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5. 욕망이라는 이름의 분쟁 - 01
사방은, 이미 어스름하였다. 지평선 너머로 태양이 뉘엿뉘엿 저물어가며 하늘은 온통 붉은 아카시아 꽃잎으로 뒤덮여가고 있었다.그 모습은 마치, 밤의 여신이 하늘에 붉은 치맛자락을 드리운 듯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석양을 배경으로 하여, 여러 대의 마차가 제도로부터 점점 멀어져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카인.”
루멘티움을 둘러 싼 성벽 위, 그 위에서 아리엘은 석양을 벗 삼아 점점 작아져가는 마차를 쳐다보고 있었다.
사락-
발걸음을 옮긴다.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저도 모르게 한 발짝 앞으로 나서고 만다. 아주 조금이라도, 조금이라도 더 그의 뒷모습을 눈에 담고 싶었다. 이렇게 떠난다면, 한동안 만날 수 없음을 알기에 이렇게나마 아쉬움을 달래고 싶었다.
“.....”
그렇게 시간이 흐른다. 마차는 하나의 점이 되었다가, 이윽고 지평선 너머로 완전히 그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어느새 석양은 완전히 저물고, 사방은 고즈넉한 적막만이 가득하였다. 칠흑 같은 어둠이 주위를 감싸고 있었음에도, 아리엘의 시선은 여전히 마차가 사라져간 북녘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아아.”
아리엘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말았다. 지금 이 순간도, 두 눈을 감으면 선명하게 떠오르는 광경이 있었다. 향긋한 풀내음이 맴도는 초원. 물줄기가 굽이굽이 맴도는 자그마한 계곡. 들판을 가득 매운 이름 모를 꽃들의 향연. 그리고 그 꽃들로 엮인, 자신만을 위한 자그마한 꽃왕관. 볼에 와 닿는 애정 어린 입술의 감촉.
기억한다. 아니,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 초원 위에 지어진 자그맣고 아기자기한 오두막집에서 보낸 그와의 시간은, 아리엘의 생애를 통틀어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으니까.
그렇다. 행복하였다. 너무도, 행복하였다. 여신의 첫 번째 종이라는 의무감도, 교단을 이끄는 성녀로서의 책임감도, 자신을 향한 수많은 사람들의 경애도 내팽긴 채 오직 그 하나만을 쫓았다. 후회는, 없었다. 더 이상 자신 곁에는 아무 것도 없었지만 대신 그가 자신의 곁에 있어주었다. 그가 빈자리를 채워주었다. 그가 자신을 사랑해주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아리엘이라는 한 여인에게 있어 세상의 전부나 다름이 없는 존재였으니까.
“...보고, 싶어.”
아직까지도 기억한다. 그의 품에 안겼을 때 그에게서 풍기던 살내음이 어떠하였는지, 자신을 향해 사랑을 속삭이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그의 손길이 어떠하였는지.
아아, 그러고 보니 그는 아리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빗겨주는 것을 좋아하였다. 아리엘이 간지럽다고 하지 말라고 해도, 그는 아무 말 없이 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빗겨주곤 하였다. 자신의 머리카락이 아름답다고 칭찬을 해주었다. 그것이, 마냥 좋기만 하였다. 자신이 사랑받고, 그리고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전부 한바탕 꿈에 불과한 시간이었다. 백일몽이었다. 물거품과 같이 부질없는 시간이 되고 말았다. 현실에서 일어날 리가 없는 망상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 때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스스로의 심장을 갈라서라도 돌아가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재회하기를 꿈꾸고 말았다. 다시 한 번, 자신만을 위해 미소를 지어주는 그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허나 그것은 불가능한일이었다. 모든 것은 시간의 사토(沙土) 속에 매장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렇기에 깨달아버리고 말았다. 설사 손을 힘껏 뻗더라도, 닿지 않는다는 것을. 모든 것은 저만치 멀어져가고 있다는 것을. 저기, 이제는 육안으로 확인할 수도 없을 만큼 멀어져 가는 저 마차마냥.
“...아, 흑.”
가슴 속에서 올라오는 사무치는 고독에 아리엘은 저도 모르게 스스로의 몸을 감싸 안고 말았다. 다리에 힘이 풀린다. 사실, 이곳에 있기 싫었다. 지금 당장 북쪽으로 가고 싶었다. 그에게로 가고 싶었다. 그에게 달려가, 사랑을 속삭이고 싶었다. 제발 자신을 돌아봐달라며 사랑을 구걸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아무런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떠한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은, 그와 함께할 때가 아니었다. 그러니, 참아야했다.
필사적으로 다른 생각을 떠올린다. 며칠 전 연회장에서 마주한 그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이제야 다시금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그와 ‘처음’ 만났던 때가 떠오른다. 자신을 보며, ‘성녀’라고 말실수를 하던 그의 벙 찐 얼굴은 참으로 귀여웠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 때 그 모습을 그대로 화폭 안에 옮겨 담고 싶었을 정도로 그의 모습은 귀여웠다.
허나 얼굴에 떠오른 미소도 잠시, 아리엘은 그 다음에 일어났던 사건을 떠올리며 눈빛을 싸늘하게 가라앉혔다.
“아이리스 엘 데브하르트.”
아리엘은 연회장에서 마주한 그 여자의 모습을 떠올리며 조소를 지었다. 우스웠다. 원정대에서는 남자를 모르는 숫처녀처럼 굴던 계집이 연회장에서는 홍등가의 창녀처럼 차려 입은 꼴을 보며 하마터면 실소를 터트릴 뻔하였다. 참, 노골적이라고 해야 할까. 무엇을 목적으로 그 따위 드레스를 입었는지 속내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모른 척을 해주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었다. 연회장에 입장한 이후, 그 계집의 시선은 오직 한 남자에게만 집중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그 계집을향해 허리를 굽히지 않았다. 제국의 황녀에게 허리를 굽히는 것은 할 수 있었지만, 한낱 창부에게 허리를 굽히는 것만은 할 수 없었다. 그 창부가, 자신의 그 이에게 꼬리를 흔들거리는 역겨운 계집이었기에 더더욱.
그러고 보니 연회장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니 그를 강아지 마냥 쫄랑쫄랑 쫓아다니던 하얀 머리 소녀가 떠오른다. 아마, 이름이 아리아라고 했던가?
“...아아, 카인. 정말, 자상하기도 하여라.”
'그것'에게 이름까지 붙여주다니. 그것을 보자마자 살심이 돌았지만 그 이가 제법 아끼는 장난감 같았기에 손을 쓰지는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손 쓸 가치도 없었기에 내버려 둔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에 든다는 말은 아니었다. 안 그래도 잡스러운 것들이 사방에 넘쳐흐르는데 괜한 장애물을 하나 더 추가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그게 아니지.”
그와 둘이서만 살게 된다면 집이 꽤나 적적할 지도 몰랐다. 이번 기회에 애완동물을 하나 기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는 계집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자신이 참아보기로 하였다. 이래 뵈어도 아리엘은세간에서 성녀라고 불린 여자였다. 그 정도 자비심은 베풀어 줄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 이가 정한 일이었다. 그 이가 정한 일에 함부로 간섭을 하는 것은 상당히 꺼려지는 일이었다. 자신이 지나치게 간섭을 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기품이 있고, 정숙한 모습. 그것이야말로 아리엘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반려자의 모습이었다.
“...음?”
그 때였다. 아리엘은 어디선가 자신을 쏘아보는 살기 어린 시선을 감지하고 말았다. 고개를 돌린다. 아리엘이 서 있는 성벽으로부터 한참이나 떨어진 황궁의 꼭대기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한 여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저 계집이왜 황궁의 꼭대기에 올라가 있었는지는 묻지 않아도 그 이유를 잘 알 것 같았다. 아마, 자신이 지금 성벽 위에 있는 것과 똑같은 이유겠지.
아리엘과 아이리스가 떨어져 있는 거리는 대략 1km 정도. 허나 그 정도 거리는 두 여인이 서로의 모습을 확인하는 것에 아무런 지장이 되지 않는 거리이기도 하였다. 머나먼 거리를 격하고, 두 여인은 서로 살기어린 시선을 교환한다. 아리엘도, 아이리스도 시선을 돌릴 생각 따위는 손톱 만큼도 없었다.
“...흥.”
웃음이 나온다.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 잘 쳐봐야 하나만 알고 둘은 알지 못하는 계집이 저리 나온다니 그저 우습기만 하다. 자신의 잘난 신분을 믿고 저리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 있나 본데, 과연 진실을 알고도 저런 태도를 고수할 수 있을까? 한낱 미물들조차도 죽을 때는 머리를 제가 살던 굴을 향해 돌리는 법이었다. 그리고, 그 이는 여우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이미 승기는 기울어져 있었다. 그것을 모르는 것은 저만치에서 아리엘을 노려보는 저 멍청한 계집 뿐 이리라.
“.....”
먼저 뒤로 물러선 쪽은, 아이리스였다. 아이리스는 아리엘을 향해 크게 혀를 차더니, 이내 고개를 휙 하며 돌렸다. 저 자존심 강한 계집이 한 발짝 뒤로 물러선 이유 따위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것으로 확실해 진 것이 있었다. 저 계집은, 조만간 선을 넘을 것이다. 이미 자신을 향해 살기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가까운 시일 내에, 저 계집이 자신을 방문한다는 것에 아리엘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 수 있었다.
상관없다. 아니, 오히려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왜냐하면-
아리엘은 그것 때문에 제도에 온 것이니까.
"황녀님, 당신의 방문은 언제나 환영이랍니다."
그리 중얼거리며 아리엘은 저도 모르게 살포시 미소를 짓고 말았다.
너무도 아리따운 한 줄기의 미소를.
****
제국의 북쪽에는 대륙의 동과 서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산맥이 자리하고 있다. 산맥의 이름은 이바렌치아 산맥. 이 높고 험준하기 이를 데가 없는 산맥은 하늘마저도 가리운 채 사람의 손길을 거부하는 고고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산맥과 산맥이 만나는 기슭 사이로 킬더른 강의 수원(水源)이 습곡을 굽이굽이 돌아 이내 에스텔 공작령으로 흘러 들어간다.
킬더른 강은 에스텔 공작령의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자그마한 지류이다. 천 년 전만 하더라도 에스텔 공작령에는 킬더른 강을 위시로 하여 비옥한 평야가 자리하고 있었지만 천 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지금 그 흔적은 눈을 씻고 보아도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지력(地力)이 다한 척박한 황무지 뿐. 황폐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일부 농작물을 제한다면 에스텔 공작령에서 이루어지는 농사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날씨 또한 지랄 맞기가 그지없어서 한여름에 눈이 오거나 성에가 이는 것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농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니 상공업 또한 자연스레 위축되었으며 상공업이 위축되니 영지 내 수입 또한 줄어드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물경 천 년이라는 시간에 걸쳐, 에스텔 공작령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은 의미를 잃어갔다. 지금 이 자리에 남아 있는 에스텔 공작령은 천 년 전의 영화(榮華)를 기억하며 추억을 곱씹고 있는, 빈껍데기나 마찬가지의 신세였다.
“...이건, 심각하군.”
루시안은 창 밖에 보이는 풍경을보며 신음성을 흘리고 있었다. 여행 기간내내 현재 에스텔 공작령의 사정에 대해 친절히 설명을 해주었음에도 쉬이 받아들이지 못하던 루시안은, 자신의 눈으로 공작령의 실상을 확인하게 되자 동요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특산품 같은 것은 없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광산 개발은?”
“이봐, 너는 설마 에스텔 공작령에서 천 년 동안 손가락만 빨고 가만히 있었다고 생각을 하는 건가?”
나는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루시안을 향해 친절히 설명을 해주었다.
“근처에 쓸 만한 광산은 이미 폐광이 된지 오래야. 그리고, 잘나가던 천 년 전에도 특산품 같은 것은 없었는데 이제 와서 그런 것이 뚝딱하며 튀어나올 리가 있겠냐.”
“...그런. 이것은...”
루시안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이내 한숨을 내리쉬고 말았다.
“이해할 수 없군. 천 년 전, 초대 에스텔 공작은 어째서 이런 땅에 자리하기를 원하였던 것이지? 이렇게 척박한 땅에서 사람이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인가?”
“내가 백 번도 더 말했던 것 같은데. 천 년 전까지 올라갈 것도 없이 대략 이백 년 전만해도 에스텔 공작령에서는 농작이 그럭저럭 이루어졌었다고. 그리고 한 때 저 폐광들에서 금과 은이 쏟아져 나오던 시절도 있었다 하더군. 그 양반으로서는 후손들을 위한 최선의 선택을 했던 것이겠지.”
초대 에스텔공작이 아무리 잘난 양반이었어도 천 년 뒤, 에스텔 공작령이 이 모양 이 꼴이 될 것이라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너무 그 따위 눈으로 쳐다보지 않아주었으면 한다. 여기가 아무리 척박한 동네라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사람이 사는 곳이니까. 우리는 네게 동정심이나 받을 정도로 비굴한 삶을 살아온 것이 아니야.”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배가 곯은 적이 없는 도련님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감성이겠지만.
“.....”
나의 말에 루시안은 두 눈을 감는다. 녀석이 아가리를 닥치니 마차 안은 저절로 조용해진다. 저 새끼는 왜 괜한 말을 꺼내 멀쩡했던 사람의 기분을 좆같이 만드는 것일까. 허나 녀석의 말은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나 역시 살짝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저 새끼 때문에 심란해진 마음을 조금이나마 진정시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나의 옆에 얌전히 앉아있던아리아가 나의 팔을 살짝 흔드는 것이 느껴졌다.
“카인님, 앞 쪽 마차에서 연락이 왔어요. 얼마 뒤에 본성에 도착할 예정이래요.”
“그래?”
“음... 그리고 카인님께 급히 전해달라고 하는 전갈이 한 가지 더 있었어요.”
“...급히 전해달라고?”
“네.”
그리 말하며 아리아는 나를 향해 꾸깃꾸깃 접힌 종이쪽지 하나를 내밀었다. 나는 왠지 모르게 치솟아 오르는 불안감을 애써 억누르며 종이쪽지를 조심스레 펼쳐 보았다.
[카스타나 후작가의 사절단이 당도함. 본성에 바로 들어가지 말고 앞에서 대기하고 있을 것.]
“.....”
아무래도 집에 돌아오자마자 상당히 엿같은 일이 발생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