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6. 헛소동 - 14
새벽빛이 밝아왔다. 동쪽 하늘의 지평선 너머, 이바렌치아 산맥의 뾰족한 봉우리 저편에서 서광이 드리우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푸른 잎사귀 사이로 두견새가 카나리아처럼 지저귀고 있는 소리가 모든 사람의 귀를 간지럽히고 있었다. 따스한 황금빛 광채를 쬐고만 나뭇잎은 스스로의 몸을 움츠리기라도 하듯 자신의 위에 맺혀 있던 영롱한 이슬 한 방울을 바닥에 똑 하고 흘리고 말았다. 카스타나 후작가의 아침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고즈넉하기 이를 데 없는 아침을 맞이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평소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사교성이 없는 마법사들의 소굴이어서 그런가 조용한 것을 넘어 언제나 음산하기 짝이 없던 카스타나 후작가로부터 흡사 시장통을 방불케 하는 소음이 새어나오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카스타나 후작가에서 흘러나오는 소음의 주된 원인이란 다름 아닌 비앙카와 나의 약혼식 준비 때문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볼품 없어도 카스타나 후작가는 돈이 썩어 넘치면 넘었지 결코 모자라다고는 할 수 없는 으리으리한 가문. 고작해야 돈 몇 푼 때문에 가문의 위신을 깎아내리면서까지 초라하고 볼품없는 약혼식을 치룰 인간들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래, 그것이 설령 가짜 약혼식이라도 할지라도 말이다.
‘...이거, 일이 너무 커져버린 것 아닌가?’
나는 현재 카스타나 후작가의 본채로 이어지는 대로변의 앞에서 북새통을 이루고 있는 마차들을 질린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알기로 오늘 나와 비앙카의 약혼식에 초대를 받은 귀족들은 딱 서른둘. 초대받은 이들은 에스텔과 카스타나의 이름값이 있는 만큼 제국의 북부를 대표하는 실세 중의 실세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었다.
물론, 제국 전체로 따져본다면 그리 권위가 높은 귀족들이라 말하기 힘들었지만 원래 똥개들도 자기 집 앞마당에서는 반은 먹고 들어가는 법이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카스타나 후작가에서는 그 짧은 시간동안 자신들이 불러낼 수 있는 최적의 인선을 뽑아낸 것이나 다름이 없으리라.
하지만 나는 오늘 나와 비앙카의 약혼식에 참여하는 하객의 명단을 보며 저도 모르게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고 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비앙카와 나누었던 ‘계약’과는 이야기가 조금 다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몇 주 전, 비앙카의 제안을 수락하였을 때만 하더라도 나는 약혼이라는 것은 그저 카스타나 후작가의 뒤에 암약하는 쥐새끼들을 잡아내기 위한 명분이라 생각을 했을 뿐이지 이토록 거창한 스케일로 약혼식이 이루어질 것이라고는 미처 상상도 해보지 못했단 말이다!
절망스러웠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고작해야 돈 몇 푼 때문과 내 미래의 혼삿길을 맞바꾸게 된 셈이 아니던가? ‘약혼을 두 번이나 올렸음에도 끝끝내 어느 누구와도 혼례를 치르지 못한 카인 폰 에스텔’ 의 명성이 대륙을 떨쳐 울리게 될 생각을 하니 나의 등 뒤에서는 저절로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말았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이 상황에서 나를 더욱 빡돌게 하는 것이 무엇이었냐면 그것은 바로 약혼식의 하객맞이를 도맡은 사람이 바로 나였다는 점이다. 내가 오늘 약혼식의 주인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본래 이러한 행사의 하객맞이는 양가의 가까운 가족이 도맡아 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매우 유감스럽게도 에스텔 공작가에서는 애당초 나 혼자서 이곳에 왔을 따름이며, 비앙카의 친아버지인 카스타나 후작은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이러한 변명을 늘어놓을 뿐이었다.
- 미안하군, 소공작. 매우 유감스럽지만, 나에게는 따로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말일세. 마음 같아서는 내 아내로 하여금 자네를 돕게 하고 싶지만 그녀는 지금 와병중이라 하객을 맞이하는 일은 무리일 것 같군. 그러니 번거롭더라도 자네가 수고를 좀 해주어야 될 듯 하네.
“.....”
그 자리에서 내가 카스타나 후작을 들이받지 않았던 이유는 추후에 그에게서 받을 금액에 지장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구차한 우려 때문이었다는 점을 꼭 밝히고 싶다.
뭐, 그런 구질구질한 뒷사정이 어찌되었든 간에 결과적으로 나는 약혼식장 앞에 서서 하객을 맞이한다는 행운을 부여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덧붙여 말을 하자면, 오늘 약혼식에 참여하는 하객들을 맞이해주는 역할이란 정말로 존나게 피곤한 역할임이 틀림없었다.
“약혼 축하드립니다, 에스텔 소공작님. 저는 렌델(Rendel)이라는 지방에서 영주직을 맡고 있는 드리어드 자작가의 장자, 트레인 드리어드라고 합니다.”
“허어, 그렇군요. 오늘 저의 약혼식에 이리 귀한 발걸음을 해주신 것에 대해 에스텔의 이름으로 환대를할 따름입니다. 트레인 경.”
“하하, 경은 붙이지 않으셔도 됩니다. 소공작. 아직 저는 아버지에게서 정식으로 후계자 지명을 받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그냥 편하게 이름으로 부르셔도 상관없습니다만.”
아무래도 나와 안면을 트고 싶었던 것인지 은근슬쩍 자신을 이름으로 부르기를 중용하는 녀석. 하지만 이 녀석에게는 꽤나 불행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매우 유감스럽게도 나는 녀석이 원하는 대로 살갑게 친한 척을 하며 이름을 불러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녀석의 이름과 같은 아무 짝에 쓸모없는 지식은 나의 뇌에서 자동으로 삭제가 되버린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눈앞의 이 녀석을 ‘뭐시기 자작가의 장자’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작? 좆밥 새끼네?’
참고로 제국에서 손꼽히는 대귀족이라 할 수 있는 에스텔 공작가의 소공작, 카인 폰 에스텔은 머리가 나빠서 그런지 백작 이하의 작위명칭은 잘 외우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귀족들의 작위란 공작, 후작, 백작, 이렇게 셋만 존재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나?
내가 지금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아무 것도 알지 못한 채 녀석은 어딘가 거만한 듯 한 얼굴을 하며 나를 향해 묻지도 않은 별 좆같은 이야기를 하나둘 나불거리기 시작하였다. 내가 잠자코 있으니 아주 신이 난 것 같았다.
“소공작께서는 잘 알지 못하실 수도 있겠지만 저희 드리어드 가(家)는 북부의 특산품이라 할 수 있는 모피가 많이 생산되는 곳입니다. 어떠한 의미에서 보자면 저희 가문이야말로 북부 전체를 대표하는 얼굴과도 같은 가문이라 생각이 될 정도이지요...”
‘지랄하네.’
나는 녀석의 같잖기만 한 자기 가문의 자랑을 들어주며 한숨이 터져 나오려고 하는 것을 막느라 무척 애를 써야만 했다. 하여간, 요즘 세상에는 가문의 이름이 자기 이름인 줄 알며 가문의 이름 없이는 뒷간에도 가지 못하는 병신 새끼들이 너무 많았다.
...설마, 카스타나 후작 그 양반은 자기가 이런 꼴을 보지 않으려고 나를 이 자리에 세워둔 것이란 말인가? 확실히, 내가 그의 입장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등신들을 접대하는 역할만은 사양이었다.
그렇게 내가 온갖 병신들을 상대로 응대를 해주며 인내심의 수위가 한계에 도달하였을 무렵,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타인의 이목을 끌어당기는 어떠한 여인이 이쪽을 향해 살며시 다가오는 광경이 눈에 들어오고 말았다.
사락-
“...카인. 여기에 있었구나.”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나를 찾아온 여인은, 다름 아닌 나의 약혼녀, 비앙카 델 카스타나였다.
****
비앙카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 장내는 끝이 없는 침묵에 빠져들 뿐이었다. 특히 남성들은, 도무지 믿기지 않는 것을 보기라도 한 것 마냥 자신의 눈을 비비기만 할 뿐이었다.
한 마디로 표현을 하자면, 그녀는 그저 아름답기만 하였다. 어떠한 형용사도, 미사여구조차 필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지니고 있는 탐스러운 적발도, 홍옥과도 같이 빛나고 있는 적안도, 그저 아름답기만 한 그녀의 얼굴도, 그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며 그녀가 지닌 극상의 미(美)를 비추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비앙카 델 카스타나라는 여인을 구성하는 전부였다.
‘...이럴 수가, 소문으로는 익히 들었다만... 저러한 여인이 세상에 존재했었단 말인가?’
‘카인 폰 에스텔, 정말이지 행운아가 아닐 수 없군. 저러한 여인과 약혼을 할 수 있다면 자신의 심장을 가를 수 있을 사내들이 세상에 널리고 널렸을 텐데.’
허나 이 자리의 귀족 청년들이 마음속으로 그러한 말을 뇌까리는 것과는 정반대로, 분에 넘치는 여인을 약혼녀로 맞이한 장본인이라 할 수 있는 카인 폰 에스텔은 비앙카 델 카스타나를 향해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어, 비앙카. 왔어?”
“으응.”
표정뿐만이 아니라 그녀를 향하는 말투가 매우 짧기만 하였다. 비앙카를 향한 카인의 응대를 보며 귀족 청년들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꿈틀거리고 말았다. 만약 자신이 카인 폰 에스텔의 자리에 서 있었더라면 자신은 결코 저리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비앙카 델 카스타나는 자신을 바라보는 카인 폰 에스텔의 표정이 시큰둥하건 어찌되건 그 따위는 사소한 것은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자신의 약혼자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어보이기만 할 뿐이었다.
“...카인, 아버님께서 당신을 찾으셨어. 아마, 조금 뒤에 있을 약혼식과 관련해서 당신과 상담하고 싶은 것이 있으신가봐.”
“그래? 그런 문제라면 수고스럽게 네가 전해줄 필요는 없었을 텐데. 어쨌건, 말해줘서 고맙다. 비앙카.”
그리 말을 하며 카인 폰 에스텔은 비앙카 델 카스타나의 어깨를 톡톡하고 두드려주었다. 그리고 그 순간, 비앙카 델 카스타나의 목덜미가 새빨갛게 변하고 말았다. 비앙카의 그러한 변화를 아는지 모르는지, 카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기색으로 그녀를 지나쳐 이내 후작가의 본채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
그리고, 그런 카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다가 이내 자그마한 한숨을 내쉬고 만 비앙카가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려고 하던 찰나였다.
“카, 카스타나 영애! 카스타나 영애!”
아까 전, 하객을 맞이하고 있던 카인과 한참 담화(談話)를 나누고 있던 귀족 청년이 다급하게 비앙카를 불러 세웠다. 그 청년이 비앙카를 불러 세운 이유는 지극히 간단하였다. 현북부의 실세라고 할 수 있는 카스타나 후작가의 적장녀와 안면을 트고 싶다는, 아주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더군다나, 이토록 많은 사람들의 눈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서 라면 비앙카 델 카스타나 또한 쉽사리 자신을 물리치지는 못하리라는 심산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카스타나 영애. 저는 드리어드 자작가의 트레인 드리어드라고 합니다. 우선, 두 분의 약혼을 축하드린 말을 전해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영애를 갑자기 불러 세운 점은 무척이나 죄송스럽게 생각을 합니다만, 개인적으로 영애께 드리고 싶은 말이...”
그 때였다. 무표정한 얼굴로 귀족 청년을 바라보던 비앙카의 얼굴이 얼음장과 같이 냉랭하게 변화한 것이.
“거기까지만 하시지요.”
“...예?”
아직까지도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귀족 청년의 의문성을 뒤로 하고, 비앙카의 싸늘하기 그지없는 옥음(玉音)이 사방에 울려 퍼진다.
“죄송하지만, 전 오늘부로 다른 사내와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지 아니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몸은 이미 그의 약혼녀에 불과한 몸이니 말입니다.”
그리 말을 하며비앙카 델 카스타나는 청년에게서 매몰차게 등을 돌렸다. 그 매서움에,이 자리의 그 어떠한 이도 그녀를 향해 섣부르게 말을 걸 수가 없었다. 비앙카 또한, 이 자리의 어떠한 이와도 말을 섞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비앙카는 단 한 순간도 뒤를 돌아보지 않으며 그 자리에서 유유히 모습을 감추었다.
****
“제기랄! 이게 대체 무슨 개망신이란 말인가!”
카스타나 후작가에서도 사람들의 인적이 드문 외딴 골목, 그곳에서는 비앙카 델 카스타나에게 매몰찬 퇴짜를 맞은 귀족 청년 한 명은 그의 친구라고 할 수 있는 귀족 청년 셋에게 방금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한 푸념을 늘어놓고 있는 중이었다.
“빌어먹을! 그녀와 단 둘이서만 있었던 일도 아니고,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눈이 있던 가운데 그런 망신을 당하다니! 우리 드리어드 가의 명예가 땅바닥에 떨어졌을 것이 분명하겠군!”
“하하, 그 정도 미인에게 말을 걸려면 그 정도 리스크는 감수를 했어야 하는 것이 아니던가? 그나저나, 참으로 도도하기가 이를 데 없는 여인이더군. 제국에서 세손가락 안에 꼽히는 미인이라는 소문은 헛소문이 아니었던 모양이야.”
“그러게 말일세.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그런 여인과 약혼을 치루는 에스텔 소공작이야말로 엄청난 행운아가 아닐 수가 없겠군.”
귀족 청년들 사이에 그런 말이 오고갈 무렵, 비앙카에게 퇴짜를 맞았던 청년은 도무지 분기를 참을 수가 없었는지 끝내 그들을 향한 험담을 늘어놓기 시작하였다. 원래, 철이 없는 남정네가 여럿이 모여 있다면 그 귀결이 타인에 대한 험담으로 흘러가기 일쑤인 마련이었다.
“하, 내 대화를 직접 해보았는데, 에스텔 소공작은 정말 별 볼일 없는 인물에 불과했다네. 허우대만 멀쩡할 뿐, 나와 대화를 하는 내내 나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지도 않는 무례한 인물에 지나지 않았어.”
청년의 에스텔 소공작을 향한 험담에, 다른 청년 또한 신이 나서 맞장구를 쳐주기 시작하였다. 사실 그 또한, 그 정도의 미인과 약혼식을 치루는 카인 폰 에스텔에 대한 질투심이 끓어올랐기 때문이었다.
“크흠, 나도 그와 관련된 소문을 들어본 적이 있지. 어디까지나 소문에 불과하긴 하지만, 그와 세르나드 백작가의 여식이 파혼을 하게 된 배경에는 이상한 추문이 얽혀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네.”
“큭, 걸작이로군. 녀석은 그저 행운아에 불과했군. 다 스러져가는 공작가에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여자 하나를 운 좋게 꿰찬 행운아 말일세!”
그렇게 그들은 한참동안 카인 폰 에스텔에 대한 험담을 신나게 늘어놓았다. 그렇다. 사실, 따지고 본다면 당사자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아무도 몰래 타인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는 것 따위, 누구나 할 수 있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행해지는, 특별할 것이 없는 행위에 불과하였다. 원래 자신보다 잘난 인간에 대해 질투심을 느끼며 험담을 나누는 것은 인간의 본성과 같은 행위였으므로.
...하지만 오늘, 그들은 운이 너무 나빴다. 그들의 죄가 있다면 처음부터 자신들의 등 뒤에 사신의 낫이 드리워졌다는 것을 꿈에도 알지 못했다는 무지함뿐이리라.
츠츠츠-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주변의 대기가 점차 무거워져간다. 이윽고, 그들 또한 무언가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왜냐하면, 약혼식 준비로 그토록 떠들썩하기만 하던 주변의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마치, 그들만이 이 세상과는 별개의 외딴 세상에 납치된 것마냥.
“.....!”
입에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아니, 목소리 뿐 만이 아니었다. 그들이 위치하고 있는 이 공간에는, 오직 침묵만이 절대적인 법칙이 되어 있었다.
또각, 또각.
모든 소음이 사라진 그 세상 속에서, 또각또각 누군가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온다. 지금 걸어오고 있는 누군가에게는, 침묵이라는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은 대체 누가 자신들을 향해 걸어오는 것인지 확인조차 할 자유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스스로의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스스로의 의지로 행할 수가 없었다.
“...사내들이란, 참으로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생물이 아닐 수 없구나.”
나른하고, 어딘가 섬뜩하기만 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 목소리는 아주 은밀하고, 그리고 치명적이었다.
“사내들은 항상 그러하지. 여인을 향해 무언가를 찌르는 상상은 수도 없이 하면서.”
푸욱-!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그들을 관통한다. 비명은, 없었다. 그녀가, 그들에게서 비명을 지를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작 자신이 찔린다는 상상은 쉽게 하지 못하더라고? 그렇지 아니한가?”
키득-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인은 분명히, 웃고 있었다.
“너희들은 결코 해서는 아니 되는 일은 저질렀단다. 그것이 뭐냐 하면 말이지.”
끼리릭-
그들의 손목과 발목이, 인간의 관절구조상 결코 돌아가서는 아니 되는 방향으로 서서히 돌아가고 있었다. 아까와는 다르게, 아픔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더욱 무서웠다. 자신의 몸이, 무언가 이질적으로 되어간다는 공포가 그들을 지배해간다.
“나의 권리를 빼앗아갔기 때문이란다. 그를 향해 뭐라 할 수 있는 것도.”
투두둑-
손목의 회전을 이기지 못한 힘줄이 결국 끊어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이 자리의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그에게서 흘러넘치는 감정을 받아내는 것도, 그리고, 그를 상처 입혀도 되는 것 또한 전부.”
“오직 나만의 권리야. 그의 약혼녀인 나만의, 적법한 권리라고.”
그리 말을 하며 비앙카 델 카스타나는 눈앞에 있는 건방진 애송이들을 향해 싸늘하기만 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거기다가 감히, 오늘 같은 날 내 앞에서 그 이를 모욕하다니. 실로 건방지구나. 그것도, 카스타나의 눈과 귀가 버젓이 달려 있는 곳에서, 그 이의 대한 험담을 지껄이다니. 정말 제정신이 아니야.”
그리 말을 하는 비앙카의 두 눈에서는 귀화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걱정 마렴.너희를 도와주러 이곳에 아무도 오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너희들 또한 이곳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해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 당연히, 죽이지도 않아.”
“...하지만, 너희들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너희들의 몸은 영겁토록 오늘 있었던 일을 기억하겠지. 무의식 깊숙한 곳에는 기억이 남을 거야. 아마 앞으로, 살아가면서 입을 조심해야겠다는 교훈이 뼛속 깊이 박히게 될 걸?”
우드드득-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들은 자신의 몸에 있는 뼈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꺾여나간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더욱 절망스러운 사실은, 이러한 공포를 눈앞에 두고도 정신을 잃을 수도, 미쳐버릴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 공간에 들어선 순간부터 그들의 생사여탈권을 오직 비앙카가 쥐고 있었기 때문에.
물론, 그들의 사정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비앙카는 실로 자애로운 미소를 띠며 저들의 귓가에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이리 속삭였다.
“그러면 어디, 가볍게 손가락 마디 끝부터 시작을 해볼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