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4. 제도 루멘티움 - 13
그 이유는 도통 알 수가 없지만, 아리엘은 루시안의 치료를 거부하고 있었다. 신에게 귀의하여 세속의 모든 것을 내려놓았기에 만민에게 평등한 치유를 베풀어야하는 성직자가 타인의 치유를 거부하다니. 거창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하기 싫다’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를 들먹이면서. 다른 곳도 아니고 연회장과 같이 듣는 귀가 수없이 많은 공개적인 장소에서.
“.....”
‘...완전히 미쳤군.’
아까까지는 살짝 긴가민가하였지만 이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오늘의 아리엘은, 어딘가 맛이 간 것 같다. 아니면 원래 맛이 가 있었거나.
물론, 내가 대가리에 꽃밭이 피어있어서 ‘성직자는 자신의 신성력을 모든 만민에게 공평하게 베풀어야 한다.’와 같은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들먹이는 것은 아니다. 신성력이란 여신에게서 비롯된 힘이지만 정작 그 힘을 행사하는 주체는 사람이다. 성직자도 사람인 이상, 그리고 그들 또한 인세에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삶을 영위하는 이상 신성력의 행사 또한 모두에게 공평하게 베풀어질 수 없음을 나 역시 잘 알고 있다.
막말로, 성직자라고 해서 땅을 파면 돈이 나오는 것이 아니며 엘프들처럼 이슬만 먹고 살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뭐, 엘프라고 해서 진짜로 이슬만 먹고 사는 것은 아니지만. 참고로 키리에는 엘프 주제에 고기도 잘만 뜯더라.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방금 전, 황녀가 아리엘에게 허리를 굽히지 않는다고 꼬장을 부렸던 것처럼 성직자 또한 인세의 권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생각 이상으로 그들의 눈치를 많이 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귀족과 평민이 동시에 신전을 찾는다면 귀족을 먼저 치유하며, 귀족들이 축성식(祝聖式) 같은 것을 연다면 성직자들은 만사를 제쳐두고 그곳에 참여해 축복을 걸어준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탓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정작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놈의 특권계층인데 뭘 어떻게 하란 말인가? 자고로 단물 쓴물 다 빨아먹는 놈이 특권이어쩌니 하며 중얼거리는 것만큼 역겨운 것은 없는 법이다.
그 중에서도 아리엘은 성직자라는 직종의 대표 위치에 서 있는 여자이다. 비록 이 시점에서는 ‘성녀’의 칭호는 받지 못하였지만 태어났을 때부터 가지고 있는 막대한 신성력과 여신에게서 하사받은 권능으로 인해 아리엘은 교단의 대표적인 인물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러니까, 아리엘의 말 한 마디가 자칫하면 교단 전체의 의지라고 오해를 받을 염려가 존나게 넘친다는 것이다.
어디 가서 입 다물고 예쁘고 고운 말만 해도 모자랄 판에 사사로운 이유로 타인의 치유를 거절하겠다는 말은 떠벌리고 다니다니? 그것도, 일반 평민도 아니고 제국 4대 공작가의 일원 중 투르니젠 공작가의 후계자를? 지금 아리엘의 발언을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듣는다면 교단측에서 투르니젠 공작가와 한 판 질펀하게 뒹굴어보자는 선전포고라 해석을 해도 변명의 여지가 없을 테지.
나는 저도 모르게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얼른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말 정말 다행스럽게도 방금 전 아리엘의 폭탄 발언을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 하였다. 나는 남몰래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살았다. 하마터면, 방금 전 제국을피로 물들일 지도 모르는 도화선에 불이 붙을 뻔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남의 속도 모른 채 바닥에서 퍼질러 자고 있는루시안을 힐끗 쳐다보았다. 이 병신 같은 새끼는 대체 뭘 잘못 했길래 아리엘의 입에서 ‘치유해주기 싫다.’라는 말이 나오게 만든 것일까.
‘...이 새끼가 뭔 신성모독이라도 했나?’
내가 기억하기로 성녀 아리엘은 북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는 와중에도 불쌍한 사람들이 있으면 일행의 발걸음을 늦추는 한이 있더라도 도움을 주고 싶어 하던 답답한 여자였다. 그런 순해빠진 여자의 미움을 사다니, 이 새끼는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는 말도 모르는 등신인 것인가? 나는 여심이라고는 눈꼽만큼도 모르는 루시안을 내려다보며 혀를 한 차례 끌끌 차보았다. 정말 내 삶에 요만큼도 도움이 안 되는 새끼가 아닐 수 없다.
“...어쩔 수 없구만.”
가장 베스트는 아리엘이 치료를 해주는 것이었는데 그녀가 치유를 거부하면 나라도 녀석을 깨워야 하지 않겠나. 이대로 쓰레기 마냥 연회장 바닥에 굴러다니게 하면 사용인들에게도 민폐일 테고.
“어? 카인님, 설마 의술도 배우셨어요?”
“전문적인 것은 아니고, 그냥 야매야. 어깨너머로 배운 정도지.”
“야매요?”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리아. 그 모습이 마치 슬랭을 처음 접하는 귀족 영애 같이 느껴져 어딘지 모르게 귀엽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방식으로 깨우실 건데요?”
“물리치료.”
“...네?”
무얼. 자고로 몸만 튼튼한 등신들을 깨우는데 이것보다 적합한 방법은 없다. 황녀가 정신을 잃은 오크나 오우거의 대가리를 한 대 강하게 후려치니까 정신을 회복하는 것은 수도 없이 보았다. 황녀가 할 수 있다면 황녀의 제자라 할 수 있는 나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위를 조심스레 살펴보았다. 지금부터 이루어질 행위는 제 아무리 순수한 의료 목적에서 비롯된 행위라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오해를 살 여지가 있었다.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접근을 해야 했다. 나는 우선 눈에 잘 띄지 않는 사각지대로 녀석을 옮겼다. 그런 다음 녀석을 바닥에 뉘인 후 주위를 한 차례 살펴보았다. 아주 좋다. 이 장소라면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치료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그대로 손을 들어 녀석의 뺨을 강하게 후려쳤다.
짝-!
뒤통수를 후려 갈겼다가는 안 그래도 저능한 지능이 더욱 추락할 염려가 있었으므로 인권보호 차원에서 뺨을 후려갈겼다. 아주 찰진 소리가 연회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옆에서 가만히 구경하고 있던 아리아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지금껏 보지 못했던 신진 의료기술을 접하는 것이라 많이 놀란 것 같이 보인다.
치료의 효과가 듣나 해서 루시안을 살펴보니 뺨이 살짝 부어올른 것이 보인다. 과연, 마스터의 경지에 도달해 있는 무인다웠다. 마음을 굳세게 먹고 강하게 후려쳤는데 고작해야 뺨이 살짝 부어오르는 정도에 지나지 않다니. 하기야. 생각해보니 황녀 또한 그랬다. 대련 중에 어쩌다가 황녀의 몸을 스치더라도 그녀의 몸을 때린 내 주먹이 더욱 얼얼하곤 하였다. 마스터의 경지에 도달하면 육신이 통상적인 인간의 피륙과는 전혀 다른 무언가로 변모한다던데 그 말이 옳은 것 같았다.
“...안 일어나는데요?”
“한 대로 안 되면 두 대를 때리면 되지 않을까?”
나는 환자를 포기할 수 없다며 최후의 순간까지 손에서 메스를 놓지 못하는 의사의 심정을 공감해버리고 말았다. 그들 또한 수술대 위에서 나와 같은 심정이 아니었을까. 나 역시 내가 맡은 환자를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사명감이 솟아오른다. 그렇다. 언제부턴가 확신을 잃었지만, 나는 이미 한 명의 의사였던 것이다-
짜악-!
순수한 치유 목적으로 녀석의 뺨을 몇 대 더 후려갈겼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의료행위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내 사심은 전혀 섞여있지않았다.
“카, 카인님!”
“오오, 이 새끼. 꽤나 근성이 있는데?”
내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달뜬 숨결이 뿜어져 나온다. 기묘한 충족감이 전신을 맴돈다. 환자를 살리는 행위가 이토록 보람찬 것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공작 같은 것은 때려치우고 의사나 할 것을 그랬다.
아무래도 뺨을 때리는 것은 치료 효과가 약한 것 같으니, 주먹으로 아굴창을 갈긴다면 더욱 효과가 크지 않을까 고심을 하고 있던 찰나, 늦게나마 나의 치료가 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그러니까, 루시안 저 녀석이 눈을 뜨고 말았다는 소리다.
“그으으윽- 이건, 대체...”
“...음, 효과가 조금 늦게 나타나는 타입이었나. 거봐, 아리아. 내가 꼭 살려낸다고 했지?”
“.....”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아리아. 아마 눈앞에서 환자가 살아났다는 감동에 가슴이 벅차올라 저렇게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카인 폰 에스텔. 네가 왜 이곳에 있는 거지?”
“왜긴 왜야. 지체 높으신 도련님께서 취객마냥 연회장 바닥에서 숙면을 취하시니 아무도 못 건드리잖아. 다른 사람들한테 더 이상 민폐 끼치지 말라고 깨웠다.”
내 친절한 설명에 루시안을 한차례 관자놀이를 쓰다듬더니 멍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건가. 난, 네게 패배한 것이군.”
그리 말하며 루시안은 이미 파해가는 분위기인 연회장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조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우리가 결투를 벌인 이후로 시간이 꽤나 흐른 것 같군. 카인 폰 에스텔, 네 말이 맞다. 이토록 오랜 시간 동안 정신을 잃은 채로 연회장에 누워있었다면, 다른 사람에게 꽤나 민폐를 끼쳤던 것이 분명할 테지.”
꽤나 개념 찬 발언을 하며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루시안. 하지만 오른쪽 뺨이 퉁퉁 부어오른 채로 저런 말을 하니 전혀 멋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럼, 나는 이만 가보겠다. 카인 폰 에스텔. 나를 깨워준 보답은 언제고 반드시 갚도록 하지. 그 때까지 몸 성히 지내도록.”
그런 멋들어진 대사를 남기며 루시안은 몸을 휙 하고 돌렸다.
“야, 잠깐만.”
“...왜 그러는가?”
갑자기 자신을 불러 세운 것에 대해 의문을 표하는 루시안. 나는 별다른 말은 하지 않은 채 가죽 주머니에서 금화 몇 개를 꺼내 녀석의 손에 쥐어주었다.
“...뭐냐, 이건?”
“동업자에 대한 예우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개평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둘 다라고 생각해도 좋은데, 어쨌든 너 가져.”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다만 날 모욕하는 것인가?”
모욕이라니. 무슨 섭섭한 말을 하는 것일까. 내가 녀석에게 금화를 쥐어준 것은 순수한 호의에서 비롯된 행동이다. 루시안 덕에 이렇게 많은 돈을 벌게 되었는데 아무런 보답도 하지 않고 입을 싹 닦는 것은 너무 졸렬한 행위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세상 사람들이 나의 온화한 심성의 절반만 닮았더라도 이 세상은 법이란 것이 필요 없는 세상이 되었을 것이다.
“...하아, 동정에 의한 적선도 모욕의 한 종류인 법이다. 기억해 두도록.”
그리 말하면서도 녀석은 자신의 주머니에 금화를 쏙 하며 집어넣었다. 그러더니 이유 모를 한숨을 한 차례 내리쉬더니 몸을 돌려 연회장 밖으로 사라졌다. ...역시, 진심이 한가득 담긴 태도는 세상 어디에서도 통용이 되는 법이었다. 보라, 저런 얼간이 같은 녀석도 내게 별 다른 말을 꺼내지 않고 사라져주지 않나.
내가 한 건 해치웠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자니 옆에서 누군가가 나의 어깨를 톡톡하며 두드려왔다. 고개를 살짝 돌려보니 아리엘이 평상시와 한 치의 변화도 없는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눈을 내리깔고 있는 아리아와는 정말 비교되는 태도가 아닐수 없었다.
“그럼 저도 진짜 가 봐야할 것 같군요. 다음에 또 보도록 하죠. 카인. 안녕히.”
그리 말을 하며 아리엘은 나를 향해 꾸벅하고 인사를 하더니 이내 연회장 밖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
그리고 나는 그러한 아리엘의 뒷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불현듯 한 가지 의구심을 품기에 이르렀다.
“아리아.”
“예.”
“...내가 저 여자한테 자기소개를 했었던가?”
내 기억이 분명하다면 난 저 여자한테 내 이름을 밝힌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