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7화 〉6. 헛소동 - 05 (37/201)



〈 37화 〉6. 헛소동 - 05

지금으로부터 천 년 전, 대륙의 모든 환란을 종식시킨 영웅이자 초대 황제였던 데브하르트는 제국을 통치하는 문제로 크게 골머리를 앓았다고 전해진다. 왜냐하면, 데브하르트에 의해 대륙의 3분지 1이 하나  거대한 제국으로 재탄생하였음에도 여전히 대륙 전체에 크고 작은 소요사태가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르게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무수한 시간동안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며 창칼을 겨누어왔건만, 이제와 ‘같은 제국민’이 되었다고 어깨동무를 하거나 모여 앉아 술을 퍼먹을 일이 일어날 리가 만무하지 않겠는가? 어떠한 다툼도 허용하지 않겠노라는 황제의 어명이 전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태는 전혀 진정되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고 서로의 것을 당연한  빼앗아 가버린 시간이 너무도 길었다. 이제 그들 사이에는 아무 이유 없는 증오만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혼란은 가속화되었으며, 사태는 날로 심각해져 갔다.

그에 반해 제국은 건국이 된지 얼마 되지 않아 한낱 변경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의 힘을 투사할 여력이 없었다. 결국, 데브하르트는 특단의 조치를 내리기에 이른다. 바로 자신이 가장 아끼고 믿는 신하,  4대 공작을 변경의 끝에 배치함으로서 황실의 영향력을 최대한 확산시키기를 시도한 것이다. 뭐, 그래도 개국공신인 만큼 신경을 써준다고 변경에서도 가장 노른자위인 땅에 봉토를 수여하기는 했지만 본질적으로 공작가를 깡촌에 박아놓았다는 사실만은 움직이지 않는 사실이리라.

그리하여 북쪽의 에스텔, 서쪽의 투르니젠, 동쪽의 데카라즈난, 남쪽의 크러셀이 드러서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제국에서 황실 다음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4개의 공작 가문이 변경의 깡촌에 틀어 박혀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될 것이다. 뭐, 이미  년이나 된 곰팡내가 나는 옛날 이야기일 따름이다. 이제와서 불평불만을 해봐야 아무 것도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도무지 참아낼 도리가 없었다.

‘...아니, 시발. 왜 하필이면 우리가 북쪽이야?’

제국의 역사책에서는 4대 공작 가문이 몸소 자신들을 희생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표적 사례가 어쩌구저쩌구 개소리를 가득 써놓았지만 나는 이와 관련된 기록을 읽을 때마다 얼굴이 휴지조각이 되는 것을 참아낼 수가 없었다. 대체 왜,  하필이면 에스텔 공작가가 북쪽을 도맡은 것이란 말인가?

내 듣자하니 요새 제도에서 여성들에게 유행하는 소설을 보면 조각 같은 미모를 가진데다가 싸움 실력은 마스터의 뺨을 후려칠 정도로 강하며 한 마리의 늑대와 같은 싸늘한 성정을 가지고 있어 적들에게는 결코 자비를 베푸는 법이 없으며 결정적으로 돈도 썩어 넘칠 만큼 보유하고 있는 ‘북부 대공’이 그토록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데 내가 보기에 그런 것은 전부 좆같은 개소리에 불과했다.

아니 시발,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한여름에도 진눈깨비가 쏟아지며 농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지랄 맞은 동네가 돈이 많은 리가 없지 않겠는가? 현실의 북부 대공은 여주인공에게 보석과 드레스를 한아름 안겨다주기는커녕 이번 겨울을 어떻게 나야할지 하늘을 보며 한숨이나 푹푹 내쉬는 개미와 배짱이 같은 존재에 불과하단 말이다.

내가 왜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냐면 마차 밖으로 보이는 카스타나 후작령의 경치는 척박하기가 말로 이를 데가 없는 북부의 평균적인 상태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푸른 초원이었다. 널따란 목초지에 목동이 소를 치는 평화로운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초원의 저 너머에는 넓직한 벌판이 펼쳐져 있었다. 벌판에는 밀이 빽빽하게 심어져 있었는데, 밀이 바람에 흩날리는  모습은 언뜻 보면 황금으로 이루어진 파도가 지상에서 일렁이고 있는 것과 같은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또한, 벌판의 주위에는 방풍림(防風林)을 조성하기 위함인지 소사나무와 편백나무가 빽빽하게 심어져 있었는데 그 또한 주위의 경치와 어우러져  폭의 그림과 같다는 생각을 해버리고 말았다.

“...스승님께서 그러셨는데 카스타나 후작가에서는 마법을 이용해 천후(天候)를 인위적으로 조절하는 방법을 가지고 있대요. 또한, 대지의 지력(地力)을회복시키고 땅 속의 영양소를 보충하는 방법도 가지고 있대요. 그러니, 너무 그렇게 자책하실 필요는 없는  같아요, 카인님.”

그런 나의 표정으로부터 대체 무엇을 읽은 것인지 나의 옆에 앉아 있던 아리아가 조심스럽게 나를 향해 말을 걸어온다. 정말이지, 비앙카도 그렇고 아리아도 그렇고 사람이 마법을 익히게 된다면 다른 사람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듯 읽을  있게 되는 것일까.

“...그래, 나도 알아. 저들의 번영이 마법이라는 초상적인 힘에 기인하고 있다는 것쯤은.”

내가  사실을 어찌 모르겠는가. 애당초 10년 뒤, 마녀로 인해  대륙에 겨울이 찾아왔을  제한적인 환경에서나마 농경을 가능하게  것이 전부 카스타나 후작가의 마법 덕분이었는데 말이다. 뭐, 제 아무리 그들이라고 해도 대기 중의 수분조차 얼어붙는 극한의 추위를 극복하고 식량을 생산하는 일은 지난한 일이었겠지만.

그렇게 내가 창밖의 광경을 보며 여러 가지 생각에 빠져 있던 때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가 멈췄다. 마차의 앞 쪽에서 마부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온다.

"...소공작님, 도착하였습니다."

"...그런가. 수고하였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한 것인가. 그렇게 아리아와 내가 마차 안에서 얌전히 대기하고 있자니, 이윽고 마차의 문이 조심스레 열렸다. 문 앞에는 머리를 전부 올백으로 넘겼으며 연미복을 입은 중년 남성이 나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에스텔 소공작님, 카스타나 후작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끄덕.

에스텔 소공작인 나를 직접 맞이해주러 왔다면 눈앞의 저 중년인 또한 그리 낮은 신분은 아닐 터. 나는 중년인을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여주며 마차에서 내렸다.

고개를 든다. 나의 눈에, 에스텔 공작령의 본성보다 두 배는 크고 세 배 정도는 으리으리한 거대한 성이 비추어진다. 말할 것도 없이, 카스타나 후작령의 본성이 틀림없으리라.

‘염병할.’

새삼스럽지만 그리 사이가 좋지 못한 적대 가문이 이토록 잘나가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니 배알이 꼴리는 것 같다. 에스텔 공작가는 천 년 전에 지어진 본성을 아직까지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건만 카스타나 후작가에서는 썩어 넘치는 돈을 바탕으로 하여 성을 증축한 것도 모자라 이곳저곳을 개조하기까지 한 것 같았다.

‘...성벽에 성문에 대물리저항술식을 새겨놓았군. 거기다가 성문에는 마법금속을 코팅해 놓은 것인가?’

내 단언컨대 카스타나 후작가에서 성문에 쳐 바른 돈만 따지더라도 에스텔 공작령의 본성을 통째로 개축할  있는 금액이 나올 것이다.  가문 사이의 재력 차이가 막심하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차이가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나는 쓰게 웃으며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브레이슬릿을 만지작거려 보았다. 과연, 이 정도로 돈이 썩어 넘치니 비앙카가 이런 물건을 선물이랍시고 아무렇지도 않게 건네줄 수 있었던 것이리라.

그런데 그 때였다.

쿠쿠쿠쿵-

카스타나 후작가의 성문이 둔중한 소리를 동반하며 서서히 열렸다. 그리고, 성문 뒤에 무수한 수의 사용인들이 양 옆으로 얌전히 시립하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성문이 열리자마자 나를 향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에스텔 소공작을 뵙습니다!””

“.....”

마치 몇 번이고 연습이라도 해본 것 마냥 일사분란하기 그지없는 사용인들의 인사에 나는 저도 모르게 몸을 뻣뻣하게 굳혀버리고 말았다. 제 아무리 명목상의 약혼 관계라고는 하지만 다른 곳도 아닌 카스타나 후작가에서 나에게 이런 환대를 해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비앙카 이 계집애가 정말 제정신이란 말인가?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사용인들이  옆으로 시립하여 있는 저 끝에, 화려한 노을빛 드레스를 입은 아리따운 여인이 이쪽을 보며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장면이 내 눈에 들어온다. 적발과 적안을 지닌 여인과 자신의 몸매를 부각시키는 노을빛 드레스는 정말이지 지독하게도  어울렸다. 화용월태(花容月態)라는 말은  여자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생각해버렸을 정도로, 그녀는 아름다웠다.

“카인!”

노을빛 드레스를 입은 비앙카는 나를 향해 사뿐사뿐 뛰어 왔다. 그녀와 헤어진 지 고작해야 2주라는 시간 밖에 흐르지 않았건만, 비앙카는 자신의 얼굴에 애틋하기가 말로 이를 데가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이 광경을 본다면 전쟁터에서 전사했다고 알려진 남편이 어느 날 갑자기 살아서 돌아온 것을 목격한 미망인과 같다고 생각을  정도로 비앙카의 표정은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이 계집애가 썅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나조차 순간적으로 마음이 철렁하며 내려앉을 정도였다.

“...카인, 보고 싶었어요. 정말로.”

그리 말하며 비앙카는 나의 품에 쏙하며 안겨 들어왔다. 그녀의 몸에서 달콤한 과일과도 같은 은은한 향기가 나는 것 같다는 병신 같은 생각을 해버리고 말았다. 아찔하였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다만, 나는  여자를 한순간이나마 사랑스럽다 생각해리고 말았다.

그 때, 그녀의 뺨에 자그마한 머리카락이 한 올 붙어있는 것이 눈에 들어오고 말았다. 나는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 마냥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비앙카의 뺨에 붙어 있는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떼어내었다. 나의 손가락과 그녀의 뺨이 맞닿자, 비앙카는 나를 향해 은은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비앙카와 나의 시선이 교차한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요요(夭夭)하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꿀꺽.

나는 저도 모르게 목울대로 침을 넘어 삼키고 말았다. 이건, 위험하다. 이대로 간다면 약혼의 흉내가 아니라 선을 넘어버릴지도 몰랐다. 지금 내 눈앞의 비앙카에게는  정도의 파괴력이 있었다.

사락.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들린다. 비앙카가 내 품에 꼭하고 안겨든다. 그녀의 풍만한 지체가 나의 전신의 감각에 와 닿는다. 연기라고 하기에는 정도가 너무 지나쳤다. 나의 손이 벌벌 떨려오는 것이 느껴진다. 비앙카는 그런 나를 보며 살포시 웃음을 지어보였다. 이젠, 도저히 무리였다. 그렇게 내 이성이 점차 날아가버리려 하고 있었다.

“...카인님? 괜찮으세요?”

그래, 그  마차에서 내리며 나를 부르는 어떤 소녀의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나를 부르는 아리아의 목소리에, 왠지 모르게 혼미해져 있던 나의 정신은 제정신으로 돌아온다.

“...아.”

그렇게, 마법은 깨어지고 말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비앙카에게서  걸음 뒤로 물러선다. 계속 그녀의 옆에 있다가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사고를 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아.”

그리고 내가 그녀에게서  걸음 떨어진 순간, 비앙카의 표정이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표독스럽게 변하였다.

‘...이런 미친.’

그리고 나는 저 표독스럽기 그지없는 얼굴을 보며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고 말았다. 정말 전형적인 악녀의 얼굴이 아닐 수가 없었다. 저 년이 드디어 양의 탈을 벗어던지고 늑대 같은 사나운 본성을 드러낸 것이 틀림없다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대체 어떤...”

비앙카는 실로 짜증이 난다는 눈빛으로 마차에서 내린 아리아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사람의 눈길이 서로를 교차하고 말았다.

“.....!”

아리아의 얼굴을 본 비앙카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변한다. 마치,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사람과 같이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린다. 그리고, 그녀의 눈동자에 시린 안광이 비춰지기 시작한다. 그와 동시에, 미약하지만 그녀의 몸에서 어떠한 기운이 새어져 나오는 것을 느끼고 말았다. 아마, 갑작스러운 감정의 변화에 순간적으로 스스로의 기운을 통제하지 못한 것이리라. 나는 본능적으로 깨닫고 말았다. 이건, 위험하다. 진짜로.

“비앙카!”

나는 저도 모르게 비앙카에게 달려가 그녀를 내 품안에 와락 하며 끌어안았다.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더라도 이토록 많은 눈이 지켜보고 있는 한 가운데에서 명목상 약혼자인 나를 밀쳐내지는 않을 것이라는 계산에서 벌인 행동이었다.

“...아, 카인.”

...다행스럽게도, 비앙카가 화를 주체하지 못해  머리통을 날려버린다거나 웰던으로 노릇하게 구워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얌전히, 나의 품에 조용히 안겨 있을 뿐이었다. 마치, 처음부터 자신이 바라는 것은 그것뿐이었노라고 주장 하는 것 마냥.

“.....”

나는 그러한 비앙카의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확실했다. 잘못 느낀 것이 아니었다. 방금 전, 비앙카에게서 새어나온 기운, 그것은. 분명.

살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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