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6. 헛소동 - 03
“에스텔 소공작, 그러니까 카인 폰 에스텔은 저희들의 제안을 수락하였습니다.”
“...그런가, 수고하였다. 비앙카.”
카스타나 후작가에서도 깊숙한 곳에 위치한 가주 집무실. 그곳에서 카스타나 후작가의 가주, 시온 델 카스타나와 그의 딸인 비앙카 델 카스타나는 마력으로 이루어진 방음막까지 쳐가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현재 그들이 나누고 있는 대화는 결코 외부로 새어나가서는 안 될 극히 비밀스러운 이야기였다. 특히, 카스타나 후작가 어딘가에 쥐새끼들이잠입해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신중에 신중을 기하더라도 결코 부족함이 없으리라.
“앞으로 며칠 뒤에 에스텔 소공작이 카스타나 후작가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표면상으로 그는 저의 약혼자 신분으로 이곳에 당도할 것입니다. 음지에 숨어 있는 그들이라면, 에스텔 공작가와 카스타나 후작가가 하나가 될 지도 모른다는 이 사태에 대해 결코 좌시할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겠지. 제국의 귀족들이 사분오열되기를 누구보다 바라는 것들이니 말이다. 며칠 전부터 너와 에스텔 소공작 사이에 이루어진 약혼 소식을 제국 전체에 은근슬쩍 흘리고 있었으니 아마 지금쯤 발바닥에 불이 붙은 것 마냥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음지에 숨어 있던 쥐새끼들이 양지를 향해 머리를 쳐드는 단 한 번뿐인 기회이다. 비앙카, 이 기회를 결코 놓쳐서는 아니 된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거라.”
“...명심하겠습니다. 가주님.”
...하지만,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아버지와 딸 사이에서 오고가는 대화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격식이 있었으며 지나치게 딱딱하였다. 물론, 현재 그들이 공적인 업무 관계로 마주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카스타나 후작과 비앙카 사이에 흐르는 기류는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마냥 틀린 말은 아니었다. 카스타나 후작도, 비앙카도 현재 그들이 나누고 있는 대화에서 어떠한 감흥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들은 사전에 미리 약속이라도 한 것 마냥 서로를 향해 무미건조한 말만 던지고 있었다. 그 속에는 혈육에 대한 정도, 부녀 사이의 친애도, 아무 것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물론, 그러한 사실은 현재 대화를 나누고 있는 카스타나 후작과 비앙카 본인이 더욱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둘 모두 숨이 막히는 듯한 현 상황을 개선할 의지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왜냐하면 이미 너무 늦어버렸기 때문이리라. 이제 와서 어떠한 것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들은 이미 평행선상을 걷고 있었다. 모든 것은, 이미 옛날 옛적에 끝나 있었다. 모조리.
“그건 그렇고, 네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 에스텔 소공작과 관련된, 개인적인 호기심에서 발로한 질문이다.”
“...말씀하십시오. 가주님.”
“네가 직접 만나 본 에스텔 소공작은 어떠한 인물이더냐? 소문에 의하면 이성을 매혹하는 재주 외에는 별 볼일 없는, 얼간이 같은 자라던데 실제로도 그러한 자이더냐? 아니라면 에스텔의 혈통을 이어받은 녀석답게 한 가닥 감춰놓은 재주가 있는 녀석으로 보이더냐?”
카스타나 후작의 질문은 본인 딴에는 어떠한 악의도 포함되어 있지 않은, 지극히 순수한 의도에서 우러나온 질문에 불과하였다. 카스타나 후작 또한 최근 들어 제국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여러 소문을 접하였기에 잘 알고 있었다.
에스텔 공작가의 소공작, 카인 폰 에스텔이라는 녀석이 요 몇 달 사이에 갖가지 추문을 일으키고 다녔다는 것을. 그리고,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제도의 연회장에서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투르니젠 공작가의 소공작과 정면에서 겨룬 끝에 당당히 승리를 거두었다는 사실 또한.
단 한 번도 그를 직접 마주한 적이 없는 카스타나 후작으로서는 에스텔 소공작의 진실 된 모습이 어떠한지 쉽사리 파악할 수가 없었다. 과연, 녀석은 소문대로 별 볼일 없는 한량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라면 사실은 자신의 발톱을 감춰둔 새끼 호랑이 같은 녀석이었던 것일까.
그렇기에 카스타나 후작은 비앙카에게 질문을 던져보았다. 그는 비앙카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은 차치해두고서라도, 그녀의 안목만큼은 그럭저럭 쓸만하다는 것을 은연중에 인정하고 있었다. 그런 비앙카라면, 고작해야 세간에 떠도는 소문에 휘둘리지 않은 채 녀석의 진면목을 쉽사리 파악하였으리라.
그리고 그 순간, 카스타나 후작은 자신이 무언가 말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달았다.
구우웅-
“.....!”
비앙카의 자그마한 몸으로부터, 어마어마한 양의마력이 폭사되었다. 그녀로부터 폭사된 마력은 하나의 폭풍이 되어 자그마한집무실 전체를 가득 메운다. 비앙카로부터 폭사된 마력은 현재 그녀의 기분을 대변하기라도 하는 것 마냥 날카롭게 날이 서 있었다. 제국에서 대마법사라고 추앙을 받고 있는 카스타나 후작조차 비앙카가 뿜어내는 마력에 의해 자신의 몸이 따끔거려오는 것을 느끼고 말았다. 아니, 그러한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비앙카의 마력은 하나의 질량을 가진 것처럼 집무실 전체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그, 음...’
실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아직 이립조차 되지 않은 어린 계집아이의 몸에서 나오는 마력에, 그것도 의도한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는 찌꺼기 같은 마력에 자신이 이토록 영향을 받고 있다니?
그런 카스타나 후작가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비앙카는 두 눈에 귀화(鬼火)를 불태우며 자신의 아버지를 향해 씹어 먹듯 말을 내뱉었다.
“...그는, 카인 폰 에스텔은 제 약혼자입니다. 또한, 그는 가주님이 계산에 넣을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 제 앞에서 그를 욕보이는 표현은 사용하지 말아 주십시오. 가급적이면, 영원히.”
반론 따위는 결코 허락하지 않겠다는 비앙카의 단호한 태도에 카스타나 후작은 속으로 신음성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새삼스럽지만, 그는 자신의 앞에 있는 딸이 괴물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고 말았다. 과연, 카스타나가 만들어낸 최고의 걸작품답다고 해야 할까.
...허나, 극히 유감스럽게도 그 걸작품은 실패작에 불과하였다. 그리 되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하였거만 결과적으로 병기에 불과한 존재가 사람의 마음을 갖추게되었으니까. 실로 유감스럽기 그지없는 사태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비앙카와척을 질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안 그래도 중요한 거사를 앞두고 있는 시점이었다. 합리적으로 보았을 때, 고작해야 사탕발림 몇 마디로 비앙카를 안정시킬 수 있다면 남는 장사임이 분명하였다. 비록 말을 잘 듣지 않는다고 해도, 아직은 쓸모가 있는 병기임이 분명하니까.
“...그래, 방금 전의 내 말은 철회하도록 하지. 그렇다면 네게 다시 물어 보겠다. 장차내 예비 사위가 될지도모르는 녀석은, 어떠한 녀석이더냐.”
마법사답게 싸늘한 성정을 가지고 있는 카스타나 후작이 내뱉었다고는 믿기 힘든, 어딘가 빈정거리는 듯한 어투였다. 하지만 그가 그러한 말을 내뱉은 순간,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비앙카의 마력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이에 놀란 카스타나 후작이 비앙카의 얼굴을 쳐다보니, 그녀는 입가에 아주 희미한 미소를 걸치고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딸아이의 미소였다.
“...좋은 사람입니다. 필경, 가주님께서도 마음에 들어 하실 것입니다.”
“.....”
그런 비앙카를 쳐다보며 카스타나 후작은 속으로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가 아무리 타인의 감정에 무감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상황이 이쯤 돌아가니 눈치를 채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허, 이것 참.’
다른 것은 몰라도 한 가지는 확실한 것 같았다. 카인 폰 에스텔이라는 녀석은, 소문대로 빌어먹을 개종자임이 틀림없었다.
‘만만치 않은 놈이로군. 아니, 대단한 녀석이라 해야 하나. 에스텔 공작가를 향한 감시의 인원을 두 배로 늘려야겠어.’
카스타나 후작의머릿속에서 카인 폰 에스텔에 대한 처우가 결정나는 순간이었다.
****
“...웃기는군, 정말.”
가주의 집무실에서 나와 자신의 방에 틀어박히기 무섭게, 비앙카는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우스웠다.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주제에 자신의 뜻대로 상황을 조율하려고 드는 가주의 행태가 실로 우습기 그지없었다. 제 발밑조차 들여다보지 못하는 얼간이가 감히 누구를 재단하려고 드는 것인가? 그가 자신의 아비라는 사실은 비앙카에게 있어 염두의 대상조차 되지 않았다.카스타나 후작이 적당히 영리하고, 적당히 눈치 있는 쓸만한 사냥개가 아니었다면 비앙카는 결코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
카스타나 후작가를 지켜낸다? 비앙카가 듣기에 그의 말은 전부 변명에 불과하였다. 저 남자는 그저 자신이 손 안에 움켜쥐고 있는 것이 새어나가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는 소인배에 지나지 않을 뿐이었다.
애당초, 가장 가까운 혈육이 배신한 사실조차 알지 못하는 얼간이 주제에 앉아서 천리를 내다보는 것처럼 구는 행태가 역겹게만 느껴졌다. 그 남자에게 지금 자신이 행하는 일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이 조금 아쉽게 여겨질 정도였다.
“천공을 달리는 용의 유산이여, 비탄의 한숨을 토해내거라.”
쩌억-
비앙카의 읊조림과 함께 그녀의 옆에 공간이 쩍하며 갈라졌다. 현존하는 마법사 중에서도 극히 일부만이 사용할 수 있는 아공간 마법이었다. 갈라진 공간 사이로, 왠지 모르게 비앙카와 얼굴 윤곽이 닮은 중년 남성 한 명과 검을 찬 기사 한 명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중년 남성은 현 가주의 친동생이자 카스타나 후작가의 수석 마법사 중 한 명인 헤론 델 카스타나였으며, 검을 찬 기사는 카스타나 후작가의 흑풍(黑風) 기사단 소속, 2번대 대장인 조슈아 펜들이라는 남자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들’에게 카스타나 후작가를 팔아먹은 쓰레기이기도 하였다. 증거 따위는 아무 것도 없었지만 비앙카는 그들이 배신자임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미래에서 저것들의 머리통을 헤집어가며 알아낸 확실한 정보였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확실한 정보는 세상 어디에도 없으리라. 어느 누구에게도 정보의 출처를 밝힐 수 없다는 아주 사소한 단점을 제한다면.
헌데 비앙카의 아공간에서 빠져나온 그들은 모습은 아무리 보아도 정상적이라고는 할 수없는 모습이었다. 그들의 동공은 멍하니 풀려 있었으며, 입가에서는 침이 줄줄 새고 있었다. 마치, 이성이라는 것이 없는 백치와 같은 모습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비앙카의 작품이었다. 저들이 혹시 아공간 안에서 난동을 부리기라도 한다면 일이 귀찮아지기에 그들을 상대로 ‘설득’을 행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으리라.
“...흥.”
비앙카는 그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며 냉소를 머금었다. 그녀가 보기에 저것들은 세상에 살아 있을 가치가 없는 쓰레기들에불과하였다. 마음 같아서는 저 버러지들을 단숨에 먼지로 만들어버리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아직은 쓸모가 있는 버러지들이었다. 그러므로 아직 죽일 수는 없었다. 그렇다, 아직은.
“나의 눈을 똑바로 쳐다 보아라.”
"....."
"....."
비앙카의 말에 풀린 눈을 한 그들은 멍하니 그녀의 눈을 바라본다.
“며칠 뒤, 비앙카 델 카스타나의 약혼자인 카인 폰 에스텔이 이곳에 당도할 것이다. 너희들이 할 일은 아주 간단하다.”
그리 말을 하며 비앙카는 진심으로 유쾌하다는 듯 그들을 향해 살며시 속삭였다.
“그가 이곳에 당도하고 나서 일주일 뒤, 그를 몰래 습격해라. 그를 향해 살의를 드러내라. 하지만 그를 죽여서는 안 된다. 상처를 입혀서도 안 된다. 너희들이 할 일은 오직 하나, 얼간이마냥 그를 향해 덤벼들다가 그의 손에 순순히 잡히는 것이다. 내 말을 이해했느냐?”
끄덕.
비앙카의 말에 그들은 멍청이마냥 고개를 얌전히 끄덕였다. 그들의 반응에 비앙카는 진심으로 흡족한 듯 웃음을 지어보였다. 아무래도 그녀의 ‘연구’는, 상당한 성공을 거둔 것이 분명해보였다.
“...카인.”
비앙카의 노림수는 실로 간단하였다. 카스타나 후작가를 좀먹고 있는 버러지들을 생포한다는 공을 전부 그에게 몰아주는 것이었다. 그런 막대한 공을 세운다면 가주를 위시한 카스타나 후작가의 윗대가리들도 그를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적어도, 카인이 카스타나 후작가의 어떤 여자와 명목뿐인 약혼에서 그치지 않고 결혼을 하기를 바라더라도 쉽사리 반대 의견을 내세우지는 못할 것이리라.
...만약, 끝까지 반대 의견을 내세운다면 마찬가지로 '설득'을 해야겠지만 가급적이면 그런 일이 없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타인의 머리통을 헤집는다는 것은, 그녀에게 있어 결코 유쾌한 일만은 아니었으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이 최선이었다. 그도,자신도,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렇기에 이토록 거대한 연극을 기획하였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처리할 수 있는 배신자를 색출하지 않고, 상황을 여기까지 끌고 왔다. 그는 알고 있을까. 카스타나 후작가 전체가, 그를 위해 조성된 무대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을.
처음에는 거부감이 들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또한 알게 되리라. 자신이 얼마나 그를 사랑하고 있는지. 자신이 그를 위해 어떤 것을 희생하였는지. 모든 것을 알게 된다면, 분명 그 또한 자신을 사랑하게 되리라.
이것으로서 모든 준비는 끝마쳤다. 남은 것은, 그가 이곳에 당도하는 것만 남아 있을 뿐. 비앙카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 생각을 하며 요요한 기색으로 웃음을 머금었다.
“...부디, 내가 선을 넘게 하지 말아줘, 카인.”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