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6화 〉4. 제도 루멘티움 - 05 (16/201)



〈 16화 〉4. 제도 루멘티움 - 05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 자리에 모여 있던 모두가 기대하던 막장 같은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사라는 그저, 단 한 마디의말도 없이 그곳에 서서 나를 싸늘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

사실, 일련의 상황은 나도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눈을 뜨고 보니 10년 뒤에서 회귀한 마녀가 내 침대 위에 새근새근 잠들어 있다고 하는 상황은, 세상 어느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천재지변과 같은 종류의 것이란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을 대놓고 설명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사라가 저리 화를 내는  또한 이해가 가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그녀가 나에게 욕지기를 퍼붓거나 뺨을 후려갈기더라도 순순히 맞아 줄 용의가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녀는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그곳에 서서 나를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사라가 저렇게 행동하는 것이 훨씬 무서웠다. 차라리 나를 향해 어떠한 행동이라도 했더라면 마음이 편하겠건만,   마디의 말도 없이 나를 쳐다보고 있기만 하니 마음이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후우.”

누구 하나 입을 벌리지 않는 살벌한 냉전 속에서 버티지 못하고 먼저 백기를 든 쪽은 바로 내 쪽이었다.

“...왜 아무 말도 안하는 거지? 나한테  말이 많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당신한테 뭐라 하는 것 그 자체가 시간낭비에 지나지 않으니까.”

사라는 한  약혼녀였다는 사실이 믿겨지지가 않을 정도로 차가운 음성으로 답을 해주었다.

“미안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당신과 마주한 것은 내가 의도한 바가 아니었어. 그저, 오늘따라 내가 재수가 없었을 따름이지. 그것뿐인 일에 지나지 않아. 혹시 모르니 착각은 하지 않아주었으면 해.”

그리 말하며 사라는  쪽을 향해 발걸음을  발짝, 그리고 또  발짝 걸어온다. 그리고 이윽고, 그녀는 나와 서로 숨결이 맞닿을 거리에 마주하게 되었다.

“호오.”

“드디어 시작되는 건가!”

주변에 포진해있던 관객들은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일을 상상하며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하였다.

허나 안타깝게도 주변 관객들이 기대하는 일은 결국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사라는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더니 그것을 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을 뿐이었다.

“...이게 뭐지?”

“약혼반지.”

그녀는 길거리에서 주운 동전에 대해 설명하는  여상한 어조로 말을 하였다.

“이미 소식은 전해 들었어. 당신과 나의 파혼, 이미 폐하께 허락까지 맡은 사안이라며? 그럼 이제  반지는 아무 의미도 없는 단순한 반지에 지나지 않다 생각해. 그러니까, 돌려줄게.”

“.....”

의외였다. 무엇이 의외였냐면, 나와의 약혼반지를 아직까지 손에 차고 있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나에게는 무척 의외였다. 왜냐하면 나는 사라가 우리의 약혼을 굉장히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다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작 이런 약혼반지 따위에 의미를 부여하고 손가락에 착용하고 있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니, 그 전에 우리들의 약혼반지는-

"...사라, 잠..."

하지만 내가 뭐라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사라는 나를 쓱 하며 지나쳐간다. 더 이상 나에게는 일말의 관심조차 없다고 모두에게 알리는 듯한 담백한 태도. 그리고  때였다. 그녀가 나의 옆을 스쳐지나가는 그 순간, 그녀는 나의 귓가에 아주 작은 목소리로 뭐라 속삭인 것이.

“서쪽 테라스, 2시간 뒤에.”

“....뭐?”

 말에 나는 저도 모르게 등을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허나 그녀는 이제 나와는 무관계한 타인이라고 이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선전이라도 하는 것 마냥 단  순간도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는 다른 사람들 사이로 빠르게 자취를 감추었다.

“.....”

나는 저도 모르게 내 손 안에 들린 약혼반지를 멍하니 매만지고 말았다. 은으로 만들어져 있고, 큼지막한 루비가 박혀 있는  반지는 실로 약혼반지라는 용도에 걸맞게 무척이나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는 반지였다. 하지만 동시에, 나에게는 굉장히 낯선 자태의 반지이기도 하였다.

“...사라.”

참고로, 나와 그녀의 약혼반지에 박혀 있던 보석은 에메랄드였다.


****

그 뒤에 일어난 일은, 뭐 별 거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 방금 일어났던 일은, 사라가 나에게 약혼반지를 돌려주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진 소소한 일에 지나지 않았다.  순간의 가십거리로는 제격이었지만, 질척질척하고 끈적한 한 편의 막장극을 기대하던 귀족 나으리들이 보기에는 맥이 빠지는 결말이었던 것 같았다. 방금까지 나를 향하고 있던 과도할 정도의 시선이  순간에 거두어진 곳을 보아하니 말이다.

그제야 나는 당초에 마음먹은 대로 연회장 구석에 쳐 박혀 아리아와 함께 음식이나 축내는 신세로 전락할  있었다. 나는 방금 전에 일어났던 일련의 상황에 대해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는 아리아의 대범함에 다시  번 놀라며 그녀의 입에 고기 한 점을 쏙하고 넣어주었다.

오물오물.

새가 모이를 먹듯 참 복스럽게도 음식을 먹는 아리아. 나는 그런 아리아를 한 차례 쳐다보며 방금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 생각을 해보았다.

‘...대체 뭐였을까.’

그녀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녀는 방금 전, 나를 향해 이렇게 말을 하였다. 오늘 나와 여기서 마주한 것은 우연이라고. 그것뿐인 일에 지나지 않은 일이라고.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그녀의 말은 거짓임이 틀림 없었다. 그녀는 분명, 나를 만나기 위해 연회장을 찾은 것이 틀림없었다.

“카인 폰 에스텔.”

나는 주머니를 뒤적거려 방금 전 그녀가 건네준 ‘약혼반지’를 다시 한 번 찬찬히 살펴보았다. 틀림없었다.  반지는 내가 그녀와 주고받은 약혼반지가 아니었다.   그 약혼반지를 손가락에 끼고 자며 아이는 몇 명이나 낳을지 몇 번이고 망상을 하였던 내가 그녀와의 약혼반지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에 지나지 않는다.

“카인 폰 에스텔.”

2시간 뒤 서쪽 테라스라고 했었나. 대체 무슨 용무로 나를 따로 만나자고 하는 것인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아니, 그 전에 이리 번거로운 수법을 쓰면서까지 나를 비밀리에 만나려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이런 일은 회귀 전에 일어나지 않았던 일인지라 괜스레 마음이 떨려온다. 회귀자 카인  에스텔의 연륜으로도 쉬이 해결할  없는 일이라는 의미였으니까. 허나 어쩔 수 없다. 여기서는 우선 사라의 말을 순순히-

“카인 폰 에스텔! 지금 나를 무시하는 것이냐!”

내 뒤 쪽에서 노호성이 터져 나온다. 연회장 전체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어떤 자식 덕분에 주위의 시선이 다시 내 쪽으로 쏠린다. 이제야 조용한 곳에서 밥  목구멍으로 넘기나 했더니, 또 어떤 새끼가 나에게 시비를 거는 것인가?

내가 짜증스런 눈초리로 뒤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재수 없게 생긴 기생오라비 같이 생긴 놈이 나를 향해 씩씩거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저 자식,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꽤나 익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 재수 없는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자하니, 저 녀석의 정체가 무엇인지 생각이 날 듯 말 듯 하였다.

“...야, 너 이름이 뭐냐?”

우선 초면에 다짜고짜 싸가지 없이 구는, 가정교육이 덜 된 씹새끼를 상대로도 나는 평화적인 교섭을 시도하였다. 나는 예의와 예절을 중시하는 문명인인지라 누구누구들과 같이 주먹이 먼저 나가는 야만스러운 짓은 하지 않는다. 녀석의 이름을 알고 정체를 알아야, 교섭이 한층 더 쉬워질 것이라는 평화적인 목적에서 우러나온 질문이었다.

“카인 폰 에스텔! 어디서 초면에 반말을 하는 것이지?”

또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저 자식은 갑자기 나를 향해 시비를 거는 걸어왔다. 갑자기 뜬금없이 소리를 지르는 행동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자식도 비앙카와 같은 분노조절장애를 앓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네가 먼저 반말 했잖아. 그리고, 용건이 있는 사람이 먼저 자기소개를 하는 것이 예의가 아닌가?”

나의 논리 정연한 말에 말문이 막힌 것인지  걸음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서는 녀석. 허나 그것도 잠시, 녀석은 표정을 가다듬고 실로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향해 말을 하였다.

“...흥. 나는 투르니젠 공작가의 적자(嫡子)인 루시안 폰 투르니젠이라 한다. 사라 양의 명예를 위해 이렇게 네 녀석을 몸소 찾아왔다.”

“...루시안 폰 투르니젠? 투르니젠 공작가? 그리고 갑자기 사라의 이름은 왜 나오는 거야?”

녀석의 뜬금없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것도 잠시, 나는 그제야 녀석을 어디서 보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아, 결혼식에서 봤었지.”

“뭐, 결혼식? 그게 무슨 말이냐?”

나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는지 미간을 찡그리며 의미를 물어오는 녀석. 하지만  앞에 있는 얼굴만 잘나빠진 도련님이 내 말을 알아들을  있을 리가 만무하였기에 녀석에게 어떠한 설명도 해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말하는 ‘결혼식’이란 회귀 전, 눈앞의  녀석과 사라가 결혼식을 올리던  때의 일을 말한 것이거든.

아직까지도 기억이 생생하다. 내가 정말 어쩔 수 없이 사라의 결혼식에 참여한 와중에, 신성한 결혼식장에서 사라와 저 자식이 단순한 키스가 아니라 찐한 입맞춤을 나누는 것을 보며 피눈물을 흘리던 쓰라린 기억이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뭐, 8년이나 지난 일이니 어느 정도는 훌훌 털어낸 감정이기는 하다. 그래도 눈앞에 있는 루시안이라는 녀석이 갑자기 두 배 정도 재수 없게 보이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리라.

하지만 회귀자인 카인 폰 에스텔이 알기로는 눈 앞에  재수없게 생긴 녀석이 사라와 연을 맺게 되는 것은 대략 1년 후의 이야기. 즉, 지금은 사라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타인이라는 소리였다. 그런 녀석이 왜 사라의 이름을 들먹이며 나에게 시비를 걸고 있는 것일까.

“근데 사라하고 너는 아무런 관계도 없지 않나? 정작 사라는 가만히 있는데 네가 왜 설치는 거야?”

“...윽.”

정곡을 찔린 듯 순식간에 얼굴이 새빨갛게 변하는 루시안. 허나 그것도 잠시, 녀석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함인지 아까보다 배는 커다란 목소리로 떠들어대기 시작하였다.  모습이, 내게는 마치 초식 동물이 자신이 겁먹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몸집을 부풀린다는 그것과 동일하게 보이기도 하였다.

“그, 그거야 네놈이 알바 아니지 않나! 나는 그저 사라 양이 네놈이라는 한량에게 걸려 안쓰러워하시는 것을 도무지 참을  없었을 뿐이다!”

까드득.

그리 말하며 녀석은 나를 불구대천의 원수먀낭 나를 노려보았다. 허나 유감스럽게도 녀석의 시선 따위는 전혀 무섭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살짝 안쓰러운 감정마저 들기도 하였다. 나도 해본 적이 있어서 잘 아는데, 짝사랑을 하는 인간이란 정말 안쓰럽게 보이기 마련이다-

내가 자신을 향해 혀를 끌끌 차고 있다는 것을 아는 지 모르는지, 루시안은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을 하였다.

“결투를 신청한다. 받아들여라, 카인 폰 에스텔. 그것도 아니라면 여기서 내게 무릎을 꿇고 사과를 하던지.”

“...사과? 사과를 사라가 아닌 왜 너한테 해야 하는데?”

“그야 내가 사라 양의 명예를 대변하고 있으니까!”

“.....”

이제 보니 단순히 싸가지가 없고 분노조절장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약간 모자란 새끼 같이 보이기도 하였다. 이런 병신 같은 놈과 드잡이질을 하고 있는 것 자체가 쪽팔려오기 시작한다. 나는 녀석과의 투닥거림을 이쯤에서 끝내고 밥이나 마저 먹는 것이 내게 유익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까.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계책은 두 가지뿐이었다.

우선 첫 번째는 녀석의 소원대로 결투에 응하는것이다. 하지만 그 방법은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녀석이 지금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도 그렇고, 예복 사이로 슬쩍 비춰 보이는 잘 발달된 근육도 그렇고, 아무리 봐도 녀석은 상당한 실력을 지니고 있는 기사임이 분명해보였다.

그에 반해 카인  에스텔이라는 녀석은 회귀한 이후 하루 종일 놀고먹기를 반복하며 대략  달간 검의 근처에도 가지 않은, 백수나 다름없는 녀석이다. 그런 둘이 한바탕 칼춤을 추게 된다면, 누가 이길지는 불 보듯 뻔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물론 나에게 승산이 아주 없는 것만은 아니었다. 허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는 사용하기 조금 부담스러운 방법이었기에 우선 결투라는 방법은 최후의 수단으로 미뤄두도록 하자.

두 번째 방법은 대화라는 방법이었다. 나는 어엿한 문명인이었으며, 무릇 교양과 상식을 갖춘 문명인들은 폭력이라는 야만적인 수단을 배척하며 대화로서 평화로운 해결방안을 모색하기 마련이었다. 그렇다. 진심을 가득 담은 말은 세상 어디에서나 통하는 법. 나의 온화한 화술이면 저런 정신병자 같은 녀석이라도 설득할 수 있으리라-

나는 잠시 머리를 굴리며 내가 어떠한 말을 하면 녀석을 설득시킬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네가 아무리 4대 공작가 중 하나인 투르니젠 공작가의 후계자라고 할지라도 나 역시 같은 4대 공작가  하나인 에스텔 공작가의 후계자이다. 우리는 명목상 같은 위계에 있는 귀족들이니 우리  사이의 우열 역시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다짜고짜 나에게 결투를 신청하는 너의 행태는 도를 넘은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된다. 결정적으로 너는 사라와 그 어떠한 관계도 맺은 적이 없지 않은가? 그래도 우리는 오늘처음 마주한 사이이니 일을 커다랗게 만들고 싶지는 않다. 네가 여기서 나에게 더욱 무례하게 군다면 나는 투르니젠 공작가에 정식으로 항의서를 넣을 것이니 이제 나를 가만히 놔두었으면 한다-’

...라고 말을 하려 했지만 내가 워낙에 내성적인 성격이라 처음 보는 사람한테는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결국 나는 살짝 한숨 내쉬며 그냥  한 마디만 하기로 하였다.

“너네 집에는 엄마가 없다던데 그 말이 사실이야?”

이윽고 연회장이 뒤집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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