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1화 〉5. 욕망이라는 이름의 분쟁 - 05 (31/201)



〈 31화 〉5. 욕망이라는 이름의 분쟁 - 05

“정말 마음에 드는 화원이야. 정말로.”

비앙카는 자신의 섬섬옥수를 내밀어 화단 위에 피어 있던 히아신스를 살짝 건드렸다. 비앙카의 손길이 닿은 히아신스는 만개해 있던 꽃봉오리로부터 향긋한 봄의 향기를 물씬 터트렸다. 그것은 실로,  폭의 그림과도 같은 광경이었다. 그림으로 그린 듯한 미인이 꽃을 어루만지며 어쩔 줄 몰라 하는 광경이라니. 지금 이 자리에 그림쟁이 한 놈을 앉혀다 놓는다면 녀석은 환장이라도 한  마냥 지금 이 광경을 화폭에 담기 위해 정신없이 붓을 놀리고 있으리라.

하지만 동시에 내게 있어서는 아무런 감흥도 들지 않는 광경이기도 했다. 나는 결코 쉽사리 넘어가지 않는다. 저 망할 계집애가 얼굴이 조금 반반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속내는 누구보다 추악하기 그지없다는 것을 내 몸소 체험해서  알고 있지 않던가? 어린 시절부터 다른 사람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는 야만적인 행동에 대해 아무런 거리낌이 없어하던 분노조절장애를 앓고 있는 여자다. 지금은 꽃을 보며 미소를 짓고 있지만 언제 눈깔이 돌아가  화원을 통째로 불사를 지도 모르는 미친 방화광이란 말이다.

“카인. 너, 지금 날 보며 뭔가 실례되는 생각한 거 아니야?”

“...글쎄,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는걸.”

비앙카가 나를 향해 귀신같은 눈치로  속마음을 짚어오자 나는 짐짓 시선을 돌리며 시치미를 떼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을 섬뜩하게 만드는 신통방통한 재주가 있는 여자였다.

“그래서 결정은 내린 거야? 생각할 시간은 충분히 줬다고 생각하는데?”

“결정은 내리는  자체는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지. 다만, 이해를 필요할 따름이야.”

“이해? 무슨 이해?

나를 향해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을 던져오는 비앙카. 나는 그러한 그녀의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저 여자는 진짜 아무 것도 몰라서 저 따위로 구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다 알고 있는 주제에 시치미를 떼고 있는 것일까. 물론, 후자일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겠지. 똑똑함이 도를 넘어선 나머지 머리가 훼까닥 맛이 간 빌어먹을 년이니까.

“그야, 이 상황과 관련된 모든 것에 대한 이해를 말하는 거지. 네 말대로 내가 머리가 그리 좋지 않아서 말이야.”

“.....”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는걸. 카스타나 후작가 측에서 순이익의 2할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금액을 넙죽 가져다 바치려 드는 것도, 에스텔 공작가가 아니라 나라는 개인을 상대로 거래를 하려 드는 것도, 그리고.”

“그리고?”

“에스텔 공작가와 카스타나 후작가의 사이에서 거래라는 것이 이루어질  있다고 생각하는, 너희들의 속내도, 전부.”

그렇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그 어떠한 가정을 세우더라도 카스타나 후작가 측에서 우리를 향해 이런 말도 안 되는 제안을 건넨다는 그림이 쉽사리 그려지지가 않았다.

 년이다. 십 년이면 강산조차 변한다는 말이 있는데, 천 년이라면 강산이 골백번은 변하고도 남을 어마어마한 시간이었다. 에스텔 공작가와 카스타나 후작가가 서로의 면상을 쳐다보며 으르렁거리던 것에서 그치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 엿을 먹이기 위해 고군분투한 세월이 무려  년이나 되었단 말이다.

서로 간에 패인 감정의 골은 한 순간에 메울 수 없었으며, 이제와서 어느 한 쪽이 화해의 손길을 내밀기에는 서로가 가진 자존심이 너무도 강하였다. 아마, 두 가문 사이에 극적인 타협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서로를 향해 증오를 불태웠던  시간들의 배는 흘러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두 가문이 서로가 서로를 미워했던 시간은 너무도 길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순이익의 일부를 무상으로 넘겨주니 어쩌니 하며 사탕발림 같은 소리를 지껄이는 것에 대해 내가 쉽사리 믿을 것이라고 생각 하는 것일까? 아니, 내가 등신도 아니고 그런 대가리에 꽃밭이 피어 있는 듯한 이야기를 순순히 믿어줄 것이라 생각을  것일까?

“비앙카, 여기까지 와서 서로를 재는 것은 하지 않아주었으면 하는데. 너희가 이겼어. 너희의 승리라고. 빈궁하기 짝이 없는 에스텔 공작가로서는, 아니 장차 에스텔 공작가를 이끌어가야 하는 나로서는 네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최선의 선택임은 부정하지 않겠어. 이대로 아무 생각 없이 눈먼 돈을 넙죽하며 받아먹는 것이 제일 좋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너희들의 제안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말아주었으면 한다. 내가 돈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고작해야 돈 때문에 에스텔 공작가의 자존심까지 팔아먹을 것이라 생각했다면 큰 착각이라고 말해주고 싶군.”

회귀 전, 에스텔 공작가는 카스타나 후작가로부터 적선 같은 것은 받지 않았으며 두 가문은 알아서 제 갈길을 걸어갔었다. 그리 넉넉한 생활이었다고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에스텔 공작가는 크게 모난 부분 없이 그럭저럭 귀족가 다운 모양새를 유지하며  굴러갔었다. 10년 뒤, 대륙 전체에 겨울을 불러온 마녀와 지금 눈앞에 있는 비앙카가 에스텔 공작령을 통째로 박살내버리기 전까지의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그러니까 가급적이면 솔직하게, 그리고 확실히 말해주었으면 좋겠는데. 마법사들과 치열한 두뇌 싸움을 벌일 자신은 없으니까 말이지. 만약  이상 내게 할 말이 없다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도록 하자고.”

그리 말하며 나는 어떠한 망설임도 없이 비앙카로부터 등을 돌렸다. 실로 미련   없어 보이는 깔끔하기 그지없는 태도. 하지만 실은 내 가슴이 쿵쾅쿵쾅 거세게 뛰는 것을 간신히 참아내고 있는 중이었다. 저 빌어먹을 년의 눈깔이 뒤집혀서 나를 향해 개지랄을 떨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해온다. 하여간, 저 계집애가 얽힌다면 뭔가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내가 이래서 저 망할 년과 마주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인데 아버지께서는 그것도 모르고-

그 때였다.

“...야, 카인. 너 당장 거기 안 서? 누구 마음대로 이야기 중에 도망가는 거야?”

우뚝-

비앙카의 가시 돋힌 말이 들려오기가 무섭게 내 몸은 나의 통제를 벗어나 그 자리에 일시정지 해버리고 말았다. 지난 1년, 비앙카의 밑에서 노예 생활을 했던 후유증이 틀림없었다.

'...시발.'

순간, 나의 머릿속에 먹이를 줄 때마다 종을 울리면 나중에는 종만 울려도 반사적으로 침을 흘린다는 개새끼들의 이야기가 스쳐 지나간다. 그 개새끼들과 지금 나의 처지가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자존심도 없이 저 년이 서라고 그대로 우뚝 서버리는 내가 개새끼와 다른 점이 무엇이란 말인가?

한차례 자아성찰을 마친 후 긴장으로 인해 뻣뻣해진 모가지를 간신히 돌려 비앙카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나를 향해 실로 흉신악살과도 같이 일그러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음 순간, 내 머리통이 생일 케이크에 꽂힌 양초 마냥 활활 타오를 지도 모른다는 절망적인 미래를 상상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정말정말 다행스럽게도 내 예상은 빗나가 버리고 말았다.

“...후우, 좋아. 카인. 전부 말해줄게. 지금의 너라면, 그만한 자격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니까.”

“...자격?”

이건  대관절 무슨 소리일까.

“하지만 그 전에 나도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어. 소문에 의하면, 제도의 연회장에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투르니젠 소공작과 결투를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고 하는데, 그 말이 정말로 사실이야?”

“...운이 좋았지. 그것도 아주.”

나의 대답은 겸양도, 겸손도 아닌 단순한 사실에 지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녀석과 싸둔다면 그 때는 절대 이기지 못할 것이니까.

“흐응, 사실이라는 거구나.”

허나 나의 대답을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였는지 비앙카는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의문은 전부 옳아. 확실히, 카스타나 후작가와 에스텔 공작가와 그리 친밀한 관계는 아니야. 적어도 이런 거래가 오고 갈 정도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하지.”

비앙카는 뭐가  그리 못마땅한 것인지 얼굴 전체에 불퉁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아까까지는 웃고 있던 주제에 1초 간격으로 표정이 휙휙 바뀌다니, 이 여자는 조울증이라도 앓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어.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당신이라는 사람이 상황을 송두리 채로 바꾸어 놓았지. 우리가 에스텔 공작가에 이런 어처구니없는 제안을 하게 된 것도, 지금 네게 말도 안 되는 제안을 늘어놓고 있는 것도, 전부  때문이라고. 카인.”

“...뭐?”

...그게  나 때문이라는 것인가?

“뭐야, 나보고는 솔직히 말하라고 한 주제에 당신은 여전히 시치미를 떼고 있네. 굳이 내 입으로 네가 무슨 짓을 하고 다녔는지 상세하게 읊어주기라도 바라는 거야? 카인?”

“.....”

아니, 그러니까 진짜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만. 내가 최근 들어 한 일이라고는 아리아와 함께 놀아주거나 황녀한테 치이거나 아리엘의 비위를 맞춰준 것 말고는 아무런 기억도 없거늘 이 계집애는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일까.

“뭐어, 그렇게 나오겠다는 거구나. 확실히, 자기 입으로 떠들만한 사항이 아니기는 하지. 그런 신중한 태도, 나도 싫어하지는 않아.”

그리 말하며 비앙카는 나를 오묘하기 짝이 없는 눈빛으로 바라보기 시작하였다.

“몇 달 전, 네가 일으킨  화려한 추문.  직후, 사라 세르나드와의 파혼. 그리고 제도에 가서 황제와 만남을 가진 것도 모자라 투르니젠 소공작과의 결투.”

비앙카는 지난 몇 달간 내가 일으킨 화려한 전적에 대해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아보더니 이내 얼탱이가 없는 결론을 내놓았다.

“이거 전부, 네가 의도한 거 맞지?”

“...뭐?”

이건 또 무슨 개소리일까. 세상천지에 자신의 면상에 똥칠을 하고자 하는 미친 새끼가 있다는 말인가?

내가 자신을 향해 어떠한 표정을 짓고 있는지 전혀 상관하지 않은 채로 비앙카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처음, 너를 둘러싼 그 지저분한 소문을 처음 접하였을 때는 나도 하마터면 깜빡 속아 넘어갈 뻔했어. 하지만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그럴 가능성은 꽤나 적더라고. 내가 알고 있는 너라는 남자는 등신 같은 놈에 불과해. 처음 본 여자에게 들이대기는커녕 겁쟁이마냥 손도 대지 못하는 쪼다 같은 새끼에 지나지 않다고.  말이 틀려?”

“.....”

나에 대한 결백을 믿어주는 것은 고맙지만 굳이 저러한 뒷말은 붙일 필요가 없지 않았나 생각해버리고 말았다.

“거기다가 너와 관련된 소문을 퍼지는 속도가 너무 빠르더라고. 마치,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퍼트리는  같이 말이야. 솔직히 말해서, 그런 이야기가 그렇게 급속도로 빠르게 전파되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러게 말이다. 대체 왜  빌어먹을 소문은 어찌하여 그토록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던 것일까.

“거기서부터 추론을 해보았지. 네가 스스로에 대한 추문을 확대, 재생산하면서까지 얻어낼 이득이 무엇이 있을까. 스스로의 명예를 땅바닥에 떨어뜨리면서까지 해내야만 하는 일이 대체 무엇이 있을까.”

그리 말을 하더니 비앙카는 방금 전보다 한결 가벼워진 목소리로 답을 도출하였다. 본디, 수수께끼를 풀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어조는 한결 가벼워지는 법이었다.

“답은 하나 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어. 그것은 황제의 명령이었겠지? 황제의 명령에 의해 원치 않은 약혼을 했던 것처럼, 이번 파혼의 이면에도 역시 황제의 손길이 닿아있었던 것이겠지?”

“...하?”

입이  벌어질 정도의 참신한 해석이었다. 너무나 새롭고 참신하다 못해, 당사자인 나조차도 오늘 처음 들어보는 놀라운 해석이었다. 도대체 어떠한 사고과정을 거쳐야지, 저러한 결론에 도달할  있는 것일까.

“그런 표정은 짓지 않아도 돼. 어디 가서 소문이라도 낼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다만, 우리가 입을 다물어주는 대가로 네가 조그마한 협조를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을 뿐.”

“...협조? 그건 또 뭐지?”

“뭐어, 별로 어려운 것은 아니야. 어떻게 보면 네게는 행운이라고도 할  있는 제안이지. 세상의 어떤 사내도 이런 제안을 받은 적이 없거든.”

그리 말을 하는 비앙카의 귓불이 약간이지만 붉게 달아오른 것이 보인다. 얼마나 거창한 말을 꺼내려하기에 저런 태도를 보이는 것일까.

“너, 나하고 약혼할 생각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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