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6. 헛소동 - 02
도움이 되고 싶다.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 주고 싶다. 누군가의 도움이 되어 주고 싶다. 그것은, 아리아의 기저에 내재되어 있던 단 하나의 신명(神命)이었다. 어째서 이러한 마음을 품게 되었는지 아리아 본인조차 알지 못한다. 그냥, 알게 되었을 따름이다. 그 날, 그의 침대 위에서 눈을 뜨게 된 이후에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을 따름이다. 이 몸은,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어주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품고 있었다는 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발견하였다. 아리아 본인이, 마음을 다 바쳐 도움이 되어주고픈 한 명의 사람을. 몸을 다 바쳐 힘이 되어주고 싶은 어떤 사람을.
“...카인님.”
그 후, 아리아는 그의 도움이 되기를 원하였다. 어디서 굴러먹다온 것인지 알 수 없는 비루한 계집아이를 귀애해주는 그의 힘이 되어주기를 바라였다. 하지만, 아리아의 그런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리아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아리아는 그가 보살펴야만 하는 방해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아아.”
그렇다. 결국, 중요한 순간에 자신은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가 자신에게 이리 말을 하였다. 자신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그렇기에 자신을 동행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노라고.
...아팠다, 그리고 슬펐다. 하지만, 그보다는 ‘분하다’라는 감정이 그녀의 마음속을 가득 메웠다. 만약, 만약에 자신이 제도에서 만난 그 여자들처럼 강했더라면, 그 여자들처럼 쓸모가 있었더라면 그 순간에 그를 따라갈 수 있었을텐데. 그가 자신이 따라간다는 사실에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을 텐데. 그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었을 텐데. 이런 생각이, 아리아의 머릿속을 점령하고 말았다.
바라였다. 그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힘을 갖추기를. 그리고 소망하였다. 자신 또한 그 여자들 못지않은 힘을 갖춤으로서 그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기를. ...그 끝에, 그의 옆에 당당히 설 수 있는 그 날을.
그렇기에 아리아는 마법을 택하였다. 아리아의 스승은 이렇게 말하였다. 만일 자신이 마법에 매진을 한다면, 1년도 되지 않아 어지간한 마법사는 내리 깔아 볼 수 있는 힘을 갖추게 될 것이라고. 자신이 그렇게 강해진다면, 그분도 자신을 다르게 볼 것이 분명하다고.
...하지만 스승의 말은 틀렸다. 왜냐하면, 아리아는 고작해야 열흘이라는 시간 만에 스승이 평생에 걸쳐 이룩한 경지를 뛰어 넘어 저 너머의 아득한 천상의 저편에 손을 뻗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하루아침에 그러한 경지에 도달한 것은 아니었다. 제도로 떠나기 전, 아리아는 스승으로부터기초를 전수 받고 마학과 관련한 여러 지식을 습득하였었다. 카를 또한 스승으로서의 재능이있었으며, 아리아 또한 오성이 뛰어났기에 이러한 성취가 가능했던 것이리라.
허나 그러한 점을 감안하더라도 아리아의 성장 속도가 역사에 유래가 없을 정도로 비정상적이라는 점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가없었다. 빨라도 너무 빨랐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마법을 익혀 나가는 아리아의 모습은, 마치 마법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잊어버리고 있던 것들은 다시금 되새겨 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정작 아리아 본인은 불만에 가득 차 있었다. 느렸다. 너무도 느렸다. 이러한 속도로는 시간에 맞추지 못할 것 같았다. 며칠 후, 그는 에스텔 공작령을 떠나 적지(敵地)나 다름없는 곳으로 떠나는 것이 예정되어 있었다. 이번에는, 결코 그를 홀로 보낼 수는 없었다. 이번만큼은 다시금 위기의 바깥쪽에 놓여진 채 그를 기다리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니, 시간이 없었다. 자신은 한시라도 빠르게 강해져야 했다. 그래야, 그의 힘이 되어줄 수 있으니까.
“.....”
눈을 감는다. 의식이 깊숙한 곳으로 침잠한다. 아리아의 육신은 지상에 있었지만 명상에 잠겨 있는 그녀의 정신은 아득한 저편에 도달하여 있었다. 시야를 위쪽으로 돌린다. 아리아의 두 눈에는, 아직 인류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아득한 지식이 한가득 들어왔다. 손을 뻗는다. 닿지 않았다. 유감스럽게도, 아직은 부족하였다. 현재 아리아의 경지로는 이 이상을넘볼 수가 없었다.
[...아, 으...]
허나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이대로 물러설 수 없었다. 그만큼 그녀는 간절하였다. 다시금 손을 뻗는다. 닿지 않는 것도, 튕겨나가는 것도 전혀 상관하지 않은 채 다시금 손을 뻗는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손이 진리의 편린(片鱗)에 맞닿았다.
우웅-
그 순간, 아리아는 자신의 정신세계가 한 차례 확장되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가로막고 있던 벽이 무너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동시에 여기까지였다. 이 이상 무언가를 얻어내려 한다면 몸에 무리가 올지도 몰랐다. 그것은 싫었다. 그에게 걱정을 끼친다는 것은 죽어도 싫은 일이었다. 그녀의 의식이 정신세계 깊숙한 곳으로부터 부상하였다. 천천히 눈을 뜬다. 눈을 뜨니, 그녀의바로 앞에 자신의 주인이 서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카인님?”
설마 자신이 수련을 하는 곳에 그가 방문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에 아리아가 어안이 벙벙한 기색을 표하고 있자, 카인은 그녀를 향해 머쓱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미안, 아리아. 딱히 방해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고, 네가 걱정이 되어서 살짝 안색을 살펴본다는 것이 네게 민폐가 되었던 것 같네.”
자신을 향해 사과를 하는 카인의 말에 아리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변하였다. 그리고 그런 생각 따위는 전혀하지 않았다는 듯 재빠르게 손사래를 쳤다.
“아, 아, 아, 아니에요. 저는 정말 괜찮아요. 네, 그렇고말고요.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네, 진짜에요.”
그리 말을 하며 아리아는 저도 모르게 카인으로부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왜냐하면, 자신은 오늘 하루 종일 마법에만 매진하고 있던 몸이었기 때문이다. 평상시에 카인의 옆에서 시중을 들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그 때는, 자신의 몸에서 혹시 날지도 모르는 체향을 감추기 위해 언제나 몸을 정갈하게 씻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새벽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손에 물 한 방울 묻혀보지 못한 상태였다. 만약 카인이 자신의 몸에서 나는 체향을 맡으며 인상을 찌푸리기라도 한다면 아리아는 그 즉시 졸도를 해버릴 자신이 있었다.
“...아니, 오늘 하루 종일앉아서 명상 밖에 하지 않았거늘 무엇을 그리 신경 쓰는 것이더냐...”
“스승님은 아무 것도 몰라요.”
카를은 조금은 어이가 없다는 눈길로 아리아를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스승의 그러한 눈길을 가뿐히 무시하였다. 애당초, 여자 손목 한 번 잡아보지 못한 채로 파릇파릇한 청춘을 마감해 버린 카를에게 있어 여자의 유리세공품 같은 섬세한 마음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지도 몰랐다-
“.....?”
그리고, 그러한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던 카인은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 말았다. 애당초 제반사정을 아무 것도 모르는 그가 이 상황에 대해 이해를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게 카인이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그 둘을 쳐다보고 있는 틈을 타, 아리아는 재빠르게 마법을 사용하였다. 자신의 전신을 종이장보다도 더욱 얇은 마력으로 둘러 싼 후, 그와 자신 사이에 존재하는 대기의 흐름을 일시적으로 역류시켰다. 이로서 자신의 체향이 그에게로 새어나갈 염려는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푸석푸석한 머리가 조금이나마 윤택이 나보이도록 머리카락 주위의 빛을 굴절시키기에 이르렀다. 아리아의 마력에 의해 굴절된 빛은 카인의 시신경에 왜곡된 이미지를 전달하게 되리라.
여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해야 4.7초. 어지간한 마법사들은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마력 조작의 극치라고 할 수 있는 예술적인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카를에게 있어서는 실로 재능의 낭비로 밖에 보이지 않는, 한숨이 절로 나오는 광경이었다. 저런 것은 가르쳐준 적도 없었건만, 도대체 어느 틈새에 익힌 재주인 것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괜한 걱정이었나.’
방금 전, 의미심장한 얼굴을 하고 소공작을 향해 경고를 던졌던 자기 자신이 한심하게만 여겨졌다. 저런 아이가 세상에 위협이 될 것이라 생각했던 자신이 머저리 같이 여겨졌다. 소공작 본인을 위험에 빠뜨릴 가능성은 차고 넘쳤지만, 카를은 거기까지 신경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그거야 소공작 본인이 알아서 할 일이지, 자신이 오지랖을 떨 일은 아니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감, 표정이 왜 그래?”
“...아무 것도 아닙니다. 소공작님.”
물론, 마력을 인지하는 재주가 없는 카인은 방금 전 자신의 눈앞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인지할 수 없었기에 여전히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뭐, 설사 인지하였다고 해도 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테지만.
그렇게 카를이 속으로 한숨만을 내리쉬고 있을 무렵, 그제야 카인은 자신이 아리아를 향해해줄 말이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네게 축하의 말을 전하는 것을 잊었구나. 방금 전에 있었던 광경, 나도 전부 보았다. 모르긴 몰라도 어떠한 성취를 얻은 것이 틀림없겠지?”
그리 말하며 카인은 아리아를 향해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하였다.
“정말 수고 많았다, 아리아.”
“...아.”
카인의 칭찬을 들은 순간, 아리아의 얼굴이 환하게 변하였다. 기뻤다. 자신이 성취를 이루어낸 것 보다, 자신을 가로 막고 있던 벽을 뛰어넘은 것보다 그가 자신을 향해 ‘수고 했다’라는 말을 한 마디 해준 것이 더욱 기뻤다. 뿌듯함을 느꼈다. 만족스러웠다. 행복한 감정이, 아리아의 가슴 속을 가득 채워 나갔다.
“...카인님...”
아리아는 저도 모르게 카인을 향해 한 발짝 다가서고 말았다. 그가 자신을 인정해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직은 한참이나 부족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저도 모르게 세차게 두근거려오는 심장만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아리아의 얼굴이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새빨갛게 변하였다.
어쩌면 자격이 생긴 것일지도 몰랐다. 언제나 그가 지켜주어야만 하는 짐덩이가 아니라, 그와 같은 위치에 서서 같은 곳을 바라볼 자격이 있는 당당한 사람이 된 것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끝에, 자신과 같이 비천한 계집아이가 언감생심 바라서는 아니 될 일이기는 하지만, 어쩌면.
어쩌면.
“...아리아? 괜찮니?”
“...네, 네!”
카인의 걱정스러운 어조에 아리아는 저도 모르게 새된 목소리를 내고 말았다. 한순간, 자신의 발칙한 상상이 그에게 들킨 것이라 착각해버리고 말았다.
“어디 아픈 것 아닌가? 얼굴에 열이 엄청난데?”
그리 말하며 카인은 아리아의 이마에 자신의 손을 스스럼없이 가져다 대었다. 그 손길은, 마치 여성을 대한다기 보다는 여동생을 대하는 것 같은 거리낌이 없는태도였다.
...그리고, 카인의 그러한 행동은 아리아의 기분을 순식간에 저조하게 만들었다.
그는, 아리아를 하나의 여자로 보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을 지나치게 편히 대하고 있었다. 그것은 나쁜 것만은 아니었지만, 아리아는 그가 자신을 여자로서 의식하지도 않고 있다는 사실에 절망감을 느끼고 말았다.
“...하나도, 안 아파요. 그러니 손 떼 주세요.”
“어? 그, 그래?”
아리아는 저도 모르게 싸늘한 어조로말을 내뱉고 말았다. 아리아의 그러한 태도에 카인은 저도 모르게 그녀의 이마에서 손을 떼고 말았다.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상황이 뭔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사실만은 눈치를 채고 말았기 때문이다.
“.....”
싫었다. 싫었다. 정말로 싫었다.
만약,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제도의 황녀나 혹은 가슴만 커다란 그 성직자였다면 카인은 절대로 이러한 태도를 고수하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지금 아리아에게 행했던 것과 같은 스스럼없는 스킨십은 없었을 것이다. 스킨십은 커녕, 그녀들을 이성으로 인식하며 곁에 함부로 다가서지도 못하였겠지. 그러한 사실이, 아리아의 신경을 더욱 거스르고 있었다. 이대로는 아니 되었다. 언제까지고 저 사람에게서 어린아이로 취급받는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싫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었다. 여기서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였다. 그에게 이런 말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 가슴이 아팠지만, 더욱 머나먼 미래를 생각한다면 반드시 필요한 조치이기도 하였다.
“카인님.”
아리아는 싱긋 웃으며 카인에게 또박또박 말하였다.
“앞으로는 숙녀의 몸을 함부로 만지지 말아주셨으면 해요. 저도 이제 다 컸으니까요.”
싸늘하고, 한기가 서린 아리아의 발언에 카인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고 말았다. 확실히, 아리아의 말도 일리가 있었기에 카인은 스스로의 잘못을 순순히 인정하고 말았다.
“....미안하구나, 아리아.”
아리아에게 사과를 던지며 카인은 끝내 울적함을 감추지 못하였다. 순진하기만 했던아리아에게 질풍노도의 시기가 온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