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4. 제도 루멘티움 - 09
언젠가, 책에서 이러한 구절을 본 기억이 있다. 인생이란 선택의 연속이라 했던가. 그 말 대로이다. 사람은, 비록 자신이 태어날 국가이나 부모를 선택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선택할 권리가 있었다.
예를 들어 초콜릿 아이스크림 위에 개똥같은 민트를 발라 먹건, 샌드위치 위에 파인애플을 곁들여 먹건 간에 그것은 그 사람의 자유가 아니겠는가? 허나 동시에, 다른 사람 또한 그 사람의 자유에 대해 못마땅해 할 권리가 있었다. 그러니까, 어떤 놈의 주둥이에 민트가 들어가는 것까지는 간섭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민트향을 풍기는 그 자식을 향해 코를 움켜잡고 인상을 찡그릴 자유까지는 있다는 말이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공공장소에서 민트 냄새를 풍기는 놈의 뒤통수를 한 대 후려갈길 자유라던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선택은 자유이지만, 그 선택으로부터 나오는 결과는 오롯이 자신이 책임져야할 몫이라고. 내가 이러한 이치를 깨달은 것은 대략 다섯 살 무렵이었다. 상당히 오래 전의 일이지만 당시 벌어진 일은 지금까지도 똑똑히 기억이 난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와 엘레나를 세워 놓고 이러한 질문을 던지셨다.
‘아빠가 좋으니, 엄마가 좋으니?’
나는 당시 다섯 살에 불과하였지만 영특한 지혜의 소유자이기도 하였기에 ‘둘 다 좋아요.’ 라던가 ‘엄빠가 좋아요.’ 같은 사탕발림으로 이 순간을 모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나와 엘레나가 선택한 길은 하나였다. 대세를 따라 더 많은 이익을 주는 곳에 편승을 하는 것.
그렇게 모종의 거래가 오고갔다. 나는 새로운 장난감을, 엘레나는 새로운 곰인형을 받게 되었으며, 그 대가로 아버지는 가장의 위엄을 지켜낼 수 있게 되었다. 허나 슬프게도 아버지의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다. 그 사실을 눈치 채신 어머니께서 아버지가 숨겨둔 비상금을 압수해 가셨기 때문에.
내가 갑자기 왜 이런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 것이냐면 현재의 내가 처한 상황이 그에 딱 걸맞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아리엘의 편을 들어줄 것인지, 아니면 황녀의 편을 들어줄 것인지.
허나 이번에는 어느 누구를 선택하더라도 내게 남겨진 희망 따위는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어느 한 쪽을 선택하면, 다른 한 쪽은 그 자리에서 나를 즉시 회쳐버릴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제 3의 선택지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내가 저 여자들과 1년간 함께 지내보았던 지라 잘 알고 있는데, 저 치들은 내가 뒷구멍으로 빠져 나가는 것을 허락해줄 위인들이 아니었다. 내가 이 자리를 모면하기 위해 어물어물 답변을 회피하는 순간, 나를 잡아 족치기 위해 맹수 같은 아가리를 쩍 벌린다면 몰라도.
“.....”
내 좌측에서는 아리엘, 우측에서는 황녀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리엘은 나를 보며 싱글벙글 웃고 있었으며 황녀는 미간을 곤두세운 채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둘의 표정은 극과 극을 달리고 있었지만 그 두 사람에게서 한 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두 사람의 시선이 나에게서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후후, 카인. 어서 대답을 해주세요. 아주 간단한 답변에 불과한데, 뭘 이리 뜸을 들이고 있는 것인가요?”
“카인 경. 어서 입을 열어 답변을 해주게나. 언제까지 나를 기다리게 할 심산인가?”
‘...나보고 뭐 어쩌라고.’
머릿속에서 위험경보가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 자리에서 혓바닥을 잘못 놀렸다가는 물리적으로 반 토막이 날지도 모른다는 강렬한 예감이 찾아들었다. 만일 내가 이 빌어먹을 연회장에서 살아 나가게 된다면 가장 먼저 신전을 찾아가겠노라고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 하였다. 요즘 들어 계속 엿 같은 일만 발생하는 것이, 아무래도 재수에 옴이 붙은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오늘 하루만 하더라도 심장을 벌렁벌렁 뛰게 만드는 일이 대체 몇 번이나 일어난 것인지 셀 수가 없을 정도란 말이다.
“...카, 카인님...”
실로 대범하기 이를 데 없는 아리아조차 지금 이 상황이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몸을 부들부들 떨며 나의 옷깃을 살며시 붙잡았다. 나는 그러한 아리아의 모습을 보며 그녀가 느끼고 있을 심정에 대해 약간이지만 공감해버리고 말았다. 하기사, 초인적인 정신력의 소유자인 회귀자 카인 폰 에스텔조차 기절해버리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아내고 있는 상황이다. 기억상실증에 걸려 평범한 소녀가 되어버린 아리아가 이 상황을 버티어 낼 리는 만무한 노릇이겠지.
"...하아."
나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며 온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아리아의 손을 살포시 잡아 주었다. 아리아가 약간이나마 진정을 해주면 좋겠다는, 내 딴에는 정말이지 순수한 의도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그것이 화약고에 불을 지르는 행위가 될 것이라는 상상도 하지 못하였단 말이다.
“저기요, 아가씨. 그 손, 카인에게서 떼면 좋겠군요.”
도화선을 당긴 이는 다름 아닌 아리엘이었다. 왠지 모르게 날이 서 있는 어투로 말을 하는 그녀의 시선은, 아리아의 손을 꼭 붙들고 있는 내 손을 향하고 있었다.
“...네?”
아리아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시선으로 아리엘을 쳐다보자 그녀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아리아에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카인은 아직 환자입니다. 방금 전, 그렇게 큰 부상을 입은 사람이에요. 본인이 힘들다고 해서 환자나 다름없는 사람에게 기댄다는 것은 커다란 민폐가 아닐까요?”
그리 말을 하는 아리엘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걸치고 있었지만 눈만은 웃지 않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무서워 보였다.
“.....”
그리고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나는 황당하기가 말로 이를 데가 없었다.
‘...저 여자가 진짜 뭘 잘못 먹었나.’
이곳에 오기 전에 뭔가 기분이 더러운 일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오늘따라 아리엘은 투견이라도 되는 것 마냥 사방을 물어뜯고 있었다. 원정대에서도 싸움은커녕 다른 사람과의 말다툼 한 번 없었던 여자가 오늘은 주변에 보이는 모든 사람에게 시비를 걸지 못해 환장한 사람처럼 구는 걸까.
결정적으로, 아리아가 내 손을 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리아의 손을 잡아 주고 있었다. 시비를 걸 상대를 잘못 판단하였다는 말이다. 그런데 아리엘은 그러한 것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마냥 아리아만을 질책하고 있었다.
“...흠. 이번만큼은 저 여자의 의견에 찬성일세. 결혼도, 약혼도 하지 않은 두 남녀가 그리 찰싹 달라붙어 있는 모습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군.”
방금 전까지 아리엘과 으르렁 거리기 바빴던 황녀조차 갑자기 저쪽에 붙어 아리아를 공격한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황녀 또한 아리아가 내 옆에 딱 달라붙어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나보다.
“.....”
젠장, 신경과민증에 걸린 여자들 같으니.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아리아의 손을 놓아주려고 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쪽의 행동이 그토록 아니꼽게 여겨진다는데 힘이 없는 쪽이 수그려야지 뭐 어떻게 하겠는가.
헌데 그 때였다. 내가 아리아에게서 손을 놓으려고 한 그 순간, 아리아의 눈빛이 사납게 변하였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와들와들 떨던 병아리 같은 눈빛에서 전의(戰意)를 갖춘 강아지 정도의 눈빛으로 변하였다. 그래봤자 눈망울이 워낙 똘망똘망해서 무섭다고 생각이 되지는 않았지만. 아리아는 저들을 향해 도발이라도 하듯 내 손을 꽉 붙잡으며 아리엘을 향해 소리쳤다.
“아줌마가 뭔데 그런 소리를 하시는 거에요? 카인님께 뭐라 그러지 마세요!”
눈을 부릅뜨며 아리엘을 똑바로 쳐다보는 아리아. 그 기백은 나로 하여금, 일찍이 마차를 향해 앞발을 치켜 올렸다는 사마귀를 연상케 하였다.
“...네?”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치고 들어온 기습이었는지, 순간 아리엘의 얼굴이 쩍하고 갈라지고 말았다.
‘맙소사.’
나는 아리엘의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회귀 전의 시간까지 포함하여 아리엘과 알고 지낸 지 꽤나 시간이 흘렀지만, 저 여자의 얼굴이 미소 이외의 다른 표정을 짓고 있는 장면은 처음 본다. 단 한 마디의 도발로 아리엘에게서 다채로운 표정을 이끌어 내다니. 역시 아리아는 나의 그릇으로는 측정할 수 없는 엄청난 거물임이 분명하다.
“아하하하! 이거 걸작이구만. 아줌마라니!”
옆에서 시누이마냥 얄밉게 웃음을 터트리는 황녀 탓인지 아리엘의 표정은 더욱 딱딱하게 굳어져 간다. 허나 그것도 잠시, 이내 안색을 회복한 아리엘은 황녀를 향해 카운터펀치를 날렸다.
“...흥, 제가 알기로는 황녀님의 나이는 저보다 1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황녀님께서는 그리 웃을 처지가 아니시지 않나요?”
참고로 황녀의 나이는 나와 동갑이며 아리엘의 나이는 우리보다 1살 적으니 그녀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지금 뭐라 하였는가? 그 말은 대체 무슨 의미로 꺼낸 것이지?”
“어머, 그거야 황녀님께서 더욱 잘 알고 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카인님. 빨리 여기서 나가요. 여기 있으면 기분이 이상해지는 것 같아요.”
“가기는 어딜 간다는 말인가? 아직 질문에 대한 답도 하지 않았거늘!”
"아, 맞다. 그러고보니 카인이 아직 대답을 하지 않았었네요. 제가 깜빡했군요. 미안해요, 카인."
“.....”
진짜 개판이다. 아리엘과 황녀가 으르렁거리는 것도 모자라 아리아까지 끼어들어 삼파전을 벌이고 있다니. 저만치서 아무 생각 없이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귀족들은 알고 있을까. 이들 셋이 본격적으로 맞장을 뜨기 시작한다면, 황궁이 문제가 아니라 제도 전체가 지우개로 문지르듯 흔적도 없이 박살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여신님. 저 좀 살려주십시오. 제발.’
나는 저 셋이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는 끔찍한 광경을 쳐다보며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아무래도 내가 오늘 이곳에서 살아서 나가기 위해서는 여신님의 기적이 필수 인 것 같다. 나는 갑자기 들끓어오르는 신앙심을 토대로 하여, 여신을 향해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제발, 목숨만은 부지하게 해주십시오, 여신님-
그런데, 그 때. 기적이 일어났다. 정말로.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귀족들의 인파가 썰물처럼 갈라진다. 이 자리에 있던 모든 귀족들은 전부 고개를 처박은 채 그가 이 자리에 온 것을 경배하기만 할 뿐이었다.
연회장에 흐르는 그 적막에, 세 여인의 삼파전 또한 갑작스레 소강상태로 변하였다.
그렇다. 바로 황제가 등장한 것이었다.
터벅, 터벅.
여유롭게 귀족들 사이를 제치며 이곳으로 걸어온 황제는 한창 삼파전을 벌이고 있던 여인들을 흥미롭다는 눈길로 쳐다보더니, 이내 황녀를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무슨 일이냐, 아이리스. 네가 언성을 높이다니, 참으로 보기 드문 광경이구나.”
약간 짓궃게까지 들리는 듯한 그 질문에 황녀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무 것도 아니옵니다. 폐하. 그저, 약간의 의견 충돌이 있었던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실로 하잘 것 없는 일에 불과하오니 폐하께서 신경 쓰실 만한 일은 아니라 생각됩니다.”
그리 말을 하며 황녀는 아리아와 아리엘을 힐끗 쳐다보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 마냥 시치미를 뚝 떼었다. 그 가증스러움에, 나는 저절로 몸을 부르르 떨고 말았다.
“흠, 그런가.”
황제는 그녀의 말에 별 흥미가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이번에는 내 쪽을 쳐다본다. 황제의 입가에는 나를 향한 완연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제 보니 황제의 용건은 황녀가 아니라 나에게 있었던 것이 분명해 보였다.
“카인 경, 짐이 이곳으로 오는 와중에 아주 흥미로운 소식을 하나 접하였다네. 결투를 벌여, 투르니젠 공작가의 후계자인 루시안 경을 쓰러뜨렸다지?”
그 재미난 유흥거리를 자기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해 매우 안타깝다는 식의 어조였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폐하.”
“운이라니, 그럴 리가 없지. 세상 천지에 마스터의 경지에 도달한 자를 운으로 꺾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그리 껄껄 웃더니 황제는 아직도 바닥에서 드르렁 중인 루시안을 슬쩍 돌아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약관의 나이에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루시안 경과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자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카인 경. 제국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그대들의 존재는 실로 홍복 그 자체가 아닐 수 없도다.”
그리 말하며 황제는 나의 어깨를 탁탁 두드려주었다. 이 양반은 또 왜 이러는 것일까. 자기 잘난 맛에 사는 황제가 남을 칭찬하다니. 뒷구멍으로 어떤 무시무시한 흉계를 꾸미고 있기에다른 사람들 앞에서 나를 이리도 띄워주는 것일까?
“그럼 따라 오거라. 아이리스. 네가 오늘 짐과 함께 해야 할 일이 아주 많단다.”
그리 말하며 황제가 등을 돌린다. 황녀 또한 순순히 황제의 뒤를 따라나선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살았다.’
살았다. 황제가 시기적절하게 이곳을 찾아와서, 진짜로 살았다. 황제 저 인간은 알고 있을까. 자신이 이곳에 제 때 도착하지 않았더라면, 오늘 제도는 먼지 하나 남기지 않고 공중분해 되었을 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사실을-
그렇게 내가 목숨을 부지하였다는 생각에 희희낙락하고 있자니 황녀는 나를 스쳐가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이리 속삭였다.
“...다음에 볼 때는 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았으면 좋겠군. 카인 경. 기대하고 있겠네.”
“.....”
아무래도 한동안 꿀잠을 자는 것은 물 건너 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