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9화 〉6. 헛소동 - 07 (39/201)



〈 39화 〉6. 헛소동 - 07


“...야, 약혼이요? 카스타나 후작가의 금지옥엽과 카인님의, 약혼이요?”

아까부터 아리아의 표정은, 울상이었다. 특히, 내가 카스타나 후작가를 방문한 이유가 사실은 비앙카와의 약혼 때문이었다는 설명을 해줄 때가 절정이었다. 아리아의 두 눈에서 무언가가 그렁그렁 맺히더니 금방이라도 무언가를 왈칵 쏟아낼 것 같은 표정이었던지라 나는 저도 모르게 허둥지둥 변명 아닌 변명을 내뱉고 말았다.

“...그래, 너한테 미리 말을 해주지 못해서 미안할 따름이다. 하지만 나도 어쩔  없었어. 이게 사정이 조금 복잡한 일인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이었냐면...”

내가 생각해도 상당히 구차하기 짝이 없는 변명을 허둥지둥 늘어놓기 바쁘던 바로  때였다. 내가 ‘미안하다.’라는 말을 꺼내기 무섭게 아리아의 눈빛이 매섭게 변하였다. 구체적으로 비유를 해보자면, 순하디 순한 강아지 같은 눈망울에서 사랑하는 남편이사실은 유곽지대를 맴돌며 다른 여자들과 질펀하게 놀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아내의 표독한 눈빛 정도로 변화한 것 같았다. 아리아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싸늘함에, 나는 저도 모르게 오한을 느끼고 말았다.

“카인님, 대체 저한테 뭐가 미안한 것인가요?”

“...응?”

내가 생각해도 넋이 반쯤 나간 병신 같은 되물음에 아리아는 말없이 자신의 두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뭐, 그래봐야 본판이 워낙 귀여워서 무섭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지만.

“제가 생각할 때 카인님께서는 저한테 미안해하실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아요. 저는 한낱 시녀에 불과하고, 카인님께서는 에스텔 공작령의 소공작이라는 공사다망한 위치에 계신 분이시잖아요. 저와 같이 보잘 것 없는 계집아이가 어찌 감히 카인님의 약혼과 같은 중대사에 간섭을 할 수 있나요? 카인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나요?”

“.....”

자신을 신경 쓸 필요 따위 없다는 말과는 달리 나를 매섭게 바라보는 아리아의 표정은 아무리 보아도 사회적 약자를 힐난하는  같은 표정이었던지라 왠지 모르게 가슴이 욱신하며 아파올 뿐이었다.

어째서인지는 잘 모르겠다만 과거, 그러니까 회귀 전에 에스텔 공작령의 기사들과 술판을 벌이다가 면상이 기생오라비 같이 생겨먹은 녀석에게서 여자를 대하는 팁이랍시고 주워들었던 어줍잖은 조언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그러니까, 그  얼큰하게 취했던 빌어먹을 녀석이 나를 향해 대체 뭐라고 지껄였었더라...?

‘공작님, 여자를 대하는 것에 가장 곤란한 점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글쎄, 내가 그걸 알고 있다면 네게서 이런 이야기를 들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나의 대답에 녀석은 실로 거만하기 짝이 없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이리 말을 하였다.

‘정답은 바로 여인들의 투기(妬忌)라 생각합니다. 여자들은 자고로 영역 동물과 같은 지라, 자신의 영역 안에 다른 여자가 들어온 사실을 귀신 같이 눈치 채곤 하더군요.’

제가 바람을 피다가 몇 번 들켜봐서 잘 압니다, 라고 중얼거리며 입맛을 쩝쩝 다시던 그 새끼를 바라보며, 나는 녀석의 기생오라비와 같은 면상에 멋들어진 칼자국  개를 내주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만 하였다.

‘자신의 영역이 침입 당했다고 생각하는 여인들은 허겁지겁 변명을 내뱉는 남자를 향해 이런 질문을 내뱉더군요. 대체 자신에게 뭐가 미안하냐고, 미안할 것이 무어가 있냐고. 참고로 말씀을 드리자면, 여기서 섣부르게 대답을 하면  된다는 점입니다. 특히, 잘못했다고 말을 하면 정말 큰일이 나더군요.’

‘...왜 큰일이 나는데?’

나는 녀석의 말에 점점 현혹이 되어가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있었다. 여자의 손목 한 번 제대로 잡아보지 못한 나였지만, 녀석의 이야기는 왠지 모르게 기묘할 정도로 재미가 있었다.

‘그러면 바로 뭘 잘못했냐고 묻기 때문입니다. 제 잘못을 안다고 대답을 해도, 모른다고 대답을 해도 공격거리가 되기 마련이지요. 결국, 그 끝에 남자가 뱉을 수 있는 말은  가지 뿐입니다.’

‘그건 뭔데?’

‘미안해, 입니다. 아시겠습니까, 공작님? 정말 무시무시하게도 상황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마는 것입니다! 정말이지,제 생애를 통틀어 가장 끔찍한 기억  하나였습니다. 마치 시간이 몇 번이고반복되는 것 같은 끔찍한 경험이었습니다.’

전신을 부르르 떠는 녀석의 모습은 실로 자업자득이라는 단어가 그토록 어울릴 수가 없는 처량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해답은 뭔데? 여자들이 뭐가 미안하냐고 물으면 뭐라 대답해야하는데?’

‘예? 거기까지는 저도 잘 알지 못합니다. 제가 그윽한 눈길로 귓가에 사랑한다 속삭이면 여자들은 금세 화가 풀려서 말입니다. 아니면 다짜고짜 입술을 훔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더군요. 원래 그런 사소한 역경 따위는 사랑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

다시 생각을 해보아도 그 새끼는 좆같은 시발 놈이었다. 그 개새끼가 해결책이랍시고 지껄였던 말은 지금 이 상황에서 아무 짝에 도움도 되지 않았다. 뭐, 아리아가 지금 이 상황에 대해 강한 불만을 품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은 확실시 된 것 같으니 그걸 소득이라고 여겨야 할까.

‘...하긴, 객관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내 행보가 문제가 많기는 하지.’

사실 문제가 많은 정도가 아니었다. 아리아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녀가 섬기는 카인 폰 에스텔이라는 녀석은 사라 세르나드와 파혼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제국의 황녀나 법황국의 예비 성녀인 아리엘 같은 여자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섞고 친한 척을 하는 개새끼였으며, 다른 여자에게 껄떡대는 것으로도 도무지 만족을 할 수가 없었는지 이번에는 냉큼 다른 여자와 약혼까지 해버리는 시발놈에 불과하였다.

물론, 황녀나 아리엘이나 비앙카 같은 여자들과 얽히게 된 것은 나의 본의가 아닌 그저 운명의 장난에 불과할 따름이었지만, 아리아가 그것을 이해해줄 리가 만무하지 않겠는가.

‘...어쩔 수 없나.’

나는 이쯤에서 아리아를 조금이지만 달래줄 필요성을 느끼고 말았다. 아리아는 단순히 나의 전속 시녀가 아니라, 장차 카를 영감의 뒤를 이어 에스텔 공작령의 전속 마법사가 되어줄 중요한 인재였다. 더군다나, 미래에 ‘겨울의 마녀’가 될 지도 모르는 요주의 인물이기도 하였다. 괜스레그녀의 성질을 자극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제는 아리아가 나보다 강할 지도 몰랐기 때문에 그녀가 조금 무서운점도 있었고.

“...어쩔 수 없구나. 아리아, 네게 고백할 말이 있단다.”

내가 아리아를 달래주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실로 단순하였다.  약혼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모든 진실에 대해 말을 해주는 것. 진실을 알게 된다면 아리아 또한 지금 내가 어떠한 심정으로 이곳에 와있는지 공감해주지 않을까.

“고, 고, 고백이요?”

내가 고백이라는 말을 꺼내자마자 갑자기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는 아리아.

“....?”

나는 다소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아리아를 향해 차분히 설명을 해주었다. 사실, 비앙카와의 약혼은 진짜가 아닌, 서로 간의 이해관계에서 비롯된 고도의 정치적 협상에서 비롯된 결과라는 것을.

“.....”

그리고, 어째서인지는 모르겠다만 나의 설명을 전부 들은 아리아는 하늘이 내려앉은 듯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리아는 이제까지는 없었던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목소리를 한차례 다듬었다.

“...카인님, 꽤나 주제넘은 말일 수도 있지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카인님께 한 말씀 올려도 괜찮을까요?”

“...어, 그래. 괜찮아.”

진지한 것을 넘어 비장하기까지 한 아리아의 모습에 압도당한 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카인님의 전속 시녀가 아니라, 에스텔 공작령의 전속 마법사, 카를님의 제자인 아리아로서 직언(直言)을 올리겠습니다. 카인님. 지금의 카스타나 후작가는, 뭔가 위험해요.”

“...그야 당연한 말 아닌가? 카스타나 후작가는 원래 에스텔 공작가에게는 적지나 다름없는 곳이니까. 나 역시 이곳에 도착한 이후로  순간도 긴장을 놓은 적은 없는걸.”

“아니요, 저는 그런 의미로 말씀을 드린 것이 아니에요.”

그리 말하며 아리아는 손을 살짝 휘저었다.

우웅-

아리아의 손끝의 궤적을 따라, 이 세상의 근원소(根源素)라 할 수 있는 마력 그 자체가 나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이, 건...”

그리고, 나의 눈에도 똑똑히 보였다. 나와 아리아가 머물고 있는 이 방을, 아니 카스타나 후작가 전체를 뒤엎고 있는 기묘한 마력의 흐름이. 내가 아무리 마법에 무지해도 이러한 마력의 흐름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은 쉬이  수 있었다.

“본성에 진입하는 순간부터 느꼈어요. 카스타나 후작가에는 현재의 제 실력으로는  진체(眞體)를 쉽사리 파악할 수 없는 기묘한 마력의 흐름이 감돌고 있다는 것을요. 흐름 자체가 워낙 교묘해서 자세한 것은   없지만, 아마 사람의 특정 감정을 건드리는 종류의 무언가라는 것은 확실하다 생각해요.”

“...사람의 특정 감정을 건드린다고?”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런 아무 짝에 쓸모없는 마법을 카스타나 후작가 전체에 펼쳐놓은 이유가 대관절 무엇이란 말인가?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하나뿐이에요. 카스타나 후작가에 머물러 계시는 동안, 카인님께서는 어쩌면 자신의 감정을 조절할 수 없을 지도 몰라요. 아주 조그마한 감정일지라도,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크게 부풀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리 말을 하며 아리아는 자신의 입술을 꽉하며 깨물었다.

“비앙카  카스타나. 카인님의 거짓 약혼녀와, 진짜로 사랑에 빠지시면 안 돼요. 절대로.”

"....."

아리아의 충고에 나는 피식하며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아리아의 직언은 나에게 있어 별반 쓸모가 없을 듯 하였다.

“...그런 일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것 같은데. 왜냐하면.”

그래, 아주 간단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녀와 내가 사랑에 빠질 일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였다. 왜냐하면-

“비앙카 같은 여자가 나 같은 녀석을 진심으로 사랑할 리가 없잖아. 안 그래?”

권세 높은 가문의 금지옥엽이며, 아름다운 외모을 지녔으며, 거기다가 본인이 대마법사이기까지 한 잘나빠진 여자가 비앙카였다. 그런 여자의 눈에, 영락할 대로 영락한 공작가의 떨거지 한 명 따위는 남자로 비춰질 리가 없음을 확신한다.

결정적으로, 그녀에게는 이미 미래를 약속한 남자가 있었다. 회귀 전, 그러니까 원정대에서 함께 살을 부대낄 무렵, 그녀와 내가 나누었던 대화가 나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 카인, 만약에, 어디까지나 만약의 일이기는 하지만, 네 영지에 나타난 마녀를 토벌하고 공작의 지위가 복권된다면, 가장 먼저 무슨 일을 하고 싶어?

- ...왜 만약이라는 전제를 붙이는 거야. 불길하게...

- 아, 어쨌든! 빨리 대답이나 해봐! 사람 궁금하게 하지 말고!

- ...글쎄. 내 나이가 나이인 만큼, 혼례부터 치러야겠지. 내 대에서 에스텔 공작가의 혈통이 끊겼다는 오명을 뒤집어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 흐응, 결혼할 여자는있고?

- ...뭐, 내 평판이 땅바닥에 떨어지기는 하였지만, 세상에  먼 여자가  명쯤은 있지 않겠어?

- 흠, 그런데 말입니다. 비앙카, 아무리 생각해도 당신이 걱정할 일은 아니라고 판단이 되는군요. 언제부터 다른 사람의 인생 계획에 그리 관심이 많았던 것입니까?

...당신,  갑자기 나와 카인의 대화에 끼어드는 거야? 이종족이라 그런지 인간의 예절은 잘 몰라서 그런 건가?

- 가만히 듣자하니 결코 흘려들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어서 말입니다. 비앙카, 제가 알기로는 당신 또한 혼기를 한참이나 넘긴 나이가 아니었나요?

- 당신은 우리보다 나이가 몇 배는 많잖아!

- ...키리에님, 그리고 비앙카. 두 사람  진정 좀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성녀님, 가만히 지켜보지만 마시고  사람에게 한 말씀 해주시면 안 됩니까?

- 후후, 평소에 비하면 아주 온건한 편에 속하는데요. 제가 굳이 나설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수고하셨어요, 카인.

- ...흥, 사람 이야기 하는데 자꾸 끼어들기나 하기는. 그리고 키리에, 당신이 몰라서 하는 이야기인데, 이래 뵈어도 나는 장래에 미래를 약속한 남자가 있단 말이야. 당신 같이 몇백살 묵은 노처녀랑은 차원이 다르다고.

- 호오. 그건 꽤 재미난 이야기이군요. 필시 정략결혼임이 틀림없겠지요? 제가 알기로는 인간 귀족들은 정치적 목적에 의해 자신이 원치 않은 결혼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하더군요.

그런 거 아니거든. 어릴 때, 어떤 남자와 약속을 맺은 적이 있단 말이지. 성인이 된다면  함께 하자는, 그런 약속을. 당신 같이 나이만 많은 여자는 결코 알지 못할 감성이란 말이지.

- ...그러니까 난, 혼자가 아니라고. 절대로.

그래, 비앙카는 이리 말을 하였었다. 자신에게는, 미래를 약속한 남자가 있다고. 아주 어릴 때, 그 남자와 그러한 약속을 맺었었노라고.

그러니 비앙카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우리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한 편의 연극으로 시작하여  편의 연극으로 막을 내릴 뿐이다. 그러니, 우리 사이에서 사랑이 싹 틀 가능성은 없다 보아도 무방하였다.

우리를 구성하는 모든 것은 거짓일 따름이다. 그런 우리에게 사랑 따위가 있을 리가 없다. 그러니 아리아의 걱정은 그저 기우에 지나지 않으리라.

...그래,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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