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3화 〉4. 제도 루멘티움 - 02 (13/201)



〈 13화 〉4. 제도 루멘티움 - 02

 뒤로 이야기는 무척이나 잘 풀렸다. 황제는 의외로 이야기가 잘 통하는 사람이었으며 내가 사라와 파혼을 한다는 사실에 대해 흔쾌히 허락을 해주었다. 모든 것은 어떠한 장애물도 없이 순조롭게 해결이 되었다. 그렇다. 내 기분이 정말 엿같다는 점만을 제외한다면 정말이지 문제 따위는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하하하! 카인 경. 괜찮네. 짐은 자네를 이해한다네. 짐도 한창 때는 자네와 같았지. 오오, 그러고 보니 짐이 열일곱의 나이 때 만났던 올리비에라는 여인이 있었다네. 당시 짐은 참 철이 없는 꼬맹이였던지라 상당히 원숙한 타입의 여성에게 끌리곤 했었지. 올리비에는 당시 수도에서 가장 농염한 매력을 뿜어내기로 소문이 자자했었는데...”

“.....”

그리 말하며 황제는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나와 부자관계가 아닌지 의심을 할 정도로 친한 척을 하며 자신의 화려한 여성 편력에 대해 신나게 주절거리기 시작하였다. 대체 지금까지 수다를 떨고 싶은 것을 어떻게 참고 있었나 의심이 들 정도로 황제는 말이 많았다.

‘...빌어먹을, 어쩌라고.’

물론, 나는 늙어 빠진 노인네의 청춘과 사랑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눈꼽만큼도 관심이 없었기에 적당히  귀로 흘려 넘기고 있었다. 하지만 원체 이야기가 지루했던 나머지 표정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깜빡하고 말았다.

“...흐음, 표정이 왜 그런가, 카인 경. 혹여 짐의 이야기가 재미가 없기라도 한 것인가?”

“아, 아닙니다. 폐하.”

“어허. 이게 다 자네를 위한 이야기야. 짐의 이야기가 지금은 재미가 없을 지라도 언젠가 자네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이리 바쁜 시간을 쪼개서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 것이라네. 짐의 깊은 뜻을 알아주겠는가?”

“.....”

저것이 바로 꼰대들의 특징이다. 원래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꼰대들은 자신의 과거사가 젊은 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망상에 빠져 사는 경우가 많았다. 더욱 사람을 환장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이냐면 꼰대들의 과거사 따위는 젊은이들에게 손톱만큼도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저 치들만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이야기가 존나게 재미없는 것은 일종의 덤이라고 할 수 있었다.

기분이 더럽다. 무엇이 기분이 더럽냐면, 지금까지 다른 여자의 손 한  제대로 잡아본 적이 없는 내가 ‘진짜배기’에게서 동지 취급을 받는다는 것은 너무도 엿같은 일이 아닐 수가 없었기에 기분이 더러웠다.

평상시에 여자를 후리고 다녔던 전적이 있었다면 ‘드디어 내게 천벌이 도래하였구나.’라며 수긍이라도 하였을 테지만 사라와의 약혼이 깨진 이후 여자라고는 가까이 해본 적 없는 금욕적인 인생을 살아온 내게 이런 변태 같은 영감이 친한 척을 한다는 것은 너무도 서글픈 일이기만 하다. 금욕적인 인생을 살아온 것이 나의 자의에 의해서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흠, 그럼 다음에는 짐의 스물 한 번째 생일 날 운명처럼 마주한 여인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도록 할까. 내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구만. 당시 시각은 오후 11시였다네. 짐과 같이 왕성한 남자들에게 있어서는 역사가 새로 쓰여 지는 순간이었지...”

“.....”

지금이라면 황제가 더 이상 주둥이를 나불거리지 못하게 목을 꽉꽉 졸라버려도 무죄가 아닐까. 어째서 사람들이 목숨을 잃을 것을 감수하고 역모를 꾀하는 것인지 알 것 같기도 하다. 그들 또한 나와 같이 황제의 핍박을 이기지 못해 손에 검을 들고 만 피해자였을 지도 모른다...

그 때였다.

“.....”

황제 옆에 무표정으로 시립하고있던 황녀의 얼굴에 표정이랄 것이 깃든다. 그녀는 나를 향해 눈을 깜빡이며 무언가를 전하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

당연하지만 나는 그녀가 무엇을 전하고 싶은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황녀와 내가 눈만 마주쳐도 서로의 생각을 알아차리는 연인 사이도 아닌데, 고작해야 눈을 깜빡이는 것을 통해 상대방의 생각을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었단 말이다.

도무지 황녀의 의중을 알 수가 없던 나는 다소 얼떨결한 기색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지난 1년, 황녀의 말에 긍정으로 답하지 않는다면 다음 날에 있을 대련에서 그녀의 주먹이 조금  매콤해진다는 것을 착실히 학습한 결과물이었다. 그러니까 내 의지와는 전혀 무관한 반사작용이었다는 말이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황녀 역시 이내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자세한 것은  수 없지만 그녀는 내가 자신의 질문에 긍정적인 답을 내렸다고 판단을 한 것 같았다.

“폐하.”

“...였던 것이지. 짐이 그녀에게 꽃다발을 가져... 응?  그러느냐? 아이리스?”

황제가 신나게 자신의 무용담에 대해 떠들던 것을 중간에 끊어버리고 황녀는 황제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을 하였다.

“저는 이만 물러나도 괜찮겠습니까? 내일 있을 건국절 기념 연회의 준비를 아직 끝내지 못했사옵니다. 적어도 밤이 새기 전까지는 준비를 마쳐놓아야, 내일 연회의 차질이 없을 것이라 사료됩니다.”

그리 말하며 황녀는 눈짓으로 창문 밖에 석양이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광경을 가리켰다.

“...으음. 네게 할 일이 있다는데 더 붙잡아둘 수는 없겠구나. 좋다. 물러나는것을 허락하마.”

그리 말을 하며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황녀는 슬며시 고개를 돌려 내 쪽을 바라본다. 뭐야, 나는 왜 쳐다보는 거야.

“폐하, 담화 중에 죄송한 일이다만 잠시 카인 경을 빌려도 괜찮겠사옵니까?”

“...카인 경을?”

황제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만만한 청중이 하나 사라진다는 사실에 기분이 조금 나빠진 것인지 눈썹을 위 쪽으로 치켜 올렸다.

“어째서냐?”

“사실 연회의 준비가 제대로 되어 가는지 객관적인 입장에서 평가를 해 줄 사람이  명 필요했사옵니다. 여기에 있는 카인 경은 지금까지 건국절 연회에 단 한 번도 참석하지 않은 인물이니 편견을 가지지 않고  3자의 입장에서 평가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 사료되었사옵니다.”

“흠.”

그 말에 황제는 왠지 모르게 불편한 기색을 내비춘다. 아직 하고픈 말이 산더미만큼 남아 있는데 이렇게 중간에 끊기는 것은 기분이 다운되는 일이라며 시위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황제는 황녀의 부탁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네가 내게 부탁을 하는 것은 드문 일이니 들어주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겠구나. 그리하겠다. 카인 경을 빌려가도 좋다. 그리고, 카인 경.”

“예, 폐하.”

“자네는 언제고 꼭 내게 다시 들리게. 아직 우리 사이에는  하지 못한 이야기가 남아있으니 말 임세. 자네라면 언제든지 내 환영하도록 하지. 허허.”

“.....”

지랄마라. 살아생전에 황궁 쪽으로는 오줌도 싸지 않을 것이다.



****

“...감사합니다. 황녀님.”

“아니네. 나 또한 이야기가 슬슬 지겨워지던 찰나에 좋은 핑계가 떠오른 것  이거든. 폐하께서는 기본적으로 좋으신 분이지만 가끔 젊은 사람들을 붙잡고 저런 이야기를 나누신다네. 폐하의 유일한 단점이시지.”

그리 말하며 황녀는 입가에 쓴웃음을 머금으며 그리 중얼거린다.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얼굴보다 조금 풋풋한 얼굴로 살포시 미소를 짓는 황녀의 얼굴은 나에게 상당한 신선함을 가져다주었다.

“.....”

“...왜 그리 나를 쳐다보는 것인가? 카인 경?”

“아닙니다. 그냥...”

“.....?”

신기해서 그렇다. 내 기억 속에 있는 황녀는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으며 말투는 돌멩이같이 딱딱하기 그지없는데다가 무(武)를 광적으로 숭배하는, 반쯤 정신이 나간 여자였다. 비앙카와 같이 다른 사람의 복장을 뒤집어 놓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사람을 개잡듯 후드려 패는 것도 모자라 마물들까지 잡아와 목숨을 건 대련을 강제하는 것 또한 정상적인 사람이 법한 사고방식은 아니었다. 황녀 또한 정상인인 내가 감당하기 힘든 부류의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덕분에 나는 지난 1년간 비앙카나 황녀 같은 여자와 함께 지내며 성악설을 신봉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이 고통을 받는 모습에 낄낄거리며  웃는 감성이나,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다른 사람을  패버릴  있는 잔혹함은 결코 후천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나와 같이 순진무구한 사람은 평생을 노력하더라도 저들의 불가해한 정신 구조를 이해할  없으리라. 그렇다. 그들은 악이었다. 나와 같이 선에 속하는 사람들이 고통 받는 모습을 보기 위해 자신들의 흉측한 마수(魔手)를 내게 뻗치던, 사악하고 거무칙칙한 악.

헌데  시간대의 황녀는 10년 뒤의 황녀와는 달랐다. 아니,  정도면 얼굴만 같은 아예 다른 사람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황제의 말을 ‘지겹다’라고 표현할 수 있는 융통성, 황제의 면전에서조차 나를신경 써서 챙겨주는 세심함.  모든 것들은 10년 뒤의 황녀와는 정극단에 위치한 요소들이었다. 나에게는 상당히 의외인 사실이었지만 현 시간대의 황녀는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상식인처럼 보였다.

솔직히 말하면 안심이 된다. 그것도 존나 안심이 되었다. 사실, 황녀와 어떤 방식으로든 엮이게 된다면 결과적으로 그녀에게 쳐 맞는 미래가 올지도 모른다는 트라우마에 휩싸여 있던 찰나였다. 현 시간대의 황녀가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면, 적어도 나를 향해 함부로 주먹을 치켜들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이, 나의 마음에 안정감을 가져다주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카인 경, 자네에게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네.”

내가 황녀를 보며 마음의 평화를 되찾고 있을 찰나, 황녀는 상당히 우물쭈물한 기색으로 나에게 질문을 던져온다. 그녀가 저렇게 우물쭈물한 기색을 보이는 것 또한 난생 처음 보는 광경이라 신기하기만 하다.

“이, 이런 것을 함부로 물어봐도  런지는 잘 모르겠다만... 궁금함을 참을 도리가 없어서 말일세. 괜찮겠는가?”

“....? 괜찮습니다. 뭐든 물어보셔도 저는 상관없습니다만.”

내가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황녀는 이런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나에게 질문을 하였다.

“그.. 정말로, 약혼녀를 제쳐두고 다른 여자랑 관계를 맺었는가? 정말, 소문대로 그 여자가 엄청난 미녀라서 자네의 눈이 돌아가기라도 한 것인가?”

“.....”

이제는 화도 나지 않는다. 그냥, 저 빌어먹을 소문이 대체 어디까지 뻗어나갈 것인지 두렵기만  뿐이다.

“...절대, 아닙니다. 절대로.”

그리 말을 하며 나는 지금까지 수도 없이 반복해온, 그 날 있었던 진실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해주었다. 어차피 그녀 또한 진실을 믿지 않겠지만, 그래도 나는 끝끝내 거짓소문에 굴복을 해버리는 것보다는 끝까지 진실을 호도한다는 사실에 대해 의미를 두기로 하였다. 내가 여기서 포기를 해버린다면, 진실은 영영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리고 말 것이리라-

그렇게 내가 한참동안 손짓발짓을 곁들어가며 설명을 하고 있자니, 황녀의 얼굴이 차츰 변화해가기 시작한다. 어찌 보면 표정이 밝아지는 것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말도  되는 변명이라 생각하며 나를 경멸하는 것 같기도 한, 오묘한 표정이었다.

“...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저는 정말로 억울합니다.”

그렇게 내가 설명을 마쳤을 무렵에는, 황녀는 다시금 무표정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젠장,  여자 역시 내가 한 말을 전부 구라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믿네.”

“...예?”

그 때, 나의 귀에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음성이 들려왔다.

“난 카인 경의 말을 믿도록 하겠네. 내가 알고 있는 경은, 그런 짓을 할 파렴치한 사람이 아니지. 그렇지 않은가?”

“.....”

맙소사. 있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나의 말을 구라라고 손가락질 하던, 진실이 천박한 농담이 된 시대에 내 말을 진실이라고 믿어주는 사람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제 말을 믿어주시는 것 입니까?”

“카인 경이야말로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 그럼 자네는 지금까지 내게 거짓을 말했다는 것인가?”

내 말이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하는 황녀. 그래, 이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상적인 사람의 반응이다. 다른 사람의 해명을 무작정 구라라고 의심부터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추구하는 저 자세야 말로 상식인이 갖추어야 할 당연한 자세였다. 외눈박이들이 살고 있는 섬에 가면 정상인이 장애인이 되는  마냥, 나는 어느새 이러한 반응이 지극히 정상적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왠지 모르지만 나는 알  같네. 자네는 여자에게 함부로 손을 댈 사람도 아니고, 함부로 거짓을 입에 담는 사람도 아니지. 적어도 나에게는, 자네라는 사람이 그리 보인다네.”

“나는 말이지, 자네라는 사람이 꽤나 익숙한 것 같군.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온 사람인 것처럼 말일세.”

그리 말하며 황녀는 쿡쿡하며 웃음을 지었다.

“그런 의미에서 자네에게 한 가지만 더 물어보도록 하지. 너무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말게나. 이건 그냥, 단순한 호기심에서 발로한 질문에 불과하니까.”

다음 순간, 나는 황녀의 눈이 날카로운 빛을 뿜어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카인 경, 자네 혹시 과거에 나와 마주한 적이 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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