황당함으로 가득 찬다.
“...어처구니가 없군요. 세상 천지에 어떤 정신 나간 간자가 그런 물건을 자신의 방 안에 놔두고 다닌다는 말입니까? 제가 보기에는 정체를 들키고 싶어서 환장한 미친 짓으로밖에 보이지 않는군요.”
카인의 말에 카스타나 후작 역시 동의를 한다는 듯고개를 끄덕인다.
“내 말이 그 말이라네, 소공작. 수상쩍어도 너무도 수상쩍어. 내가 보기에 이들의 행동은 정상이 아닐세.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기는 하지만, 이들은 스스로의 행적이 탄로가 날 것이라는전제하에 움직이는 것 같다네. 마치, 자신이 간자라는 것을 모두에게 알리고 싶어 하지 않았나,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 정도이니 말일세.”
후작과 카인 모두 설마 자신들의 추측이 정답일 것이라고는 미처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의혹을 지울 수가 없군. 이것이 혹시 함정이 아닐까, 만약 함정이라면, 저들은 대체 무엇을 노리고 있는 것일까. 대체 왜 이런 일을 꾸미고자 한 것일까... 하는 의혹들 말일세.”
“그래서, 제게 부탁하고자 하는 일은 대체 무엇입니까?”
카인의 말에 카스타나 후작은 낯빛을 굳히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간단하네. 저 ‘일기장’의 가장 뒤편에 보면, 자네와 비앙카의 약혼식 도중, 후작가 내부에 있는 다른 한 명의 간자와 동조하여 자네를 습격할 계획이라고 적혀있다네. 그러니까...”
“그러니까, 녀석들의 계획을 뻔히 알고는 있지만 과연 어떻게 나올 것인지 가만히 지켜보자는 말씀이신 것입니까?”
카인의 말에 카스타나 후작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장담하도록 하지. 그대에게 해가 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무엇보다, 자네의 옆에는 비앙카가 있지 않는가? 그 아이의 실력이라면 그런 녀석들 따위 눈 깜짝할 사이에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네. 자네가 할 일은, 녀석들이 자신의 마각(馬脚)을 드러내기까지 참고 기다리는 일 뿐이라네.”
“.....”
카스타나 후작의 말에 카인은 고심에 빠져들었다. 원래대로라면 이렇게 위험한 일은 사양해야만 하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카인은 비앙카가 어떠한 여자인지, 그리고 어떠한 실력을 갖추고 있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여자가 당해내지 못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열이 넘지 않을 것이다. 비앙카가 옆에 있는 한, 자신은 털끝만큼의 상처도 입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그의 뇌리속에는 그날 밤 사라와 나누었던이야기가 끊임없이 재생되고 있었다. 저주, 반지, 정치적 목적을 내포한 약혼. 세르나드 백작가, 그리고 에스텔 공작가.
고심은 짧았다. 그는 카스타나 후작을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명백한, 긍정의 표시였다.
****
‘빌어먹을! 나한테 해가 되는 일 따위는 절대로 없을 것이라 했으면서!’
카인은 속으로 그렇게 기함을 지르고 말았지만 사태가 여기까지 온 이상 아무 짝에 쓸모없는 투정에 불과하였다. 설마하니 알 수 없는 이유로 비앙카가 전투불능이 될 것이라고는 어느 누구도 예측하지 못하였을 테니까.
더군다나, 현 상황은 카스타나 후작을 향해 칭얼거림이나 늘어놓을 만큼 한가롭게 돌아가는 중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순간에도 카인을 향해 조슈아의 검이 세차게 휘둘러지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카가가각!
조슈아의 검이 공간을 휩쓸어갔다. 그의 참격이 쉴 새 없이 카인을 덮쳐온다. 찌르고, 베고, 올려 긋고, 내려찍는 동작이 고작 한호흡만에 이루어진다. 눈으로 뒤쫓기 힘든 초고속의 연격이었다.
하지만 카인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그 연격을 피해내었다. 고작해야 종이 한 장 차이로 조슈아의 검이 카인의 몸을 스쳐지나간다. 카인이 스스로의 몸을 비틀었다. 조슈아의 찌르기가, 카인의 심장을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갔다.
“병신.”
카인이 조슈아를 바라보며 조롱을 던졌다. 다음 순간, 그의 반신(半身)이 빙글하고 돌며 조슈아를 향해 쇄도한다. 노리는 곳은 후두부. 흐르는 별을쓸 것까지도 없었다. 팔꿈치에 힘을 주며, 스스로의 팔을 채찍과도 같이 휘두른다.
파앙-!
하지만 막힌다. 조슈아는 자신의 몸을 비틀어 카인의 주먹을 피해낸 것과 동시에 검을 반월의형태로 흩뿌렸다. 그 안에 담겨 있는 흉험한 살기에, 주위의 모든 것이 갈기갈기 찢겨나간다.
스르륵-
하지만 그 순간, 카인의 모습이 식장 안에서 소실되었다. 이지가 날아가 버린 조슈아조차도 일순 당황하여 검을 멈칫하고 말았다. 그리고-
불쑥.
조슈아의 뒤편에서 갑작스레 카인이 ‘출현’하였다. 조슈아가 그의 기척을 느꼈을 때는, 한 발짝 늦은 뒤였다. ‘흐르는 별’이 발동한다. 그의 양손에 집중된 힘의 흐름은, 평상시 그의 완력의 몇 배는 훌쩍 넘는 강대한 힘이었다.
우드득!
카인의 양손이 조슈아의 오른손을 양손으로 붙잡고 힘껏 비틀었다. 뼈가 비틀리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진다. 그 격렬한 통증에, 조슈아 또한 고통을 참아내지 못하고 검을 떨구고 말았다. 카인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상대방은 무장을 해제당한 상태였다. 아무리 보아도 이것은 기회였다.
“카인, 뒤!”
헌데 그때였다. 비앙카의 다급한 목소리가 저편에서 들려온다. 순간, 카인은 저도 모르게 옆으로 몸을 날린다. 그리고-
콰앙!
1초 전까지 카인이 있던 자리에 폭발이 일어나고 말았다. 고개를 황급히 돌려 보았다. 저 편에, 지팡이를 들고 있는 중년 남성이 방금 전 마법을 쏘아 보낸 원흉임이 틀림없었다.
‘저 새끼도 간자였던 것인가?’
잠시 소강상태가 된 틈을 타 황급히 좌우를 돌려보니 카인과 비앙카, 그리고 저 빌어먹을 개자식들을 둘러싸고 반원형의 결계가 쳐져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래서야,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을 도와주고 싶어도 무리라는 것을 깨닫고 만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사실이 있었다면, 저 중년인은 지금 이 결계를 유지하느라고 제대로 된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 하나일까.
‘카스타나 후작 그 양반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카인은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고 만다. 하지만 지금은 무엇을 원망하건 그 어떠한 의미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우선, 저들의 손에서 살아남는 것이 우선적인 과제였으니까.
스윽.
조슈아가 멀쩡한 왼쪽 손으로 검을 주워든다. 검을든 자세가 매우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양손잡이 이거나 혹은 왼손으로도 검을 휘두르는 연습을 했던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하지만,녀석의 전력이 크게 감소한 것만은 확고한 사실이었다.
투웅!
전투가 벌어진 이후 처음으로, 카인이 조슈아를 향해 덤벼든다. 공간을 접어,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카인을 바라보며 조슈아는 스스로의 살기를 부풀어 오르게 하였다. 그의 검에서 넘실거리는 무언가가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오러는아니었다. 하지만,조슈아는 모종의 수단으로 자신의 검격을 강화시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카인은 자신의 경계심의 수위를 한 단계 높였다.
서로의 거리가 순식간에 줄어든다. 조슈아가 검을 휘둘러온다. 노리는 곳은 그의 명치. 허나 찰나의 순간, 카인의 손이 그림과도 같이 움직인다. ‘흐르는 별’에 의해 강화된 그의 손은, 일순간이지만 어지간한 강철과 맞먹는 강도를 지니고 있었다.
“큭!”
하지만 카인은 조슈아의 검과 자신이 손이 맞부딪힐 때마다 손에 저릿한 통증이 올라오는 것을 느끼고 말았다. 황녀의 흉내를 내보았건만, 역시 자신의 흐르는 별은 황녀의 숙련도보다 한참 못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될 뿐이었다.
콰지직!
흐르는 별로 기세를 최대한 죽였음에도 결국 조슈아의 검에 카인의 손톱이짓뭉개지고 말았다. 순간, 카인의 미간이 고통에 일그러지고 말았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방어에 집중하고 있던 그의 손이 틈을 내보이고 말았다.
때를 놓치지 않고, 조슈아의 검이 카인의 목을 향해 덤벼든다. 이전까지의 스피드를 아득히 상회하는 속도로 검이 날아든다. 이지를 찾아볼 수 없는 조슈아의 눈에 희열감이 깃든다. 이 거리, 이 자세라면 적은 결코 검을 피할 수 없으리라!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조슈아의 결정적인 패인이었다.
투확!
카인이 손을뻗는다. 위협적인 속도로 카인의 목을 향해 날아가던 조슈아의 검이, 위협적인 속도로 다른 곳으로 튕겨나간다. 일직선으로 찔러진 검이 다른 방향으로 궤도가 꺾여나가는 모습은 놀랄 정도로 자연스러웠으며, 그렇기에 기괴하기가 짝이 없었다.
하지만 카인도 결코 무사하지는 않았다. 그의 양손은 이미 피투성이였다. 무리한 자세에서흐르는 별을 펼친 대가로, 그가 미처 해소하지 못한 힘의 흐름에 양손의 핏줄이 모조리 터져버리고 만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사소한 것 따위는 전부 무시한 채 조슈아를 향해 주먹을 휘두른다!
그 때였다.
“카인!”
다시 한 번 비앙카의 외침이 들려온다. 고개를 힐끗 돌려 쳐다보니, 결계를 유지하고 있던 중년인이 카인의 무방비한 등을 노리고 전격을 쏘아 보낸 것이었다. 피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잠시 후, 벌어지게 될 끔찍한 참상에 비앙카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만다.
하지만, 이 자리의 모두가 결코 상상도 하지 못한 광경이 펼쳐지고 말았다.
파지지직-
분명 카인의 몸통을 향해 내쏘아진 전격이, 카인이 휘두른 왼팔에 모여들었다. 카인의 통제에 의해 그의 왼팔을 감싸고 있는 황금빛 뇌전은, 마치 그를 주인으로 인정한 것 마냥 순순하기 이를 데 없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한 번 기습한 놈이, 두 번은 하지 못할까. 안 그래?”
뇌전에 의해 왼손이 타들어가는 고통을 애써 무시하며, 카인은 씩하고 웃음을 지어 보인다. 카인의 왼손이, 조슈아의 가슴에 그대로 직격한다.
콰아아앙!
“크아아아악!”
흐르는 별에 의해 응집되어 있던 힘과, 뇌전이 더해진 힘이 조슈아의 몸 안에서 폭발을 일으키고 말았다. 조슈아가 꼴사나운 비명을 지르며, 연회장의 벽에 내동댕이쳐진다.
“커... 허....”
그것이, 조슈아의 마지막 단말마였다. 녀석은 눈을 까뒤집으며, 천천히 눈을 감고 말았다.
“.....”
장내에 침묵만이 흐른다. 카인의 헐떡이는 숨소리만이 이곳에 가득 차 있는 소리의전부였다. 눈을 힐끗 돌리니, 결계를 펼치고 있는 중년인을 포위하고 있는 카스타나 후작가의 마법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카인은 자신을 향해 덤벼드는 아리아의 등을 찬찬히 토닥여주며 작은 목소리로 한탄을 내뱉고 말았다.
“...이게 어디가 쉽고 간편한 일이라는 거야, 빌어먹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