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3화 〉6. 헛소동 - 11 (43/201)



〈 43화 〉6. 헛소동 - 11

-그것은, 정말로 기나긴 기다림이었습니다.

당신은 알고 있을까요. 그 이후, 당신이라는 사람은 나의 어둡기만 한 삶 속에서  줄기 등불 같은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그  맺었던 약속이, 나에게는 그토록 소중한 의미로 다가왔었다는 것을.

실로  거 아닌, 어린아이들끼리의 시시한 약속이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당신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대체 어째서 였을까. 태어나서 손에 쥐어본 것이 그것 밖에 없어서일까, 아니면 그것이 나를 지탱하는 전부여서일까.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힘들고 지칠 때마다, 당신과 함께했던 추억을 가끔 꺼내어 살며시 매만져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할수 있었다.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왜냐하면,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나긴 고독과 기다림의 끝에, 그와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희망이 있었기에, 나는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이 순간을 견뎌내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그래. 그가 사라 세르나드라고 하는, 어떠한 여자와 약혼을 맺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기 전까지는.

그리하여, 모든 것은 끝나버렸다. 그것은 비유하자면, 자신이 지탱하고 있던 발밑이 모조리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 날, 약속도, 추억도, 맹세도, 그녀를 지탱하던모든 것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결코 쉽사리 끝이 나지 않을, 기나긴 악몽의 시작이었다.

그녀에게 있어 봄은, 존재하지 않는 계절이나 다름이 없었다.


****




“아가씨,  옷은 어떠하신가요?”

“...좋구나, 그것도 아주. 그 이의 머리카락도 검은 색이니 함께 서 있으면 꽤나  어울릴 듯 하구나.”

비앙카는 거울 앞에 서서 검은색 오프숄더 드레스를 걸친 자신의 모습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비앙카가 현재 걸치고 있는 드레스는 옆트임이 탁하고 트여있어 그 사이로 그녀의 고혹적인 각선미가 드러나고 있었으며 가슴부근에는 하얀색 프릴이 달려 있어 그녀가 두르고 있는 우아함을 한층 더 돋보이게 해주고 있었다.

자신이 보아도 스스로의 차림새는, 꽤나 흡족하였다. 이 정도면  어떠한 부끄러움도 없이 그의 앞에 설  있을 듯 하였다. 그녀 또한 여인이였기에 사랑하는 이의 앞에서는 언제나 아름다운 모습만을 보여주고 싶어하였다.

“...그 분이라면, 혹시 카인 경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시녀의 의아함이 섞인 질문에 비앙카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해주었다.

“그래, 내가 함께할 사내가 그 외에 대체 누가 있겠느냐?”

그리 말을 하며 비앙카는 저도 모르게 살짝 미소를 짓고 말았다. 이리 대답을 하고나니, 자신이 정말로 그의 약혼자가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니, 다시 한 번 생각해보니 자신은 그의 약혼자임이 분명하였다. 비록, 그와 자신이 약혼을 맺게  이면에는 에스텔과 카스타나의 정치적 거래가 자리하고 있기는 하였지만 그러한 사실은 세간에 알려져 있지 않았다.


세상은, 그와 자신의 약혼이 어디까지나 순수한 사랑의 결과물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저번 만찬장에서 카인이 그리 선언을 하였으니까. 자신은, 그녀를 사랑하노라고. 언제까지나 그녀의 곁에 있어주겠노라고.

“...후훗.”

그렇다. 자신은 그의 약혼녀였다. 과거에는 사라 세르나드라고 하는 증오스러운 여자가 그의 옆자리를 꿰차고 있었지만, 그것은 전부 흘러간 과거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그와 함께하며, 그와 미래를 약속하고, 그와 모든 것을 나누기로 결의한 사람은 다름 아닌 비앙카, 그녀였기에.

그러므로, 자신이 그와 함께하는 시간을 갖는 것은 결코 그릇된 일이 아니니라. 예를 들어, 그와 함께 카스타나 후작가의 뒤편에 위치한 자그마한 후원에서 산책을 즐기는 정도의 일은 약혼관계의 두 연인에게 있어서는 지극히 평범한 일에 지나지 않겠지.

그와 함께하는 그 짧은 만남을 위해, 비앙카는 아침부터 거울 앞에만 매달려 있었다. 무엇을 입어야 할지 쉽사리 선택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떠한 옷을 입어야 자신에게  어울리는 것일까, 어떻게 차려 입으면 그와  쌍의 연인처럼 보일까. 그러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만으로도 즐거웠고, 지루함 따위는 생각날 겨를조차 없었다.

원래의 그녀는, 자기 자신을 치장하는 것 따위에 대해 어떠한 흥미도 느끼지 못하였다. 평소에 걸치는 옷들도 전부 활동성을 중시한 옷이었을 뿐, 그녀는 자신이 타인에게 어떻게 비추어질까 따위를 염두에 두었던 적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그러한행위가 무척이나 즐겁기만 하였다. 그가 자신이 차려입은 모습을 보며 어떠한 표정을 지을지 상상을 해보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멈추지않았다.

문득, 비앙카는 이것이야말로 다른 평범한 여인들의 일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여인들은 현재 자신이 느끼고 있는 이러한 기분을 언제나 느끼곤 하였던 것일까. 누군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고, 왠지 모를 아련함이 드는 이 감정을,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손에 넣어왔다는 것일까.

...하지만, 이제 자신은 그들을 부러워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에게도 그런 날이 다가오기까지 머지 않았기 때문이다.

드디어 내일이었다. 내일, 카스타나 후작가에서는 카인 폰 에스텔과 비앙카  카스타나의 약혼식이 거행될 예정이었다.  자리에 참석한 모든 하객들이,  명문가 사이에서 거행되는 약혼에 대해 축하를 해주리라. 그리고  끝에-

“...가씨, 아가씨!”

“...아, 불렀느냐. 무슨 일이더냐?”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는 바로 옆에서 시녀가 자신을 부르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가씨. 아직 날씨가 다소 쌀쌀한 감이 없지 않기에 어깨가 다소 시릴 수도 있으니, 이거라도 걸치시는 편이 어떠신가요? 이거라면 아가씨께서 입고 계신 드레스와 잘 어울릴 것이라 생각이 된답니다.”

그리 말하며 시녀는 비앙카에게 옅은 베이지 색의 케이프 숄 하나를 건네주었다. 허나, 비앙카는 그것을 보며 고개를 살짝 내저을 뿐이었다.

“되었다. 걸치지 않아도 된다. 이 몸은, 고작 이 정도 추위 따위에 한기를 느끼는 몸이 아니니 말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마나의 축복'을 받은 비앙카는 고작해야 그 따위 한기에 몸을 떨 정도로 나약한 몸이 아니었다. 거기다가 10년 뒤, 겨울의 마녀가 불러온 극한의 추위를 경험해 본 그녀에게 있어 봄날의 꽃샘추위 따위는 선선한 바람과 전혀 다를 바가 없을 뿐이었다.

“결정적으로, 그러한 것을 어깨에 두른다면 내 차림새가 너무도 단정해 보이지 않겠느냐?”

“...네?”

시녀는 일순 비앙카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눈을 깜빡이고 말았다. 그리고 비앙카는 자신의 잡티 하나 없는 새하얀 어깨를 살짝 매만지며 배시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내 남자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지만 풍문은 익히 들은 적이 있구나. 자고로 사내들이란, 이리 은근슬쩍 보이는 것에 더욱더 흥미를 느끼는 법이 아니겠느냐?”

****

‘...삭막하군.’

그것이 내가 카스타나 후작가의 뒤편에 위치한 정원을 보자마자 하게 된 생각이었다. 정원을 꾸미는 것에 눈꼽만큼도 관심이 없으며, 예술적 감각이라고는 털끝만큼도 갖추지 못한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카스타나 후작가의 정원은 그 상태가 실로 심각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돈이 모자라 정원을 꾸미는 것에 그리 변변찮은 예산을 꾸리지 못하는 에스텔 공작가조차도 이 정도로 정원을 방치해 두지는 않았다.

적어도, 에스텔 공작가에서는 계절에 맞는 꽃을 옮겨 심고 화단을 조형해보려는 노력을 하였건만, 카스타나 후작가의 정원은 그러한 최소한의 노력조차 기울인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들었다. 정원에는 잎이 사시사철 푸른 상록수만이 잔뜩 심어져 있었으며 꽃이라고는 개망초를 위시로 한 이름 모를 들꽃 밖에 피어 있지 않았다.

원래  가문의 정원이란 외부의 손님을맞이하는 응접의 용도로 활용이 되는 공간으로서,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가문의 상징과도 같은 곳임을 생각한다면, 카스타나 후작가의 정원은 명백히 정상이라고는 할 수가 없었다.

...하기야, 마법 말고는 아무 것도 흥미가 없는 정신병자들이 실은 뒷구멍으로 정원 가꾸기라는 단란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면 그것이 훨씬 놀라운 사실이기는 하겠지만.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이따위 삭막하기 짝이 없는 정원도 좋다며 콧노래까지 흥얼거린 채 이리저리 거닐고 있는 비앙카는 마법사 중에서도 별종 같은 인간이 아닐 수가 없었다.

마법사라는 인종은 죄다 감수성이 메말라버린 끝에 가슴 속에 삼각형이 동그라미가 된 미친 놈들이라 단정을 짓고 있었거늘, 의외로 비앙카에게 그런 소녀 같은 감수성이 남아있을 것이라고는 미처 상상도 하지 못했단 말이다.

그 때였다. 상당히 들뜬 얼굴로 정원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던 비앙카는 나를 향해 살그머니 웃음을 짓더니 이윽고 내 왼팔에 살며시 팔짱을 꼈다.

“...비앙카, 지금 뭐하는 거야?”

“뭘 하긴? 약혼자로서 당연한 일을 하는 것에 불과한데? 연인인 주제에 팔짱도 끼지 않는다면 어디 그게 연인인가? 잊지 말아주었으면 하는데. 우리는 지금 대외적으로 연인 관계라는 것을 말이야.”

“.....”

당연하다는 듯이 대꾸를 비앙카의 모습에 나는 저도 모르게  말을 잃고 말았다. 하기야, 그녀의 말대로 약혼사이라면 팔짱을 끼는 것 정도는 지극히 당연한 일 일지도 몰랐다. 동시에, 무려 수 년 간 약혼자 사이였던 사라의 손목조차 제대로 붙잡아보지 못한 나는 그냥 병신새끼였던 것이고.

“...그보다 우리,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면 안 될까?”

비앙카가 나를 향해 나지막하게 속삭여오자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와 나는 팔짱을 낀 채로 카스타나 후작가의 정원을 천천히 가로지르기 시작하였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오늘의 비앙카는 평소에 비하자면 무척이나 순한  같이 느껴졌다.

“카인. 나, 뭐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될까?”

“...뭔데?”

“오늘의 나, 어때 보여?”

그리 말을 하며 비앙카는 뒷짐을 진 채로 나에게서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정원에 아무렇게나 피어있는 들꽃들을 배경으로  비앙카의 전체적인 자태가 나의 눈에 들어왔다.

가장 먼저 나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녀의 새하얀 어깨가 아무렇지도 않게 드러나 있다는 사실이었다. 순간, 바람이 불어온다. 불어오는 바람에 그녀의 머리와 검은 색 드레스가 살짝 흩날렸다. 그러한 모습을 보며, 나의 입은 저도 모르게 어떠한 단어를 내뱉고 말았다.

“...예뻐.”

“예쁘다고? 정말?”

나의 아무 생각 없는 칭찬에 눈을 반짝이며 한 걸음 다가오는 비앙카를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리고 나의 아무 의미 없는 칭찬에, 비앙카는 아련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칭찬, 받았네... 너에게서...”

그리 말을 하며 비앙카는 들꽃이 아무렇게나 피어 있는 화단 쪽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그리고, 화단 앞에 쪼그려 앉은 채 한 손으로 꽃을 얌전히 어루만져 보였다.

“카인, 이 꽃, 꺾어줄 수 있어?”

“...꺾어달라고?”

“응. 꺾어서, 나한테 주었으면 좋겠어.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빨리 해줘.”

“.....”

어려운 일이 아니라면서 왜 자기가 직접 하지 않고 나한테 시키는 것인지 이해를  수가 없다. 귀하게 자라신 아가씨라서 손에 흙을 묻히는 것도 싫다, 이런 의미인 것인가?

나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며 그녀 앞에 놓여 있던 이름 모를 들꽃을 꺾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나에게서 꽃을 받자마자 그녀의 얼굴은 환하게 변화하였다.


정말이지, 이 계집애는 과거나 지금이나 미래에서나 다른 사람한테 개 뜬금없는 부탁을 하는 것을 즐기는 이상한 취미를 가진 여자였다.

“...하아, 비앙카. 너는 꽃을 정말로 좋아하는구나.”

“...내가?”

“그래, 저번에 에스텔 공작가의 정원에서도 꽃을 매만지며 좋아했었잖아. 그것도 엄청.”

아직까지도 기억이 난다. 에스텔 공작가의 화원에 피어있던 히아신스를 어루만지며 어쩔 줄 몰라 하던 비앙카의 모습이.

그리고, 나의 그러한 말에 비앙카는 킥하며 짓궂은 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럴 리가. 카인. 당신은 여자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구나.”

그리 말을 하며 비앙카는 방금 내가 꺾어다준 이름 모를 들꽃이 무척 소중하기라도 한 것 마냥 자신의  손에 꼭하고 붙잡으며 나를 향해 아주 자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 사실은,  같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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