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2화 〉5. 욕망이라는 이름의 분쟁 - 06 (32/201)



〈 32화 〉5. 욕망이라는 이름의 분쟁 - 06

“...약혼?”

순간, 비앙카가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나의 머리통이 비앙카가 하는 말에 대해 이해하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약혼? 그러니까, 남녀 사이에서 장차 결혼을 할 것을 약정하는 그 약혼? 한 때 내가 사라와 했었던, 그 약혼?

고개를 들어 올린다. 시야에, 귀를 새빨갛게 물들인 비앙카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순간, 비앙카의 그러한 모습을 보며 ‘이 얄미운 계집애에게도 이런 귀여운 면도 있었구나’ 하는 빌어먹을 감상을 느껴버리고 말았다.

다음 순간, 비앙카와 정말로 약혼식을 올리는 병신 같은 망상을 해버리고 말았다. 약혼식장에서 서로에게 반지를 끼워주며, 서로를 향해 살포시 웃음을 짓고, 그리고 그 다음에는 약혼식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있는 서로 간의 입맞춤을...

‘...나 진짜 병신인가.’

연회장에서 사라의 손목 하나 잡아 보지 않은 주제에 그녀의 명예를 들먹이던 루시안 같은 저능아를 욕할 처지가 아니었던 것 같다. 비앙카의 입에서 ‘약혼’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그녀와 약혼식을 올린다는 등신 같은 상상을 해버리다니.

재빨리 비앙카의 안색을 살펴본다. 다행히도, 그녀는 내 쪽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땅바닥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녀의 귓불은 새빨갛다 못해 조만간 폭발할 것 같은 붉은 색을 띠고 있었다. 비앙카의 그러한 모습은 나를 향해 ‘약혼’과 같은 이야기를 내뱉은 것에 적잖은 수치심을 느끼고 있음을 알려주는 명확한 지표가 되어주고 있었다.

‘...으음.’

역시, 방금 전 비앙카가 꺼낸 약혼을 맺자는 이야기는 진짜 약혼을 하자는 이야기가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아니, 애당초 에스텔 공작가와 카스타나 후작가 사이에서 ‘약혼’과 같은 알콩달콩한 이야기가 오고갈 리가 없지 않겠는가?

더욱이, 나를 집에서 기르는 개만도 못하게 여기는 비앙카가 나와 약혼을 맺고 싶어 할 가능성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였다. 확실하다. 이것은, 내가 당황하는 꼴을 보고자 하는 비앙카의 악랄하기 짝이 없는 간계임이 분명하였다. 노련하기 이를 데가 없는 회귀자 카인  에스텔이 비앙카와 같은 풋내기 년한테 순순히 넘어갈 것이라 생각했다면 크나큰 오산이 아닐 수가 없다.

“...설마 진짜로 약혼을 하자는 건 아닐 테고. 시늉만 내자는 말인  같은데.  추측이 틀린가?”

나의 합당하기 그지없는 추리에 가슴이 뜨끔하기라도 했는지 비앙카는 낯빛을 한 차례 굳히더니 이윽고 나를 무시무시하기 짝이 없는 눈초리로 쳐다보기 시작하였다. 흔히 정곡을 찔린 사람들은 대체로 이따위 반응을 보이곤 한다는 것은  또한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똑똑한데? 아주 똑똑해. 카인. 네 말이 옳아. 그래, 진짜로 약혼하자는  아니었어. 이제 됐니? 만족해? 어!”

“.....”

어릴 때부터 앓고 있는 지병인분노조절장애가 또다시 발작을 일으킨 것일까. 왜 애꿎은 나에게 성질을 부리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후우, 그래. 맞아. 너와 거짓... 그래. 거짓으로 약혼을 올리자고 제안을  이유는 아주 간단해. 네가 황제의 명을 받고  여우같은 여자와 약혼식을 올렸던 것과 마찬가지의 이유에서이지.”

“....?”

황제의 명을 받고 약혼식을 올렸다고? 내가 그런 충성스러운 신하였었던가? 아버지로부터 황제가 나의 약혼에 대해 관여하였다는 말을 전해듣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약혼을 주선한 수준에 지나지 않은 것이 아니었던가?

“카인, 이제 제발 멍청한 척 좀 그만하면  될까? 설마 내가 황제에게 달려가 모든 것을 일러바칠까봐 걱정이 돼서 그런 연기를 하고 있는 거야? 아니면. 카스타나 후작가 측에서 대체 무엇을 알고 있는 것인지 확실히 하기 위해 그렇게 굴고 있는 거야? 이 정도까지 왔으면 이제 우리를 조금쯤은 믿어도 되는 거 아냐?”

...아니, 네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아 이렇게 구는  뿐 이다만.

“에스텔 공작가 같은 역사가 깊은 명문가에서 세르나드 백작가 같은 근본 없는 귀족가와 약혼을 맺은 이유. 그것은 세르나드 백작가를 간판으로 내세운 채 그 뒤에서 암약하고 있는 쥐새끼들의 목덜미를 붙잡기 위해 그런 것 아니었어?”

“...쥐새끼?”

“그래, 이름도, 정체도, 그 목적도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집단. 우리들 역시 잘 알고 있어. 지난 20년 간, 에스텔 공작가에서 그들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해 고군분투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말이야. 허깨비니, 무능하니 하는 온갖 조롱과 수치를 참아오면서까지 그들을 꾀어내기 위한 역할에 충실했었다는 것 또한.”

“.....”

“그리고 몇 달 전, 네가 일부로 추문을 일으켜 파혼을 유도한 것은 일정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이겠지? 확실히, 필요 이상으로 그들에게 파고든다면 오히려 그 쪽으로부터 역추적을 당할 위험성이 있으니까 말이야.”

...세르나드 백작가 뒤에, 정체를  수 없는 어떠한 집단이 숨어 있었다고? 그러니까 비앙카의 말을 요약해보자면, 나와 사라의 약혼식은 단순한 약혼이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한 계략의 일환이었다는 것인가.

내가 듣기에 비앙카의 주장은 저잣거리에 나도는 싸구려 음모론 같은 헛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길거리의 시궁창 어딘가에서 약에 찌든 정신병자 한 놈이 아무렇게나 내뱉는 등신 같은 망상과 다를 바가 없단 말이다.

...허나 매우 유감스럽게도, 나는 비앙카의 주장에 대해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비앙카의 말을 들은 그 순간, 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카인, 대단한 걸. 웬만한 마법사들도 눈치 채지 못하는 저주인데.]

[내가 당신에게 건네준 약혼반지, 엄청 귀한 거니까 잃어버리면  돼?]

에스텔 공작가에 스스로의 몸을 의탁하기를 바라던 사라. 그녀의 몸에 깃들어 있던 정체불명의 저주. 그리고 그녀가 내게 선물이랍시고 건네준 이상한 반지.  모든 것들이, 방금  비앙카가 내게 뱉었던 말과 결합이 되어 하나의 결론을 도출하였다.

“.....”

내가 황망한 눈빛을 감추지 못하며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자, 비앙카는 그런 나의 얼굴을 보며 또 무슨 착각을 하는 것인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네 표정을 보아하니 내가 정곡을 찌른 것 같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어. 카스타나 후작가 또한 녀석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밝혀내고 싶어 하거든. 방금 전, 내가 꺼냈던 약혼 역시 그 연장선상의 이야기일 따름이지.”

그제야 나는 비앙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 어렴풋하게나마 짐작이 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니까, 네가 나와 약혼을 하자고 했던 이유가...”

세르나드 백작가 뒤에있는 빌어먹을 놈들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해 한바탕 연극을 해보자는 의미였던 것인가.

“맞아. 꽤나 불명예스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최근 들어 그놈들이 카스타나 후작가의 깊숙한 곳까지 잠입했다는 움직임을 포착하고 말았거든. 하지만 누가 배신자인지, 놈들이 어느 선까지 침투한 것인지는 알아차리지 못했어. 이건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지만, 가문 내에 그들과 결탁한 배신자가 있는 것 같기도 해. 그렇기에,  놈들을 굴속으로부터 끌어낼 필요성을 확실하게 느끼게 되었던 거야.”

앞으로 일어날 일이 상상만 해도 유쾌한 듯 킥킥거리며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비앙카. 나는  비앙카의 그러한 모습을 보며 새삼스럽지만 이 계집애가 성격파탄자라는 사실을 다시   깨닫고 말았다.

“내가 다른  몰라도 쥐새끼들의 습성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거든. 자신들의 이득이라면 환장을 하며 덤벼들고, 우리들의 살을 야금야금 파먹으려 하는  놈들이라면 적어도 너와 나의 약혼에 대해 팔짱을 끼고 얌전히 구경만 하려 들지는 않을 걸?”

“...특히, 키텔렌 광석으로 인한 순이익의 2할이라는 막대한 금액이 그대로 에스텔 공작가로 흘러가는 이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러한 노릇이고?”

“맞아. 정답이야. 눈치가 꽤나 빠르네, 카인?”

“.....”

확실히, 굴속에 틀어박힌 쥐새끼들을 끌어내기에 이것보다 적절한 방법은 찾기 힘들어 보였다. 무려 천 년이나반목을 해온 두 가문의 결합, 그리고 두 가문 사이에 은밀히 오고가는 막대한 이권. 비앙카의 말대로 놈들이 카스타나 후작가에 몰래 스며든 상황이라면 이런 예상치 못한 사태에 대해 녀석들 나름대로 어떠한 리액션을 취할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래, 내가 비앙카와 약혼을 맺는다는 사실에 대해 생리적인 거부반응을 일으킨다는 아주 사소한 문제만을 제한다면 말이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나는 장차 매 맞는 남편과 같이 희귀한 직업군에 종사하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다는 점이다. 절대로. 내가 1년간 눈이 돌아갈 듯한 미녀들과 함께 생활을 해보아서 잘 알고 있는데, 평생을 함께할 배우자는 외모만 보고 고르는 것은 정말 미친 짓이었다. 특히 자신의 마음에 거슬리는 것이 있다면 주먹부터 들고보는 비앙카나 황녀 같은 여자와는 상종을 해서는 아니 된다 생각한다.

“...비앙카. 그 전에 네게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묻고 싶은 것? 뭔데?”

“만약 내가 너와 약혼 관계를 맺는다면 그 뭐냐, 그...”

“...그, 뭐?”

“주변에서 볼 때 연인 같이 보이도록 연기라도 해야 하는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무리가 아닐까 싶다. 아무리 착하고 고운 생각만 하려고 노력을 해도 비앙카의 얼굴만 본다면 과거 그녀와 함께 쌓아온 아름다운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곤 하였으니까.

“뭐, 그렇긴한데... 그런데 그 따위 사소한 것은 벌써부터 신경 쓰지 말아 줄래? 전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그냥 몸만 오면 돼. 알아들었어? 어?”

“.....”

정말 내가 이 계집애의 약혼자라는 연기를 잘 해낼 수 있을지에 대해 벌써부터 불안감이 밀려온다. 아니, 생각해보니 애당초 이 계집애의 제안을 받아들여 둘만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전부 나의 업보에서 비롯된 결과이니 이제 와서 불평불만을 내뱉을 수도 없는 현실이 한탄스럽기만 하였다.

“...좋아. 네 제안에 답을 주기 전, 한 가지만 더 묻고 싶은 게 있어.”

“궁금한 것도 많구나. 그래, 말해 봐.”

자신이 답할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답해주겠다는 표정의 비앙카를 보며, 나는 카스타나 후작가에서 보내온 서찰을 보았을 때부터 내 머릿속을 가득 메운 위화감에 대한 질문을 던져보았다.

“단층지대에서 발견 되었다는 키텔렌 광석, 그건 진짜인가?”

그렇다. 개뜬금없이 두 가문의 경계 지대에서 발견이 되었다는 희귀 광석. 그 어떠한 생각을 하더라도, 어떠한 가정을 대입해 보더라도  광석의 존재는 도무지 설명을 할 수가 없었다. 회귀 전에는 발견되지 않았던 광석이 이번 생에는 어딘가에서 불쑥하고 튀어나온다는 게 말이 된다 생각하는가?

“흐응, 예리한데, 카인.”

나의 질문에 비앙카는 진심으로 유쾌한  입가에 미소를 띠우며 내게 답을 하였다.

“네 추측이 옳아. 가짜지. 하지만 완전히 가짜라고는 할 수 없어. 왜냐하면 단층지대에 실제로 키텔렌 광석이 묻혀 있기는 하거든. 다만, 순도가 너무 떨어지는 나머지 채굴할 가치도 없다는 것이 난점이기는 하지만 말이야.”

"....."

...역시 그랬었나. 그렇다면, 카스타나 후작가에서 사절단을 보내느니 광석으로 인한 수익성을 논하느니 어쩌니 지랄을 떨었던 것부터가 녀석들을 끌어내기 위한 한 편의 연극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면, 수익의 2할을 주니 뭐니 하는 소리는 전부 입에 발린 소리였던 것인가?”

“그런. 설마 우리가 돈을 떼먹기라도 할까봐 걱정이라도 한 거야? 적어도 나는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하는데.”

그리 말을 하더니 비앙카는 손가락  개를 펼친 후 내 앞에 흔들어 보였다.

“올해 카스타나 후작가에서 아티팩트 판매로 벌어들이는 순이익의 2할을 주겠어. 어때?”

“그 대가로 네 약혼자 행세를 좀 해주고 말인가?”

“맞아. 네게 있어서도 손해 볼 것 없는 거래라 생각되는데? 카스타나 후작가로서도 상당히 큰 출혈을 각오하고 내놓은 제안이라고.”

...확실히, 연극 몇 번에 그만한 돈을 받는다는 것은 꽤나 남는 장사이긴 하였다. 눈앞에 있는 비앙카가 돈을 떼먹을 위인으로는 보이지 않기도 하였고.

"흠, 놈들을 잡기 위해 단단히 작정을 한 것 같은데. 녀석들이 카스타나 후작가에 대체 어떠한 피해를 입혔기에 그리 세게 나오는 것이지?"

나로서는 별다른 생각 없이 던진, 단순한 질문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비앙카의 두 눈에서 날카로운 안광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넌 그걸 질문이라고 던지는 거야? 그 개자식들은 너를..."

"...너를?"

나의 되물음에 비앙카는 순간적으로 아차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야, 잊어줘. 아무 것도 아니야. 이건 개인적인 사정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래서, 내 제안을 받아들일 거야, 말거야?"

...대체 뭐였지. 방금  비앙카가 미처 내뱉지 못한 뒷말이 꽤나 신경이 쓰이기는 하였지만 내가 섣부르게 질문을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비앙카의 말처럼 무언가 개인적인 사정이 얽혀있는 게 분명해 보이니 말이다.

“좋아, 네 제안을 수락하도록 하지. 그러면, 구체적으로 내가 무엇을 하면 되지?”

나의 질문에 비앙카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대답을 내놓았다.

“지금으로부터 2주 뒤, 카스타나 후작가를 방문해주면 돼. 공식적인 용건은 약혼식. 세부적인 준비는 이쪽에서 끝내놓을 테니 아무 것도 걱정할 필요 없어.”

"아주 간단해서 마음에 드는 걸."

"그렇지? 아주 간단한 일이야. 우리라면  해낼 수 있을 거야. 나는 어릴 적부터 너라는 사람에 대해 알고 지내 왔지. 너라는 사람에 맞춰서, 사랑스런 약혼자 시늉을 내는 것은 일도 아니라고."

그리 말하더니 비앙카는 나에게서 몸을 빙글 돌린다.

“그럼, 2주 후에 봐요. 세상에 하나 뿐인 나의 약혼자, 카인 폰 에스텔. 그리고...”

“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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