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4. 제도 루멘티움 - 11
...거두어 달라? 자신을?
“...그건 도대체 무슨 뜻이지?”
“후후, 글쎄?”
나의 질문에 사라는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있을 뿐, 어떠한 대답도 해주지 않는다.
설마, 사라는 아직도 내게 마음이 남아 있었던 것일까.
그 날 그녀가 나에게 싸대기를 때렸던 것은, 약혼 상대인 자신을 놔두고 파렴치한 짓을 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아리아에 대해 질투심이 들끓어 자신도 모르게 손이 나가고 만 것일까?
순간, 대하소설 한 편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약혼으로 맺어진 두 남녀.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 그리고 사실 남자를 사랑했지만 그 사실을 티를 내지못하고 속으로만 끙끙 앓는 여자. 그 여자는 어느 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를 침대에 끌어들이고 만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남자를 향한 배신감에 저도 모르게 싸대기를 때리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끝내 남자를 향한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어 베게 귀퉁이를 눈물로 적시던 나날을 보내던 와중, 여자는 제도의 연회장에서 우연히 자신의 약혼자를 마주하게 된다. 허나, 때는 너무 늦은 상태. 두 가문의 파혼은 이미 정해진 사안이었으며, 남자의 옆에는 그 때 침대 위에 누워있던 여우같은 계집아이가 찰싹하며 달라붙어 있는 것을 목격하고 만다. 애타는 마음, 들끓는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한 여자는 최후의 수단으로 남자에게 사랑을 구걸하기 위해 서쪽 테라스로 그를 불러낸 것이리라-
‘...그럴 리가 없지.’
만약 내가 10년 전의 대가리에 피도 마르지 않았던 카인 폰 에스텔이었다면 방금 전 그녀의 말을 듣고 눈이 돌아갔을 지도 모른다. 약혼식장에서 반지를 교환한 이후, 그녀의 얼굴을 보고 첫 눈에 반한 끝에 아이는 몇 명이나 낳을 지에 대해망상이나 하던 그 병신이었다면 지금쯤 사라의 말이 끊어진 약혼 관계를 다시 잇고 싶다는 말인 줄 알고 그녀의 발바닥을 핥으며 자비를 구걸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허나 이제는 아니다. 나는 세상 어느 누구보다 객관적인 눈으로 사라를 바라볼 수 있었다. 어떠한 속내도 내비추지 않은 채 그녀를 찬찬히 살펴본다. 겉으로는 달콤한 말을 내뱉고 있었지만 정작 그런 말을 내뱉고 있는 그녀의 표정은 로맨틱하지도 아니하였거니와 사랑에 빠진 여자로 보이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그녀의 두 눈에는 나를 향한 어떠한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녀의 두 눈은, 지극히 냉철하고 싸늘하기만 하였다.
나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지어 보이며 그녀를 향해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아무리 들어도 약혼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는 달콤한 이야기로는 들리지 않는데?”
“뭐야, 다 들켰네? 벌써 눈치 챈 거야?”
사라는 이 상황이 재미있기만 한지 킥킥 웃음을 지어보이더니 이내 나의 말에 순순히 긍정을 표하였다.
“좋아. 더욱 마음에 들어. 솔직히, 아까까지는 긴가민가하였지만 이제는 확신할 수 있겠어. 믿음직스러운 남자가 되었구나. 카인.”
“...그 전까지는 내가 믿음직스럽지 못했다는 건가?”
“어머? 그걸 내가 꼭 내 입으로 말을 해야 하는 거야?”
“.....”
아니, 사라의 입에서 내 흑역사가 흘러나오는 것만은 죽어도 사양이다. 그런 일이 일어나는 꼴을 가만히 지켜보느니 차라리 테라스 난간에서 투신자살을 하는 편을 택할 것이다.
“...떠보는 것은 여기까지만 해주면 좋겠는데. 설마 말장난이나 하자고 나를 여기까지 불러낸 건가?”
내가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눈썹을 살짝 치켜 올리자 사라 역시 얼굴에서 장난기를 지우고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물론, 아니야. 좋아. 당신을 떠 본 것에 대해서는 사과할게. 하지만 방금 했던 말은 장난으로 한 말이 아니었어. 나름 진심을 담아 한 말이었다고.”
“...진심?”
“그래, 내가 당신에게 말하고자 한 바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였어. 때가 온다면, 나는 에스텔 공작가에 몸을 의탁하고 싶어. 나를, 거두어주었으면 해. 카인.”
“.....”
그 말에 나는 그녀를 다시금 쳐다보았다. 확실히, 아까와는 다르다. 현재 그녀의 두 눈동자에는 굳건한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본인도 인지하고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만, 현재 그녀의 손끝이 아주 약간이나마 파르르 떨리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그 모습은 마치, 비를 흠뻑 맞은 아기 새의 모습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자그마한 몸을 파르르 떨고 있는 그 애처로운 모습은 다른 이로 하여금 그녀를 안아주고 싶다는 충동을 일게 한다.
하지만.
“내가 왜?”
"...뭐?"
일부러 과장된 웃음을 짓는다. 입꼬리를 들어 올려 그녀를 향한 조소를 내비추어 보인다.
“사라. 너도 잘 알고 있을 텐데? 내가 네 제안을 들어줄 이유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
“우리가 약혼 관계라는 것은 말 그대로 고리타분한 옛날이야기에 불과하지 않던가? 너와 나 사이에 파혼이 이루어진 이상, 우리는 남남만도 못한 관계에 지나지 않아.”
그리 말하며 나는 사라를 향해 한 발짝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에게 압박감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허나 그녀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오히려,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저도 모르게 속으로 혀를 차고 말았다. 여전히, 만만찮은 여자였다.
“더군다나, 세르나드 백작가는 에스텔 공작가를 향해 무례를 범하였지. 약혼 관계를 파하자며 그 어떠한 상의도 없이 달랑 편지 한 통만 보내온 것은 세르나드 백작가 쪽이 아니었던가? 이쯤 되면 대단하기까지 하군. 사라 세르나드. 너는 에스텔 공작가가 그리도 만만한가? 네 눈에는 에스텔 공작가가 원하면 언제든 오갈 수 있는 구멍가게로 비춰지는 것인가?”
“.....”
“그런데도 에스텔 공작가에서 너를 받아줘야 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응?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네가 예쁘장하게 생긴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유 하나만으로 널 받아들이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다 생각 되지 않아? 너도 알다시피 에스텔 공작가는 워낙 협소해서 말이야. 당신을 장식해둘만한 공간이 부족하거든.”
내가 빈정거리는 어조로 말을 하자 사라의 눈동자가 약간이지만 변하였다. 그녀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다. 그녀의 어깨가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파르르 떨리는 것을보아하니, 솔직히 좀 심하게 말하지 않았나 후회가 되기도 한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녀에게 싸대기 한 대 정도는 맞을 각오를 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내게 화를 내지도, 나를 한 대 후려 갈기지도 않았다. 그녀가 택한 길은 전혀 다른 길이었다.
사락.
옷깃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사라가 내 쪽으로 한 발짝 다가온다. 이윽고, 서로의 숨결이 닿을 만한 거리에 우리는 서 있었다. 한 발짝 만 더 내딛는다면 입술이 닿을 만한 거리에서, 우리는 서로의 두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문득, 그녀에게서 은은한 장미향이 느껴진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 말았다.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두 눈을 마주하고 있자니, 말 그대로 우리를 제한 모든 세상의 시간이 정지한 듯 여겨졌다.
허나 우리에게서는 로맨틱이라는 단어를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팽팽하게 당겨진 실과 같은 긴장감뿐이었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마주보고 있기만 하였다.
“.....”
백기를 먼저 든 쪽은, 사라였다. 그녀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질문에 대한 답을 하였다.
“...당신의 말이 전부 옳아. 부정은 하지 않겠어. 나 역시 세르나드 백작가의 구성원 중 하나. 비록 나의 의사가 섞여 있지 않았다 해도 내가 세르나드의 성을 달고 있는 이상 그들의 과오는 나에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 생각하니까.”
그리 말하더니 그녀는 나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미안해, 카인. 당신과 에스텔 공작가에, 우리의 무례를 사죄하도록 할게.”
“.....”
“그리고 이건 아까 이야기의 연장선상에서 말을 하는 것인데, 나는 상당히 쓸모가 있을 거야. 보잘 것 없긴 하지만, 셈과 관련해서는 재능이 있다 자부하는 몸이거든. 적어도 화단 옆에 꽂아두는 것보다는 조금 더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해.”
“....”
그건, 나 또한 알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사라 세르나드는 재녀(才女)라 칭하여도 부족함이 없을 만큼 이지적인 여자이니까.
“...그러니 부탁이야. 날 거두어줄 수 있겠니, 카인?”
허나 지금은, 그 따위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사라. 너...”
사라 세르나드가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언제나 도도하며, 스스로에 대한 긍지를 잃지 않던 사라 세르나드가 나를 향해 자존심을 내려놓았다. 마치 장사치라도 된 것 마냥, 스스로의 가치를 재단하고 나에게 자비를 애걸하고 있었다.
후련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왠지 모르지만 기분이 굉장히 더러워졌다. 나는 사라의 이런모습을 보기 위해 그녀를 도발한 것이 아니었다.
“...사라.”
더 이상 그녀를 도발하는 것도, 떠보는 것도 의미가 없었다. 나는 한숨을내쉬며 그녀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대체 왜지? 왜 모든 것을 내팽겨 치면서까지, 에스텔 공작가에 의탁 하려하는 것이지? 그 이유가 너를 지탱하고 있던 모든 것보다 소중했던 것인가, 사라?”
내가 알고 있는 너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카인, 뭔가 착각하고 있구나.”
그녀는 나를 향해 자조적인 웃음을 지어 보인다.
“당신은 아무 것도 몰라. 내가 어떠한 심정으로 지금 이 자리에 선 것인지. 나답게 살아가기 위해 무엇을 포기할 수 있는지. 그리고, 당신이 알고 있던 나의 모습이 얼마나 거짓된 모습인지까지, 전부.”
“.....”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내려놓더라도 내게는 에스텔 공작가로 가야할 이유가 생기고 말았어. 왜냐하면 지금의 에스텔 공작가는, 아니 지금의 당신이라면 세상을 속일 수 있는 가림막이 되어줄 테니까.”
...가림막.
그말에 아까 연회장에서 사라와 있었던 한바탕의 연극이 떠오른다.
“...연회장에서는 일부러 그렇게 행동했던 것인가?”
“맞아. 내가 당신과 아무런 관계가아니라고, 세상 그 어디를 가더라도 당신이 있는 곳에는 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모두에게 알리기 위해. 사라 세르나드라는 여자와, 카인 폰 에스텔이라는 남자를 완전히 분리시켜 버리기 위하여.”
“...왜지? 그런 연극을 하면서까지 스스로의 종적을 감추려고 하는 이유가 대체 뭔데?”
“.....”
사라에게서 침묵이 이어진다. 한참을 기다려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것은 대답하기 싫다는 암묵적인 대답인 것일까.
...아니, 그것이 아니었다. 지금의 침묵은 매우 부자연스러웠다. 지금까지 그녀와 해왔던 침묵과는 결이 다르다는 사실을 눈치챈다.
“사라.”
“...응?”
“눈 감아봐. 잠시만.”
“...설마 키스라도 하려 그러는 건 아니지?”
그런 농담을 던지면서도 사라는 고분고분 눈을 감았다. 나는 그녀의 머리칼을 스러 넘겨준다. 당연하지만 불순한 의도로 이러는 것이 아니다. 그녀의 목 뒤 쪽에 손을 가져다대며 나는 조용히 ‘흐르는 별’을 사용해본다.
“.....”
흐름이 느껴졌다. 심장에 근원을 두며, 혈관을 타고 그녀의 신경계 전체를 잠식하고 있는 검은 저주가. 틀림 없다. 이 검은 저주야 말로, 그녀에게서 언행의 자유를 앗아간 빌어먹을 녀석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상당히 질이 좋지 않은 저주로군. 대충 파악했으니 무리하게 말을 하지 않아도 괜찮아.”
“...카인, 대단한 걸. 왠만한 마법사들도 눈치채지 못하는 저주던데. 못 본 사이에 재주가 좀 늘은 것 같네?”
사라가 신기하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놀라자 나는 너스레를 떨며 답을 하였다.
“원래 인기 있는 남자일수록 감추고 있는 비밀이 많은 법이지.”
“...풉. 뭐야, 그게. 진작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그랬어. 그랬더라면...”
그녀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걸린다.
“...정말 당신을 사랑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르는데.”
그리 말을 하는 사라. 하지만 우리는 이미 너무 늦었다. 우리의 길은 너무나도 엇갈렸다. 우리의 사이는 이미 옛날 옛적에 파경으로 끝을 맺었다. 깨어진 유리를 온전히 붙일 수 없으며, 쏟아지고 만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것 마냥.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 카인. 분위기상 한 번 해본 말에 불과하니까.”
그리말하며 사라는 분위기를 환기시키려고 한 듯 화제를 돌렸다.
“아, 맞다. 내가 당신에게 건네준 약혼반지. 그것도 보수야. 아니면 뇌물이라 생각해도 돼. 에스텔 공작가에 잘 보이려고 바치는 뇌물. 엄청 귀한 거니까 잃어버리면 안 돼?”
“이 반지가 대체 뭐길래 그래?”
“.....”
나의 질문에 침묵으로 대응하는 사라. 그것도 대답할 수 없는 영역에 놓여 있는 질문인가. 뭐, 좋다. 대륙에서 손꼽히는 부를 갖춘 세르나드 백작가의 여인이 직접 ‘귀하다’라고 보증해준 물건이다. 가지고 있어봐야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주머니에 반지를 도로 집어넣으며 그녀를 향해 말을 하였다.
“좋아. 당신이 말하는 때가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에스텔 소공작의 이름으로 당신을 받아들이기로 하지. 대신, 이쪽에도 조건이 있어.”
“조건? 뭔데?”
별 거 아니다.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라 생각된다. 약간의 각오가 필요한, 사소한 일에 불과할 뿐.
“사라 세르나드."
"응."
"나를 위해 죽어줄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