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4. 제도 루멘티움 - 10
“...그럼 저는 이만 물러나보겠사옵니다. 폐하.”
“그리하거라. 오늘은 수고하였다. 아이리스.”
지쳤다. 그녀는 오늘 하루 종일, 연회장에 있던 수많은 귀족들과 일일이 얼굴을 맞대고 환담을 나누었다. 가만히 앉아 다른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 자체는 힘든 일이 아니었지만 마치 인형이라도 된 것 마냥 입가에 미소를 띠운 채 수많은 이들과 아무 의미도 없는 이야기를 나눈다는 일은 그 자체만으로 피로감을 안겨다주는 일이었다.
실로 지치고 지난한 일이었지만, 동시에 그러한 일은 그녀의 의무이기도 하였다. 제국의 황족으로써 태어난 이상, 당연히 치러야 할 대가이기도 했다. 태어나면서부터 고귀한 피를 가지고 태어날수는 있어도, 스스로 고귀한 이가 되기 위해서는 그만한 책임을 져야했다. 그것이, 아이리스 엘 데브하르트라는 여자가 가지고 있는 지론이었다.
아이리스가 지친 표정으로 황제에게서 물러나려 하자 황제는 그녀를 향해 기특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허허, 네가 참으로 믿음직스럽구나. 네가 아니었다면 짐은 참으로 힘들었을 것이다. 고맙다.”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사옵니다. 폐하.”
만약, 그녀가 과거와 같았더라면 황제에게서 그러한 칭찬을 받았다는 사실에 정말 기뻐했을 것이다. 제국의 가장 위에서 만민을 굽어 살피는 이에게서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이 뿌듯했을 지도 모른다.
...허나 이제는 아니었다. 그토록 드높았던 황실에 대한 긍지도,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던 황족의 명예도 이제는 곰팡이가 슬어버린 낡은 비석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대신, 그녀의 마음을 가득 메우고 있는 존재는 어느 한 남자의 모습이었다.
카인 폰 에스텔. 그녀가 알고 있는, 지상에 놓인 가장 찬란한 별.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녀는 별의 반짝임을 동경하게 되었고, 이내 그 별을 손에 넣기를 갈망하게 되었다. 가지고 싶다. 너무도 가지고 싶다. 갈증에 허덕이는사람이 물을 원하는 것 마냥, 그녀 역시 가슴을 가득 메우는 탐욕의 열기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지상에 놓인 별. 자신이 태어난 이후 봐온 것들 중에 가장 아름다웠던 것이다. 그 별을 동경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그 외의 모든 것은 무채색으로 변하였다. 아버지의 인정도, 황족으로써의 긍지도. 제국의 황녀라는 명예도. ...해서는 아니 될 생각이긴 하지만, 제국 그 자체마저도.
불현 듯, 머릿속에 그의 얼굴이 떠오른다. 자신을 마주하였을 때 크게 놀란 그의 얼굴은, 참으로 귀여웠었다. 아마, 자신이 그러한 드레스를 입었기에 그리 놀란 것이 틀림없었겠지-
“후훗.”
오늘, 난생 처음으로 그러한 드레스를 입어 보았다. 다른 사내들 앞에서 자신의 맨 살을 드러내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부끄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을 봐주었으면 하는 감정이 더욱 컸기에 그런 드레스를 입어보았다.
...아아, 그러고 보니 이러한 말이 떠오른다. 남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고, 여자는 자신을 기쁘게 해주는 남자를 위해 화장을 한다 했던가.
과연, 그 말 대로였다. 그가 자신을 보며 눈이 커졌을 때,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부끄러움을 참아가며 이런 옷을 입은 보람이 있다 생각하였다. 그 이후로 시간이 꽤나 경과했지만, 그 뿌듯한 감정은 아직도 그녀의 마음속을 한가득 메우고 있었다. 자신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마법에 걸리고 만 것이 틀림없다-
지친 몸을 이끌고 아이리스는 자신의 방에 돌아왔다. 그녀는 방의 한 가운데 놓여 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오늘 하루 피곤했던 심신을 잠시 내려놓았다. 허나 그것도 잠시, 그녀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음을 깨닫는다.
“...크리스.”
그녀가 입술을 달싹이는 것과 동시에 방 한 쪽 구석에서 기사 한 명이 모습을 드러낸다. 황녀의 호위기사, 크리스였다. 아이리스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방금 전, 사랑에 허덕이던 한 명의 여인은 온데 간데 사라지고 없었다. 지금, 이 방 안에 존재하는 사람은 냉엄한 얼굴로 제국의 신민들을 이끌고자 하는 황녀, 아이리스 엘 데브하르트 뿐이었다.
“내 그대에게 명하였었지. 오늘 하루 종일, 카인 폰 에스텔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한 후 나에게 보고를 해 달라고.”
끄덕.
아이리스의 말에 크리스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어디 한 번 들어보도록 할까. 내 얌전히 경청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우선, 오늘 하루 카인 폰 에스텔의 동향에 대해 설명을 드리자면...”
그 때였다. 아이리스가 크리스를 향해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은 것이.
“...존칭.”
“...예?”
“존칭을 붙이거라. 그는 네가 하대해도 될 만한 사내가 아니니라.”
그리 말을 하는 아이리스의 얼굴에는 반론 따위 듣지 않겠다는 의사가 서려있었다.
“...죄송합니다.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크리스 또한 아이리스의 말에 반의를 표할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그는 황녀의 검. 그녀의 뜻을 대변하며 그녀의 의지를 대행하는 자였다. 그녀가 그렇다 말하면, 그는 그리 행할 뿐. 그것뿐인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다.
“카인님의 오늘 하루 행적을 살펴본 결과, 별다른 점은 없었습니다. 루시안 폰 투르니젠과 결투를 벌였다는 것이 특이 사항이라면 특이 사항이기는 하지만, 그 외에는 특이한 점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다만...”
“다만?”
크리스는 잠시 말을 멈추고 이것이 황녀에게 보고해야할 사항인지 아닌지 잠시 머뭇거리고 말았다. 지금부터 그가 꺼낼 이야기는 황녀의 수호기사인 크리스조차 말을 아껴야할 신중한 사항이었다. 자신의 입에서 나올 이야기가 어떠한 평지풍파를 일으킬지 모르는 만큼, 더더욱 그러하였다. 허나 고민은 짧았다. 이윽고, 크리스의 입이 열리고 말았다.
“...어디까지나 이건 제 추측입니다만, 카인님께서는 루시안 폰 투르니젠과의 결투 중에 ‘흐르는 별’을 사용한 것 같습니다.”
“....”
순간, 방 안에 적막만이 맴돌았다. 아이리스도 그렇고, 크리스도 그렇고, 황실의 직계가 아닌 자가 ‘흐르는 별’을 사용했다는 것이 어떠한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말, 상세히 읊어 보거라.”
아이리스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아니, 굳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녀의 표정 속에 깃들어 있는 저 감정은, 놀라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경악 또한 아니었다. 굳이 분류를 하자면 저 표정은-
“어서, 말을 해보거라. 어서!”
계속되는 아이리스의 재촉에, 크리스의 입이 열리고 만다.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사실이지만, 루시안 폰 투르니젠은 마스터의 경지에 도달해있었습니다. 그가 결투 중에 자신이 마스터임을 밝히고 오러를 사용하자, 카인 님께서는...”
크리스는 결투 당시, 자신이 본 광경을 다시 한 번 떠올리며 온 몸을 부르르 떨고 말았다. 연회장을 가득 매운 오러의 폭풍, 그 안에 담겨 있던 끔찍한 정도의 파괴력. 그리고...
“...상대방의 오러의 흐름을 비틀고, 검을 통로로 삼아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 끝에, 자신의 힘을 더하여 루시안 폰 투르니젠의 공격을 본인에게 고스란히 되돌려주기 까지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로, 그러한 종류의 무(武)를 구사할 수 있는 검술은 오직 하나, 흐르는 별뿐입니다.”
크리스는 황녀의 호위기사였기에, 황녀가 흐르는 별을 수련하는 모습을 몇 번 인가 지켜본 적이 있었다. 그렇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당시 아이리스가 보여준 모습과, 카인이 보여준 모습은 흡사 거울을 비추는 것과 같이 똑같았다. 마치, 둘 중 한 명이 다른 한 쪽의 스승이라도 되는 것 마냥.
...그렇기에 모순이다. 카인 폰 에스텔은, 도대체 어떻게 흐르는 별을 익힌 것일까? 도대체 어떻게, 아이리스와 그리도 흡사한 모습으로 흐르는 별을 구사할 수 있는 것인가. 두 남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알려져 있는데, 대체 어떻게?
크리스가 도무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와 마주하여 머리를 싸매고 있을 무렵, 아이리스는 크리스의 말을 들으며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짓고 말았다. 정말, 대담한 것인지 눈치가 없는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는 남자이다. 나중에 만나면 따끔하게 한 소리를 해줘야 할 것 같았다.
“...카인. 어지간히도 조심성이 없구나. 내 반드시 타인의 눈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만 사용하라 하였거늘.”
쓴웃음을 머금으며 크리스가 이해할 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아이리스는 이내 크리스를 힐끗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그 사실을 나 말고 다른 이에게 말하지는 않았겠지?”
“네.”
“좋다. 그 사실은 당분간 함구하고 있도록.”
참고로 아이리스가 ‘함구’하라는 말은, 어느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밝히지 말라는 뜻이었다. 심지어, 황제에게까지도.
크리스가 아이리스의 말에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뭔가 고심에 빠져 무언가를 한참 생각하는 듯 하더니 이내 크리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크리스, 네가 해주어야 할 일이 한 가지 더 있다.”
“...하명하십시오.”
“법황국의 아리엘 티에르, 카스타나 후작가의 비앙카 델 카스타나, 그리고 세계수의 수호자 키리에 엘 데나리스.”
그녀는 피식하고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 계집들의 지난 두 달 간의 행적을 조사해 오거라. 사소한 것도 빼먹지 말고 남김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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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러운 이야기이지만, 사라와 만나기로 약속한 서쪽 테라스는 무서울 정도로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한산한 장소였다. 서쪽 테라스라는 장소가 연회장과 상당히 거리가 떨어져 있으며, 황궁 내의 모든 사용인과 귀족들이 현재 연회장에 모여 있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그러하였다. 뭐, 그런 만큼 조용하게 이야기를 나누기에 이런 곳보다 더 나은 장소는 찾기 힘들 테지만.
“...사라, 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그녀는 대체 왜 이런 번거로운 수단을 사용하면서까지 나를만나려 하는 것일까. 다른 사람들의 눈을 속여 가며, 그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한 편의 연극까지 펼쳐가며 나와 단 둘이 만나려고 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
주머니에 들어 있던, 그녀가 내게 건네준 약혼반지를 살짝 어루만져본다. 반지에서 느껴지는 감촉은 여전히 낯설기 그지없다. 나는 약혼반지를 조심스레 매만지며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짓고 말았다. 난생 처음 보는 반지를 약혼반지라며 건넨 사라나, 그녀의 의도를 확인하기 위해 이곳까지 발걸음을 옮긴 나나 별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나는 어느새 서쪽 테라스로 통하는 문 앞에 도착하고 말았다. 망설임은 없었다. 나는 아무런 주저도 없이 문을 열었다.
끼익-
테라스로 통하는 문은, 쉽게 열렸다. 문을 열자마자 내가 느낀 것은, 밤바람이 꽤나 쌀쌀하다는 것이었다. 고개를 들어 앞을 쳐다 보았다. 테라스의 난간, 그곳에서 사라는 달빛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때마침,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에 흩날리는 그녀의 노을빛 머리카락이 눈에 밟힌다.
“...사라.”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를 부른다. 그러자 그녀는 서서히 나를 돌아보았다.
“...와주었구나. 안 올 줄 알았는데.”
“네가 와 달라 했으니까.”
“그러니까 하는 말이었어. 네가 오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 생각했거든.”
그리 말하며 사라는 나를 향해 살포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예나 지금이나, 사라 세르나드라는 여자는 정말 지독하게 아름다웠다. 그녀에 대한 모든 마음을 접었다고 생각한 나조차, 순간 마음이 동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정말 찰나의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가 루시안 폰 투르니젠이란 애송이와 결혼식장에서 찐한 키스를 나누며 혀가 왔다갔다하는 광경을 나에게 보여준 이후, 나는 그녀에 대한 모든 감정을 내려놓았단 말이다. 나는 일부러 평소보다 더욱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빠르게 본론으로 들어가면 좋겠는데. 무슨 용건으로 날 부른 거지?”
내 질문에 사라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풋 하며 웃음을 지어 보인다.
“변했구나, 카인. 그것도 엄청. 한층 더 어른스러워진 것 같아. 사내들이란 죽어서도 철이 들지 않는 생물이라 생각했는데, 오늘 그 생각을 수정해야겠네.”
그리 말하며 사라는 등을 돌려 나에게 사뿐사뿐 걸어왔다. 그 모습은 마치, 한 마리의 나비가 나를 향해 날아드는 장면을 연상시켰다.
“뻔뻔스럽긴 하지만... 네게 부탁이 있어서 그래.”
“...부탁?”
“응.”
그리 말하며 사라는 실로 처연하기가 이를 데 없는 미소를 지으며 나를 향해 말을 하였다.
“카인, 날 거두어 주지 않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