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6화 〉6. 헛소동 - 04 (36/201)



〈 36화 〉6. 헛소동 - 04

언제나 뼈저리게 느끼는 일이기는 하지만, 시간이란 녀석은 강자에게 약한 주제에 약자에게는 한없이 강한, 실로 개 같은 새끼임이 틀림없다는 것이 평소 나의 지론이었다. 이것은 결코 근거 없는 비방이라고는   없었다. 내가 이러한 감상을 느끼는 것에는 나름대로의 근거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달 여전, 루멘티움에 있었을 때는 시간이 정말 멈춘 것과 같이 지독하게 느릿느릿 흘러갔었다. 말로서 사람의 복장을 뒤집어 놓는 황제라던가, 언제 주먹을 치켜 올릴지 몰라 나의 심약한 심장에 무리가 오게 하는 황녀라던가, 혹은 겉으로는 느긋하기 이를 데가 없는 미소를 짓고 있지만 무언가 나의 신경을 거스르게 하는 아리엘이라던가, 그 외의 기타 등등들이 언제나 나의 심장을 옥죄고 있었던 무렵에는 시간은 정말 좆같이도 느리게만 지나갔다는 말이다.

헌데 2주 전, 비앙카와의 비밀스러운 ‘계약’을 주고받은 이후 어느덧 내가 카스타나 후작가를 방문할 때가 다가오기까지의 시간은 정말 더럽게도 빠르게만 흘러갔다. 나도 나름대로 마음의 준비라던가, 혹은 카스타나 후작가를 방문하기 전에 여러 가지 준비를 해놓고 싶었건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비앙카와 카스타나 후작가에서 한바탕 연극을 펼치기로  시간이 다가오고 말았다는 의미였다.

그리하여 어느새, 에스텔 공작가와 카스타나 후작가가 천년에 걸친 반목을 끝내고 양가의 자제(子弟)들을 약혼시키기로 한 역사적인 순간이 다가왔다. 뭐, 어디까지나 명목상의 약혼일  진짜로 약혼을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참고로 나와 비앙카가 약혼을 올린다는 소식은 에스텔 공작가의 몇몇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다. 애당초 진짜 약혼이 아니었으니 경사스러운 일이라고는  수 없었을 뿐더러, 사실상 원수나 다름이 없는 카스타나 후작가의 여식과 약혼을 한다하면 제반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좋지 않은 여론이 형성될 우려도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나도 이번 일에 걸려 있는 막대한 이권만 아니었더라면 비앙카의 제안을 결코 수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얄미운 계집애와 약혼식을 올린다니. 아무리 진짜가 아니라고는 하지만 알콩달콩한 연인 흉내를 내야한다니. 상상만 하더라도 몸서리가 처지는 실로 끔찍한 일이 아니던가? 카인 폰 에스텔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원정대에서 비앙카에게 받았던 갖은 모욕과 수치를 잊지 않고 있었단 말이다.

“후우, 사라  아이와 파혼한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다시금 약혼이라니. 카인. 이렇게 너를 보내려고 하니 실로 걱정되기만 하는구나.”

참고로 아버지께서는 내가 무엇 때문에 카스타나 후작가를 방문하는 것인지  이유에 대해 알고 있는 몇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셨다.

“...제가 어린아이도 아닌데 대체 무엇이 걱정된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버지의 뜬금없는 한탄에 내가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질문을 드리자 아버지께서는 나를 향해 미간을 찌그러뜨리셨다.

“...정녕 아무 것도 몰라서 내게 질문을 하는 것이더냐. 정말 눈치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놈이로다. 네가 카스타나 후작가에서도 이 따위로 굴어댄다면 비앙카 그 아이의 속이 뒤집어질지도 몰라 걱정이 된다는 의미였다. 이제야 말귀를  알아먹겠느냐?”

“.....”

이건  무슨 실례되는 말인 것일까. 세상천지에 나만큼 기민하고 약삭빠른 사람이 어디에 또 있다고 아버지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니, 그 전에 아버지께서는 대체 왜 친아들인 나보다 증오스런 카스타나 후작가의 여식인 비앙카를  아끼시는 것일까. 그 성격파탄자 여자가 다른 사람에게서 호감을 얻는 것이 가능하다니, 그러한 일이 정말 현실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그 대상이 나의 아버지일 것이라고는 더더욱 예상하지 못하였고.

“뭐, 되었다. 너를 향해 백날 떠들어 봐야 아무 소용도 없는 이야기이긴 하지. 비앙카 그 아이라면 어련히 널 알아서 내조해줄 것이라 생각한다. 벌써부터 시아비를 챙길 줄 아는 기특한 아이이니 말이다.”

그리 말씀하시며 아버지께서는 품속에서 넥타이핀 하나를 꺼내셨다. 백금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한가운데에 큼지막한 청금석이 박혀 있는, 딱 봐도 더럽게 비싸 보이는 넥타이핀이었다.

“보거라. 저번 방문 때 비앙카 그 아이가 내게 선물로  넥타이핀이란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라는 녀석은 내 생일 날에도 동전 한 푼 쓰기 아까워하는 호로 자식인 것에 비해 비앙카 그 아이는 에스텔 공작가를 방문한 기념으로 내게 이것을 꼭 전해드리고 싶었다 하더구나.  눈 앞에 있는 어떤 녀석과 참으로 대비되는 행보가 아니더냐?”

“.....”

빌어먹을  같으니. 대체 어느 틈 사이에 아버지께 저런 뇌물을 드리고 간 것일까.아니, 그 전에 아버지께 대체  저런 뇌물을 드린 것인지 그 저의가 의심스럽기만 하다. 도대체 어떤 무시무시한 흉계를 꾸미고 있기에 저런 값비싼 넥타이핀을 아무렇지도 않게 선물이랍시고 내놓을  있는 것일까.

내가 비앙카가 꾸미고 있을 악랄한 음모의 정체가 무엇일지에 대해 고심을 하고 있자니, 아버지께서는 이제 막 생각이 나신 듯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내게 건네주셨다.

“아, 그러고 보니 이것을 잊었구나. 자, 어서 받거라.”

“....?”

나는 다소 얼떨결한 기색으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것은, 금으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브레이슬릿이었다. 브레이슬릿에는 필시 이름난 세공사가 다듬었을 것이라 추측이 되는 두 개의 녹색 페리도트가 박혀 있었는데, 빛을 반사하며 눈부신 광택을 반사하는 페리도트와 황금이 한데 어우러지면서 놀랄 만큼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비앙카가 내게 맡긴 선물이다. 네게 전해 달라 더구나. 원래 네게 바로 건네려고 했는데 쑥스러움 때문에 네 얼굴을 보며 전해줄 수가 없었다더구나. 허허, 말하는 것도 하나하나 어찌나 귀엽던지. 너 같은 놈에게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더구나.”

“...그건 또 무슨...”

나는 아버지의 말씀을 들으며 황당함에 입을 쩍하고 벌리고 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알고 있는 비앙카와 아버지가 알고 있는 비앙카 사이의 괴리가 너무나도 크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그 계집애가 대체 언제까지 내숭을 떨고 다닐 작정인지 이제는 감도 잡히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께서 건내주신 브레이슬릿을 아무 생각 없이 오른 손목에 착용해보려고 하였다. 헌데 그 때, 아버지께서 그런 나를 조용히 만류하셨다.

“아, 그러고 보니 그 아이가 꼭 왼쪽 손목에 착용해야 한다고 전해 달라 하더구나.  이유에 대해서는 나도  모르지만.”

“...왼쪽 손목이요?”

거 참, 까탈스럽기가 말로 이를 데가 없는 여자이다. 고작해야 브레이슬릿 하나 가지고 뭘 그렇게 유난을 떠는 것인지 원.

'...뭐, 나중에 착용해도 되겠지.'

원래부터 장신구 같은 것을 걸치지 않는 성격인지라 이런 것은 내게 있어 거추장스럽기만 하였다. 어차피 명목상 약혼자에게 선물임이 분명하니, 굳이 착용하지 않아도 비앙카 또한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을 것라 생각한다. 아마도.

그런데 그 때였다. 저만치에서 이쪽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어느 시선 하나가 느껴졌다. 왠지 모를 압박감에 눈알을 굴려 옆을 살펴보니, 그 시선의 정체는 바로 저 만치에서 이쪽을 향해 얌전히 시립하고 있던 아리아였다.

“.....”

쟤는  또 저런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것일까. 혹시 내가 뭘 잘못하기라도 한 것일까?

터벅, 터벅.

아리아는 실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내뿜으며 이쪽을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그 분위기에 압도당하여 나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넘어 삼키고 말았다. 이윽고, 나의 앞쪽까지 다가온 아리아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저, 공작님. 대화중에 죄송하지만 제가 한 말씀 올려도 괜찮을까요?”

...다행스럽게도 나 때문에 이쪽으로 온 것은 아니었나보다.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응?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 것이더냐. 아리아.”

아버지께서는 나를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사근사근한 어조로 답을 하셨다. 모르는 사람이 이 광경을 본다면 아리아가 아버지의 친딸이라 착각을 해도  말이 없을 정도로 불공평한 처사였다.

“그게, 저. 방금 전의  넥타이 핀, 제가 좀 살펴보아도 괜찮을까요? 물론, 주제가 넘는다는 것은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래도...”

아리아가 머뭇거리는 태도로 말을 하자 아버지께서는 실로 시원스러운 태도로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게 무어가 어렵다고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것이더냐. 괜찮단다, 아리아. 마음껏 살펴보려구나.”

그리 말씀하시며 아버지께서는 아리아에게 넥타이핀을 순순히 넘겨주셨다.

“가, 감사합니다.”

아버지로부터 넥타이핀을 받아든 아리아는 한동안 말없이 넥타이핀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마치, 부모님의 원수라도 되는 것마냥 무시무시한 눈초리였다.

“...으응?”

허나 그것도 잠시, ‘이게 아닌데’라는 표정을 지으며 넥타이핀을 요리조리 살펴보는 아리아.

"...윽."

하지만 결국은 아무런 소득이 없었는지 울상을 지으며 아버지께 넥타이핀을 순순히 돌려주었다.

“공작님, 죄송합니다. 제가 예민했었나 봐요...”

“허허, 괜찮단다. 아리아. 네가 요즘 마법에 매진하고 있다면서? 마법사들은 보통 사람보다 훨씬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으니 그런 착각을 할 수도 있지. 이해한다.”

아버지께서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풀이 죽어 있는 아리아를 위로해주셨다. 그리고  역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버지와 같은 의견이었다. 비앙카 그 계집애가 제정신이 아닌 것은 맞았지만 이런 선물에도 뭔가 수작질을 부렸을 만큼 맛이 가있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흠, 그런데 이번 여정에 결국은 아리아를 데려가는구나. 내게 처음에는 아리아는 데리고 가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았더냐?”

“네, 원래는 데리고 갈 생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전력(戰力)이 되는데 데리고 가지 않을 이유 또한 없지 않겠습니까. 결정적으로, 아리아 본인이 강력하게 희망을 하더군요.”

나는 오늘 아침, 내 방을 방문하여 나를 향해 말 그대로 간청을 하던 아리아의 모습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자신 또한 도움이 될  있다며 그토록 애처롭게 말을 하는데, 제가 무슨 수로 그 아이의 부탁을 뿌리치겠습니까. 적어도 저는 그런 냉혈한이 되지 못합니다.”

“흠.”

사실, 지금  순간도 아리아를 데리고 가는 것이 정말 옳은 것인지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왠지 모르게 불길했기 때문이다. 만약에, 어디까지나 만약의 영역에 지나지 않기는 했지만, 정말로 내 예상이 들어맞는다면 아리아와 비앙카를 마주하게 하는 것은 정말 최악의 사태가 아닐 수가 없으리라.

물론, 황녀나 아리엘은 아리아를 보며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기에 아무런 일도 없을 가능성이 훨씬 높았지만 조심을 해서 나쁠 것은 없지 않겠는가.

그렇게 한참을 고민한 끝에 나는 결국 아리아의 제안을 수락하기로 결정하였다. 아리아의 말마따나 충분한 도움이 될 수 있는 인원을 이곳에서 가만히 놀리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특히 카스타나 후작가가 실은 적지나 다름없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위험한 곳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그럼 저 새끼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에스텔 공작가에 머물고 있는 밥벌레인 동시에 기생충  마리라 할 수 있는 어떤 녀석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리고 녀석을 대체 어떻게 처리를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심도 있는 고민을 하기 시작하였다. 내가 없는 동안 에스텔 공작가에서 빈둥빈둥 놀고 있을 녀석을 생각하니 기분이 더러워지기 시작하였다.

“...나는 에스텔 공작가에 얌전히 머물러 있도록 하겠다.”

내가 자신에게 뭐라 할 것을 눈치라도 챈 것인지 루시안은 내가 입을 벌리기에 앞서 재빠르게 선수를 쳤다.

“왜?”

나는 퉁명스럽게 녀석의 말을 받았다. 할 일이 없으면 밖에 나가서 밭이라도 갈던지, 어디서 감히 본성에 틀어박혀 꿀을 빨 생각을 하는 것일까. 상도덕도 없는 새끼 같으니라고.

“...카인 폰 에스텔. 나는 이곳에 공짜로 머무는 것이 아니다. 나는 분명 이곳에 머무르기 위해 네게 매 달마다 일정 이상의 비용을 지불하고 있을 터. 또한 나는 에스텔 공작령의 기사들을 단련시키는 역할까지 맡고 있다. 이 이상으로 내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은 지극히 불합리한 처사라는 점을 네게 말해두고 싶군.”

과연, 내가 듣기에도 루시안의 말은 합리적이었으며 꽤나 설득력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의 말은 상당한 타당성을 지니고 있었기에 나는 저도 모르게 루시안의 언변에 감화되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래서  어쩌라고. 내가 듣기로는 북쪽 마을에 마수들이 준동할 기미가 보인다던데 기사단이랑 같이 가서 사냥이나 해.  마리라도 놓쳐서 주민들이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전부 네 탓인 것으로 간주할 테니 그리 알도록.”

“...그건  무슨, 불합리하기 이를 데가 없군. 대체 왜...!”

“아, 나보고 뭐 어쩌라고! 좆같으면 그냥 너네 집에 돌아가던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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