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4화 〉6. 헛소동 - 12 (44/201)



〈 44화 〉6. 헛소동 - 12

“...흐음, 크리스. 그거 아는가? 사실 나는 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네. 뭐, 보다보면 꽤나 귀여운 맛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개보다는 고양이 쪽에 호감이 가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더군. 그런 의미에서 자네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네. 자네는 개가 좋은가? 아니면 고양이가 더 좋은가?”

아이리스는 마치 소풍이라도 나온 듯한 여유롭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크리스를 향해 말을 걸었다. 하지만 매우 유감스럽게도 크리스는 하늘과 같은 황녀의 말에 대꾸를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바로 코앞에서는 과장 조금 보태어 어지간한 소보다 훨씬 커다란 체구를 지닌 늑대들이 자신을 향해 날카로운 발톱을 휘둘러대고 있었으니까!

카가가가각-!

자신을 갈기갈기 찢어놓기 위해 발톱을 휘둘러오는 늑대를 간신히 막아내며, 크리스는 저도 모르게 이런 위험하기 짝이 없는 여정을 떠나오는 것에 아무런반대의견도 표하지 않은 몇 주 전의 자기 자신을 힘껏 갈기고 싶다는 충동을 억눌러야만 하였다.

황녀는 카인  에스텔과 비앙카  카스타나의 약혼 소식을 접하자마자, 그대로 살벌하기 짝이 없는 살기를 뿜어내더니 이윽고 자신이 직접 카스타나 후작가에 방문하기를 바라였다. 대외적인 방문 목적은 ‘약혼 축하’였지만, 크리스는 황녀가 카스타나 후작가에 가서 그들을 향해 얌전히 박수만 치다가 온다는 장면을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 황녀는 ‘마차를 타고 간다면 약혼식이 열리는 날짜에 맞추지 못할 것이다.’라는 논리를 내세워 그와 크리스, 단 둘이서만 카스타나 후작가로 떠나기를 강력하게 주청하였다. 당연하지만, 황제는 그녀가 어떠한 호위도 없이 카스타나 후작가로 떠난다는 사실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으며, 그렇게 아이리스와 황제 사이에 기나긴 설전이 오고가게 되었다.

그들 사이에서 어떠한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크리스는 알지 못한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아이리스가 결국 황제의 뜻을 꺾고 크리스와 단 둘이서만 카스타나 후작가로 떠나는 것에 대해 허락을 받았다는 점이다.

그로부터  주, 실로 지옥을 방불케 하는 강행군이 이어졌다. 쉬는 시간 따위는 없었다. 말이 지치면 말을 버리고 가장 가까운 마을에 가서 말을 구입한 후 그대로 내달렸다. 고통으로 가득 찬 이번 여정 내내 황녀는 지친 기색 따위는 일절 내비추지 않았다. 그저 아무 말도 없이, 무언가를 꾹꾹 참는 듯한 불길한 기색을 내비추기만  뿐.

그리하여 그들은 고작해야 단 몇 주 만에 카스타나 후작령에 들어서는 기염을 토할 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제도에서 카스타나 후작가로 통하는 단 하나의 길목을, 여러 마리의 늑대가 가로막고 있다는 이상한 소식을 접하게 된 것이었다.

당연하지만 그들은 늑대가 길을 비켜설 때까지 기다려줄 정도로 한가로운 입장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고작해야 야생동물 몇 마리를사냥하는데 고귀한 황녀가 나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결국 그녀의 호위 기사인 크리스가 나서게 되었다.

그리하여 상황은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크리스는 숨을 헐떡이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늑대들을 향해 조용히 검을 들어올렸다. 어지간한 야생 동물이었다면, 이미 그가 휘두른 일검에 고혼이 되었으리라. 황녀의 호위 기사를 자처하는 크리스에게는, 그 정도의 실력이 있었으므로.

하지만, 그가 상대하고 있는 것들 또한 보통 늑대가 아니었다. 크기도 크기이거니와, 무엇보다 그의 상식에 의하면 늑대는 아가리에서 불을 뿜어내거나 혹은 정수리에 검을 정통으로 찔러 넣어도 오히려 검이 튕겨져 나가는 어처구니없는 내구도를 지닌 생물이 아니었단 말이다!

더군다나, 지능 또한 상당한 수준인 것인지 늑대 주제에 방진(方陣)을 짜서 공격을 해오고 있었다. 크리스를 향해 덤벼들고 있는 늑대의 수는  여섯. 서로가 서로의약점을 보완해주며 교묘하게 빈틈을 파고 들어오는 그 모습은 마치 잘 훈련받은 정예병의 움직임을 연상시킬 정도였다.

카아앙!

크리스의 검과 늑대의 발톱이 정면으로 충돌하였다. 놀랍게도, 늑대의 발톱은 강철로 제련된 검과 부딪히고 있는 주제에 조금도 쇠할 겨를을보이지 않고 있었다. 크리스의 등줄기에서 저도 모르게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말았다. 이대로라면, 황녀 앞에서 추태를 보일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그를 엄습하고 말았다.

“...쯧.”

그리고 크리스의 그러한 모습을 보며 아이리스는 저도 모르게 혀를 차고 말았다. 만약, 이 자리에 카인이 있었더라면 지금과는 사뭇 다른 결과가 나왔을 텐데, 라는 생각을 떨쳐버리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약하군. 이래서야 누가 누구의 호위인지 분간이 가지 않아.”

그리 중얼거리는 것과 동시에 아이리스는 크리스의 측면을 노리고 발톱을 휘두르고 있던 늑대를 향해 자신의 오른손을 불쑥하며 내밀었다. 그것은, 아무리 보아도 죽고 싶어서 환장을  미친 짓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황녀님!”

크리스는 저도 모르게 깜짝 놀라 그녀를 쳐다보고 말았다. 황녀가 강한 것은  알고 있다만 이런 흉험한 생물을 상대로 하여 검조차 꺼내지 않고 덤벼들다니? 순간, 크리스는 늑대의 발톱에 황녀의 옥체가 갈갈이 찢겨나간다는 끔찍한 상상을 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상황은 크리스가 예측한 것과는 정반대로 흘러갈 뿐이었다.

후웅-

황녀의 손과 늑대의 발톱이 서로 맞닿은 그 순간, 늑대의 발톱은 마치 그녀의 몸에 닿아서는  된다는 명령을 받은  마냥 옆으로 흘려졌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일정 범위 내의 모든 종류의 ‘흐름’을 조절하는 흐르는 별의 힘이었다.

“사람을 향해 함부로 이빨을 드러내다니, 주제를 모르는 개가 아닐 수 없군. 그럼, 어디 한 번 주인을 대신하여 훈계를 내려 볼까.”

그리 말을 하는 것과 동시에 아이리스는 피식 미소를 지으며 엄지와 검지를 그러모아 늑대의 머리를 향해 장난스럽게 딱밤을 날렸다. 그리고-

콰아아앙-!

순간, 인간의 피륙에서 비롯되었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커다란 소리가  일대를 강타하였다.

풀썩.

단말마 따위는, 없었다. 그녀의 딱밤을 정통으로 맞은 늑대의 머리는  깜짝할 새에 흔적도 없이 증발해버리고 말았다. 머리를 잃어버린 몸통이 땅바닥에 털썩하며 쓰러진다. 그리고 이내, 땅바닥에 남아 있던 몸통 부분 또한 먼지로 화하여 천천히 스러져가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너무도 현실성이 느껴지지 않아 한 편의 연극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어처구니가 없는 광경이었다.

“...흠, 생각보다 연약하군. 10년 뒤에 비하면 내구도가 현저히 떨어져. 역시, 그녀 또한 아직은 미숙하기 그지없다는 확실한 증거가 아닐 수 없군.”

천천히 풍화되어가는 늑대의 시신을 바라보며 아이리스가 그리 중얼거리고 있을 때, 자신들을 마주하고 있으면서도 등을 돌린 채 무언가 생각에 빠져 있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늑대들은 사납게 울부짖기 시작하였다.

자신들의 주인이 내린 명이 있으니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늑대들의 머릿속에는  건방지기 이를 데가 없는 여자에게 본때를 보여주고자 하는 생각 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크아아아-!”

저 여자가 등을 돌리고 있는 지금이 기회였다. 남은 늑대  한 마리가, 그녀를 빛살과도 같은 속도로 덮쳐갔다.

그녀의 등이 늑대의 발톱에 찢겨나갈 것만 같은  찰나의 순간, 아이리스는 아주 느릿하게 등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늑대를 향해 아주 자그마한 어조로 속삭였다.

“...버릇이 없군. 여인의 뒤를 함부로 노리다니. 아무래도, 본보기가 부족했던 모양이구나.”

콰드드득-!

다음 순간, 아이리스의 손이 늑대의 앞발을 움켜잡고 그대로 반대 방향으로 비틀어버렸다. ‘흐르는별’에 의해 몇 배나 증폭된 폭력적인 힘은, 단숨에 늑대의 거죽을 찢어버리고 뼈가 튀어나오게 하기에 충분한 위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윽.”

그 소름끼치는 소리에, 크리스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제 아무리 자신을 습격했던 짐승이라고는 하지만, 눈앞에서 살가죽이 해체되고 뼈가 튀어나오는 장면을 보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아이리스의 공격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흐르는 별을 사용, 늑대의 전신을 휘감고 있는 마력의 진체(眞體)를 순식간에 파악해내었다. 느껴졌다. 늑대의 거대한 몸통 한 가운데에, 늑대를 현실에 구현화시키고 있는 핵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푸욱-!

강철조차 튕겨내는 단단한 몸체였지만 아이리스의 손 앞에서는 두부와 하등 다를 바 없는 강도였다. 너무도 쉽게 늑대의 심장 쪽에 손을 뻗은 아이리스는, 이내 핵을 붙잡고 손에 살며시 힘을 주었다.

파삭-

핵은, 그녀의  아래서 사탕마냥 바스라지고 말았다. 늑대를 현세에 묶어두고 있던 핵이 소실되어버리자, 늑대의 몸통은 이내 환염(幻炎)이 되어 세상에서 소실되어버리고 말았다.

“...으음. 역시, 진짜 늑대가 아니라 합성수(合成獸)의 일종이었나. 저러한 애완동물을 목줄도 없이 길거리에 풀어두다니, 그 여자는 정말 제정신이 아니로군.”

합성수란 마법사들이 부리는 사역마의 일종이었다. 일반적인 사역마와 다른 점이라면 조금 더 전투적인 측면에 특화되어 있다는 점일까.

늑대에게서 기묘할 정도로 살기가 느껴지지 않은 모습으로 비추어볼 때, 단순히 이 길을 가로막으려는 의도에서 이러한 짐승들을 이곳에 풀어놓았던 것이 분명해보였다. 저 늑대들이 그들을 향해 이빨을 드러낸 것은 크리스가 늑대들을 향해 검을 치켜 올린 직후였으니까.

물론, 그렇다하더라도  따위 흉험한 짐승을 사람이 나다니는 길목에 배치해둔 그녀의 행태는정말 제정신이라고 말하기 힘들었다. 뭐, 거꾸로 생각하면 이번 일에 대해 그 정도로 필사적이라는 의미인 것일 테지만.

주춤.

그녀의 손 아래에서 늑대 두 마리가 순식간에 소멸해버리는 모습을 보며, 늑대들은 처음으로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늑대들 또한, 지금  자리에서 누가 가장 강한 이인지 깨닫고 만 것이다.

“똑똑하군. 이 정도로 영리하면 황궁에서 한 마리쯤은길러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안인 듯 하구나.”

그녀가 겁에 질린 늑대들을 보며 피식 웃음을 지어보일 때였다.

- 끼이이이익-!

 때였다. 갑자기  일대에 돌풍이 몰아치기 시작하였다. 아이리스가 눈을 올려 상공을 보니, 하늘에는 전신에 바람을 휘감고 있는 한 마리의 청동새가 날개 죽지를 퍼덕이고 있었다.

구우우우웅-!

지축이 뒤흔들렸다. 땅의 깊숙한 곳에서, 전신이 암석으로 이루어진 거인이 일어나 그녀를 향해 포효를 하기 시작하였다.

- 구워어어-!!

“...크으윽.”

사방을 뒤흔드는 거인의 포효에 크리스는 저도 모르게 뒤로  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황녀의 호위기사로 있으면서 그야 말로 온갖 것들과 맞상대를 해보았지만, 저런 암석으로 이루어진 거인과 검을 겨룰 것이라고는상상도 해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호오. 정말, 어지간히도 다급했던 모양이구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저들마저 이곳에 대기시켜 놓았던 것인가.”

하지만 저런 괴수들을 바라보며 황녀는 겁을 먹기는커녕 마치 오래전에 헤어진 벗을 만난  마냥 반갑기 그지없다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렇다. 아이리스가 어찌 저들의 존재를 잊어버릴 수가 있겠는가. 원정대 소속의 마법사, 비앙카 델 카스타나가 부리던 최강의 사역마를.

“오랜만이로구나. 스팀팔로스, 그리고 오리에드.”

아이리스가 싱긋 웃으며 그들을 향해 인사를 하였지만, 당연하게도 그들에게서 인사가 돌아오지는 않았다.

끼야아아아악-!

- 구워어어어어-!

청동 새와 암석의 거인에게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폭사된다. 그들은 주인으로부터 어느 누구도  길목을 통과하게 놔두지는 말라는 명령을 부여받았을 뿐이었다. 살업(殺業)은 되도록 지양하라고 주인이 당부를 하긴 하였지만, 청동새와 암석의 거인은 본능적으로깨닫고 말았다. 눈앞의 저 여자는, 자신들이 진심으로 상대를 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잡아먹힐 지도 모르는, 괴물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전력을 다한다. 다음 순간,  일대에 광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하였다. 생명의 생존 그 자체를 불허하는 강풍에, 크리스는 자신의 육신이 으스러져가는 것을 느끼고 말았다.

쿠구구궁-!

암석의 거인이 바위로 이루어진 거대한 팔을 치켜든다. 어지간한바위산보다 더욱 거대한 주먹이, 아이리스를 향해 그대로 내리 찍힌다. 이 세상의  어떠한 인간도, 저 주먹을 맞고서 형체를 보존할 수는 없을 것이리라-

“...이건 조금, 위험하군.”

어쩔  없었다. 상대방에게 기억이 있다는 것은 익히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까지 진지한 수준으로 나올 것이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하였다. 아무래도, 그녀 역시 감추고 있던 패를 하나 내밀어야  듯 보였다.

아아리스의 오른손이 검의 손잡이를 살며시 감쌌다. 그리고, 오른쪽 발을 살짝 앞으로 내딛으며 상체를 약간이지만 낮추었다. 전투가 벌어진 이후, 그녀가 처음으로 잡은 ‘자세’였다.

눈을, 감는다. 지금부터 그녀가 행하고자 하는 것에 시각은 필요 없었다. 필요한 것은 오직, 이 세상을 개변시키고자 하는 그녀 자신의 굳은 의지뿐이었다.

“...하아.”

숨을  차례 깊게 들이 쉰다. 정신을 집중한다. 자신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검의 날을 바로 세운다.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의념(意念)의 흐름이, 고작해야 한 명의 인간에게 집중이 되고 있었다.

벤다. 그것이 그녀가 마음먹은 바였으며, 지금  순간 그녀가 진실로 만들고자 하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다음 순간, 아이리스의  눈이 번뜩하고 뜨였다. 허공에 참선(斬線)이 하나 그어졌다.

철컥-

그 후,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기색으로 검을 도로 집어넣었다.왜냐하면, 이미 모든 것은 끝나있었기 때문에.

“.....”

그것은, 시간이 얼어붙은 것 같은 광경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모든 것은 아무 것도 변함이 없었다. 광풍을 불러오던 괴조(怪鳥)도, 지축을 떨쳐 울리던 거인도, 마치 그대로 멈추어버린 것 마냥 어떠한 미동도 없었다.

쩌적-

마침내, 시간이 기울어졌다. 공간이 일그러지고, 이내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콰아아아앙-!

그녀의 검의궤적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베어졌다. 늑대들도, 청동새도, 거대한암석의 거인도, 모조리 베어졌다. 저 편에 있던 산조차 두 조각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그 끝에, 하늘마저 둘로 갈라지고 말았다.

쿠르르르르-

산이 두 조각으로 갈라지는 것과 동시에 어마어마한 충격파가 주위를 휩쓸어갔다. 고작해야  명의 인간의 힘이 불러온 결과라고는 도무지 믿기 힘든 장엄한 파괴의 현장이었다.

“...이, 럴 수가...”

크리스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며 황녀를 쳐다보고 말았다.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자신이 호위를 맡고 있는 황녀가 자신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의 힘을 감추고 있을 것이라고는 미처 상상도 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하, 아...”

하지만 정작 이러한 파괴를 이끌어낸 아이리스는 자신의 부들거리는 오른팔을 만족스럽지 않은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아직 그녀의 육신은 완성되지 않았다. 방금은 10년 뒤의 깨달음을 발판으로 하여 그 결과물을 억지로 구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조금 전의 일참의 대가로, 그녀는 자신의 오른팔의 근육이 모조리 단선되었음을 깨달았다.

“...으윽.”

망가진 것은 오른팔뿐이 아니었다. 입을 슥하고 훔쳐보니 피가 묻어나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10년 전의 몸은 그녀의 생각 이상으로 연약했던 모양이었다.

“...하아, 빌어먹을...”

곱게 자란 황녀의 입에서 결국 욕지기가 터져 나오고 말았다. 이제 조금만  간다면 카스타나 후작가에 도착할 수 있었을 텐데, 이러한 곳에서 생각지도 않게 발목을 잡혔다는 사실이 그녀를 미치게 만들고 있었다. 이래서야, 자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비앙카  카스타나의 손에 놀아난 격이 되리라.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수 없었다. 카인과 비앙카 그 계집의 약혼식까지 남은 시간은 정말 얼마 없었다. 이런 곳에서, 이 따위 이유로 주저앉는다면 자신은 남은 평생을 끝까지 후회할 지도 몰랐다.

“...카인.”

그녀를 후들거리는 다리를 애써 진정시키며 앞을 향해 가까스로 한 발자국을 내딛었다. 그녀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줘. 이제  내가  테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