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5화 〉4. 제도 루멘티움 - 14 (25/201)



〈 25화 〉4. 제도 루멘티움 - 14

황궁에서도 비처에 속하는 어느 깊숙한 곳, 그곳에는 제국 유일의 황녀인 아이리스 엘 데브하르트가 평상시에 거하는 방이 존재한다. 황실의 직계가 거하기에 전혀 부족함 없는 위엄과 자태를 뽐내고 있는 화려한 방의 한 가운데에서, 아이리스 엘 데브하르트는 의자에 앉은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

눈을 감고 있었지만 자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생각할 것이 있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생각해야만 하는 것이 있었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있었다. 신중하게 행동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조심은 아무리 해도 모자라지 않았다. 자신이 마음먹은 바를 완벽히 성취해내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어야만 했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생각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주어진 기회는 오직 한 번. 사냥감이 아무 것도 눈치 채지 못하고 방심하고 있을 때, 완벽하게 일을 처리해야만 했다. 실패는 용납되지 않았다.

스륵-

그 때였다. 방 안에 공기의 흐름이 순간적으로 일변하였다. 노크 소리도, 인기척도 없었음에도 아이리스는 손님이 자신의 방에 당도하였음을 깨달았다. 허나 놀랍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에게도 행적을 들키지 말고 은밀히 이곳에 들어오라 명한 것이 다름 아닌 아이리스 본인이었기에.

"...크리스인가."

“...예, 황녀님. 명하셨던 대로 아리엘 티에르, 키리에 엘 데나리스, 그리고 비앙카 델 카스타나의 지난 두 달 간의 행적을 조사해왔습니다.”

그리 말하며 크리스는 아이리스를 향해 몇 장의 문서를 건네주었다. 아이리스는 크리스의 손에서  문서를 받아들며 의외라는 듯 중얼거렸다.

“흐음, 생각보다 빨리 왔군? 적어도 일주일은 걸릴 것이라 생각했는데 말이지.”

크리스의 능력이 특출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고작해야 사흘이라는 시간 만에 그들의 행적을 알아낼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하였다.

“그 세 명은 정보부에서도 주요감시대상에 올라가 있는 인물들이었습니다. 덕분에 쌓여 있는 자료를 취합하기만 하면 되는 쉬운 일이었습니다.”

“호오, 그들이 제국의 주요감시대상에 포함되어 있었던가.”

하기야, 굳이 10년 뒤를 논할 필요도 없었다. 현재 시점에서도 하나 같이 범상치 않은 무력을 지니고 있는 계집들이다. 제국의 모든 정보를 규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편집증에 시달리고 있는 정보부에서도 그것들을 눈여겨보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을 테지.

“...꼬리는?”

“비닉 루트를 사용하였습니다. 특급으로 걸어놓았으니 어느 누구도 이를 확인할  없을 것입니다. 폐하께서 직접 확인하시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안전하다 자부합니다.”

“좋다. 수고했군, 크리스.”

아이리스는 크리스의 깔끔한 일처리에 크게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찬입니다.”

아이리스의 치하에도 크리스는 황공하다는 듯 고개를 떨굴 뿐, 크게 기뻐하는 기색은 없었다. 자신은 황녀의 검. 그녀가 시키는 일은 완벽히 처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황녀의 치하는 자신에게 있어 과분하기 짝이 없다 생각하였다.

“흐음...”

아이리스는 문서의 첫 장을 넘겨보았다. 첫 번째 장에는 세계수의 수호자, 키리에 엘 데나리스의 지난  달간 종적에 대한 기록이 적혀있었다.

“...지난 두 달간 키리에  데나리스는 단 한 차례도 세계수 근처를 벗어난 적이 없다고?”

“예. 엘프들과 교류가 허가된 상인들의 목격담에 의하면, 그녀는 수호자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중이라 하였습니다. 실제로, 정보부 쪽에서도 감시대상이 엘프들의 영역에서 나온 것을 확인한 바는 없다 합니다.”

“...거 참. 답답하기 이를 데가 없는 여자로군. 뭐, 그런 점이 마음에 드는 여자이긴 하지만.”

아이리스는 키리에의 행적을 살펴보며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자신도 어지간히 융통성이 없다 생각했지만 키리에는 자신보다 한  더 뜨는 것 같았다. 너무 오래 살아왔기에 이제 와서 삶의 방식을 바꿀 수 없는 것일까, 아니면 스스로가 어떤 상태인지 외면하고 있을 따름인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뭐, 그 여자는 당분간 신경 쓰지 않아도  것 같군.”

아이리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흔들며 종이를 넘겼다. 다음 페이지에 적혀 있는 인물은, 아이리스의 기분을 순식간에 저조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위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아리엘 티에르.”

아이리스는  여자의 얼굴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리고 말았다. 아이리스는, 그 여자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원정대에 속해있던 계집들은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 중에서도 아리엘 티에르는 독보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유는, 없었다. 언제나 싱글벙글 웃고 있으며 타인에게 시비를 걸거나 하지 않는 무해한 여자였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에 들지않았다. 어쩌면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느긋한 표정이 원인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순전히 추측의 영역이었지만, 아리엘 그 계집은 원정대에 속한 다른 이들을 자신보다 아래에 있다고 깔아보는 것 같았다. 정말이지, 기분 나쁜 계집이었다. 그런 계집이 세간에서는 ‘성녀’라고 불린다니, 정말 우습기 그지없는 한 편의 촌극이나 다름이 없다 생각하고 말았다.

아이리스는 솟아오르는 불쾌감을 속으로 삼키며 문서에 적혀 있는 글을 차분히 읽어 내려갔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전, 사람이 갑자기 변한 것 같이 굴었다고?”

“예. 어느 날부터인가 스스로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기색을 보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략 일주일에 걸쳐 타인과의 접촉을 거부한 채 홀로 기도만을 올리더니, 갑자기 제도에 있는 신전으로 파견되기를 강력하게 희망했다 합니다.”

“...흠”

과연, 연회장에서 마주친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셈이다.  계집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연회장에 참석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 목적은 너무도 노골적인지라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래, 이리 나와야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지 않겠는가. 경쟁이 치열해야 걸려 있는 상품의 가치도 올라가는 법.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떨거지들을 제치고 먹잇감을 가로채는 행위는 하이에나나 다름없는 비열한 행위다. 우아하지도 않고, 품위 있지도 않다. 가로막는 모든 것을 정면에서 쳐부수고 당당하게 승리를 쟁취한다. 그것이 아이리스  데브하르트라는 여자가 가진 철학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거기까지에 불과한 일이었다.

‘시시하군. 정말로.’

우습다. 몇날 며칠 동안 끙끙 앓다가 생각해낸 것이라는  우연을 가장하여 연회장에서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었단 말인가?  음흉한 여자가 생각해낸 책략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귀여운 수작이었다. 아니면 오만하다고 해야 할까. 아직 경주는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승리자마냥 행세하고 있는 아리엘의 행태가 실로 우습게만 여겨졌다.

아이리스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마음을 한결 내려놓았다.  여자는 출발선상에조차 오르지 않았으며, 다른 여자는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수준 이하였다. 아무래도, 긴박감이 넘치는 치열한 승부는 이루어지지 않을 모양인가보다.

아이리스는 아까보다 한결 나아진 표정으로 문서를 다음 장으로 넘겼다. 그리고, 다음 장에 적혀 있던 글을 읽자마자 얼굴이 딱딱하게 굳히고 말았다.

“...크리스.”

“예, 저하.”

“이곳에 적혀 있는 내용이, 정말 사실이더냐?”

“...어떤 부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비앙카 델 카스타나가, 흑탑을 방문했다는 사실 말이다.”

흑탑.

마법 가운데서도 흑마법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파들이 뭉쳐서 세운 집단. ‘흑마법’이라는 말만 들으면 왠지 모르게 금지된 학문을 다루는 사악한 마법이라 생각이 될 수도 있었지만 생각 외로 그들은 정상적인 부류에 속하는 이들이었다. 그저 다루는 마력이 통상의 마력과는 다른 새카만 색이었기에 일반인들이 경원시하는 것일 뿐. 따지고 보면 흑마법 또한 마법이라는 학문의 한 종류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비앙카  카스타나 또한 마법사   명. 마법사가 마법을 연구하기 위해 ‘탑’을 찾은 것이 무어가 특별한 일이냐 물을 수도 있겠지만, 아이리스는 본능적으로 이 일이 심상치 않은 일의 전조라는 것을 깨달을  있었다.

왜냐하면 흑마법이라는 학문이 다루는 분야는 인간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삶과 죽음이라던가, 영혼의 작용이라던가.

...혹은, 인간의 기억이라던가.

“.....”

비앙카  카스타나의 목적은 대체 무엇일까. 그저 마법에 대한 호기심이 일었기에 흑탑을 방문한 것일까. 아니면 다른 목적을 내포한  그곳을 방문한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지난  달간 심경에 큰 변화가 있었기에 흑탑을 찾아간 것일까.

왠지 모르지만, 위험하다. 그것이 아이리스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녀가 갈고 닦아온 육감이 경보를 울리고 있었다.가만히 놔둔다면, 뭔가 일이 터질 것이 분명했다.

“크리스.”

“예, 저하.”

“채비를 갖추거라. 내 친히 흑탑을 방문할 것이다. 비공식적인 방문이니 흔적은 남기지 말도록 하여라.”

“...언제 출발을 하실 예정이십니까?”

크리스의 질문에 아이리스는 당연하다는 어조로 대답을 하였다.

“지금 당장.”



****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황궁에서의 연회가 끝난 이후, 드디어 에스텔 공작가의 제도에서의 모든 공식적인 일정이 종료가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드디어 이 빌어먹을 도시를 떠나 집에  시간이 당도하였다는 말이었다.

“이 도시는 정말 엿같은 도시야.”

나는 수행인들이 마차에 짐을 싣는 것을 보며 저도 모르게 한탄을 내뱉고야 말았다. 드디어 끝이었다. 이 빌어먹을 곳에 당도한 이후, 집에 돌아갈 날만을 그렸건만 진짜로 이 날이 올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였다. 체감상 제도에서 대략 1년은 머문 것 같이 느껴졌다.

그만큼 지난 며칠간 내가 겪은 일은 실로 다사다난하다는 말조차 부족할 지경이었단 말이다. 아니, 단적으로 말하자면 수명이 10년 정도 쪼그라든 기분이 들었다. 최근 며칠 사이에 어찌나 놀랄 일이 많았는지 이제는 어지간한 일은 웃고 넘길 수 있는 강심장이 된 것 같단 말이다. 물론, 전혀 기쁜 일은 아니었다.

허나 이것도 끝이다. 이 좆같은 도시를 떠난다면  이상 나의 평화로운 삶을 방해할 요소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에스텔 공작령에 쳐 박혀 유유자적한삶을 보낼 것이라 마음 속으로 굳게 다짐하였다.

“...다음에 이곳에 온다면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인가.”

아버지께서 돌아가신다면 황제에게 봉토 서약을 하러 이곳을 방문해야 하니까. 되도록 아버지께서 오래오래 만수무강하시기를 기원하도록 하자.

그런데 그 때였다.

퍼억-!

누군가 나의 뒤통수를 강하게 후려갈겼다. 순간적으로 눈앞에 별이 아른 거리는 것을 보니 감정이 듬뿍 담긴 일격이었다.

“정말, 불효막심한 개자식이로다. 하늘에 대고 이 아비가 하루 빨리 죽기를 기도라도 올리는 것이더냐? 아니면 그토록 공작 위가 가지고 싶었더냐? 응?”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면 무슨 의미더냐? 내가 이해하지 못할 심오한 의미라도 담겨 있었던 것이더냐?”

아버지께서 내 변명을 들으며 헛웃음을 흘리신다. 젠장, 방금 내 말은 회귀 전과 같이 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셔서 이 거지 같은 도시를 방문하는 일이 없으면 하는 의미에서 내뱉은 말이었다. 권력에 눈이 돌아가 반역을 꿈꾸고 있던 것이 아니란 말이다.

하지만 그에 대해 설명을 하자면 내가 10년의 세월을 거슬러 온 회귀자임을 설명해야  것이니 섣부르게 입을 벌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내가 택한 것은 입을 조개처럼 다무는 것이었다. 염병할, 순수한 의도를 가지고 내뱉은 말조차 타인에게는 곡해되어 들린다니. 생각 외로 회귀자라는 직종은 타인에게 이해를 받지 못하는 쓸쓸한 업종인지도 모른다-

내가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한숨을 내쉬고 있자니 아버지께서는 내 속도 모른  나를 한심하게만 쳐다보신다.

“...뭐, 네가 얼마나 불효자식인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차근차근 논하도록 하마.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닌 것 같으니.”

“왜입니까?”

“손님이 왔다. 너를 찾아왔다 하더군.”

...나를? 누가? 이 빌어먹을 도시에서 나를 개인적으로 찾아올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은데?

내가 그렇게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니 아버지께서는 아까와는 사뭇 다른 진지한 어조로 내게 말씀을 하셨다.

“참고로 나는 이미 손님의 제안을 허락했다. 하지만 최종 결정권은 네게 미룬다고 일러두었지. 카인, 네가 알아서 판단하거라.”

그리 말하며 아버지는 저만치에서 쭈뼛거리고 있는 ‘손님’에게 손짓을 하였다. 이리로 오라는 신호였다. 그것과 동시에 아버지께서는 자리를 비켜주셨다. 둘이서 편안히 이야기를 나누라는 배려였다.

“...카인 폰 에스텔, 오랜만이군.”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손님’이란, 내 예상을 한참이나 벗어난 정말 의외의 손님이었다.

“루시안? 루시안 폰 투르니젠?”

손님의 정체란 바로 며칠  나와 연회장에서 박 터지게 싸운 끝에 내게 쥐어 터지고 패배한 루시안이었다.

“...네가 대체 무슨 일이냐? 나한테 볼일이 있다고?”

나와 루시안의 앙금은  결투를 통해 깔끔히 해소된 것이 아니었나? 이 녀석도 그리 뒤끝이 있어 보이는 성격은 아닌 것 같아 보이는데. 설마 결투를 한 판 더 하자고 나를 찾아온 것인가?

“카인  에스텔. 네게 부탁이 있어서 왔다.”

“뭔데?”

투르니젠 공작가의 도련님의 입에서 ‘부탁’이라는 말이 나오다니, 얼마나 거창한 말이 튀어나오려고 녀석은 사람을 부담 주는 것일까.

헌데, 루시안의 입에서 나온 부탁이란 나의 상상을 한참이나 벗어난 종류의 것이었다.

“나 역시 너와 함께 에스텔 공작가로 떠나고 싶다. 내가 에스텔 공작가의 기사가 되는 것을 허락해주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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