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9화 〉4. 제도 루멘티움 - 08 (19/201)



〈 19화 〉4. 제도 루멘티움 - 08

그렇게, 승부가 갈렸다. 예상했던 대로다. 루시안과 나의 결투는, 최종적으로 나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하아, 하아.”

허나 상처뿐인 승리였다. 저런 거만한 도련님 정도라면,  손으로 가지고 놀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결투를 받아들였었다. 그런데 루시안  새끼가 설마 마스터의경지에 도달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해보지 못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자기 자신에 대한 과신은 저 녀석이 아니라 내 쪽에서 하고 있던 것인가.

“...개자식, 어디서 힘을 숨기고 지랄이야. 그런 건, 유행이 지나간 지 오래라고.”

질 뻔했다. 아니, 사실상 패배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내가 녀석에게 승리를 할 수 있었던 요인은 오직 하나, 녀석이 방심하였기 때문이다.

“.....”

루시안은, 나를 향해 이리 말하였다. 너는 강하다. 그러니 방심하지 않겠다. 자신이  수 있는 한 모든 전력을 사용해 너를 상대하겠다, 라고. 그리고 그것은 허세가 아니었다. 루시안은 자신의 말을 철저히 이행하였다.

하지만 최후의 순간, 녀석은 결국 방심을 해버리고 말았다. 내 오른발을 아작 낸 것만으로 승부가 결정났다 단정 지은 후, 자신이 사용할  있는 최강의 기술을 써서 나를 끝내버리려고 한 것이다. 녀석 딴에는, 기사다운 낭만이 담겨 있는 결착을 맺고 싶었던 것이 분명하겠지. 그리고, 바로 그것이 패인이었다.

“...병신 같은 자식. 멋이나 부리긴.”

녀석은 흐르는 별이 어떠한 원리의 검술인지 전혀 파악하지 못한 주제에 무작정 커다란 기술을 사용했다. 그리고 방심의 대가는 참혹하였다. 녀석의 기술은 나에게 역이용 당하였고, 저렇게 땅바닥에 드러눕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내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천운에 가까운 일이었다. 다시  번 맞붙는다면, 이런 결과가 나오지는 않겠지.

“카인 님!”

그 때였다. 저만치서 결투를 지켜보고 있던 아리아가 내게 쪼르르 달려온 것이.

“...아리아.”

나는 나를 향해 쪼르르 달려오는 아리아를 웃으면서 맞이해주려고 했다. 결투 전, 나를 향해 다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던 아리아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생각보다 걱정을 많이 시킨 것이 분명할 테니, 잔소리를 들을 각오를 해두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그 때였다.

피잉-

“커, 허-”

저도 모르게 다리가 풀린다. 순간적이었지만, 정신이 아찔해지고말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카인님!”

아리아가 금방이라도 울  같은 표정으로 나에게 달려오는 모습이 보인다. 나의 코와 입에서 피가 끝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런.”

그것은, 단련되지 않은 몸으로 분에 넘치는 힘을 다룬 대가였다.

“카인님! 괜찮으세요? 어디 크게 다치신 거 아니에요?”

“...아리아, 난 괜찮아. 이건 그냥, 아까 저 자식한테 한  얻어맞아서 그런 거야.”

그러니까 저기 누워있는  녀석을 한 대 걷어차 달라며 농담이라도 던지려 했지만 상황은 그리 여유롭게 돌아가지 않았다. 사실은 몸 상태가 전혀 괜찮지 않았다. 아까부터 시야가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아리아를 향해 제대로 초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이대로라면, 저기 땅바닥에서 드르렁하고 있는 루시안 녀석을 욕할 처지가 되지 못하리라.

“...하아, 아리아. 미안하지만 저기 칼 들고 서 있는 험상궂은 아저씨들에게 가서 의사 한 명만 불러달라고...”

“아니요,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군요.”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가 나의 말을 중간에 끊는다. 내가 뭐라고 말할 틈도 없이 누군가가 나의 등 위에 손을 올려놓는다.

[여신께서는 자신을 경외하는 자에게 스스로의 언약을 비추시노라.]

파아앗-

성언(聖言)이 읊어진다. 나의  위에 올려진 손을 중심으로 하여, 성스러운 빛이 뿜어져 나와 나를 감싸 안는다.  순간, 빛에서 나오는 따스한 기운이 내 전신을 가득 메우기 시작한다.

“...아아.”

체내의 남아있던 모든 상처가 빠른 속도로 아물어가기 시작한다. 아니, 단순히 상처가 아물어가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것은마치 시계태엽을 거꾸로 감은 듯한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쩍하고 입을 벌리고 있던 상처가 순식간에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되는 모습은, 그것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외감을 품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맙소사.’

실로 엄청난 신성력이었다. 이 정도 신성력이라면, 10년 후의 성녀와도 맞먹어볼 만한 정도였다. 세상에 이런 대단한 신성력을 가진 사람이 성녀 말고  있었단 말인가?

“치유가 어느 정도 이루어진  같군요. 손발을 움직여 보세요.”

나는  말대로 방금 전 루시안에게 짓밟힌 오른발을 움직여보았다.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현재 나의  상태는 루시안과 결투를 치루기 직전의 그것과 동일하였다.

“몸은  괜찮나요? 카인?”

“아, 네 감사합...”

등을 돌려 뒤를 돌아본 순간, 내 얼굴은 저도 모르게 굳어지고 말았다. 이곳에서만큼은 절대로 마주할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사람이, 내  뒤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얼굴은 10년 뒤와 한 치의 변화도 없이 똑같았다. 허리까지 닿는 연한 보랏빛 머리, 에메랄드를 박아 넣은 듯한 아름다운 두 눈동자, 화사하면서도 단정한 이목구비. ...그리고 도저히  속내를 파악할 수가 없는, 의미심장한 미소. 확실했다. 그녀는, 내가 잘 알고 있는 사람이 틀림없었다.

나는 저도 모르게 얼간이 같은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고 말았다.

“...성녀님?”



****



성녀, 아리엘 티에르.

인류 역사상 가장 강대한 신성력을 가지고 태어난, 여신의 현신이라 불린 여자. 여신에 대한 믿음이 하늘 끝에 닿아, 여신께서 직접 자신의 아이임을 입증하는 ‘권능’을 하사해 준  번째 종. 동시에, 교단이 자랑하는 최고의 성직자이자 최강의 방패.

그녀가 여신으로부터 하사 받은 권능인 ‘휘광의 수호’는 순간적으로 그녀를 현세에서 유리(遊離) 시킴으로서 모든 삿된 이치를 튕겨낸다 전해진다. 그리고 나는 그 말에   치의 과장도 섞여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마녀와의 최종결전 당시, 성녀가 펼친 ‘휘광의 수호’는 마녀가 쏘아낸 절대적인 공격에 대항해 몇 번이고 원정대의 목숨을 부지하게 만들어 준 일등 공신 같은 존재였으니까.

허나 그것은 전부 미래의 이야기. 내가 알기로 현 시간대의 그녀는 특유의 엄청난 신성력으로 나름 명성을 얻고 있기는 하였지만 아직 ‘성녀’의 호칭을 부여받지는 못하였다. 또한, 그녀는 현재 교단의 본산지인 법황국에 머무르고 있다 알고 있었는데 어찌하여 이런 곳에모습을 드러낸 것인가?

내가 그녀를 보며 경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성녀는 얼굴에 느긋한 미소를 띠어보였다.

“어머, 성녀라니. 제게 있어서는 너무 과분한 호칭이라 생각 되는군요. 저는 그저 교단에 있는 수많은 성직자 중 한 명에 불과한걸요. 아, 제 이름은 아리엘 티에르라고 해요. 그냥, 아리엘이라 불러주세요.”

“...죄송합니다. 잠시 헷갈린  같군요. 성... 아니, 아리엘.”

“후후, 농담이에요. 카인이 죄송할 것은 하나도 없는걸요. 그러니 그렇게 고개를 숙일 필요는 없답니다.”

그리 말하며 아리엘은 실로 자애로운 미소를 띠며 나를 위로해 주었다. 다른 사람이 본다면 그녀의 온화하고 따스한 마음씨에 감동을 하며 온 몸을 전율하였을 테지만 나는 아니었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아리엘이라는 여자가 왠지 모르게 껄끄럽게 여겨졌다. 저 느긋하고 온화한 미소가, 나에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로만 비추어질 뿐이었다.

“저기, 아리엘. 한 가지 질문을 해도 괜찮겠습니까?”

“예, 무엇이든지요. 카인.”

나는 나를 쳐다보며 싱글벙글 웃고만 있는 아리엘을 향해 질문을 던져본다.

“어째서 이런 곳에 계신 것입니까? 소문에 의하면 아리엘은 법황국에서  나오지 않는다 들었습니다만...”

“예? 카인은 제가 이곳에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가요?”

그리 말하며 성녀는 고개를 살짝 갸우뚱하였다.

“아뇨.. 그게 아니라...”

이상해서이다. 내가 알고 있는 성녀 아리엘은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며 조용하고 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고요하게 지내는 것을 좋아하는, 실로 재미없는 사람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여자였다.

시끌벅적하고 사람이 많은 연회장과 아리엘이라는 조합은 초콜릿 위에 민트를 올려놓은 것과 동일하다 생각된다. 그러니까 엄청나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허나 미래에서 얻은 지식을 떠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이미 뱉어놓은 말을 어떻게 해서든 수습해보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 때였다.

“말 잘했네, 카인 경. 그것은 나 역시 묻고 싶었던 말이다. 나도 그녀가 이곳에 있는 이유가 매우 궁금하던 찰나였거든.”

순간,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내 몸이 저절로 딱딱하게 굳어버린다. 저 여자는   등장하자마자 다른 사람에게 시비를 거는 것인가? 나는 순간적으로 뻣뻣해진 모가지를 가까스로 돌려 황녀 쪽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연회장에서 성녀를 본 것과는 다른 의미로 벙찌고 말았다.

‘맙소사.’

그 황녀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현재 그녀가 입고 있는 것은, 눈과 같이 새하얀 색의 드레스였다. 드레스의 가슴 부분은 깊게 파여 있었으며 상체 부분이 몸에 달라붙어 있어 그녀의 아름다운 곡선을 은은하게 부각시키고 있는 중이었다. 또한 허리에 매여 있는 검은색 요대는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확실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마치 한 떨기의 꽃과 같은 화려함에, 나는 저도 모르게 넋이 나가 황녀를 쳐다보고 말았다.

‘...얘는 또 왜 이러는 거야.’

좋으나 싫으나 지난 1년간 얼굴을 부대꼈기에 잘 알고있다. 황녀는, 노출 같은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다. 원정 내내 온 몸을 어찌나 꽁꽁 싸매고 다니던지 나는 그녀의 맨 살이라고는 얼굴과 손 밖에 보지 못했을 정도이다. 그런데 그런 여자가 저런 드레스를 입다니? 드디어 내일 이 빌어먹을 세상이 망한다는 징조인 것인가?

그렇게 내가 세상의 종말에 대한 심오한 고찰을 하고 있자니, 주변에 있는 귀족 들 또한 황녀를 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들은 그 표정을 속으로 감추고 황녀를 향해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린다.

“제국의 달을 뵙습니다.”

“제국의 달을 뵙습니다.”

그렇게 연회장에 있는 모든 사람이 황녀를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였다. 헌데 건방지게도, 지금 이 자리에서 황녀를 향해 허리를 숙이지 않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사람의 정체란, 다름아닌 아리엘이었다. 아리엘은 입가에 걸친 여유로운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로, 황녀의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보고 있기만 할 뿐이었다.

“...호오?”

가소롭다는  아리엘을 쳐다보는 황녀. 그리고 그런 황녀를 향해 아리엘 역시 눈을 돌리거나 하지 않았다. 그렇게, 황녀와 아리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힌다. 두 여자 모두, 서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

“...건방지군. 아리엘 티에르. 소문으로 전해 듣기에는 만민을 굽어 살피는 자애로운 마음씨를 가지고 있다 들었는데, 실제로 보니 소문이 많이 와전된 것이 아닌가 하는군. 그토록 뻣뻣한 허리를 가지고 타인을 위한 봉사를 행할 수가 있겠는가?”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저희는 이미 여신께 모든 것을 바친 이들입니다. 만민을 굽어 살핀다는 말은, 어느 특정 사람 하나만을 위해 허리를 굽히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는 것도 모르시는 건가요?”

그 말에 황녀의 눈썹이 치켜 올라간다. 사실, 아리엘의 말이 옳긴 하다. 원칙상, 성직자들은 신을 섬기는 몸이기에 인세의 권력자에게 허리를 굽히지 않아도 된다. 그래, 원칙상으로는. 실제로 그 원칙을 실행하는 성직자는 거의 없었다. 그 말인 즉슨, 권력자와 한 따가리 해보자는 의미였으니까.

“...재미있군.”

황녀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실로, 재미있다는 반응이다. 그에 비례해 아리엘의 입가에 걸쳐 있던 미소 또한  층  짙어진다. 그리고  전쟁터의 한 가운데에 껴있는 나는 불안해서 미칠지경이었다. 상황이 이쯤 되니 저기서 드르렁이나 하고 있는 루시안이 부럽기만 하다.

“아주 재미있어. 아리엘 티에르.”

황녀는 아리엘에게서 시선을 떼더니 갑자기 내 쪽을 쳐다본다. 뭐야, 나는  쳐다보는 건데.

“카인 경, 그대는 어찌 생각을 하는가? 누구의 말이 옳다 생각하지? 제국의 명예로운 귀족으로서, 그대의 고견을 들려주었으면 하는군.”

황녀의 존나 뜬금없는 질문에, 주위에 있던 귀족들의 시선 또한 전부 나에게 날아와 꽂힌다. 그들 역시 나의 대답이 실로 궁금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

시발, 이게 말로만 듣던 사회적 매장인가 뭔가 하는 녀석인가? 대체   여자는 가만히 있던 나를 들먹이는 것이란 말인가?

나는 저도 모르게 아리엘 쪽을 쳐다본다. 실로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나를 구원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리엘 밖에 없었다. 내가 그녀를 향해 실로 절실한 눈빛을 보내자, 아리엘은 전부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살며시 끄덕인다. 맙소사. 여신님 만세다. 그녀가  상황에서 나를 구원해 준다면  반드시 교단에 십일조를 낼 것을 맹세하도록 하겠다-

“맞아요, 카인. 당신은 누구 편인가요? 이 자리에서 확실히 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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