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4. 제도 루멘티움 - 12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이 되었던 것일까. 무엇이 잘못되었던 것일까.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모든 것이 잘못되었던 것일까.
일의 계기는 단순하였다. 오늘따라 아이리스는 그저, 기분이 좋았을 뿐이었다. 실로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
과거의 모든 것은 이미 사라져버렸다고 생각했었다. 시계태엽이 거꾸로 감기고, 세계의 시간이 뒤로 거슬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자신뿐이라 생각했었다.
...아팠다. 그 날의 추억도, 속삭임도, 함께 나눈 감정의 교류도 이제는 없었던 것이 되고 말았다는 사실이 슬프기만 하였다. 그 날 보았던 별의 반짝임과 해후할 수 없음을 탄식하고 말았다.
물론, 이 시간대에도 그는 존재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아는 그가 아니리라 생각하였다. 아이리스 엘 데브하르트라는 여인이 사랑했던 어느 남자는, 그녀가 닿을 수 없는 미래에 남아 있다 생각하였다. 오직 자신만이 이 시간대에 유폐되고 말았다는 생각이 들고 말았다. 그와 함께했던 그토록 찬란했던 시간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끝에 고독한 망상으로 전락하리라 낙심하고 말았다.
허나 아니었다. 실은, 이어져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경험했던 과거가 오롯이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와 함께 공유한 시간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아이리스는 안도하였고, 기쁨을 느꼈다. 더 이상 자신이 혼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비록, 그리 반갑지 않은 몇몇 떨거지들도 섞여 있는 것 같았지만 그 정도는 허용범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으로 보나, 신분으로 보나, 그깟 것들보다 자신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서 있었으니까.
창문을 열었다. 창 밖에는, 마치 그 날 밤처럼 하늘에 수많은 별자리가 수 놓여 있었다. 문득, 저 별들을 더욱 가까이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테라스로 나왔다. 밤바람이 선선하였다. 싸늘한 밤바람이, 기대감으로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뺨을 선선히 식혀주었다.
그 때였다. 저 만치 떨어져 있는 서쪽 테라스에서, 한 쌍의 남녀가 밀회를 가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 것이.
“.....”
황궁에서 한 쌍의 남녀가 밀회를 가지는 것 정도야, 지금까지 셀 수도 없이 목격한 광경이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마치 목석을 바라보듯 신경조차 쓰지 않았을 것이다. 허나 남녀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아이리스의 모든 신경은 그들에게로 집중이 되고 말았다.
“...아.”
두 남녀가 누구인지 알아본 순간, 아이리스가 가장 먼저 한 생각은 자신이 검술을 익혔다는 사실 그 자체에 대한 탄식이었다. ...만약, 자신이 검술을 익히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보통 사람보다 월등한 시력을 갖추지 않았더라면, 저들이 저곳에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였을 텐데.
테라스에서 남몰래 만나고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그들은, 아이리스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남녀였다. 어찌 저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까.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와 관련된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카인.”
그리고 여자 측은-
“...사라, 세르나드.”
전혀, 생각지 못한 조합이었다. 차라리 카인이 옆에 거두고 있는 하얀 머리의 소녀나 그 음흉하기 이를 데가 없는 아리엘 티에르와 함께 있었다면 이해가 되었을 것이다. 납득은 도저히 할 수 없었겠지만, 이성적으로나마 이해는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헌데 저 여자만큼은, 같이 있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용서가 되지 않았다. 아아, 어떻게 저 계집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 ‘약혼’이라는, 카인과의 신뢰를 헌신짝 버리듯 어긴 여자를. 제 한 몸뚱이를 팔아 투르니젠 공작가에 몸을 맡긴 창녀 같은 여자를.
문득, 언젠가 그와 나누었던 대화가 스쳐 지나간다.
- 경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나? 약혼녀였던 여자가, 다른 사내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보고도 그녀를 용서할 수 있는가?
-...사랑했으니까요. 그리고, 이제는 다 끝난 일인데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그 때, 카인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렇기에 자신 또한 용서하였다. 이미 다 끝난 일이었으니까. 이제 더 이상 카인 폰 에스텔이라는 남자의 인생에 끼어들지 않을 여자였으니까. 아니, 어떤 의미로는 감사하기도 하였다. 그 계집이, 카인을 버리고 간 덕에 지금 자신에게도 기회가 생긴 것이니까.
...그런데 어째서일까. 어째서 카인은, 테라스에서 단 둘이 저 여자와 만나고 있는 것일까. 그는 지금 저 계집과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일까.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카인과 저 계집은 달콤한 밀어(蜜語)라도 교환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
거리가, 거리가 너무 멀어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온갖 해괴망측한 상상이 아이리스의 머릿속을 점령한다. 손이 벌벌 떨려온다. 온 몸의 털이거꾸로 곤두서는 느낌이다. 후회한다. 차라리, 저들이 만나는 것 따위 알지 못했다면 이런 감정도 느끼지 않았을 텐데.
그 때였다. 카인이, 그녀를 향해 한 발짝 다가간다. 그녀를 향해 뭐라 속삭인다. 그 말을 들으며, 사라 세르나드 역시 카인을 향해 한발짝 다가선다. 두 남녀는, 한참이나 말없이 서로를 마주하며 서 있는다. 그 광경은, 어느 누가 보아도 연인 관계로 밖에 설명이 되지 않았다.
콰직-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아이리스의 악력을 이기지 못하고, 테라스의 난간이 박살나고 말았다. 하지만 그 따위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리스의 눈동자가 크게 떠진다. 카인의 손이, 그의 손이 사라 세르나드의 목덜미를 쓰다듬는다. 그와 동시에, 사라 세르나드는 카인의 품에 자신의 몸을 맡긴다.
“...아아.”
그 순간, 아이리스의 가슴 속의 무언가가 무너지고 말았다. 무엇이 무너졌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무언가가 무너졌다는 사실만은 이해할 수 있었다.
...빼앗겼다. 자신은, 다른 사내와 저리도 가까운 거리에 있어본 적이 없었는데. 다른 사내에게 목덜미를 허락해본 적이 없었는데. 그리고, 다른 사내의 품에 저리 안겨본 적이 없었는데. 그에게 모든 처음을 허락하리라, 그리 다짐하고 있었는데.
정작 카인은 자신이 처음이 아니었다. 이미 그는 다른 계집의 목덜미를 쓰다듬어 보았고, 다른 계집을 품에 안아보았으니까. 만약 그녀가 그의 품에 안기더라도, 그는 저도 모르게 비교를 하고 말 것이다. 사라 세르나드는 좀 더, 자신의 품에 쏙하고 안겼는데. 이런 생각 따위를 떠올릴 지도 모른다. 그것만큼은, 죽어도 싫다. 싫다, 싫어. 싫다고.
“...카인.”
카인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저 남자는, 별과 같은 남자이다. 그 별빛에 매혹된 부나방들이 몇이나 있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그러니 그는 나쁘지 않다. 나쁜 것은 부나방들이다. 자신의 주제도 모르고 그에게 접근을 하는, 계집들이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이 나서야 했다. 더 이상 저 이에게, 주제를 모르는 다른 벌레가 접근하는 것을 가만히 두고볼 수가 없었다. 인내는 여기까지였다. 1년을 참아왔다. 그리고 거기서 두 달을 더 참아왔다.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순간, 아이리스 엘 데브하르트의 마음 속 깊숙한 곳에서 어느 가느다란 매듭이 툭하며 끊어지고 말았다.
다시는 이어지지 않을 만큼. 확실하게.
****
사라와의 대화를 끝마치고 연회장에 돌아오니, 연회장의 분위기는 슬슬 파해가는 분위기였다. 내가 이곳을 나설 때만 하더라도 사람들로 북적거려 발 딛을 틈 하나 없더니, 이제는 정말 소수의 귀족들과 사용인들만남아 있을 뿐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에게는 사람이 적은 편이 더 좋다. 요즘 내가 워낙 유명인인지라, 나를 향해 시선이 꽂히는 것도 이제는 지긋지긋하였으니까.
“카인님!”
저 만치서 내 얼굴을 알아보고 아리아가 종종걸음으로 뛰어온다. 아리아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해맑기 그지없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무슨 기쁜 일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여기요, 여기!”
아리아는 내게 달려오더니 나의 손에 큼지막한 가죽 주머니를 올려놓는다. 뭐지, 이건.
“수금해왔어요! 잘했죠?”
“...수금?”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지,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것도 잠시. 나는 루시안과 나의 결투를 두고 거액의 도박판이 벌어졌다는 것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아리아를 얼굴마담으로 삼아서 그 도박판에 금화 몇 개를 걸었다는 사실 또한.
“...아, 맞다. 그러고 보니 나도 돈을 걸었었지. 수고했어, 아리아.”
나는 별 생각 없이 아리아가 건네준 가죽 주머니를 열어보았다. 고작해야 금화 몇 개를 걸었을 뿐인데 벌어봐야 얼마나 벌었을까하는 단순한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내 몸이 굳어져버리고 말았다.
“.....”
내 눈앞에 황금의 파도가 일렁이고 있었다.저도 모르게 눈을 슥슥 비비어보았지만 눈앞에 펼쳐진 황금의 물결은 여전히 나를 매혹하고 있는 중이었다. 저도 모르게 금화 하나를 쥐어 앞뒤로 살펴본다. 이것은 그냥 금화가 아니었다. 통상 금화의 몇 배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기념 주화였다. 이럴수가. 그럼 이 가죽 주머니 안에 들어 있는 실제 금액은 대체 얼마라는 소리인가?
갑자기, 내가 손에 들고 있는 가죽 주머니가 존나게 무거워졌다. 그야 그럴 수밖에. 지금 내가 손에 들고 있는 이 가죽 주머니 안에 들어 있는 돈은, 에스텔 공작령의 1년 예산을 훨씬 웃도는 어마어마한 금액이란 말이다. 에스텔 공작령이 제국에서도 손꼽히게 가난한 가문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내가 들고 있는 이 돈은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
“...아리아.”
“네. 카인님.”
나는 저도 모르게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아리아를 껴안고 말았다.
“네가 정말 복덩이다. 복덩이야.”
내가 만약 아리아에게 맛있는 것을 먹여주기 위해 연회장에 데리고 오지 않았더라면, 결과적으로 막대한 금액의 돈을 벌 기회를 놓치고 말았으리라. 역시, 나의 판단이 옳았다. 여신님께서는 착하게 사는 사람을 굽어 살펴보며 복을 내려주신다 했던가. 내가 선하기 그지없는 의도로 아리아를 여기에 데리고 왔기에 나에게 이런 행운이 찾아든 것이리라-
“헤헤, 아무 것도 아닌 걸요.”
아니, 절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 나는 벅차오르는 기쁨을 참아내지 못하고 아리아를 덥석 끌어안고 말았다.
“...카, 카인님... 이런 곳에서 이러시면...”
하지만 아리아의 말은 너무도 작았기에 기쁨에 취해있는 나의 귓가에는 잘 들리지 않았다. 아니, 단순히 껴안는 것만으로는 나의 기쁨을 표출할 수 없다. 여기에서는껴안기 보다는 번쩍 안아 빙글빙글 돌리는 편이-
“...다른 사람이 많이 있는데 그런 행동은 좀 자제해주지 않을래요? 카인?”
그 때였다. 느긋하지만 왠지 모르게 가시가 돋혀 있는 듯한 말투가 나를 향해 사정없이 꽂혀든다. 그 속에 담겨 있는 한기에 나는 저도 모르게 아리아에게서 손을 떼었다. 뒤를 돌아보니 성녀, 아리엘이 나를 보며 싱글벙글 웃고있었다.
“성... 아니, 아리엘. 아직도 이곳에 남아 있었습니까?”
“네에, 카인. 어쩌다 보니까요. 이렇게 남아있게 되었네요.”
여전히 싱글벙글한 표정을 유지하며 나를 향해 대답을 하는 아리엘. 왠지 모르게 저 말투에 나에 대한 불만이 섞여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것은 단순한 착각일까.
좌우지간, 신기한 노릇이었다. 시끌벅적한 것을 싫어하면서 아직까지 이곳에 남아있었다니.
“...뭔가 볼일이라도 남아있으셨던 것입니까?”
“예, 뭐. 하지만 방금 마쳤으니 저도 이제 돌아갈 때가 되었군요.”
그런 새침한 말투로 내게서 몸을 휙 하고 돌리는 아리엘. 거 참, 오늘따라 왜 저렇게 까칠한 것일까.
“아리아, 우리도 가자. 이제 여기서 볼 일은 다 본 것 같으니까.”
“예!”
나는 저절로 흘러나오는 콧노래를 부르며 연회장을 빠져나가려 했다. 그런데 뭔가 발에 툭하며 체이는 것이 있었다. 뭐야, 연회장에 돌멩이라도 놔둔 것인가?
“...카인님, 일부러 사람이 쓰러져 있는 벽 쪽으로 가시면 어떻게 해요?”
“아, 이게 사람이었어?”
난 또 큼지막한 게 연회장에 누워 있길래 쓰레기인가 뭐 그런 것인 줄 알았다. 그래서 한 번 걷어차고 지나가려 했는데 아쉽게도 쓰레기가 아니라 나와 한바탕 결투를 벌인 루시안이었나보다.
“근데 얘는 왜 아무도 안 치워갔어?”
“음, 그게, 어떤 아저씨들이 신관님을 부르러 간다 했는데 아직도 안돌아왔어요.”
...그 자식들은 무슨 법황국으로 성직자를 부르러 갔나? 왜 아직도 안 돌아온 거야?
“야, 안 일어나고 뭐해? 여기가 너네 집 안방이냐?”
퍼억-
툭하고 걷어차 보았지만 루시안은 그 어떠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단순한 시체인 것 같다.
“...카인님. 이 사람, 아직 살아 있어요.”
“음, 그래?”
제 아무리 머저리 같은 놈이라지만 연회장에 이리 자빠져 있는 꼴을 보아하니 측은지심이 들기 시작한다. 자비로움의 대명사인 카인 폰 에스텔은 이런 것을 쉬이 넘기고 지나갈 수 있을 만큼 모진 성품이 아니었다. 이런 따뜻한 마음씨가 언젠가는 커다란 약점이 될 것을 알고 있지만 어찌하겠는가. 내 천성이 이토록 선하게 태어난 것을.
나는 저도 모르게 내 옆에 가만히 서 있는 아리엘을 곁눈질로 힐끗 쳐다보았다. 바로 이곳에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성직자가 있는데 그 자식들은 왜 엄한 곳으로 성직자를 찾으러 간 것일까. 나는 별다른 생각 없이 아리엘에게 부탁을 해보았다.
“성... 아니, 아리엘. 이 녀석에게 치유를 좀 걸어주실 수 있나요?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꼴사납게 드러누워 있는 꼴을 보니 마음이 조금 아파...”
“싫어요.”
“...네?”
아리엘은 나의 오른쪽 발을 힐끔 쳐다보더니 이내 딱 잘라서 거절의 의사를 표하였다.
“싫어요. 안 할 거에요.”
“.....”
...성직자가 부상당한 이의 치유를 거부하다니. 이건 직무유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