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6. 헛소동 - 10
그렇게, 만찬은 끝을 맺었다. 방금 전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음식을 나누어 먹고, 설전(舌戰)이 오고가느라 시끌벅적 했던 것이 거짓말인 것 마냥, 만찬장 안은 적막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모든 사람이 자리를 떠나간 현재, 만찬장에는 어떠한 인영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 아까부터 줄곧 자신이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조차 없이 멍하니 천장만을 쳐다보고 있던, 비앙카 델 카스타나라는 어느 여인을 제한다면 말이지만.
‘...카인.’
이미, 만찬장 안의 불은 전부 꺼져있었다. 살짝 열려 있는 창문 사이로, 구름의 틈새로 살짝 얼굴을 드리운 달빛이 비앙카의 전신을 감싸 안는다. 어둠이 내려앉은 만찬장의 한 가운데에서, 달빛이 드리우는 아래 우수(憂愁)에 잠겨 있는 미인의 모습이란, 지극히 몽환적인 광경이 아닐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정작 그런 장면을 연출하고 있는 비앙카는 지금 자신이 타인의 눈에 어떠한 모습으로 비춰지는 지와 같은 시시한 문제에 대해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지금, 카인 폰 에스텔이라는 어떤 남자가 카스타나 후작가 전체를 대상으로 하여 당당하게 내뱉었던 말들이 끝없이 되풀이 되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 저와 그녀는 미래를 약속하였습니다. 언젠가는 꼭, 함께하기로 말입니다.
- 저는, 비앙카라는 여자를 결코 홀로 놔두지 않겠습니다. 제가 비앙카의 약혼자인 이상, 언제나 그녀의 곁에 있어주겠습니다.
“...아, 으...”
그가 했던 말을 다시 한 번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이 두근거렸다. 심장의 박동이, 너무도 거센 나머지 이대로 파열되지 않을까 우려가 될 정도로 두근거렸다. 이것은, 명백히 정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좋았다. 너무도 좋았다. 이대로 심장이 터져 죽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좋았다. 비앙카는 자신의 두 손을 지그시 모아 그녀의 풍만한 가슴 아래에 있을 심장을 살포시 눌러보았다.
-두근
느껴진다. 그녀의 손끝에, 지금 이 순간에도 힘차게 맥동하고 있는 심장의 고동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비앙카는 이러한 심장의 박동이야말로 그녀가 지금껏 걸어왔던 삶의 증명 그 자체임이 틀림없다 생각하고 말았다. 이것은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었다. 스스로 생각할 때, 그녀가 오늘 마주했던 감동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기에.
길었다. 정말로, 길었다. 아득할 정도로, 긴 시간이었다. 그를 처음 마주한 뒤로 물경 20여년, 그 기나긴 세월의 인고 끝에 비앙카는 그의 입에서 자신을 ‘사랑한다.’라는 말을 들었다. 자신의 곁에 있어주겠노라고 다짐을 하는 말을 들었다.
...비록, 그의 말이 거짓으로 점철된 가짜에 불과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달콤한 말에 가슴이 주체할 도리 없이 흔들거리는 것만은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비앙카는 사랑하는 연인과 열락(悅樂)의 시간을 보내는 여인의 기분이 이와 같지 않을까 생각해버리고 말았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반칙이었다. 이래서야, 그에게 더욱 반해버릴 수밖에 없지 않는가.
거기다가 사실,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9년 전, 아직 어리기만 하였던 그와 자신이 미래를 기약하며 나누었던 약속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잊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린 시절 나눈, 시시하기 짝이 없는 약속 따위는 망각의 저편으로 흘려 넘겼을 것이라 지레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실은, 그 또한 전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만이 그 때 나누었던 약속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그 역시 자신과 나누었던 약속의 반쪽을 여전히 품에 지니고 있었었다. 카인과 자신은, 어느새 약속이라는 이름의 매듭으로 이어져 있었던 것이었다.
기뻤다. 그리고 행복했다. 지나친 행복감에 그녀는 쉽사리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그녀가 정신을 되찾았을 때는, 만찬은 이미 파한지 오래였다. 카인은 물론이거니와, 만찬장에는 이미 어떠한 사람도 남아있지 않았다. 오직 그녀만이, 사람 하나 없는 적막한 만찬장에서 홀로 군림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아아.”
하지만 그녀는 이 자리에서 섣부르게 일어나기가 싫었다. 이 여운을 조금 더 만끽하고 싶었다. 자신이 느끼고 있는 아름다움을, 조금만 더 가슴 속에 새겨놓고 싶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그녀는 눈을 감은 채로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고 있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때였다.
터벅-
오직 그녀만이 남아 있던 만찬장에, 인영이 드리운다. 만찬장에 들어선 자는 자신의 기척을 숨길 생각 따위는 애초에 없었는지 아무렇지도 않은 기색으로 발걸음을 옮겨 비앙카의 바로 앞에 섰다.
“.....”
그의 정체는 방금 전, 카인을 향해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던 노마법사였다. 그는 카인을 추궁할 때와는 달리 착잡하기 그지없는 얼굴을 한 채로 비앙카를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이내, 비앙카 또한 자신 앞에 드리운 인기척을 눈치 채고 살며시 눈을 떴다. 그리고.
“...하, 할아버님.”
그리고, 노인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비앙카가 노인을 향해 예를 표하기 위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려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노인의 정체는-
“...되었다. 비앙카.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된단다. 내가 너를 찾아온 것은, 너와 긴히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란다.”
그리 말을 하며 노인은 비앙카를 음울하기만 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사실, 노인에게 있어 비앙카는 아픈 손가락과 같은 존재였다. 그에게 있어 회한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였다. 왜냐하면 과거, 그는 자신의 손녀딸을 향해 그 어떠한 것도 해주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과거의 노인은, 마법사로서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아 자기 주위의 그 어떠한 것도 돌아보지 않았었다. 가문에 추악한 광기가 만연해 있었다는 것도, 그 광기가 나약하고 어린 손녀를 덮치고 말았다는 것도, 그 어떠한 것도 알지 못하였다. 그가 모든 것을 눈치 챘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나버린 뒤였다.
그렇기에 그는 비앙카를 향한 어떠한 종류의 부채의식을 끌어안고 있었다. 어릴 적, 그는 비앙카를향해 그 어떠한 것도 해주지 못했었다. 그러니,한참 늦기는 하였지만 이제라도 그녀가 조금이라도 행복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그것이, 위선에 불과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인은 비앙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말았다.
바로 그것이 그가 카인을 향해 매서울 정도로 추궁을 던졌던 이유이기도 하였다. 어쩌면, 손녀와 일평생을 함께 할 반려자가 될지도 모르는 녀석이었다. 손녀사위만은, 그녀를 반드시 행복하게 해 줄 녀석으로 뽑고 싶다는 것이 노인의 자그마한 욕심이었다.
노인은 비앙카를 지그시 쳐다보기만 하다가 이내 침중한 어조로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네게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구나. 비앙카, 너는, 방금 전의 그 녀석을 사랑하느냐? 가령 내일 당장 혼인을 올린다고 하더라도상관이 없을 정도로?”
“.....”
비앙카는 노인의 질문에 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얌전한 기색으로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명백한 긍정의 표의였다. 비앙카의 두 볼은, 잘 익은 무화과 마냥 붉게 물들어 있었다. 비앙카의 그러한 모습을 보며 노인 또한 저도 모르게 빙그레 웃음을 짓고 말았다.
“허허, 그래. 내가 보기에도 상당히 괜찮은 녀석이더구나. 얼핏 보면 경박해 보일 수도 있지만 사려가 깊으며 행동 하나하나에는 너를 위한 배려가 있더구나. 녀석이라면 분명, 너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할아버님...”
노인의 그 말에 비앙카의 얼굴이 활짝 하며 피었다. 노인이 그를 손녀사위로 인정해준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노인이 그를 칭찬해주었다는 점이 비앙카는 기쁘기 그지없었다. 그 사실이, 다른 무엇보다도 그녀의 기분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하지만, 소공작에게는 한 가지 무시하지 못할 결점이 있더구나. 너와 함께 하겠다는 것도, 너와 미래를 약속했다는 것도 전부 사실이었던 주제에 단 한 가지 만은 거짓을 말했더구나. 비앙카, 너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
“.....”
노인의 질문에 비앙카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답변을 회피하기라도 하듯 눈을 감고 있기만 할 뿐이었다. 노인 또한 그녀에게서 답변이나오기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는지 푹하고 한숨을 내리 쉬며 말을 이어나갔다.
“소공작은 가장 처음에 이러한 말을 내뱉었었지. 자신은 비앙카 너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라고. 하지만, 그 말은 거짓이었단다. 소공작이 내뱉었던 말은 전부 진실이었지만, 우습게도 너를 사랑한다는 그 말만은 거짓이었다는 것이다.”
개 같은 녀석 같으니, 라며 혀를 끌끌 차는 조부를 바라보며 비앙카는 살며시 눈을 감고 말았다. 조부는 카인과 자신이 맺은 ‘계약’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하였으니 어찌보면 저리 반응을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하아, 비앙카. 너처럼 똑똑한 아이가 그것을 모를 리가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네게도 무언가 생각이 있다는 것 또한 내 익히 짐작하고 있단다. 그러니 내가 네게 해주고 싶은 말은 오직 한 가지뿐이란다.”
그리 말을 하며 노인은 입가에 인자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노인은 진심으로, 자신의 손녀딸이 행복해지기를 바랄 뿐이었다.
“나는 네 편이니라. 네가 녀석의 사랑을 얻기 위해 어떠한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너를 응원하겠다. 그러니, 뒷걱정은 하지 말고 어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해 보거라.”
“할아버님...”
그것은 사실상, 허락의 의미나 다름이 없는 말이었다. 카스타나 후작 본인을 제한다면, 이 가문에서 가장 발언권이 큰 자신의 조부가 지금 이 순간 카인과 비앙카의 사랑을 허락해주었다. ‘계약’에 대해서 까지는 알지 못하지만, 카인과 비앙카 사이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익히 짐작하면서도 노인은 둘 사이의 약혼 관계를 용인해준 것이란 말이다!
‘...아아.’
이것으로서 카인과 비앙카의 약혼을 가로막는 모든 외적 요인은 소멸하게 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제 그들 사이에 남아 있는 요인은 오직 하나, 카인이 비앙카라는 여자에 대해 어찌 생각하느냐, 그것뿐인데-
도리도리.
비앙카는 오늘만큼은 더 이상 그러한 생각을 이어나가지 않기로 하였다. 안 그래도 오늘은 이미 충분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의 고백 아닌 고백에 대해서 들을 수 있었으며, 그가 자신과 얽힌 과거에 대해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카인과의 약혼에 대해 조부의 찬성을 이끌어내는 것에 성공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니, 오늘 하루만큼은 순수하게 성공을 자축하기만 해도 괜찮을 것이다.
비앙카는 약간이지만 들뜬 기분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고개를 들어 창밖을 내다보니, 하늘에서 별똥별 하나가 하늘을 가로지르며 떨어져가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비앙카는 그러한 광경을 보며, 하늘 또한 자신의 성과에 대해 축하를 해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떨어져가는 별똥별을 보며 싱긋하고 웃음을 지어 보였다.
오늘은, 어떻게 보아도 최고의 날임이 분명했다.
****
그리고, 카스타나 후작가의 뒤뜰에서 어떤 하얀 머리 소녀는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았다.
소녀의 머릿속에서는 방금 전, 만찬장에서 그가 했던 말이 무수히 되풀이 되고 있었다. 그는 분명, 이렇게 말을 하였다. 그녀를 사랑한다고, 그녀의 곁에 언제까지고 있어주겠다고.
...알고 있다. 하얀 머리 소녀는, 그에게서 이미 진실을 전부 들었다. 그렇기에 그가 내뱉은 말이 단순한 거짓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팠다. 그의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동시에 거짓으로라도 그가 다른 누군가에 대해 사랑을 입에 담는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싫었다. 미웠다. 분했다. 그리고, 너무도 쓰라렸다.
“...아, 윽...”
슬펐다. 만약, 자신이 좀 더 강했더라면, 적어도 그가 저런 여자의 손을 순순히 붙잡지 않을 정도로 강했더라면, 지금 이 순간 이러한 광경을 보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게 다, 자신이 약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자책만이 남겨져 있었다.
갑자기 모든 것이 싫어졌다. 약해빠진 자기 자신도 싫었고, 그를 이런 곳까지 오게 한 카스타나 후작가도 싫었으며, 그가 그러한 말을 내뱉게 한 그 여자는 더더욱 싫었다. 전부 다, 싫기만 하였다.
“...아.”
문득, 하늘을 쳐다보았다. 별똥별 하나가 하늘을 가로지르며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녀가 보기에 저 별똥별은, 끝이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그녀의 현재 기분을 대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결국, 그녀는 버티지 못하고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은 채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말았다.
오늘은, 어떻게 보아도 최악의 날임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