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5. 욕망이라는 이름의 분쟁 - 04
“에스텔 소공작. 오랜만이군요. 이번 사절단의 총 책임자 역할을 맡은 비앙카 델 카스타나라고 해요.”
내가 응접실로 들어선 그 순간, 내가 느낀 것은 응접실 전체에 어떠한 은은한 향기가 난다는 것과 붉은색 머리카락을 지닌 어느 미인이 마치 이곳의 주인이라도 되는 것 마냥 나를 환대해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연하지만, 카스타나 후작가의 사람들 중에서 나를 향해 ‘오랜만이다.’라는 말을 해줄 사람은 오직 한 사람밖에 없었다.
‘비앙카 델 카스타나.’
불타오르는 듯한 노을빛 머리카락, 마치 홍옥을 박아 넣은 듯한 붉은색 적안(赤眼). 일류 조각사가 심혈을 기울여 조형을 한 듯한 아리따운 얼굴. 어디를 보아도 내가 기억하고 있는 ‘비앙카 델 카스타나’의 모습 그대로였다. 10년 뒤의 모습과 한 치의 변화도 없는 저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자하니 저 여자 또한 사실 나와 같이 10년 전으로 회귀를 한 것이 아닐까 하는 등신 같은 상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네, 오랜만입니다. 비, 아니 카스타나 영애.”
나는 그러한 비앙카를 보며 저도 모르게 ‘카스타나 영애’라 부르는 것이 아니라 ‘비앙카’라고 부를 뻔했다. 저 계집애를 ‘비앙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에 워낙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비앙카의 인사를 받아주며 그녀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는 그 순간, 나는 목격하고 말았다. 도도하기 이를 데가 없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던 비앙카가, 아주 찰나의 순간이지만 은은한 미소를 짓는 광경을.
“.....”
...비앙카가 저런 미소도 지을 줄 알았었나? 언제나 싸가지 없는 비릿한 웃음만 지을 줄 아는 여자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10년 전의 비앙카는 꽤나 정상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 나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비앙카는 나를 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기 시작하였다.
“에스텔 소공작. 카스타나 후작가에서 저를 비롯한 사절단을 에스텔 공작가로 보낸 이유에 대해서 알고 계시나요?”
“단층지대에서 발견된 키텔렌 광석 관련 문제를 아무런 잡음 없이 해결하기 위해 이곳에 찾아오신 것 아닙니까?”
“예, 맞아요. 소공작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키텔렌 광석은 카스타나 후작령과 에스텔 공작령의 경계지대라 할 수 있는 단층지대에서 발견이 되었어요. 도의적으로 보나, 법적으로 보나 두 가문 중 어느 한 쪽이 섣부르게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는, 애매모호한 지역에서 보물이 발견된 상황이란 말이지요. 참, 골치 아픈 상황이 아닐 수가 없군요.”
그리 말을 하더니 비앙카는 누가 보아도 과장된 것 같은 한숨을 푹하며 내리쉬었다.
“저희측의 입장은 매우 단순해요. 아티펙트의 제작에 있어 키텔렌 광석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촉매인 만큼 다소 손해를 보더라도 광석의 소유권을 인정받는 방향으로 협상을 진행하고 싶어 한답니다. 아주 단순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죠. 그러지 않나요?”
“...그 말이 맞긴 하군요. 카스타나 영애.”
비앙카의 말처럼 아주 단순한 이야기가 맞기는 하였다. 단, 카스타나 후작가에서 우리 측을 향해어떠한 개수작도 부리지 않는다는 전제 하의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카스타나 후작가의 가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입장에서 제안을 드리겠습니다. 저희 측에서는 온전한 형태의 키텔렌 광석을 얻고 싶어 하는 만큼, 채굴부터 시작하여 광석의 가공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에 대한 전권을 얻고 싶습니다. 그대가로, 카스타나 후작가에서는 키텔렌 광석으로 인해 얻을 순이익의 15%를 양도한다는 조건이 어떠할까 싶습니다만.”
“...15% 말씀이십니까?”
순간, 비앙카의 발언에 나는 저도 모르게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15%라고? 키텔렌 광석으로 얻을 순이익의 15%를 에스텔 공작가에 고스란히 상납을 하겠다고? 카스타나 후작가에서 키텔렌 광석을 채굴하고, 아티펙트로 가공도 하고, 전 대륙에 판매까지 도맡아 할 동안 에스텔 공작가는 그저 방구석에 가만히 드러누워 있기만 하더라도순이익의 15%를 받아먹을 수 있다는 말인 것인가?
‘...미친 건가?’
카스타나 후작가의 가주를 비롯한 윗대가리들이 전원 돌아버리기라도 한 것인가? 아니면 카스타나 후작가의 친구들이 직업을 마법사에서 자선사업가로 바꾸기로 결심이라도 한 것일까.
비앙카의 제안을 들으니 내심장이 벌렁거리다 못해 탭댄스를 추기 시작하였다. 순이익의 15%라니, 모르긴 몰라도 에스텔 공작령의 1년 총수익쯤은 가볍게 뛰어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 틀림없을 테지.
...하지만 나는 비앙카를향해 섣부르게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라는 말을 내뱉을 수가 없었다. 조건이 너무 좋았다. 좋아도 너무 좋았다. 그리고, 카스타나 후작가와 에스텔 공작가의 사이는 이런 형편 좋은 거래가 오고 갈 정도로 막역한 관계는 아니지않았던가?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비앙카가 제안한 이 거래의 이면에는 음험하기 짝이 없는 꿍꿍이가 숨어있을 것이 너무도 자명해보였다.
“...으음.”
그렇게 내가 비앙카의 제안을 섣부르게 받아들이지 못한 채 끙끙거리기만 하고 있을 찰나였다.
“...음, 설마 15%가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것인가요? 하긴,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군요.”
머릿속이 너무도 혼란스러웠던 나머지 답변을 내뱉지 못하는 나를 보며비앙카는 무언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지껄이기 시작하였다.
“그렇다면 순이익의 20%는 어떠신가요? 이 정도라면 에스텔 공작가로서도 만족할 만한 금액이라고 사료됩니다만.”
“...20%요?”
“예, 덧붙여 에스텔 공작가에는 그 어떠한 조건도 덧붙이지 않을 생각이랍니다. 아, 그와는 별개로 몇 가지 ‘사소한’ 부탁을 드릴 수는 있다는 점을 명심해주셨으면...”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비앙카의 뒷말은 내 귓구멍까지 들려오지 않았다.
‘맙소사.’
순이익의 20%, 어떠한 조건도 덧붙일 생각이 없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비앙카가 내게 저지른 모든 행동에 대해 용서를 해버리고 말았다. 그렇다. 모든 것은 복선이었던 것이다. 비앙카가 미래에서 나를 수없이 갈구고 지랄염병을 떨었던 것은 지금 이 순간을 위한 장대한 복선이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지금이라면 비앙카가 발을 씻은 물이 아니라 목욕을 한 물에라도 세수를 할 수 있다 생각을 해버리고 말았다. 저 지랄 맞은 년이 내 인생에 있어 도움이 될 리가 없다고 어림짐작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너무 섣부른 판단이었던 것이다. 나는 한 줄기 서광이 비앙카를 비추는 듯한 환상을 보고야 말았다. 나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어 그 제안을 받아들이겠노라고 말을 하려 했다. 이런 제안은 받아들이지 않는 쪽이 등신 새끼인것이다!
"....."
비앙카의 뒤쪽에 시립하고 있던 카스타나 후작가의 기사들은 방금 전 협상 내용이 못마땅하기만 한 것인지 그리 썩 달갑지 않은 눈초리로 내 쪽을 쳐다보았다. 뭐, 녀석들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아무런조건도 없이 순이익의 20%나 내놓는 쪽의 머리가 이상한 것이지, 저만치서 그러한 비앙카의 결정에 불평불만을 품고 있는 것은 정말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리라.
감히 에스텔 소공작을 향해 건방진 눈초리로 쳐다보는 것들의 눈깔을 확 뽑아버리고 싶었지만 나는 관대한 마음으로 녀석들을 용서해주기로 하였다. 어차피 저 새끼들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등신들이었으니까.
저번에 루시안과의 결투로 벌어들인 용돈도 그렇고, 녀석이 이곳에 상주하는 대가로 내놓는 '친구비'도 그렇고, 요즘 들어 행운의 여신이 나를 향해 미소를 지어주고 있는 것 같았다. 기분이 한결 나아진 내가 비앙카를 쳐다보자, 비앙카는 나를 향해 은은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에스텔 소공작님, 방금 전 이야기의 연장선상에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만, 혹시 둘이서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둘이서만요?"
다른 누구도 아니고 비앙카와 단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상당히 껄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나는 비앙카를 '용서'하기는 했지만 그것과 이것은 어디까지나 별개의 일이 아니던가. 내 육신은 아직까지도 비앙카가 나에게 가하였던 학대를 잊지 않고 있었다.내가 다소 떨떠름한 표정으로 비앙카를 쳐다보니, 그녀는 나를 향해 꽤나 애처로운 표정을 지어보이며 다시 한 번 부탁을 하였다.
"예,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곳에서 나누기에는 조금 부담스러운 이야기 같아서요. 안 될까요?"
"....."
...설마 무슨 일이 있지는 않겠지. 다른 곳도 아니고 우리 집인데. 남의 집에서 깽판을 부릴 정도로 미친 여자는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리 하시지요."
그렇게 말을 하며 나는 비앙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순진하게.
****
나는 비앙카를 본성의 뒤편에 위치한 화원으로 인도해주었다. 에스텔 공작령의 본성은 건축이 된 지 몇백년은 훌쩍 넘어가는 오래된 고성(古城)이었던 지라, 방음처리가 그리 여의치 않다는 치명적인 단점을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조금 나누고자 접대 준비도 되지 않은 후줄근한 방에 들어가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내가 선택한 것은 바로 화원에 가서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이었다. 사방이 탁 트여있고, 주변의 경치가 훤히 보이는 이곳이라면 다른 누군가가 우리들에게 몰래 접근하여 이야기를 쉽사리 엿들을 수 없을 것이다.
"...아름답군요."
비앙카는 잘 조성되어 있는 화원의 경치를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말 대로였다. 정원의 한켠에서는 유채꽃으로 이루어진 황금빛 파도가 일렁이고 있었고, 다른 한 쪽은 새하얀 수선화와 목련이 자신들의 은망울빛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금과 은의 명주실을 자아내어 정원 그 자체에 수를 놓은 듯한 환상적인 광경이었다.
"저희 어머니께서 심혈을 기울여 조성하신 정원입니다. 어머니께서는 꽃을 좋아하셨거든요."
어머니께서 가지고 계셨던 몇 안되는 취미 중 하나였다. 정원사로 하여금 정원을 꾸미라 지시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직접 모종삽을 들고 꽃을 심는 것을 좋아하신, 그런 분이셨기에 이렇게 아름다운 정원을 조성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리라.
"...그렇군요. 어머니께서..."
나의 설명을 듣더니 비앙카는 갑자기 숙연하게 고개를 수그린다. 어째서인지는 모르지만 방금 내가 내뱉었던 말이 그녀의 메마른 감성 중 어딘가를 건드렸나보다.
"그럼 카스타나 영애, 둘이서만 하고픈 이야기가 무엇인지 설명을..."
그 때였다. 비앙카는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이내 고개를 살며시 내저었다.
"이제 둘만 있는데, 그렇게 딱딱한 호칭으로 부르지 말아줘. 예전처럼, 비앙카라고 불러주면 안돼?"
"...예전처럼?"
"응. 어릴 때는, 우리 서로 이름으로 불렀잖아. 기억 안 나?"
기억 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철없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었나? 하지만 비앙카가 이미 서두를 던졌는데 이제 와서 존칭을 쓰겠다며 뻗댈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나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비앙카. 오랜만이다. 대충 10년 만인가?"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9년 하고도 3개월 11일 만이야. 로베르타 백작의 결혼식 날 이후 만나지 못했으니까 말이지."
"...넌 그런 걸 대체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거야?"
마법사라는 인종이 똑똑하기 짝이 없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머리통에 시계와 달력까지 넣고 다닐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말이지.
"모르는 네가 이상한 거야. 나는 언제나 기억을 하고 있었는걸."
왠지 모르게 으스대는 듯한 말투로 내게 말을 하는 비앙카.
"...그래, 너 똑똑해서 좋겠다."
나는 빡통이라 그런 거 기억 못한다. 이 망할 년아.
"그래서, 나와 단 둘이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 용건은 대체 뭐지? 이렇게 둘이서만 이야기를 나누자고 한 것을 보니 어지간히도 비밀스러운 이야기 같은데."
내 예상으로는 방금 전, 순이익의 20%를 주겠나니 어쩌니하며 사탕발림으로 나를 꼬셔대던 이야기의 후속편이 아닐까 예상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금 전에 나누었던 이야기에는 무언가 함정이 숨어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비앙카의 머리통에 내가 알지 못하는 숨구멍이 한 개 더 생겨난 것이 아니라면 말이지.
"...흥, 너는 무드라는 것이 없는 남자구나. 너무 성급하기도 하고. 요즘 세상에 그런 남자는 별로 인기가 없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멍청한 것은 덤이라고 할 수 있고."
그렇게 말을 하며 나를 향해 코웃음을 친 비앙카는 이내 표정을 진지하게 굳혔다.
"좋아. 네가 원하니 그 쪽 이야기부터 우선적으로 할게. 방금 전, 내가 아무런 조건 없이 에스텔 공작가에 순이익의 20%를 주겠다고 한 것, 엄밀히 말하자면 그것은 사실이 아니야."
"...뭐?"
"카인, 너도 얼추 예상은 하고 있지 않았어? 우리 측에서 제시한 조건이 너무 좋다고 의구심은 품지 않았어? 네가 아무리 멍청한 남자라고는 하지만 그 정도 지능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
...뭐, 당연히 나도 예상 정도는 하고 있었다. 애초에 그런 형편 좋은 거래가 오고 갈 정도로 에스텔 공작가와 카스타나 후작가 사이의 관계가 돈독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렇다면 방금 전 응접실에서는 왜 그런 소리를 내뱉은 것이지? 우리 사이에 오고가는 이야기를 들었던 귀가 몇 개인데 이제 와서 비율을 바꾸는 것이 통용될 것이라고 생각한건가?"
"하, 카인. 여전히 사람 말을 끝까지 듣지 않는 나쁜 버릇이 있구나. 내가 말하는 것은 비율 쪽이 아니야. '조건' 쪽이라고."
"...조건?"
이제 와서 어떠한 조건을 붙이겠다, 이런 말인 것인가?
"그런데 왜 거기서는 말을 하지 않고 이렇게 둘이서만 있는 곳에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지?"
"그야, 에스텔 공작가가 아니라 너 개인에게 부탁을 하는 것이니까. 또한, 개인적인 문제인 만큼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어. 그것 뿐인 이야기일 따름이지."
"....."
비앙카의 말에 나는 저도 모르게 눈쌀을 찌푸리고 말았다. 아무래도 저 계집애의 입에서 나올 이야기는 나를 상당히 피곤하게 만들 이야기임이 틀림 없어 보였다.
"그리 겁먹지 말고. 그리 어려운 부탁은 아니니까."
그리 말하며 비앙카는 나를 향해 쿡쿡거리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 웃음이 나에게 있어서는, 존나게 불길하게만 여겨지는 것은 대체 왜 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