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4. 제도 루멘티움 - 03
“장난이 너무 심하셨습니다.”
카인과 아이리스가 떠나고 오직 두 사람만이 남겨진 태양의 홀.
그곳에서 에스텔 공작은 저도 모르게 황제를 향해 한숨을 내쉬며 그리 말을 내뱉고 말았다.
“장난? 그건 너무 섭섭한 말이 아니던가.짐은 그저 그대의 아들이 짐과 마찬가지로 여난(女難)에 시달릴 지도 몰라 몇 마디 충고를 해준 것에 지나지 않았다네.”
“...그것이 바로 장난이라는 것입니다. 그 녀석을 여기서 쫓아내는 것에 대해 지나치게 공을 많이 들이지 않으셨습니까?”
에스텔 공작의 한숨이 재차 이어지자 황제는 그를 향해 능글맞은 웃음을 지어 보인다.
“흐음, 프란츠. 짐은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네. 자네도 잘 알다시피 높은 자리에 있으면자신의 흉금을 털어놓느니 어쩌니 떠벌리는 주제에 뒷구멍으로는 다른 주머니를 차는 쥐새끼들이 모여들기 마련이지 않던가. 그런 녀석들만 상대를 해오다보니 짐은 단 한 마디를 내뱉더라도 그 안에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하는 의미심장한 말을 아주 좋아하게 되고 말았지.”
그리 말하며 황제는 에스텔 공작을 휙 하며 돌아보았다. 황제에게서는 방금 전 카인을 향해 자신의 여성편력에 대해 설명을할 때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황제의 전신에서는 추상과도 같은 기풍이 흘러나오고 있었으며 그의 두 눈은 흡사 사자와도 같이 이글이글 불타오르고 있었다. 황제는 그저 저곳에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할 뿐인데 에스텔 공작은 황제의 모습이 이 드넓은 태양의 홀을 꽉 채우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짐이 녀석에게 그러한 농지거리를 내뱉었던 것은 프란츠 자네와 긴히 나눌 이야기가 있으니 눈치껏 자리를비키라는 신호였었네. 헌데 녀석은 머리가 꽉 막히기라도 한 것인지 내 말을 멀뚱멀뚱 듣고 있기만 하더군. 짐은 지금까지 아이리스, 그 아이가 세상에서 가장 융통성 없고 딱딱한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초야에 아직까지 그런 걸출한 인재가 숨어 있었을 줄이야. 내 살다 살다 아이리스가 먼저 상황을 눈치 채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장면은 처음 보았다네. 그런 상황을 연출해 준 자네의 아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군.”
“.....”
에스텔 공작은 정말 유감스럽게도 황제의 말에 어떠한 반박도 할 수가 없음을 깨달았다. 요즘 들어 뭘 잘못 쳐 먹기라도 한 것인지 사람이 조금 달라지기는 하였지만 고작 그 정도로는 사람이 되었다고 평가하기에는 한참 부족하였다. 기본적으로 카인 폰 에스텔이라는 인간은 눈치라는 것이 조금, 아니 아주 많이 부족한 머저리라는 것이 아버지인 에스텔공작의 평가였다.
“뭐, 서로의 자식 자랑은 이만 차치하고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할까.”
그리 말을 하는 황제의 얼굴에서는 웃음기가 가셨다. 지금부터는 진지한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었다.
“프란츠. 내 한 번만 더 확인을 하고 싶네. 이 약혼, 꼭 파해야만 하겠는가?”
“네.”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끄덕이는 에스텔 공작을 보며, 황제는 그가 이미 마음을 굳혔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에스텔 공작의 태도을 보아하니 결코 그가 하루아침에 내린 결정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설사 황제가 직접 설득을 하더라도 절대 마음을 바꾸려 들지 않을 것이라는 것 또한.
“에스텔 공작가는 폐하의 검에 불과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검이란 제 아무리 날카롭다 할지라도 결국은 사람이 사용하는 도구의 연장선에 불과한 존재이지요. 왜냐하면, 사람의 손에 들리지 않는 검은 결과적으로 무용지물에 불과하니 말입니다.”
에스텔 공작의 말은 무척이나 담담하였다. 마치, 낮에는 태양이 뜨고 밤에는 달이 뜬다는 진리를 설명하기라도 하듯 당연한 어투로 말을 하고 있었다.
“저는 평생 동안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그리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저는 제가 그리 살아왔던 것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난 천 년간 에스텔 공작가가 쌓아 올려온 긍지 그 자체이니 말입니다.”
“...허면, 지금에 와서 짐의 부탁을 그리도 단호하게 거절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녀석이, 싫다고 하더군요.”
“...응?”
에스텔 공작은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녀석은 제게 이리 말을 하였습니다. 에스텔 공작가를 무시하는 녀석들에게, 자신은 구차하게 자비를 구걸하기 싫다고. 이 수모는 자신이 언젠가는 갚아줄 테니 여기까지만 하자면서 저를 설득하더군요.”
사라 그 아이에게 푹 빠져 질질 짜던 멍청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호기로운 발언이었습니다- 라고 중얼거리며 에스텔 공작은 킥킥거리며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호오.”
황제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방금 전, 그 멍청하게 생긴 녀석이 그리도 호기로운 대사를 내뱉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해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녀석의 설득에 홀딱 넘어가고 만 것인가?”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세상에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에스텔 공작은 마치 아련한것을 바라보듯 허공의 어딘가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에밀리가 죽기 전 제게 한 부탁을 하던 것이 떠올랐습니다. 카인과 엘레나가 싫어하는 일은 강제로 시키지 말라는, 그 부탁 말입니다.”
“...에밀리가.”
에밀리라는 이름이 수면 위로 나오자 황제는 더 이상 그를 추궁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거 참, 대단한 팔불출이로군.”
“기왕이면 순정파라고불러주시지요.”
둘은 한 차례 시선을 나누더니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당사자가 싫다는데 별 수 있나. 다만...”
“예, 세르나드 백작가 뒤에 숨어 있던 쥐새끼들을 걸러내려 하던 일은 원점으로 되돌아가고 말았군요.”
아쉽다기보다는 차라리 후련하게까지 들리는 그 말에 황제는 혀를 끌끌 차고 말았다.
“무려 20년이나 공을 들여온 일일세. 그 탓에 자네는 20년이라는 시간을 허깨비처럼 보내야 했었고. 쌓아온 적공이 단 한 순간에 무너졌음에도 자네는 미련이 없나보군.”
“카인, 그 잘난 녀석이 10년 안에 세르나드 백작가에 이 빚을 갚아준다고 호언장담을 했으니 말입니다. 20년이라는 세월을 참고 기다렸는데 이제 와서 10년을 더 기다리지 못할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에스텔 공작의 말투는 한없이 가벼웠지만 동시에 그 기저에는 카인에 대한 믿음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에스텔 공작의 그러한 모습을 보며, 황제는 카인 폰 에스텔이라는 녀석에 대한 자신의 불신을 다시 한 번 곱씹어 보았다. 거리에 나도는 그 소문도 그렇고, 생긴 것부터가 왠지 모르게 뺀질거리게 생긴 그 녀석을 정말 믿어도 되는 것일까.
정말이지 정이 가지 않는 녀석이다. 황제는 자신이 아무리 노력을해보려 해도 그 뺀질뺀질한 녀석과 호감이라는 단어를 동일선상에 놓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황제는 자신의 이러한 감정이 타인에게는, 특히 남자에게는 어떠한 관심도 일절 내비추지 않던 아이리스가 난생 처음 본 그 녀석을 신경써주는 모습에 자신의 복장이 뒤집히고 말았다는 사실에서 기인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적어도, 황제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였다. 원래, 세상의 모든 팔불출 아비들은 자신이 그러한 부모라는 사실을 쉬이 인정하지 못하는 법이었다-
‘개새끼.’
소문으로 접했을 때는 자신의 젊은 시절과 유사한 점이 많은, 호감 가는 젊은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보니 하나 뿐인 딸에게 흉측한 손을 내밀지도 모르는 시커먼 늑대새끼였다니! 심지어 그 녀석은 오늘 제도에 처음 와보았다고 전해들었는데 도대체 어느 틈에 아이리스에게 찝쩍거렸던 것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카인이라는 녀석이 보통 개새끼가 아니라 상당히 신출귀몰한 개새끼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황제는 자신의 경계심의 수위를 한 단계 위로 끌어 올렸다.
“프란츠.”
“예, 폐하.”
“다시 생각해보니 그 녀석,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는 녀석이군. 애초에 약혼녀를 내버려두고 다른 여자로 망설임 없이 갈아타는 개자식을 짐이 믿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
다음 순간, 에스텔 공작의 뇌리에는 하얀 머리를 한 소녀, 아리아의 모습이 스치고 지나갔다.
'...정론이로군.'
에스텔 공작은 편견에 휩싸인 황제의 저 발언에 쉽사리 반박을 할 수 없는 자신이 서글프기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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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하, 차를 대령해왔사옵니다. 식기 전에 드시옵소서.”
“...그곳에 놔두고 물러가거라. 지금은 홀로 생각할 것이 있으니.”
아이리스는 그렇게 방 안에 있던 모든 사용인들에게 축객령을 내린 후 홀로 창가에 서서 멍하니 창문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창 밖에는 어느새 해가 완전히 기울어 사방이 어두컴컴하게 변해 있었다. 밤하늘의 별자리가 떠올라 하늘을 가득 수놓고 있는, 찬란한 광경이 그녀의 눈에 들어온다. 아이리스의 눈동자는 하늘에 가득 찬 별자리들을 눈에 가득 담고 있었지만 그녀의 정신은 이미 사라지고 없는 과거의 어느 날 밤을 회상하고 있었다. 그 때도, 똑같았다. 그 때의 그녀 또한 지금과 마찬가지로 밤하늘의 별을 눈에 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때, 그녀는 혼자의 몸이 아니었다.
- 카인.
- … 황녀님.
"...아아."
그 날 밤, 그와 함께 올려다 본 별자리는, 참으로 아름다웠었다. 정말,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하나의 화인이 되어 그녀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숨쉬게 되었다. 그 때, 그녀는 깨달았다. 아름다운 것을 보며 아름답다고 평하는 것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 것인지. 아름다움에 대한 감상을 다른 누군가와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 것인지. 다른 이와 같은 곳을 바라보며 똑같은 감상을 품는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경험인지.
‘카인.’
아이리스는 조용히 그 이름을 혀끝에서 굴려보았다. 특별할 것이 없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녀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이름이기도 하였다. 마치, 수천 번이고 수만 번이고 불러본 이름 같이, 낯익은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카인 폰 에스텔.’
허나 현재는 아니었다. 자신과 그 남자는 일면식도 없는, 타인에 불과한 사이에 지나지 않았다. 자신과 그 남자는 어떠한 관계도 아니었다. 자신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제도를 벗어난 적이 없었으며, 그 남자 역시 에스텔 공작령을 벗어난 적이 없다 전해 들었다. 그러니, 그와 자신이 만났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던 것이 분명하다. 모든 것은, 한낱 꿈에 불과하였을 테지.
‘카인.’
그렇다. 틀림없었다. 카인 폰 에스텔과 아이리스 엘 데브하르트는, 그 어떠한 관계도 아니었다. 그들은, 완벽한 타인이었다. 그들 사이에는 그 어떠한 접점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군.”
하지만 아이리스에게 있어 그 따위 사실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 자신이 그를 알고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그 한 가지 사실만이, 그녀의 가슴 속을 가득 메우고 있는 요인이었다. 그러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만약 겁쟁이처럼 이곳에 틀어박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그녀는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후회하고 후회하고 후회한 그 끝에, 더욱 후회할 것이 틀림 없었다. 그녀가 지닌 여인으로서의 직감이, 그것은 반드시 일어나게 될 일이라며 귓가에 살며시 속삭이고 있었다.
“......”
상념은 길었지만 판단은 찰나였다. 곧 결정을 내린 그녀는, 이윽고 조용히 입을 달싹거렸다.
“크리스.”
아이리스가 조용히 그 이름을 읊조리자, 그녀의 방 한 켠에서 인영 하나가 불쑥 튀어 나온다. 그녀의 호위 기사, 크리스였다.
“예, 황녀님.”
크리스가 그녀 앞에 서서 머리를 숙이자, 아이리스는 그를 향해 조용히 말을 하였다.
“그대가 내일 하루, 나 대신 지켜봐주었으면 하는 사람이 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빠짐없이 관찰한 후 나에게 보고 하거라.”
“...그 대상은 누구입니까?”
다소 뜬금없는 명령이었음에도 크리스는 그 어떠한 의문도 품지 않은 채 황녀에게 대상이 누구인지만을 묻는다. 그에게 있어, 황녀의 명령이란 절대적인 무언가에 가까웠다.
“카인 폰 에스텔.”
아이리스는 그 이름을 자신의 입에 담는 행위 그 자체가 더없이 유쾌하다는 듯 입가에 살짝 미소를 걸치며 말을 이어나갔다.
“요즘 제도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상당한 유명인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