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4. 제도 루멘티움 - 01
제도(帝都) 루멘티움.
이 대륙의 3분지 1을 차지하고 있는 제국의 천년 수도이자 제국의 위엄을 상징하는 거대한 도시. 유동인구까지 합쳐 백만이 훌쩍 넘는 사람들이 제도에 머무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감당하고도 남는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는 도시이자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부가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장소라 일컬어지는 부(富)의 도시. 전설 속에 등장하는 용들이 직접 축복을 걸어주었으며 드워프들이 건축에 도움을 주었다고 전해지는 터전 위에 세워진 이 도시에 나는 다시 한 번 발걸음을 내딛고 말았다. 물론, 나의 의지 따위는 전혀 반영되지 않은 행보이기도 하였다.
“...하, 빌어먹을...”
나는 저도 모르게 하늘을 바라보며 탄식을 내뱉고 말았다. 하지만 하늘은 마치 나를 놀리기라도 하듯 빌어먹을 정도로 파란 하늘을 유지하고 있었다. 내 기분 따위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고 선언을 하는 듯 한 그 모습에 이제는 한숨조차 나오지 않았다. 어차피 하늘이 저 따위로 구는 것은 어제오늘일이 아니었다.
에스텔 공작령에서 제도까지 오는데 걸린 시간은 대략 한 달. 나는 그 여행 기간 동안 금은보화에 굶주린 산적들이 마차를 습격하거나 혹은 인간의 선혈로 목을 축이고 싶어 하는 마물들이 우리를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이 여행 자체가 파토나기를 하늘에 대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였지만 안타깝게도 하늘은 내 소원을 개무시해버리고 말았다.
아니, 오히려 지난 한 달간의 여정은 지루하기 짝이 없을 정도로 평화롭기만 하였다. 제도가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옥죄이는 듯한 기분을 느끼던 나만 제외한다면 모두가 그렇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리 하여 결국 도착하고 말았다. 저 만치 어렴풋하게 보이는 으리으리한 황궁의 자태를 눈에 담고 있자니 전신이 욱신욱신하며 비명을 질러오는 것만 같았다. 이것은 육신의 고통이 아니었다. 마음의, 영혼의 절규였다. 과거로 회귀하며 온 몸에 남겨져 있던 상처들은 전부 깨끗하게 사라졌지만 내 영혼은 본능적으로 지난 1년간 나의 전신을 두들기던 그 조막만한 주먹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사람의 뼈는 부러질수록 단단해진다.’라는 유사과학을 신봉하며 나를 전신골절 환자로 만들기 위해 부지런히 주먹을 놀리던 어떤 여자의 얼굴을 떠올리니 온 몸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아직 황녀의 머리카락조차눈에 담지 않았건만 이런 반응이라니, 그녀를 직접 대면한다면 정말 오줌이라도 지리지 않을까 벌써부터 걱정이 된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제발 집으로 돌아가면 안 됩니까?”
내가 여행 기간 내내 백 번은 넘게 말한 대사를 또다시 읊자 아버지는 나를 향해 질린다는 표정을 지으셨다.
“넌 또 그 소리구나. 대체 넌 왜 이리 제도에 오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냐?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와보지 않은 주제에.”
“젠장, 정당한 이유가 없으면 이 엿 같은 도시를 무조건 좋아해야 한다는 말씀이신 것입니까? 대충 전생에서 험한 꼴을 당했다 생각해 주시지요.”
“...어쩌다가 내가 아들이랍시고 이런 맛이 간 녀석을 낳았는지, 원. 에밀리가 너무 일찍 죽은 것이 한스럽구나. 너를 이 따위로 기르고 말았으니 죽어서 그녀를 볼 낯이 없어. 볼 낯이.”
당연하지만 아버지께서는 내가 제도로 오는 것에 대해 왜 이리 광분을 하는 것인지 그 자세한 이유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신다. 그에 대해 설명을 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내가 10년 전 과거로 되돌아왔다는 사실에 대해 설명을 해야 할 것이며 그리한다면 아버지께서는 나를 황궁이 아니라 정신병원으로 끌고 갈지도 모른다. 무릇 현명한 사람이란 입을 벌릴 때와 다물 때 정도는 확실히 구분을 할 줄 아는 법이다.
“제도에 난생 처음 온 주제에 도살장에 끌려온 소처럼 구는 놈은 너밖에 없을 것이다. 아주 지랄을 떠는구나. 지랄을.”
아버지는 나를 향해 혀를 끌끌 차더니 손가락을 들어 나의 앞쪽을 가리키신다.
“무릇 제도에 처음 온 사람의 정상적인 반응이란 저런 것이 아니겠느냐? 뭐, 네게서 저런 귀여운 반응이 나오기를 원했던 것은 아니다만.”
아버지는 저만치 앞에서 제도의 풍경이 너무도 신기한 듯 사방을 이리저리 돌아보고 있는 아리아를 가리키시며 그리 중얼거리셨다.
“와아, 카인님. 진짜 엄청 신기해요. 에스텔 공작령에서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이곳에는 정말 많아요.”
그렇게 아리아는 사방이 신기하기만 한 듯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곳의 시민들에게 자신이 촌구석에서 막 상경한 촌놈이라는 사실을 동네방네 광고하고있었다. 허나 아리아의 그 모습이 귀엽기만 한지 지나가던 시민들은 그녀를 쳐다보며 손녀딸에게나 지을 법한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물론, 내 옆에서 나를 향해 떽떽거리기만 하던 어느 양반도 예외는 아니었다.
“애가 보면 볼수록 참한 것 같구나. 자꾸 보니까 귀엽기도 하고. 네 쪽에서 먼저 일을 저질렀으니 저 아이를 확실하게 책임지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생각되는구나. 어차피 약혼도 깨진 판에 거리낄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저는 결백하다고 충분히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요. 그리고 그건 대체 언제까지 우려먹을 작정이십니까?”
“너 죽을 때까지.”
나의 억울함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말초적인 쾌락만을 탐하겠다고 당당하게 선언을 하는 그 모습에 내 얼굴이 휴지조각처럼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그 때였다.
뎅- 뎅- 뎅-
저 멀리 황궁 앞에 세워진 거대한 시계탑으로부터 현재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제도 전체에 은은하게 울려 퍼진다. 현재 시각이 오후 3시라는 것을 알리는 확실한 지표였다.
“음, 시간이 다 된 것 같구나. 이제 슬슬 입궁할 준비를 해야겠다. 폐하와 만나 뵙기로 약속된 시각이 머지않은 것 같으니.”
“벌써요? 이제 제도에 들어온 지 몇 시간이나 되었다고 벌써 폐하를 뵙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씀이십니까?”
회귀 전, 내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황제에게 봉토 서약을 할 때는 알현을 위해 무려 일주일이 넘는 시간을 기다렸는데 말이지. 덕분에 그 시간동안 마음의 준비나 하며 숙소에 틀어박혀 있으려 했던 내 계획이 전부 어그러지고 말았다.
“...넌 제국에 4개 밖에 없는 공작가를 너무 무시하고 있구나. 기본적으로 공작쯤 되면 폐하의 일정과는 상관없이 그분을 알현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천 년 전, 초대 황제께서 4대 공작가에게 부여한 특권 중 하나이지.”
“.....”
정말이지 하등 쓸모없는 특권이 아닐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잽싸게 황제를 만나서 용건만 처리하고 나오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지는 저 망할 황궁에서 황녀와 마주치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 아닌가.
어차피 나는 황제에게 잘 보이거나 발바닥을 핥아줄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으니 용건만 처리하고 잽싸게 튀어나오는 거다. 좋다. 완벽하다. 정말이지 그 어떠한 사람도 상처받지 않는, 모두에게 행복한 결말이 아닐 수가 없다-
“아, 그러고 보니 네가 기뻐할 만한 소식을 전해준다는 것을 깜빡하였구나. 우리가 폐하를 알현하는 것에 있어 황녀님께서도 그 자리에 동석하신다는 소식이다. 제국 제일의 미녀라고 소문이 자자하신 분을 실제로 뵙는 영광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그 분을 보고 반하거나 하지는 말거라. 뭐, 황녀님께서 너 같이 살짝 맛이 간 놈을 마음에 들어 하실 리가 없겠지만.”
“.....”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당장 사라한테 달려가서 내가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어본다면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어서 오거라. 제국을 수호하는 북방의 검이여. 짐은 그대들을 환영하노라.”
태양의 홀. 회귀 전, 능구렁이 같은 황제가 음험하기 이를데 없는 수작을 품고서 나를 원정대의 일원이 되라는 선언을 한, 내게 있어서는 악몽과도 같은 장소. 그 장소에 서서 나는 다시 한 번 황제에게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이 장소에 가만히 서 있자니 지난 1년간 원정대에서 개고생을 한 기억이 새록새록 생각이 나 전신이 뒤틀리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황제가 나에 대해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을뿐더러 그 쪽으로 의식을 할애할 여유 따위는 더더욱 없었다. 현재 나의 모든 의식은 황제 옆에서 아무런 표정도 없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어느 여인의 동향을 파악하는데 집중되고 있었으니까.
황족을 상징하는 찬란한 금발, 사파이어를 그대로 박아 넣은 듯한 바닷빛 눈동자, 예술가가 정성들여 빚은 듯한 오밀조밀한 얼굴. 틀림없었다. 저 여자야 말로 나의 전신에 폭력에 대한 아픔이무엇인지 뼛속 깊이 박아 넣은 범인, 황녀 아이리스 엘 데브하르트였던 것이다.
'...젠장.'
황궁으로 들어오기 전 그토록 마음의 준비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내 온몸은 사시나무가 떨리듯 벌벌 떨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지라 그녀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은 희석되었을 줄 알았건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아니, 두려움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잠시 잊혀졌던 것에 불과하였다. 지금 황녀가 주먹을 위로 치켜든다면 나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갈 자신이 있었다.
나도 이런 내가 너무 등신 같다고 생각되었지만 이것은 내가 조절할 수 있는 종류의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 어떠한 사람이라도 특정인에게 1년 정도 쳐 맞는다면 나 같이 반응할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자존심이고 인간의 존엄성이고 나발이고 주먹 앞에서는 전부 부질없는 것에 불과하단 말이다.
“...흐음, 카인 경. 짐을 보고 너무 겁을 먹은 것이 아닌가? 그리도 몸을 벌벌 떨다니 말일세. 짐은 그대를 적대할 생각이 없다네. 그렇고말고.”
황제는 내가 온 몸을 부르르 떠는 것에 대하여 자신의 위엄을 보고 놀라는 것이라 착각이라도 한 것인지 짐짓 걱정스러운 어조로 나를 향해 그런 말을 해주었다. 허나 나는 황제의 어조 속에 묘한 자부심이 깃들어있다는 것을 쉽사리 눈치 챌 수 있었다.
저 인간, 체면 때문에 대놓고 티를 내지 못하지만 내가 자신에게 쫄아 버렸다고 착각을 하고서는 그 사실에 흡족함을 느끼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예전부터 느낀 사실이지만 황제 저 인간도 약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하하, 그야 제국을 찬란히 비추는 폐하의 존안을 실제로 본다면 누구나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겠습니까? 저 역시 폐하를 처음 뵈었을 때만 해도 다리가 풀리는 것을 억지로 참았던 것 같습니다.”
“허허, 이 사람도. 얼굴에 금칠을 그쯤 해두게나. 아이들이 옆에 있는데 그런 말을 들으면 쑥스럽지 않겠는가.”
그렇게 황제와 아버지는 주거니 받거니하며 황제의 면상에 금칠을 좀 해준 뒤에야 가까스로 본론이 튀어나올 수 있었다.
“그래, 에스텔 공작. 세르나드 백작가와의 약혼을 파하고 싶다고?”
“그렇습니다. 폐하.”
“흐음, 그래도 짐은 상당히 괜찮은 약혼이라 생각을 하였었는데. 전해 듣기로는 세르나드 백작의 하나 뿐인 여식은 미색도 곱고 참한 아이라는 소문이 자자하다고 하던데 말이지. 대체 어떤 부분이 자네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인가?”
“...세르나드 백작가는 에스텔 공작가에게 모욕을 주었습니다.”
“모욕?”
그 말에 황제의 눈썹이 까닥하며 위로 올라간다.
“어디 자세하게 말을 좀 해보게나. 경청하도록 하지.”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이번 약혼은 단순한 약혼이 아니라 가문 간의 결합이라고 봐도 좋은, 정치적 성향이 짙은 약혼이었습니다. 그런데 무례하게도 세르나드 백작가는 저희에게 어떠한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파혼을 선언하였습니다. 어떠한 설명도, 해명도 없었습니다. 저희에게 돌아온 것은 파혼을 하겠다며 통보를 하는 편지 한 통이었습니다. 소신은, 이것을 모욕이라 칭하지 않는다면 뭐라 설명을 해야 할지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의 구구절절한 해명에 황제의 입가에 걸쳐져 있던 미소가 더욱 짙어져간다. 그러고보니 저 양반은 아까부터 왜 저따위 웃음을 짓고 있는 것이지.
“...흐음, 어떠한 설명도, 해명도 없었다고?”
“그렇습니다. 폐하.”
“크흡, 그것은 짐이 들은 소문과는 다소 거리감이 있군 그래. 안 그런가, 카인 경?”
“....?”
뭐야, 갑자기 왜 나를 끌고 넘어지는 거야? 내가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황제를 쳐다보자 황제는 웃음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큭큭거리며 웃음을 지어 보인다.그 옆에 가만히 서 있던 황녀의 미간이 살포시 찌그러지는꼴이 눈에 들어온다. 그녀의 두 눈에 담겨 있는 감정은, 명백한 혐오감이었다. 순간, 내 전신에 존나 불길한 예감이 스쳐지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짐이 듣기로는 세르나드 백작가의 여식이 자네가 낯선 여인과 침대에 단 둘이 누워있던 것을 목격하고 말았다던데? 그 소문으로 요즘 제도가 떠들썩하다네. 자네의 약혼녀 또한 꽤나 출중한 미색으로 제국에 이름이 나있건만, 그를 무시하고 다른 여인을 품에 안다니! 역시, 소문대로군. 약혼으로 인한 거짓된 사랑보다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실 된 사랑을 추구하는 사내 중의 사내다운 거침없는 행보이구만. 아, 에스텔 공작가의 차기 후계자가 이제 걸음마를 뗐다는 소문은 정말 사실인 것인가?”
“......”
다른 건 잘 모르겠고 한 가지만은 확실하게 알 것 같다. 카인 폰 에스텔의 혁혁한 명성은, 이미 에스텔 공작령을 벗어나 대륙 전체를 떨쳐 울리고 있었다는 사실을.