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6. 헛소동 - 06
오래된, 꿈을 꾼다.
그것은, 실로 시시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 너무도 오래되어 어느 누구도 기억해내지 못하는, 아무 것도 아닌 오랜 기억.
...하지만, 그녀에게 있어서는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한, 찬란하기 그지없는 이야기.
그를 만나기 전까지, 그녀는 어떠한 것도 알지 못하였다. 가족의 정도, 부모의 귀애도, 세상의 온기도, 전부, 아무 것도 알지 못하였다.
...그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겠지. 애당초 그녀는, 한낱 병기에 지나지 않았다. 살아있는 도구였으며, 타인의 손에 빚어진 물건과 같은 존재였다. 물건을 아끼는 사람은 수없이 많지만, 물건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였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그녀를 둘러싼 세상의 전부였다. 그러한 취급에, 언제부터인가 그녀는 익숙해지고 말았다. 자신을 둘러싼 삭막함이야말로 세상의 전부가 틀림없다 생각해버리고 말았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하루가 다르게 온갖 지식이 강제로 쳐박혔지만,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녀는 세상 누구보다 현명하였지만,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그녀는 세상 어느 누구보다 무지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타인을 향한 자애도, 박애도, 호의도, 그리고 누군가를 향한 사랑도, 그 어떠한 것도 알지 못하였다. 그렇기에, 그녀는 끝내 누군가를 사랑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였다.
...생각해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랑이라고는 단 한 순간도 받지 못한, 그러한 삶이었다. 제 아무리 그녀가 현명하더라도, 단 한 순간도 받아보지 못한 것을 타인에게 베풀어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사랑이란, 어떠한 소원이라도 아무 조건 없이 이루어주는 자비로운 왕과 같은 존재가 아니었다. 그것은 비유하자면, 금화와 같았다. 금화가 타인과 주고받는 과정을 통해 순환의 과정을 거침으로서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듯, 사랑 또한 마찬가지였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아야만,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다른 누군가를 사랑할 힘을 얻는 것이었다. 누군가로부터 사랑 한 번 받은 적이 없는 결함품인 그녀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일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포기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깨달아버렸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그러한 것이 베풀어질 리가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문의 모든 구성원은 그녀를 경원시하였다. 어쩌다가 만난 또래의 아이들은, 그녀를 무서워하였다. 그녀를 가리켜 뒤에서 ‘괴물’이라 일컫기를주저하지 않았다.
...사실, 그녀가 보아도 자신은 괴물이 맞았다. 어미의 젖을 떼기도 전부터 마력을 다루는 법을익혔으며, 무언가를 익히는 것에 곤란함을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삶에는 칭찬도, 꾸짖음도,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적어도, 자신이 보통 사람과는 확연히 다른 무언가라는 것은 틀림없노라고 그녀는 쓰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자물쇠로 꼭꼭 걸어 잠그었다. 가슴 속에 조그맣게 남아 있는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을 허락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하지만 가끔, 아주 가끔이지만 그녀에게도 가슴이 아려오고 하는 때가 있었다. 그래, 언젠가 이러한 광경을 본 적이 있었다.
마차를 타고 길거리를 지나치던 와중, 자신의 어미 아비의 손을 잡고 길거리를 걸어가는, 어느 여아의 모습을 보고 말았다. 오랜만에 가족끼리 외출을 나와 들뜨기라도 한 것인지 힘차게 거리를 내달리던 그 아이는, 돌부리에라도 걸린 것인지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그 여아의 아비와 어미는, 무릎에 피가 나는 아이를 위로해주고, 손수건으로 아이의 상처를 동여매며, 아이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여아는, 금세 울음을 그치고 해맑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세상 어디에서나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그러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광경을 보며 참으로 아파하고 말았다.
왠지 모르게, 슬펐다. 만일 자신이 저런 평범한 가정에서 나고 자랐더라면, 자신 또한 저렇게 누군가의 사랑을 받으며 자랄 수 있었을까. 그리고 자라나며 어떠한 남자와 사랑에 빠지고, 부모와 많은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식도 올리고, 가정을 이루며, 아이를 낳고, 그 끝에 그 사람과 늙어가는, 그러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을까.
...동시에, 부질없는가정이었다. 무의미한 상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걸 잘 알고 있음에도, 어째서인지 저들에게서 눈을 뗄 수 없는 자신이 존재하였다. 자신에게는 결코 닿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기어코 손을 뻗는 자기 자신이 보였다.
어쩌면 그녀는, 소리 없는 외침을 지르고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헤어나올 수 없는 수렁에서 자신을 건져달라고, 누군가는 제발, 나라는 사람을 봐달라고. 나를 도와달라고. 그리고 그 끝에, 이런 나라도 사랑해줄 수 있냐고. 그렇게 그녀는 한 마디의 말도 없이 바라고, 또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기적은 말없이 찾아왔다.
- 카인, 카인 폰 에스텔 이라고 해.
소녀는, 어느 소년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그녀는 아직까지도 그 때 그 순간을 기억한다. 단 한 순간도 빠짐없이 생생히 기억한다.
아아, 어찌 그 순간을 잊을 수 있을까. 태어난 이후 줄곧,그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그녀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광명(光明)이 드리운 순간이거늘.
- 넌 참, 바보구나. 난, 너 같은 건 하나도 두렵지 않아. 마법 같은 건 우리 영지의 별 볼일 없는 늙은이도 쓸 줄 알아. 내가 보기에, 넌 그냥 평범한 여자아이에 불과해.
처음이었다. 자신을 다른 사람과 별 다를 것 없는 눈으로 봐주는 사람은.
- 너도 이거 먹을래? 아니, 그냥 하나 받아. 사실 여동생에게 주려고 아끼던 건데, 특별히 너한테도 하나 줄게.
처음이었다. 자신에게 대가없는 호의를 베풀어주는 사람은.
- 그럼, 나중에 또 보자. 다음에 만나면 이렇게 쉽게 져주지 않을 거니까. 각오해.
...처음이었다. 자신보고 나중에 다시 만나자고 말을 해주는사람은.
양철인형에 피가 통하는 기분이 이러할까. 자신을 아무렇지도 않게 대해주는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노라면, 자신 또한 평범한 계집아이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기뻤다. 태어나 처음으로,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행복을 맛보았다. 그와 함께 있던 시간은 너무도 반짝반짝해서 빛이 드리우는 것 같았다. 자신도 모르게, 그와 함께할 다음번을 기약하고 말았다. 다시 한 번 그와 함께하는 기쁨을 누리고 싶었다. 그리고 그 끝에-
“...아.”
눈을 뜬다. 의식이 부상한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비앙카는 자신이 목욕 중에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아무래도 오늘 여러 가지 일이 있었던 만큼, 밀려드는 노곤함을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아가씨, 깨어나셨나요?”
그녀의 목욕 시중을 들고 있던 시녀가 그녀를 향해 공손하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 깜빡 잠이 들고 말았구나.”
그리 대답을 하는 비앙카의 표정을 보며 시녀는 머뭇머뭇한 태도로 그녀에게 말을 하였다.
“...좋은 꿈을 꾸신 것인가요. 표정이 좋아 보이십니다.”
“...내 표정이 좋아 보인다고?”
“예.”
시녀의 대답에 비앙카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얼굴을 매만진다. 느껴졌다. 자신의 입가에 희미하지만 미소가 걸쳐져 있다는 것을.
“...그래. 좋은 꿈을 꾸었다면, 꾸었다고도 말할 수 있겠구나.”
그리 말을 하며 비앙카는 욕탕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그녀의 지체(肢體)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길고 매끄러운 다리에서부터 늘씬한 허리와 풍만한 곡선을 그리는 가슴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조각사가 심혈을 다해 조형한 하나의 예술품과 같았다. 실로 매혹적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그 아름다움에, 같은 여자인 시녀조차 멍하니 비앙카의 몸을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뭘 그리 멍하니 서 있기만 하는 것이더냐? 어서 내 몸을 닦아주려무나.”
“아, 아, 예. 죄송합니다, 아가씨.”
비앙카의 말에 시녀는 정신을 차리며 허둥지둥 수건을 꺼내들었다. 오늘따라 시녀가 다소 정신을 다른데 두고 다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비앙카는 그런 시녀를 너그럽게 용서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오늘만큼은 그러한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까, 카인이 직접 나서서 자신을 꼭하고 안아주었기 때문이다.
“후훗.”
그와의 포옹은 상상만큼, 아니, 상상보다 훨씬 좋았다. 그의 품은 넓고, 안락했다. 비앙카는 장담할 수 있었다. 그의 품에 안겨있었을 때의 그녀는, 세상 그 어떠한 여인과도 비교할 수 없는 지고의 행복을 맛보고 있었을 것이라고.
“...아, 그러고 보니...”
그와의 포옹을 떠올리니, 기억의 저편에서 그다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 또한 같이 떠오르고 말았다. 카인의 마차에서 그와 함께 내린, 하얀 머리 소녀의 얼굴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
처음에는 눈치 채지 못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얼굴이 미묘하게 달랐기 때문이다. 하얀 머리 소녀의 얼굴은 비앙카가 알고 있는 그 얼굴보다 훨씬 앳되었으며, 성숙치 않았다.
하지만, 그 본질은 같았다. ‘마나의 축복’을 받아, 타인의 근원을 꿰뚫어볼 수 있는 비앙카는 하얀 머리 소녀의 정체가 무엇인지 쉬이 깨달을 수 있었다. 틀림없었다. 그것은, ‘겨울의 마녀’임이 분명했다. 물론, 지금 시점에서는 한낱 계집아이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것이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대체 어째서, 카인의 옆에 그러한 것이 붙어 있는 것일까. 카인은 알고 있을까. 자신이 옆에 거두어들인 것이, 미래에 자신을 파멸로 몰아넣을 재앙 그 자체라는 것을.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비앙카의마음 깊숙한 곳에서 살심이 동하고 말았다. 외관은 어린 소녀의거죽을 쓰고 있지만 저것은 살아있어 봐야 이 대륙에 해악을 끼치게 될 악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 만약 그 때 그가 자신을 안아주지 않았더라면, 비앙카는 분명 그 하얀 머리 소녀를 죽여 버렸을 것이다. 아마도.
그리고 그런 자신의 마음을 눈치라도 챈 것인지, 그는 머리를 좌우로 조용히 흔들며 비앙카에게 하얀 머리 소녀를 소개시켜주었다.
‘그녀의 이름은, 아리아라고 해. 내 전속시녀인 동시에 에스텔 공작령의 전속마법사인 사람이지. 그녀 또한, 카스타나 후작가의 손님으로서의 대우를 해줄 수 있을까. 비앙카, 부탁한다.’
“...아리아. 하필이면, 겨울의 여신의 이름이라니.”
알고 지은 것일까. 모르고 지은 것일까. 물론, 그가 그러한 사실을 알고 그런 이름을 붙였을 리가 없겠지만, 우연치고는 정말 잘 들어맞는다는 생각은 감출 수 없었다.
결국, 비앙카는 그 계집아이에게 손을 쓰지 못했다. 카인이 자신에게 처음으로 한 ‘부탁’이었다. 자신이 어찌 그의 부탁을 뿌리칠 수 있겠는가.
어차피, 미래의 ‘겨울의 마녀’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초라하기가 이를 데 없는 계집이었다. 10년뒤, 황녀와 성녀와 키리에와 힘을 합친 끝에야 겨우동수를 이루었던 절대자의 위용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아리아라는 소녀는 ‘겨울의 마녀’의 전성기의 힘에 일할에도 미치지 못하는, 먼지 같은 존재에 불과했다.
그러니 죽이지 않는다. 어차피, 죽이고자 마음을 먹는다면 그것은 여반장과도 같았다. 지금은 그 따위 것을 신경 쓰기보다는, 그와의 추억을 하나라도 더 쌓아가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였다.
비앙카는 바랬다. 카인과 자신이 허울뿐인 약혼 관계에서 벗어나, 진심으로 자신을 대해주기를. 에스텔과 카스타나의 뿌리 깊은 반목 따위는 일절 신경 쓰지 말고,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하게 되기를. 그가 그리한다면, 그리 해준다면, 자신은.
그를 ‘설득’하지 않아도 되리라.
“...부탁해, 카인. 제발.”
날 사랑해줘, 다른 여자가 아니라, 나만을 봐줘.
내가 다른 마음을 품지 않게, 도와줘.
내 모든 것을 당신에게 바칠 테니, 당신 또한 모든 것을 나에게 줘.
부탁해. 그러니 제발, 나를-
그리 마음속으로 외치며, 비앙카는 오른 팔목에 차고 있던 브레이슬릿을 살짝 어루만진다.
이 이야기의 끝이,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기를 간절히 기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