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7화 〉4. 제도 루멘티움 - 06 (17/201)



〈 17화 〉4. 제도 루멘티움 - 06

나는 문득, 이러한 현학적인 생각을 해버리고 말았다.

이 세상에는 어째서, 이토록 싸움이 만연하고 있는 것일까. 세상 사람들이 조금  다른 사람을 아끼고, 배려하며, 좋은 말과 고운 말만 사용한다면, 이 세상은 예전보다 훨씬  살기 좋은 세상이 되어 있지 않았을까?

"결투, 결투다! 카인 폰 에스텔!"

그래, 내 눈앞에서 결투를 들먹이며 입에서 거품을 물고 있는 루시안을 보고 있자니 저절로 든 생각이었다.

녀석은 어째서 제국의 4대 공작가  하나인 투르니젠 공작가의 적자(嫡子)다운 모습을 갖추지 못한 것일까. 무릇, 한 가문의 후계자라면 그에 걸맞는 진중한 모습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네가  말은 아닌 것 같군. 카인  에스텔. 어서 검을 뽑아라. 사라 양을 모욕한 것도 모자라, 투르니젠을 모욕하기까지 한 너를, 이대로 좌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리 말을 하며 루시안은 내가 어떠한 대답도 하기 전에 먼저 검을 뽑아 나를 향해 겨누기까지 하였다.

"...난 너와 결투를 치루겠다고 아직 대답을 안했던  같은데?"

"어처구니가 없군. 그럼, 이런 상황까지 왔는데도 아직도 언변으로 모든 것을 무마하려던 생각이었던 것인가?"

그리 말하며 루시안은 타협의 여지는 조금도 없다는 듯 나를 향해 으르렁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대체 녀석은 왜 이렇게 화가 난 것일까.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이해를  수가 없었다. 나는 그저 모든 것을 좋게 좋게 끝내고 싶었던  뿐인데-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며 나는 주변에서 재미있는 것을 관람이라도 하는 듯한 눈초리로 우리를 바라보던 좌중들을 한차례 훑어보았다. 혹시나, 지금 이 상황에 난입하여 나에게 도움을  만한 사람이 없나 하는 기대감에서였지만.

"호오, 결투라. 제도에서 결투가 이루어지는 것을  눈으로 보는 것은 실로 오랜만이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원체 허약한 지라 모욕을 당해도 자리를 피하기 일쑤이니 말입니다. 오랜만에 명문가 자제들의 제대로 된 결투를 관람할 수 있겠군요. 오늘 연회에 참석하길 실로 잘한  같습니다. 허허."

"....."

아무래도, 주위에 내 편을 들어줄 사람 따위는 어디에도 없는 것 같았다.

결국,  상황에서 남아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루시안의 소원대로, 녀석과 한바탕 칼춤에 어울려주는 것.  나는 그저 대화라는 온건한 수단으로 상황을 헤쳐 나가고 싶었건만 어째서 일이 이렇게 돌아가는지 도통  수가 없을 따름이었다.

“...어쩔  없지. 네가 그리 원한다면, 소원대로 해주마.”

나는 그리 말하며 가까운 곳에서 이곳을 지켜보던 근위기사에게로 다가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밀었다.

“잠시 검 좀 빌려도 괜찮을까? 잠깐만 쓰고 다시 돌려줄게.”

물론, 검이 멀쩡할 것이라는 보장은 할 수가 없지만.

****

그리하여 나와 루시안의 결투가 성립이 되었다. 음식이 잔뜩 올려져 있던 식탁은  쪽으로 치워지고, 우리들의 결투를 위한 간이 결투장이 즉석에서 만들어졌다.

흥겨웠던 연회장이 삽시간에 투기장으로 변모했음에도 불구하고 귀족 나으리들은 어떠한 불만도 제기하시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얼마 뒤에 있을 유희 거리에 대한 기대감을 내뿜으며 승자가 누가  것인지를 주제로 도박판까지 벌이고 있었다. 꽤나 흥미로운 이야기였던 지라 귀를 기울여 보니 배당이 무려 9:1이라 하더라. 어느 쪽이 9이고 어느 쪽이 1인지는 마음이 아프니 언급하지 않도록 하겠다.

하지만 상관없다. 지금  순간, 나의 패배를 예견하는 모든 이들에게 굳이 반박을 할 생각은 없었다.

폭풍전야-

저 새끼가 허접한지, 아니면 내가 허접한 것인지는 오롯이 결과가 말해줄 것이다-

“아리아.”

“예, 카인님.”

나는 내 옆에 멍하니 서 있던 아리아를 불러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소근 거린다.

“네가 맡길 일이 있어. 아주 중요한 일인데, 해줄 수 있을까?”

“무슨 일인데요? 말만 해주세요! 무엇이든 할게요!”

아리아는 내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기쁜 것인지 눈을 반짝반짝 거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 시선은 실로 부담스럽기 그지없는 시선이라, 저도 모르게 헛기침을 해버리고 말았다.

“사람 한 명을 찾아주었으면 하는데.  연회장에 머리카락은 금발이고, 눈을 파란색인데, 자기가 수틀리면 말보다 주먹이 앞설 것 같은 분위기를 가진 언니가 이곳에 있는지 확인 좀 해주렴.”

“...네에?”

 말이 잘 이해가 가지 않는지 아리아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아리아는 어째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내가 생각하였을  방금 전 황녀의 외향묘사는 완벽하다 자부하건만.

“음... 그 언니를 찾아서 카인님께 데려오면 되는 일인가요?”

“아니. 그 언니가 지금 연회장 안에 있는지 없는지만 확인해주면 돼. 간단하지?”

끄덕끄덕.

그렇게 아리아는 쪼르르 달려나가더니 몇 분 지나지 않아 내게 다시 돌아와 연회장 내부의 정찰 결과에 대한 보고를 해주었다.

“음, 연회장을 전부 둘러보았는데 금발 머리에 파란  눈동자를 가진 언니는 없었어요.”

“그래? 확실해?”

“네!”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이는 아리아. 뭐, 솔직히 나 또한 예상한 바였다. 지체 높으신 황녀께서 연회가 무르익지도 않았는데 벌써 모습을 드러낼 리가 만무하지 않겠는가. 좋다. 이것으로 나에게 남아있던 마지막 걱정거리는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흐음.”

나는 주머니에서 자그마한 금화를 두어개 꺼내 아리아에게 건네주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을 하였다.

“아리아, 네가 마지막으로 해 줄 일이 있어. 아주 중요한 일이지.”

“뭔데요?”

“저기, 지금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이 모여 있는 곳 보이지?”

“네.”

“저곳에 가서 이 금화를 내밀고 이렇게 말해.”

나는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만 같은 웃음을 가까스로 참아내며 아리아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카인 폰 에스텔이 5분 안에 이긴다는데 이 금화를 걸겠다고.”



****


“카인,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자네는 검술에 재능이 없다네. 요만큼도.”

황녀는 마치 오늘 아침밥 메뉴를 정하기라도 하는듯한 여상한 어조로 말을 하고 있었다.

“......”

“지금은 목숨이 오고가는 실전을 치루고 있으니 실력이 빠르게 늘고 있지만 언젠가는 기필코 한계가 찾아올 것이라네. 아니, 자네의 경우 그 한계는 더욱 빠르게 다가올 테지. 더욱 높은 곳으로 가기 위한 재능이 턱없이 부족하니 말이네.”

“......”

“그래서 내 그동안 고민을 좀 해봤다네.  입으로 자네의 스승을 자처한 이상, 이대로 제자를 포기할 수는 없지 않는가? 그 결과, 한 가지 방도를 생각해냈다네.”

“......”

“그 방도가 무엇이냐 하면...”

“...끄으으으윽!”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이상은 버틸 수가 없었다. 황녀를  위에 올린 채로 팔굽혀펴기를 하고 있던 나는 팔이 후들거리는 것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세가 무너지고 말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자세가 무너지려고 하던 그 찰나였다.

“어허, 자세!”

그 말과 함께 황녀는 손을 찰싹 휘둘러 내 엉덩이를 후려 갈겼다.

찰싹-!

“끄아아악!”

황녀의 조막만한 손바닥이  엉덩이에 닿는 순간, 내 엉덩이에서는 실로 끔찍한 통증이 올라와 내 전신을 감싸 안았다. 내 듣자하니 제도에는 여성에게 매도를 당하거나 어딘가 쳐 맞으면서 쾌감을 느낀다는 변태새끼들이 있다는 소문을 익히 들었지만 그 새끼들도 황녀한테 쳐 맞아보면 맨발로 도망칠 것이 틀림없었다. 단순히 아프기만 한 것이 아니라 엉덩이를 후벼 파고 그 자리에 폭죽이라도 꽂은 것 같은 거지같은 통증은 정말이지 몇 번이고 쳐 맞아도 익숙해질 수 있는 종류의 통증이 아니었단 말이다.

“끄으으으....”

죽고 싶다. 다시 생각해보면 내 스승이 되어주겠다니 검술을 가르쳐준다니 하는 황녀의 사탕발림에 넘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저 유사시   몸 지킬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 되기를 원한 것이지 황녀마냥 맨 손으로 오우거를 줘 팰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단 말이다.

“카인, 자네는 참 엄살이 심하군. 볼기를 살짝 건드렸는데 그런 반응이라니. 누가 보면 내가 자네를 고문이라도 한 것인 줄 알걸세.”

“.....”

 같은 년. 황녀만 아니었으면 저 년을 어디 꽁꽁 묶어다가 볼기짝을 존나게 두들겨 줬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현실에서 실행 가능한 일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도록 하자.

“하아, 하던 이야기나 마저 하도록 하지. 자네가 스스로의 한계를 뛰어넘어 더욱 강해질 수 있는 방법. 그것은 최상승의 검술을 익히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네.”

“...최상승의 검술이요?”

“그래, 최상승의 검술 속에 담겨 있는 무리(武理)라면 자네를 더 높은 경지로 이끌어  수 있을 것이라네. 어떠한가, 나의 생각이?”

“...무리인 것 같습니다만.”

나는 생각도 제대로 하지 않고 단칼에 황녀의 말에 부정적인 의견을 표하였다.

“황녀님의 말씀대로 저는 재능이 없습니다. 그런 최상승의 검술을 익힌다 하더라도, 제대로 익혀내지 못할 리가 뻔하죠. 애초에 에스텔 공작가의 검술도 제대로 익혀내지 못한 제가 그런 검술을 익히는  가능이나 한 일이겠습니까?”

내가 약간이지만 빈정 상한 듯한 어투로 말을 하자 황녀는 나를 향해 쓴웃음을 지어 보인다.

“일반적이라면 자네의 말이 정론일 것일세. 허나 내가 지금부터 가르쳐줄 검술은 그런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 검술이라네. 이 검술의 형(形)을 제대로 익히기만 하더라도, 자네는 지금보다 배는 강해질 것이라 내 장담하도록 하지.”

“...그게 정말입니까? 세상 천지에 그런 신통방통한 검술도 다 있다는 말씀입니까?”

익히기만 하더라도 사용자를 강하게 만들어주는 그런 사기적인 검술이 세상에 있었단 말인가?

“자세한 설명은 차후에 하도록 하지. 내가 자네에게 가르칠 검술의 이름은 ‘흐르는 별.’ 황실의 직계에게만 전승이 되는, 제국에서 오직 나만이 익히고 있는 최상승의 검술이라네.”

...황실 직계에게만 전승? 왠지 모르지만 존나 불길함이 느껴지는 단어가 아닐 수 없다.

“...황실 직계에게만 전승이 되는데 저에게 가르쳐주셔도 되는 것입니까?”

“물론, 일반적으로는 불가능하지. 허나 내게도 융통성이 있다네. 지금은 긴급 상황이니 어쩔 수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그리 말하며 황녀는 나를 향해 상큼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아, 참고로 이 검술은 다른 사람 앞에서는 되도록 사용하지 말게나. 만일 황족 이외의 사람이 이 검술을 익힌 것이 발각된다면 그 사람의 팔다리를 자르고 혀를 뽑는다고 하더군. 자네가 그리 된다면 참으로 끔찍한 노릇이 아니겠는가?”

“....”

...그런 검술은 나에게 대체  알려주는 것일까. 혹시 이것은 벌칙 게임과 비슷한 종류의 무언가가 아닐까. 그것도 아니라면 나를 간접적으로 살해하기 위해 계획을 꾸미고 있는 것은 아닐까. 흠, 내가 생각하기에 마지막 가설은 꽤나 신빙성이 높다고 생...

“또! 자세가 무너지는군!”

찰싹-!

“끄아아아악!”

****


“루시안  투르니젠, 결투에 임하기에 앞서 네게 물어볼 것이 있다.”

“...무엇이지? 카인 폰 에스텔?”

결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 것인지 루시안은 나에게 굉장히 거들먹거리는 태도로 대답을 하였다.

“뭐, 별건 아니고. 그냥 이번 결투에서 검 이외의 다른 것을 사용해도 되는지 너한테 물어보려고. 예를 들어, 주먹이라던지, 발이라던지. 내 검술 유파가 좀 특이한 유파거든.”

“...흠, 에스텔 공작가의 검술은 정통파 검술이라고 들었는데, 사사로운 잡기(雜技)라도 익힌 것이냐. 한심한 녀석 같으니.”

그리 말하며 루시안은  재수 없는 얼굴에 한가득 비릿한 미소를 띄우더니 실로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나를 향해 말을 하였다.

“좋다. 제안을 받아들이지. 이번 결투에서 주먹이 아니라 암기를 꺼내 투척하더라도 상관하지 않겠다. 네가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뭐든지 해보도록. 내게 있어서  정도는 핸디조차 되지 못하니깐 말이지.”

내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 루시안. 지금  순간, 자신의 손으로 자기가 들어갈 무덤을 파버렸다는 사실을  새끼는 알고 있을까.

“그럼, 사양 않고.”

나는 히죽하고 웃으며 발뒤꿈치를 약간 곤두세운  지면을 발로 찼다. 대략  달 만에 몸을 움직이는 것이지만 컨디션은 완벽에 가까웠다. 물론 10년 뒤의 몸뚱아리와 비견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이 정도만 하더라도 저 도련님의 자신만만한 얼굴을 찌그러뜨리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을 듯 하였다.

“간다. 루시안 폰 투르니젠.”

“흥! 선공은 양보해주마, 카인 폰 에스텔!”

선심이라도 쓰는  실로 거만한 목소리로 내게 말을 하는 루시안.

그러나 불행하게도 녀석의 그런 거만한 태도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퍼억-!

"커헉-!"

주먹이 턱주가리에 꽂히고도 겸손해지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들어본 바가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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